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26장 마지막 날 밤

마태복음 26장 마지막 날 밤

Tolle Rege/마태복음

2012-06-30 00:50:48


  예수님은 25장의 세가지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이틀이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릴 것이라고 하셨다. 결국 이 세가지 비유는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이 되고 말았다. 이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흉계로 잡아죽이기로 의논을 하고 있었고 명절이 오기전에 그 일을 결행하려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죽음은 매우 임박한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에게 귀한 향유를 부은 이름모를 여인과 제자중 하나인 가롯 유다의 배반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물론 여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평가하신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여인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신 것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매우 귀한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의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아마도 예수님은 복음에 대한 이런 태도야 말로 복음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인의 행위도 말하라고 가르치신 것 같다.

 드디어 그 유명한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제자들과 함께한 이 만찬은 유월절의 예비일인 니산월 14일 목요일이었을 것이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배반을 지적하셨고 이어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신다. 예수님은 특별히 포도주를 가지고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계시하여 주신다. 그런데 그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당연히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다. 구약에서 언약의 피라는 것은 언약의 일방이 상대방을 향하여 생명을 걸고 언약을 지키겠다는 서약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이 흘리는 피가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적 행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깨어진 언약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열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하였고 그 댓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언약배반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죽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인 것이다. 이는 마치 유월절에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에 어린양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장자들의 생명이 보존된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정확하게 유월절에 맞추어짐으로써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한 것이었음을 계시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한 대속적 죽음인 것이며( 언약을 배반한 인간편에서 인간대신 흘린 속죄의 피)  또 다른 하나는 구약의 옛언약을 대치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인 것이다( 하나님편에서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려 흘리시는 언약의 피) 이런 이중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언약의 피인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순종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기도는 매우 이중적인데 하나는 죽음의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자신의 소원을 아뢰면서도 그러나 자기의 소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이 이중적 기도는 자기 뜻이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심으로써 참된 순종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첫사람 아담의 불손종과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성육신과 죽음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순종이며 순종의 역사인 것이다. 예수님은 잡히시고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대제사장이 듣기에 죽음을 피할 없는 신성모독의 말씀을 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게 확정시키신다. 단호하게 자신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순종의 모습과 자기 생각대로 좌충우돌하다가 결국은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오버랩되고 있다.

 

[추기] 2019-11-06 17:14:07

마태복음 26장

이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 곧 자신의 죽음의 때가 임박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나귀를 타심으로써 자신이 왕, 곧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 이야기의 크라이막스인 그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맗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나라를 위한 왕적 사역인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는 자신을 통해 임할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말과 행동을 통해 가르쳐 왔다면 이제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1-25장의 긴 이야기가 이제 26-28장의 이야기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삶의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성취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 이야기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의 삶의 이야기기 없다면 우리는 그의 죽음 이야기의 의미를 해석할 길이 없어질 것이며 또한 그의 죽음 이야기가 없다면 그의 삶의 이야기는 공허하고 방향을 잃게 될것이다. 여기에는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의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예수의 메시아직과 관련된다. 제자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 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아관은 당대의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정치적인 메시아관이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에 보여준 예수의 모습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이런 실망이 결국 제자들의 배반과 부인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불가피하거나 힘이 없어서 당하는 비자발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의 시기를 유월절에 의도적으로 맞춘 것은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곧 해방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예수가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하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말씀은 28절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그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언약의 피라는 말이다. 언약의 피라는 말은 출애굽기 24장 8절에 처음 등장하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은 후에 언약체결 예식을 행하면서 모세가 번제와 화목제의 피를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이스라엘에게 뿌리면서 이것을 언약의 피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언약의 피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후에 언약의 쌍방이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만일 언약의 어느 일방이 언약을 배반할 경우그는 죽음으로서 언약배반의 대가를 치뤄야한다는 엄중한 약속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가 지신의 죽음을 언약의 피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의 책임을 지고 죽는 죽음임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이런 언약적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는 죽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이런 언약적 죽음을 죽는 것이며 왜 예수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게 되는 것인가? 그 대답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곧 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다. 그왕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은 곧 그 백성의 죽음으로 간주된다. 그러니까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의 죄를  대신지고 죽은 것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의 책임을 지고 대신 죽음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언약배반의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언약적 죽음이고 많은 사람이 죄사함을 얻게하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의 죽음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과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함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여기에 순종이란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꺾고 포기하는 것이며 바로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진리가 극적으로 나타나있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왕적 사역의 클라이막스였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의 죽음은 단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가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자기의 죽음을 통해 자기가 다스릴 백성을 창조하신 것이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신다. 특히 64절의 대답은 자신의 메시아됨이 단순히 정치적 메시아를  넘어선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예수의 이런 주장이 신성모독이라고 간주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