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음인가? - 갈라디아서와 성령
2014-10-08 18:06:44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라고 한 것은 위선적 영성의 대안으로 믿음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비판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란 바로 위선적 영성을 가리킨다. 외적으로 율법의 모양만 내고 울법의 정신은 저버리는 것,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것이 바로 위선적 영성이다 예수님은 이런 영성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못들어간다고 경고하신다. 구제. 기도 금식과 같은 예를 들어서 위선적 영성의 특징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할 때 빠지기 쉬운 영성이 바로 위선적 영성이다. 바울이 반대한 율법의 행위란 바로 위선적 영성을 가리킨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이 제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위선적 영성을 극복하는 것이고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말하면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갈라디아 3장 1-5절) 또한 바울은 십자가를 얘기하면서 그 목적이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 3:13-14) 십자가는 죄의 용서만이 아니다. 죄의 용서는 구원의 첫단추일 뿐이고 그 이후에 주어지는 삶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전 포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는 방식이다. 갈리디아 3장 1-5절에서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나 3:14에서 십자가 속량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나 동일한 얘기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4장 4-5절에서 성육신을 이야기 하면서 성육신의 목적이 아들의 명분을 얻게하려함이라고 말한다. 아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곧 상속자를 뜻한다.(갈4:7) 그 순서를 보면 먼저 아들을 보내시고(4절)아들의 영을 보내시며(6절) 마지막으로 아들로서 유업을 받게하신다. 그러니까 4절의 아들을 보내신 사건과 6절에 아들의 영을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동일 목적을 위한 두 동작인 셈이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국 성령으로 이끄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22-31절은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가 나오는데 이것은 약속을 따라 난 자와 육체를 따라 난 자를 대비하면서 약속을 따라 난 자만이 유업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약속을 따라서 난 자를 성령을 따라서 난자라고 말하면서 결국 성령을 따라서 난 자만이 유업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알레고리 이전에 바울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 알레고리에는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고 말한다결국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성령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위선적 영성이 아닌 성령의 역사,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이다. 바울은 행위의 반제로서의 믿음이 아닌 성령의 약속을 받는 믿음을 얘기 하고 싶었다
상속이란 구원을 의미하는데 상속이란 말 자체가 미래적 성경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5잘 5절에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through the Spirit for faith) 의의 소망(the hope of righteousness)을 기다린다" 고 한 것이다. 여기서 믿음은 성령을 수식하는 것으로,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을 통하여 의의 소망(종말론적 구원)을 기다린다고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이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말은 성령의 원천으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어서 5장 6절에서는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데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믿음이 성령을 따라가는 삶인 것이다. 그럼으로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믿음이 행위와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선적 영성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영성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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