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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2014-10-08 19:07:32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주전 384-322)는 16세때 플라톤(주전 427-347)의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20년후 플라톤이 죽을때까지 여기서 공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더불어 희랍사상의 절정을 보여준 철학자였다. 그는 플라톤과 많은 문제에서 아주 유사한 견해를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시기에 가서는 점점 플라톤의 입장에서 이탈해 간 것이 사실이며 더구나 중요한 면에서 이탈하여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을 통하여 플라톤 사상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플라톤 속에 있던 하나의 사고 방향을 완성시킨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의 철학은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 철학과 마찬가지로 플라톤 사상의 감화의 훈유의 역사적 결과로서 생긴 중요한 사상이다.

 

 플라톤이 인간 문제에서 출발하여 자연을 단순히 인간 이상 추구의 배경으로 보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반대로 자연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자연의 일반적 진행의 전형적이면서도 독특한 한가지 특수화된 경우로 보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차이는 강조점과 출발점의 차이라고 하겠다.  플라톤은 이상의 정의로 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현실적 인간의 태만과 결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디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분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이 이상주의적이었디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 가정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성찰에 나타난 근본적인 신념은 궁극적으로 실재는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많은 구체적 개채적인 사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생적인 의미에서 이런 사물들의 여러 성질이나 그들 사이의 관계 혹은 그것들이 가진 상태나 양상도 역시 실재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하나 하나의 구체적, 개체적인 사물을 우시아(ousia)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을 키케로는 라틴어로 substantia라고 번역하였고 근세에 영어로는 substance(실체) 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의 취지를 살린다면 본래적 존재인 구체적, 개체적인  사물들을 실체라고 하고 그것들의 성질이니 관계니 하는 것들은 실체가 아니라 부체적인 의미의 존재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야 실체는 궁극적으로 많은 구체적, 개체적인 것들로 되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개체적인 것과 관계하지 않고서는 실재적일 수 없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 신념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슨느 그의 근본적 신념의 의의를 범주에 관한 연구에서 논하고 있다. 그가 의미한 범주란 우리 주위의 세계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의 분석에 사용하게 만드는 기본적 기념이다. 실체는 하나의 범주이다. 성질과 관계도 범주들이다. 그는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열개의 범주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첫째로 본래적 의미의 실체 그 다음에 성질, 분량, 관계, 공간적 규정, 시간적 규정, 능동, 피동, 자세, 상태, 이상 열가지이다.  이 범주들의 중요한 취지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사유는 그 세계의 성질에 의해서 좌우되며 세계의 성질은 사물들이 무한히 잡다할지라도 비교적 소수의 논술 용어로 요약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특장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영혼은 실체가 아니라 능동 활동이라고 단정하였는데  그의 심리학 전체는 이 방향에 맞추어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덕은 활동이 아니라 상태라고 결론을 내렸다. 정의의 개별적인 실례는 활동이지만 정의라는 덕 자체는 하나의 상태 즉 잘 수련된 습관을 지닌 상태라는 것이다. 그의 윤리학 전체가 덕에 대한 이런 개념에 맞게 형성되었다. 그는 연구의 대상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가를 분명히 결정지은 다음이라야만 그  대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발견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테레스의 범주론은 그의 철학의 여러부문을 함께 연결하 주며  각 부문에 체계화의 원리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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