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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왜 삼위일체인가?

왜 삼위일체인가?

2013-12-04 16:03:36


   기독교는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  神人이시라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神人이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다시 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지상에 오셨을 때만 神人이신 것이 아니라 일단 神人이 되신 이후에는 영원히 神人이시며 영원히 神人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와 연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대속의 교리도 이신칭의의 교리도 전부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초기부터 이 문제와 씨름하였고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서 삼위일체 교리가 수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초대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단과의 치열한 성경해석 투쟁을 거쳐서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관은 기독교가 서있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며 삼위일체를 떠나서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신관이야 말로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 짓는 확고한 진리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인정한다. 그러나 위대하든 아니든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관으로는 예수님은 인간일 뿐 하나님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거짓을 믿는 종교가 될 것이며 기독교 이천년 역사는 허위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신관을 반영한 교리이며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을 다른 모든 거짓 신들과 구별시키는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시며 또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실 또 다른 신적 존재이신 성령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교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등장으로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는 분과 예수님 자신 그리고 보혜사로 오시는 성령님 이렇게 신적 존재가 세 분으로 계시된 것이다. 그런데 신약 계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 계시에 터를 두고 있으므로 구약에 계시된 유일하신 여호와라는 신관과 신약의 새로운 계시는 어떻게 상관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교회가 초기부터 치열한 성경 해석 투쟁을 하였고 그 결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신관이 형성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심각한 분열을 가져온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리나 종교 개혁시기에도 기독교 신관인 삼위일체 교리는 손상을 입지 않고 보전되었으며 오늘날 까지도 극단적 이단종파를 빼고는 삼위일체 신관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 교리를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독단적이고 교만하게 자기류의 알량한 성경 해석을 주장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님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상 항상 있어 왔고 오늘날도 그러하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믿는 신은 적어도 기독교가 고백하는 신이 아니며 그가 만든 신일 것이니 우리가 어찌 다른 신을 믿는 자와 화해하며 화목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우리는 그런 자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대한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하여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반성하여야 할 것은 오늘날 삼위일체 교리를 사변적 교리로 치부하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와 상관없이 그저 예수님의 대속교리만 믿으며 성령의 인도하심만 믿으면 된다는 식이다. 대속교리와 이신칭의 교리는 모두 삼위일체 교리에 기초한 것이다. 삼위일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교리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반드시 삼위일체 교리도 가르쳐야 하며 삼위일체 교리의 위대하고 풍성한 진리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삼위일체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고 마지막이라고 단언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이 설파하였듯이 바른 신관에서 바른 신앙이 나온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거짓된 신관에서는 바른 신앙이 나올 수 없으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다시 묵상함

2015-11-20 19:38:41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와 함께 일어서고 함께 넘어진다고 말할 정도로 삼위일체 교리를 기독교의 핵심 진리로 간주하였다. 신학의 일차적인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교리가 될 것이며 삼위일체 교리를 떠나서 다른 기독교 교리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나오며 삼위일체 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삼위일체 교리가 목회현장에서는 거의 가르쳐 지지 않고 있으며 일반 신자들도 이 교리에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핍은 곧 신앙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핍을 의미할 것이며 이것은 결국  신앙의 대상을 왜곡함으로써 신앙을 오도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목회현장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소외된 것인가? 신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신비한 것이므로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오히려 이단으로 빠지거나 신앙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와 동일한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선명하게 구분하는 교리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받아들을 수 없는 교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유일신 교리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런 인식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실 기독교내에서 암암리에 공유되어 오지 않았나 한다. 왜냐하면 서구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유일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삼위일체 교리를 전개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 전통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유일성을 숫자적 유일성으로 전제하고 숫자적으로 유일하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을 가진 하나님이 되는가를 설명하려고 애를 썻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전제를 가진 채 셋이라는 설명을 하려다 보니까 결국 여러가지 사변들이 도입됐고  그런 사변은 이성적 지지는 물론, 성경 계시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서방 교회의 이런 접근은 결국 목회현장에서는 많은 경우에 삼위일체에 대한 양태론적 이해로 나타났고, 양태론적 이해는 서방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다. 그 결과 삼위일체 교리는 점점 목회현장에서 소외되었고 실제적인 신앙 생활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오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원조격인 동방교회의 전통은 서방교회와는 접근 방법이 달랐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유일성을 숫자적인 유일성으로 전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라는 자연스런 전제에서 출발하여 이 세 분이 어떻게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시는가로 삼위일체 교리를 접근했다.  동방교회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숫자적 하나로 전제하지 않은 것은 유일신 사상의 출처인 구약성경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은 숫자적 유일성이 아니라 관계적 유일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구약성경은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렇게 접근하면 서방교회처럼 삼위일체 교리를 이성에 반하는 초월적이고 이해 불가한 교리로 만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목회현장에서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의미깊은 교리가 될 수 있다. 

 

    동방교회 전통은 세 분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이 상호 침투 혹은 상호내주로 번역되는 "페리코레시스" 를 통해 하나의 일치된 연합체나 공동체로 존재하신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지만 이 세 분이 독립적으로나 분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하나의 통일체로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세 분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시지만 서로 분리되거나 독립되지 않는 공동체나 통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성부도 존재하시고, 성자도 존재하시며, 성령도 존재하신다. 그러나 이 세 분은 각각 독립적으로가 아니라 언제나 상호간에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나 연합체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가 삼위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규정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부는 성자와 성령에 의해 존재가 규정되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에 의해 그 존재가 규정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의해 그 존재가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론적 이해에서 보면 성령이 성부와 함께 성자로 부터 나온다는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주장이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한 동방교회보다 오히려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성부는 성자 및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시며 성자나 성령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이것은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세 분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분리될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하나의 통일체로만 존재하시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교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 교리의 실천적 유익도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역시 공동체적 존재이며 인간 외의 피조물들 역시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를 내재적과 경륜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전통 신학은 창조-구원- 성화의 각 사역을 각각 성부-성자- 성령이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럴 경우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동방교회 전통을 따라서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세 분 하나님이 다른 두 분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 분 하나님의 사역 역시 분리되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창조-구원- 성화의 사역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동일하다. 결국 삼위일체란 하나님은 세 분이 공동체적으로 존재하고 공동체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하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가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도 바로 공동체적 존재와 공동체적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