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2014-10-03 16:50:05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은 성령론의 일부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주된 성령 사역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의 목차가 신론-인간론-기독록-구원론-교회론-종말론의 순서로 된 것은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조직신학이 체계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인간 구원은 기독교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인간이 처한 불행하고 곤란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데 그 상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무엇으로 부터 구원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불분명한 채 단지 구원의 좋은 결과만을 애기하면 구원을 오해하게 된다. 구원은 단지 우리의 좌절되거나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욕구 충족을 위한 인간적 한계에 부딪히자 종교에 귀의한다는 식으로 구원을 생각하면 안된다. 종교의 역할은 인생의 곤겸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신적 능력을 빌려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할 때 기복 신앙이 된다. 세상의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인간이 처한 진정한 곤경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란 무엇인가? 로마서 1장 25절은 죄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죄의 핵심이고 여기서 부차적인 죄의 결과들이 생겨난다. 죄와 죄의 증상들을 구별해야 한다. 죄의 증상들을 해소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죄의 핵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 간단하고도 중요한 명제가 사라지고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죄에 대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지만 동시에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동시에 나타나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죄의 결과인 죽음과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은 자력 구원을 이야기 한다. 인간 스스로 곤경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와 우리의 실존적 삶의 경험은 인간은 자신이 처한 곤경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손길은 인간밖으로부터 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오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안에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충만하게 나타났다고 증거한다. 이렇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람과 공의가 함께 나타나있다. 하나님의 사랑만 말하고 공의를 말하지 않는다면 반쪽자리 복음이다. 복음은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말하며 궁극적으로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 구원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결코 주시못하는 놀라운 하늘의 복을 허락해 주신다. (계시록 21:1-7)
중생(Regeneration)
2014-10-03 17:35:40
중생, 칭의, 양자됨, 회심, 성화 등등은 전통적으로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되어왔지만 이것은 과도하게 이론화된 것이고 구원론을 사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동일한 구원 사건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 다양한 특성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중생(거듭남) Rebirth, Regeneration
중생은 구원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현상임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영적 증생을 잘 보여주는 예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태어나 새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구원을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구원을 받는 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중생을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성경 다른 곳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나는 것(요1:13, 요일5:1)으로 혹은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나는 것(벧전 1:23, 약1:18)으로 표현한다. 이 모든 말씀의 의미는 중생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임이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우리가 믿게되는 것이 중생인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성령으로 태어나고 말씀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중생의 특징은 무엇인가? 중생은 분명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사후적으로 중생의 현상을 보고 알 뿐이다. 마치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분 것을 알게되듯이 그러하다. 중생이 성령의 사역이란 말은 중생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이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날 수 없다.(엡2:1) 하나님이 우리는 다시 살리신 것이다.(엡2:4-5) 마치 우리가 태어난 후에게 자신이 태어난 것을 알게되듯이 영적 태어남인 중생도 마찬가지이다. 중생의 결과로서 으리가 복음에 반응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모두 중생의 결과로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또한 중생은 단한번 순간에 일어난다. 태어남이 순간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중생에 대한 인식은 점진적일 수 있지만 중생 자체가 점진적은 아니다. 중생의 시점을 모르거나 혹 중생의 순간에 극적인 체험이 없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중생의 시점을 안다거나 극적인 체험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이후에 얼마나 하나님과 같은 사랑의 관계를 현재적으로 누리느냐가 중요하다.
중생의 결과는 무엇인가? 중생 그 자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신비한 영적 사실이지만 중생의 결과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의 결과를 보고 우리의 중생을 인식하게 된다. 중생의 결과의 중요한 것은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란 의미이다. 요한일서 5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하나님께로터 낳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복음에 대한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고 강조한다. 중생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신비한 일이므로 성경이 중생을 촉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회개를 해야 중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믿음과 회개는 중생의 원인이 아니라 중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하는 태도도는 양면적이어야 한다.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그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이 주도하신 중생의 결과임을 동시에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중생은 전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고린도 후서 5:17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중생은 영혼만의 태어남이 아니라 전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로 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중생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결과중의 하나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3:9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물론 중생한 즉기 완전히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중생자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또한 중생자는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감사 신뢰의 마음이 생겨나며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한다. 이런 모든 것들을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성령의 역사여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종교적 활동이나 이적이나 영적 능력이 아니라 인격과 삶의 거룩함이다. 결론적으로 중생은 삶의 방향과 목적의 전환을 가져온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된다. (고전 10:31) 그러나 중생은 결코 완성이 아니고 완성으로 나아가는 출발일 뿐이다. 더 자라고 성숙해가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중생은 출발을 의미할 뿐이고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칭의 (Justification)
2014-10-03 18:49:20
하나님의 구원은 그 스케일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거기에 내포된 의미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칭의 교리는 구원의 다채로운 측면의 또 다른 면을 설명해준다.
우선적으로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 비록 지금 형벌은 유예되고 있지만 반드시 그 형벌은 집행될 것이다. 인간은 마치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와 같다고 할 것이다. 칭의란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고 즉 죄인이 아니라고 법정에서 선언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칭의 개념이 법정적이란 말은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자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죄라고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한다. 실제로는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인정한다는 것이요 실제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전가(imputation)를 통해 이루어진다. 전가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는데 하나는 소극적 전가로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넘어가는 전가이다. 이 전가를 통하여 내가 받을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신 것이다. 나의 죄를 대신지고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 바로 소극적 전가교리이다. 소극적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헤 주는가를 설명해준다. 두번째는 적극적 전가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확득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죄의 용서만 가고는 불충분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여 의로운 자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적극적 전가 교리이다. 이처럼 칭의는 소극적 전가와 적극적 전자 이 두가지 전가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법적인 선포이다.
두번째로 칭의는 관계적 개념이다. 의롭게 되었다는 법적이 선언은 법적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의 회복을 가져온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고 말한다. 원래 히브리적 사고에서 "의" 라는 개념은 관계를 맺은 쌍방이 그 상대방을 향하여 언약적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칭의 곧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은 단순히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언약적 의무를 다할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서 하나님과 실제적인 화목을 누림이 중요하고 그런 실제적이 누림을 통하여 칭의가 비로소 의미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전가 교리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헤요 우리의 공로가 아마것도 없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행위가 아나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지만 믿음 조차도 우리가 자랑할 수 행위가 아니라 단순히 전가의 통로일 뿐이다. 믿음은 자기 무력감의 고백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명이다. 그러나 칭의가 행위를 베제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강조하다 보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야고보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신칭의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칭의를 얻는 믿음을 다시 정의한 것이다. 칭의를 얻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아라야 된다는 것이고 참된 믿음에는 행함이 있다는 의미이다. 칭의가 구원의 한 측면일진대 구원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듯이 믿음의 진위 여부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존프레임의 말은 정확하다. "구원은 행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을 통해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마찬가지로 칭의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며 또한 출발일 뿐이다. 칭의는 내적인 변화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 법정적 선언이지만 내적인 변화를 전제하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았디면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칭의는 법정적 개념뿐 아니라 관계적 개념도 동시에 있는 것이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한 측면인 칭의 역시종말론적 완성을 기다린다. 칭의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칭의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언약을 지키면서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언약을 깨뜨리면 관계는 파기되고 언약은 무효가 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르 인용하면서
칭의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세윤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으로 칭의되고 의인의 신분을 얻은 사람은 이제 최후의 심판 때 칭의의 완성을 받을 때까지 자신이 진입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소원이나애씀과 무관하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칭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해서 칭의는 성화의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칭의는 성화를 낳으며 성화없는 칭의는 효과없는 사문서로 전락한다.
칭의 교리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 인간의 가능성이나 인본주의적 종교가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한다. 또한 칭의 교리는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의 상식이나 기준과 다름을 보여준다. 세상을 상을 받을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자에게 상을 준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헤는 이런 세상 기준을 뒤집는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니이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한다.(고전 1:26-28)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의미이다. 공정함도 중요하지만 공정함은 소극적이고 기존 질서를 전제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세상을 치유하고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공정함을 넘어서는 은혜의 원리이다. 칭의는 무조건적 은혜를 말하지만 우리를 절대 방종하게 만들지 않는다. 칭의 교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자라면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된다.
칭의 용어의 문제점
2014-10-08 16:58:35
칭의 교리의 개념
칭의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그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죄는 씻는 일(the remission of sins)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일(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갈라디아 3장 8절, 로마서 3장 26절, 로마서 8장 33-34절에 언급된 "의롭게 하다"라는 말이 칭의와 관련되어 사용된 것인데 이는 고발을 당한 자의 죄책을 사면하여 그 사람의 무죄를 확인시킨다는 뜻 이외에 다른 뜻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를 의롭다하신다는 말은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 우리를 사면하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칭의는 일차적으로 죄를 사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래서 로마서 4장은 먼저 칭의를 가리켜 의의 전가라 부르고 이어서 그것을 죄사함속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칭의는 죄사함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수단이다. 로마서 5장 21절은 화목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분명히 나타낸다.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 의 오류를 반박함
오시안더가 소개하는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라는 개념은 칭의 교리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품성 모두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의 혼합을 주장하면서 우리가 중보자의 은혜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본질 속에서 우리와 연합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값없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된다는 뜻만이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하실 때에 그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렇게 하시겠느냐는 논지를 편다. 이 논지는 쉽게 답변할 수 있다. 즉 태양의 빛과 열기를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로 우리가 지각하는 두가지 칭의와 성화는 서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은 값없이 의롭다하신 자들을 새롭게 하셔서 의를 배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태양의 열과 빛은 서로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별되는 것이다. 오시안더는 이 두가지 은혜를 서로 혼동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다는 바울의 진술(고전 1:30)은 칭의가 성화와 다른 의미임을 분명히 시사한다.
나아가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의가 되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과 관계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가 되시는 일은 그가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신성이 있지만 중보자라는 칭호는 아버지나 성령과 구별되이 그리스도만이 갖는 독특한 칭호이다. 따라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직분의 본질에 따라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그가 우리를 위해 제사장 직부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큰 임무는 사람이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가 이 모든 임무들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로마서 5:19) 그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심으로 순종하신 것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실 다른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로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값없는 전자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경멸한다. 그러나 바울의 교훈을 보면(고후 5:19,21 ; 롬8:33 ; 로4"6-7) 사람이 본질적으로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가리켜 복되다고 인정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칭의의 은혜가 중생과 서로 구별되지만 (여기서 칼빈은 중생을 성화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경험으로 알수 있듯이 칭의가 새생명으로 변화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수 밖에 없다. 중생은 삶의 전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칭의의 은헤가 없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면 언제나 죽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칭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누구라도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다. 행위를 주목하면 믿음이 흔들리고 만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도 자기 행위에서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칭의와 중생을 이중적인 의(double righteousness)라는 용어로 뒤섞어 버리지만 로마서 8장 24절에서 바울의 고백은 이 둘이 구별된다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다. 오시안더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아주 장황하게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칭의에 대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비판함
사람들 가운데 의가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 중 하나가 세위지면 다른 하나는 넘어지고 만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빌3:8-9 ; 롬 10:3) 믿음이 모든 자랑을 제거해 버린다면(롬 3:27)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절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연관이 없는 것이다.(롬4:2, 4) 은혜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행위의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왜곡하려는 어떤 궤변가들은(스콜라 신학자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한 그 행위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이요 중생의 열매인 경우에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서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의 대조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제외된다는 사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분명히 구별하여 가르친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능력이 믿음에 있다는 문제를 거론할 때 심지어 영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거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의 공로에 대해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기를 바라는 양심의 확신이라 부르고 또한 하나님이 값없이 의를 전가시켜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성령께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롬바르드는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선행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울법은 행위에 근거하여 의를 인정하고 복음은 행위와는 무관하게 값없이 의를 베풀어 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약속을 율법과 정반대에 놓고 둘을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격해야 할 의는 사람들이 자기 힘과 자유의지로 행하여 하나님께 뻔뻔스럽게 자랑하는 그런 의일 뿐이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율법은 믿음과 다르다고 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는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믿음의 의는 행위를 요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이 여하한 모든 "행위"를 다 제외시키고 있다는 우리의 견해는 확고하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그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므로 결국 의롭다하심이 사랑 여부에 달려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물론 우리도 바울과 미찬가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게하는 능력이 그 사랑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의롭다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의 교제속으로 이끌어 준다는데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얻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이 화목은 오직 죄 사함에 있다.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으며 하나니의 의로서는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묵과할 수가 없다. 그리하며 주께서는 자기와 연합된 상태로 받아들이시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놓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은혜의 상태로 받아드링거나 그와 연합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죄사함" 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은 의와 화목을 서로 구분하지 않고 말함으로써 이 둘이서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 의를 얻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의롭다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시도는 죄사함과 의를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어서 그 둘이 서로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며 또한 그 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로 말미암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하여 그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가 의로운 것이란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을 함께 나누게 되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식의 이해는 헛된 것이다. 우리의 의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마치 우리 자신의 순종처럼 우리의 것으로 돌려진 것이다.
성화(Sanctification)
2014-10-17 14:49:44
칭의에 대한 두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칭의가 과거 일회적인 구원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칭의로 모든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를 이렇게 오해하면 구원은 과거에 일회적인 과정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 된다. 그러나 칭의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점 그리고 칭의는 구원의 한 측면으로서 죄의 용서를 묘사한 것이지 구원의 총제적인 묘사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한 것이다.(빌립보 2:12) 중생과 마찬가지로 칭의도 구원과정의 시작점이지 완성점이 아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칭의가 구원의 과거적 측면 혹은 출발적 측면을 좀 더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구원의 현재적 차원이나 과정적 차원을 좀 더 강조하는 것이 성화이다. 구원에서 칭의가 죄의 용서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성화는 거룩한 삶이란 측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중생으로 새생명을 얻었고 칭의로 법정적 의로움을 받았지만 아직 내면적으로 거룩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의롭다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자로 성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화이다. 그러니 성화의 과정을 등한시 여기면서 칭의에만 안주한다면 구원을 시작하였다가 중단하는 것과 같고 씨를 뿌렸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성화는 칭의와 함께 구원을 이루는데 필수적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존재적 측면의 거룩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측면의 거룩이다. 전자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거룩인데 이것은 신분의 변화로서의 거룩으로서 칭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후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서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성화에 해당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종교적 영역뿐 아니라 일상적 차원을 더욱 강조한다. 사람의 내면적 인격과 일상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거룩함의 표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제시하는 성령의 열매는 일상적 삶에서 나타나는 인격적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성화는 전인격적 차원에서 총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적, 감성적, 행동적 차원 모두에서 성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삶은 언제나 전인격적이고 총제적이기 때문이다.
성화가 전인격적이고 총제적이라는 것은 성화를 이루는 일에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화의 과정은 일종의 고된 훈련 과정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그 부르심의 목표인 거룩한 자로 성장하기 위하여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의 훈련이 모든 면에 유익하며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준다고 말한다.(딤전 4:8) 이 성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능동적으로 자기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성화는 우리의 노력없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화가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특별히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이처럼 성화는 우리가 애써야 하는 과제이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필요한 도움을 넉넉히 공급하여 주신다.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특히 힘써야 하는 일이 말씀과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이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더욱 깊어지고 튼튼하게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 성장을 원하다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 성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불러 자녀로 삼으시고 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공동체는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체화하면서 거룩하게 변화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교제하고 자극하고 권면하고 경책하면서 성화의 훈련을 체화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거룩함을 체현하듯이 또한 우리는 공동체속에서 이루는 관계속에서 거룩함을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화의 훈련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역동적인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 충만 없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거룩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신비 체험이나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 충만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어도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말씀에 따른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변화가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성품과 삶에서 나타나는 인격적열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전적인 지배를 받아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이 말씀과 기도임을 언급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이 말씀과 기도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말씀에 착념하며 말씀의 기초위에 기도에 열심을 내야 한다. 다른 왕도는 없다. 그 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에 대한 갈급함과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고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여야 한다. 성령충만은 일회적인 사건도 아니며 한번 충문하면 그 효력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성령 충만의 경험이 현재의 충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든지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하기를 소원하고 노력해야 한다. 성령 충만에 완성이란 없다.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갈구하고 애써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더욱 성령 충만하여 지기를 노력하여야 한다.
구원론 일반
2014-01-06 13:26:15
구원제 1 장 聖靈의 一般的 事役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救贖事業이 聖靈의 특별역사로 말미암아 罪人의 마음과 생활에 적용된다고 하는 方法論이 뒤따른다.
제 1 절 自然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
성령의 일반적 사역은 자연과 인간생활의 旣成秩序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創造에 근거를 두고 피조물의 성장과 완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제 2 절 普通恩惠
(1) 보통은혜의 敍述
1) 이것은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감화시켜, 죄를 제재하시며, 社會秩序를 유지하시며, 시민의 正義를 증진시키신다. 2)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祝福이다. 보통은혜는 죄인으로 하여금 어떠한 靈的 善도 수행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信仰과 悔改로써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腐敗를 제거하기에 불충분하며, 인간을 영적 更新의 길로 인도하기에도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보통은혜와 특별은혜에는 相異點이 있다.
1)普通恩惠는 영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나, 特別恩惠는 그것을 할 수 있다. 2) 특별은혜는 영적 및 창조적 방법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全性質을 更新, 또는 靈的 果實을 맺게하는 것이다. 3) 보통은혜는 反抗的이며, 특별은혜는 不可抗力的이다.
(2) 보통은혜와 그리스도의 贖罪事役
1) 보통은혜는 罪責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2) 보통은혜는 定罪의 선고를 옮기지 못하고 다만 그 執行을 연기해 줄 뿐이다. 아마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震怒를 발하시지 않으시는 그 선하신 뜻이 곧 보통은혜의 축복들이다.
(3) 보통은혜의 方法
1) 하나님의 啓示의 빛
이것은 基本的인 것으로 자연인의 양심을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말한다.
2) 秩序
벨직 信仰告白書(Belgic Confession)는, 하나님께서 악마의 세력과 “인간의 방탕”을 억제하기 위해서, 또는 “善한 秩序와 端正함”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정부를 제정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3) 與論
자연계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 특히 특별계시의 빛으로 보강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여론과 일치하는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4) 하나님의 刑罰과 賞給
刑罰은 惡을 저지함에 유용하고, 그 상은 선을 장려함에 유효한 것이다.
(4) 보통은혜의 효과
1) 刑의 執行猶豫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적 생명을 유지, 연장하여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보통은혜에 의하는 것이다.
2) 죄의 制裁
죄는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제재된다.
3) 眞理, 道德, 宗敎의 意識
인간은 보통은혜에 의하여 眞,善,美에 대한 의식을 다소 가지게 된다. 진리와 외부적 보편성, 나아가서는 종교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까지도 慾求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4) 세속적 義
보통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능히 세속적 義, 혹은 자연적 善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을 실행케 한 다. 물론 그것들은 참된 영적 성질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5) 자연적 축복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자연적 축복은 보통은혜로 말미암는다.
제 2 장 召命과 重生
제 1 절 救援의 순서에 대한 일반적 관찰
救援의 역사의 출발점을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구속적 행위에 있어서 그것은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라는데 두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구속의 과정을 시작하는 분은 하나님이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사역으로써 이 역사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중생의 사역에 의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派나 알미니안派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출발점을 인간에다 두었다.
제 2 절 召命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우신 행위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그것은 三一伸의 사역이다. 이 소명은 외적이기도 하고 내적이기도 하다. 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내적 소명은 彼擇者에게만 임한다.
(1) 외적 소명
외적 소명이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 제시하여 赦罪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진실한 권고라 정의할 수 있다.
1) 외적 소명의 요소
a) 복음적 사실과 이념의 계시
b) 신앙과 회개로 그리스도를 받으라는 招請
c) 容敍와 구원의 약속. 그러나 이 약속은 결코 절대적이 아니고 항상 조건적이다. 진정한 회개와 신앙이 없이는 아무도 이 약속의 성취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2) 외적 소명의 특징
a) 그것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모두 아무 차별없이 온다는
것이다.
b) 외적 소명은 성실한 소명이다.
3) 외적 소명의 意義
하나님은, 이 외적 소명에서 죄인에 대하여 가지시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봉사를 받을 권리가 있으시다. 만일 인간이 이 소명에 순종치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권리를 輕視하는 것이 자기의 죄를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이 외적소명은 역시 하나님께서 죄인을 정죄하시는 일의 정당함을 증명해 준다.
(2) 내적 소명, 혹은 효과적 소명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소명이 발생되고, 내적 소명에서 그 효력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내적 소명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1)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救援的으로 적용된 소명이다.
2) 이것은 능력있는 소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다.
3) 이것은 후회가 없으며, 변화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소명이다.
a) 이 소명은 도덕적 說誘의 방법으로 역사한다.
내적소명에서 성령께서는 說誘的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b) 그것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한다.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 悟性을 통하여 의지를 효과적으로 감화시키 는 것이다.
c) 이 소명은 항상 한 목적지로 향하게 한다.
내적소명은 성령께서 피택자를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제 3 절 중생
(1) 중생의 어의
칼빈은 이 말을 아주 넓은 의미에서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 과정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중생이란 말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속에 심어주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 중생의 본질
1) 중생은 근본적 변화이다.
중생은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어주어,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이다. 원리상으로 그것은 전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곧 理知과 의지, 그리고 감정에 미친다.
2) 중생은 즉각적 변화이다.
이것은 영혼안에서 점진적으로 준비되는 변화가 아니다. 생과 죽음 사이에 중간계단이 없음과 같다. 이것은 성화와 같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고, 瞬間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3) 중생은 潛在意識 생할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은 은밀한 것이며 또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직접 이를 지각할 수 없고 다만 나타난 결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에는 그 변화를 직접 의식하게 된다.
(3) 소명과 중생의 질서관계
외적 소명은 성령의 역사보다 먼저거나 혹은 그와 동시에 일어난다. 그 다음으로 중생이고 이 중생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받게된다. 靈耳를 받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효과적 소명은 영혼에 태어난 새 성향을 처음으로 거룩하게 운영하게 한다.
(4) 중생의 필요성
이 중생의 필요성은 역시 인간의 罪的 狀態에서 생겨진다. 영혼의 전성향을 갱신하기 위하여는 근본적인 내적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5) 중생의 기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이고, 복음의 말씀은 오직 도덕적 설유적 방법으로서만 역사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사람안에 새 생명을 심어주는데 있어서 기구일 수 없는 것 같다. 성서는 분명히 주장하기를,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다만 성령의 특별역사에 의해서만 된다고 한다. 중생에 있어서 말씀이 기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약 1:18과 벧전 1:23이 입증해 준다고 가끔 말하고 있다.
(6) 중생은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중생의 창시자이다. 이것은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일하시고 죄인의 협력은 조금도 필요없다는 것을 뜻한다.
(7) 세례의 중생
로마교회, 영국교회, 다수의 루터파까지도 일종의 세례중생을 가리킨다. 그러나 루터파 중 어떤 이들에 의하면, 이것은 영적 갱신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受洗人을 교회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모든 교파는 중생의 축복이 상실될 수 있다고 하는 교훈에서 일치를 보고있다.
제 3 장 回 心
제 1 절 회심의 성서적 용어
(1) 구약의 용어
nicham은 “후회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계획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를 가리키며, shubh는 “돌아오다”, 특히 떠났다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말이다.
(2) 신약의 용어
metanoeo, metanoia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것은 지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변화로도 생각되어야 한다. epistrepho, epistrophe는 “방향을 돌리다.” 혹은 “되돌아가다,”를 의미한다. 이말은 능동적 생명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회심의 최종적 행동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metamelomai라는 말은 “후에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다.”를 의미하며, 이 말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최우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제 2 절 성서의 회심관
(1) 국민적 회심
성서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과 열왕시대의 유다, 그리고 니느웨 등의 국민적 회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말한다.
(2) 일반적 회심
이러한 회심은 마음의 변화를 표시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회심으로 잠시 동안은 진정한 회심인 것처럼 보인다.
(3) 진정한 회심
회심이란 하나님께서 중생자로 하여금 자기의 의식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과 회개를 일으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 반복적 회심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새 생활의 활동력은 세속, 不注意 등을 통하여 그 빛이 가리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여러번이라도 부름 받고 다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눅 22:32, 계2:5, 16, 21, 22, 3:3, 19)
제 3 절 회심의 요소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되며, 회개는 과거에 관련되어 있고, 신앙은 미래에 관련되어 있으, 전자는 성화와 후자는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
(1) 회개의 요소
1) 지적요소
이것은 생각의 변화이다. 곧 죄에 대한 지식이다.(롬 3:20)
2) 감정적 요소
이것은 감정의 변화이다. 곧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3) 결의적 요소
이것은 목적의 변화이다. 이것은 죄에서 떠나는 내적 轉換, 사죄와 정화를 추구하는 성향을 뜻한다. 이것은 회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2) 로마 교회의 회개의 개념
1) 痛悔
죄에 대한 진정한 비애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득적인 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과실에 대하여 슬퍼함을 말한다.
2) 告明
이것은 신부에게 고백하는 회개이다.
3) 補贖
이것은 죄인의 행동의 회개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인내하거나, 혹은 어렵고도 불유쾌한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는 회개이다.
(3) 회개의 성서적 견해
성서는 회개를 전적으로 내적행위, 다시 말하면 통회의 행위, 혹은 죄로 인한 비애로 간주한다. 진정한 회개는 항상 참된 신앙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제 4 절 회심의 특성
(1) 회심은 도덕적이며 재창조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태를 바꾸어 준다.
(2) 회심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된다.
(3) 그것은 원리상 옛사람을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새사람을 옷입음을 뜻한다.
(4) 특수한 의미에서 생각하면, 이것은 순간적인 개변을 가리키는 것이요, 성화와 같이 한 과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제 5 절 회심의 창시자
하나님만이 회심의 창시자이시다.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이 역사하시고 인간은 전적으로 피동적이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능력은 항상 인간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사역에서 오는 것이다.
제 6 절 회심의 필요성
회심에 대하여는 절대적인 표현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분별 연령에 도달한 후에 중생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반항하던 생활은 그들에게서 즉시 하나님과 더불어 친교생활로 바꾸어지는 것이다.
제 4 장 信 仰
제 1 절 신앙의 성서적 용어
구약 성서의 he'emin는 “믿는다”를 뜻하는 말로 지적요소를 강조하며, batach와 chasah는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한 信賴, 혹은 依賴의 요소를 강조한다. 신약성서는 신앙을 1) 한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 2) 이러한 신뢰를 근거해서 그의 증거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 3) 미래를 위해서 그를 의뢰하는 것 등이다.
제 2 절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의 종류
(1) 역사적 신앙
역사적 신앙이란, 어떤 도덕적 영적 목적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성서의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2) 이적의 신앙
이것은 이적이 자기에 의해서 또는 자기를 위하여 일으켜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개인의 확신을 말한다. 이 신앙은 구원적 신앙을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3) 일시적 신앙
이 신앙은 양심의 어떤 자극이나 애정의 분발을 수반하고 있기는 하나 중생된 마음에 뿌리를 박지못한 종교적 진리에 관한 확신이다.(마 13:20,21) 이것은 상상적 신앙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시적 신앙은 감정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참된 구원적 신앙
참된 구원적 신앙이란 그 자리를 마음에 두고, 중생한 생활에 그 뿌리를 박고있는 것을 말한다.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으켜진 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대한 성실한 신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 3 절 신앙의 요소
신앙은 인간전체의 활동이다.
(1)지적 요소(지식)
구원적 신앙이란단순히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속에 계시된 진리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2) 감정적 요소(찬동)
이것이 “贊同”이라 불리워지는 것은, 사실은 구원적 신앙의 지식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3) 결의적 요소(신뢰)
신앙의 최고 요소로 그것은 생활의 방향을 결정하는 의지의 문제요, 영혼이 그 대상으로 나아가서 그것을 붙잡는 영혼의 행위인 것이다. 구세주요, 主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한다.
제 4 절 구원적 신앙의 대상
(1) 일반적 의미의 구원적 신앙
일반적 의미에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속에 포함되어있는 신적 계시의 전체라 할 수 있다.
(2) 특수적 의미의 구원적 신앙
구원적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인 것이다. 구원적 신앙의 특수행위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데 있으며, 또한 복음에 기록된대로 그에게 안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제 5 절 로마 캐톨릭의 신앙관
로마 캐톨릭은 신앙을 단순히 진리에 대한 찬동으로 보고, 구원하는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들은 신앙에 지식의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을 소유하거나 안하거나를 막론하고 진리에 대한 이 찬동은 그것이 성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랑으로 역사하게 될 때에만 참된 구원적 신앙이 되는 것이다.
제 6 절 신앙과 확신
신앙과 확신의 관계에서 참 신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신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비록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안전과 보증의 의식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에 내포되어 있는 확신은 반드시 의식적인 소유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이라고 해서 언제나 신앙의 부요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신을 기르도록 재촉을 받는 것이다. 확신은 祈禱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함으로서, 또는 성령의 열매가 입증해 주는 참된 신앙생활의 발전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것이다.
제 5 장 稱 義
제 1 절 “의롭게 하다”의 성서적 용어
구약성서는 이 말을 하나님께서 인간속에서 이루시는 도덕적 변화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인간에 관한 신적 선언을 정식으로 지적해 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재판장의 자격으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관념을 전달하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의로움을 선언하는 말인 것이다. 성서의 “의롭게 하다”라는 말은, 의롭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의를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매우 명백해 진다.
제 2 절 칭의의 본질과 특징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법적 행위라 정의할 수 있다. 칭의가 미치는 영향은 죄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신분에 대하여 행한다.
제 3 절 칭의의 요소
(1) 소극적 요소
칭의의 소극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해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뜻한다. 칭의에서 허락된 그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죄책과 모든 형벌을 제거한다.
(2) 적극적 요소
1) 자녀로 되는 것
칭의에서 하나님은 신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신자를 자녀의 지위에 두시고, 모든 권리를 그에게 주시는 것이다.
2) 영생에의 자격
이 특권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구원의 모든 축복의 후사가 되지만, 동시에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된 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받는 것이다.(벧전 1:4)
제 4 절 칭의의 영역
(1) 능동적 칭의
능동적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되어진다. 심판장은 죄인을 원하시는 뜻에 따라 용서하시며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2) 피동적 칭의
피동적 칭의는 죄인의 마음이나 양심에서 일어난다. 기쁜 소식이 죄수에게 전달되어 감옥이 열려지지 않는 한 용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언되는 무죄석방의 판결은 죄인에게 전달되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제 5 절 칭의의 시간
(1)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피택자에게 전가되었을 그 때 피택자는 이미 속죄의 계획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의견을 갖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른 칭의가 조만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성서가 죄인의 칭의를 말할 때, 이것이 바로 성서의 의미하는 바라고 하는데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단순히 이상적이었던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업을 완성하신 후에는 그 이상 더 다른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하여, 결국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속사역의 적용을 무시해 버렸다. 피택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의롭다함을 입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를 말하는 개혁파 신학자 들도 이것을 죄인의 칭의의 전제로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하여도 믿는 것이다.
(3) 신앙으로 말미암는 칭의
성서의 칭의는 하나님의 칭의적 은혜의 주관적 適用과 充用을 말한다. 성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 말하고 있다. 신앙과 칭의의 관계는 두개의 의의있는 표현이 있다. 첫째는 칭의의 기구이다. 이것은 신앙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마음 속에서 용서의 선고를 내리시는 것이다. 둘째는 충용하는 기관이다. 이 명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충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관념을 나타내 준다.
제 6 절 칭의의 근거
로마 교회에 의하면, 죄인은 중생에서 그 마음에 주입되는 자기 고유의 의를 기초로 하여 의롭게 된다고 한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롬 3:24),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칭의의 참 근거는, 칭의에서 죄인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제 7 절 칭의교리에 대한 異議
(1) 칭의는 일종의 법적 가치이기 때문에 은혜를 배제한다고 말한다.
(2) 어떤 사람은 칭의를 하나님의 아무 쓸모없는 행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죄인은 사실상 의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3) 이 교리는 사람을 방종하게 만든다고 한다. 왜냐하면 의롭게 된 자들은 자기네 개인적인 경건 같은 것은 거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 6 장 聖 化
제 1 절 성화의 성서적 용어
“성화하다”(qadash)라는 히브리어는 아마 “자르다”를 뜻하는 용어에서 왔을 것이다.그러므로 이말은 분리의 관념을 강조한다. 이 말은 역시 hagiazo 라고 하는 신적 용어의 기초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성서의 용어들은 마음속에 일으켜진 영적 특질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위치와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결의 주관적 특징들을 인간속에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지시하기도 한다.
제 2 절 거룩함과 성화의 성서적 관념
첫째 하나님에게 적용되었다. 이 관념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어 天的인 위엄을 가지고 그것을 멀리 초월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준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신적 성결의 관념은 신적 영광의 관념에 배경하여 거의 그것과 동일시 되는 것이다.
둘째로 거룩함의 관념은 하나님과 더불어 특별 관계를 가지는 인물과 사물에도 적용되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거룩한 인물, 그리고 제사와 정화와 같은 거룩한 의식을 가지기도 하는데, 이들 인물과 사물은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구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내적 성별을 가져 오지는 못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자만이 참으로 주앞에 거룩한 것이다.
제 3 절 성화의 특징
(1) 성화의 창시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이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대로 맡겨주신 수단을 열심히 사용함으로 성화의 사역에서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또한 협력해야 한다.
(2) 성화는 칭의와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고 도덕적, 재창조적 행위이다. 이 행위에 의하여 죄인은 그의 내적 존재가 새로워지며, 또한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3) 성화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어서 현세에서는 결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4) 성화의 과정은, 그것이 영혼에 관한 한 죽을 때 완성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 직후에 완 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육체에 속하고 있는 한 부활시에 완성된다.
제 4 절 성화의 성질
(1)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성화란 영혼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이 사역으로 말미암아 중생에서 심어진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대되는 것이다.
(2)그것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a)옛 사람의 抑制
옛 사람, 곧 죄의 지배만을 받고 있던 인간성이 점차로 十字架에 못박히는 것이다.
b)새사람의 胎動
영혼의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진되어 생활의 새로운 과정이 일으켜 지는 것이다.
(3)그것은 전인에게 영향을 준다.
성화는 인간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동시에 생활의 외부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오성, 의지, 감성, 양심에 영향을 준다.
(4)그것은 신자가 협력하는 사역이다.
이 사실은 악마와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반복적인 경고에서 알 수 있다.
제 5 절 현세에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현세에 있어서의 신자의 영적 성장은 정도에 있어서는 불완전한 채로 남아있게 된다. 완전을 위하여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완전주의자들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하지만 그 요점을 입증하지 못한다.
제 6 절 성화와 선한 일
(1)선행의 성질
선행은, 완전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원리상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요, 또는 영적 의미에서 선한 일을 뜻한다. 그같은 선행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에서 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욕망에서 일어난다. 선행의 최종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만이 이같은 선행을 수행할 수 있다.
(2)선행의 공로적 특징
신자의 선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로적이 아니다. 그 이유로 신자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에게 드릴 의무가 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이 없이는 선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일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가장 훌륭한 선행도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에 못지 않게 만족하신다. 신자의 선행은 영원한 영광의 보상에는 그 균형을 잃고 있다.
(3)선행의 필요성
선행은 구원을 공로있게 하는데 필요하지도 않고 또한 구원의 필요한 조건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선행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써 성인신자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신앙의 열매로써, 감사의 표현으로써, 신앙의 확증을 얻는 일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제 7 장 성도의 堅忍
제 1 절 성도의 견인의 성질
엄격히 말해서 忍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라 하겠다.
제 2 절 견인 교리에 대한 증거
성서는 또한 당연한 귀결로서 선택의 교리가 된다. 이 선택의 교리란, 완전한 구원의 목적에 대한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의 효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代價를 지불하신 사람들은 결코 다시는 정죄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신비적 연합에서도 필연적으로 추론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신자가 현재에도 구원의 확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추론된다. 신자가 어떠한 때에도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제 3 절 견인교리에 대한 異議
견인의 교리는 거짓 평안과 태만과 방종과 부도덕으로 이끌어 간다는 비난을 가끔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비난이다.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이 우리 편의 끊임없는 주의와 집념과 기도없이 보호하신다는 관념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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