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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율법과 하나님나라

율법과 하나님나라

2011-08-07 23:21:32


 율법에 대한 종교개혁의 전통은 크게 두가지로 갈리는데 그것은 율법을 신자의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는 소위 율법의 제3의 용도를 주장하는 칼빈주의 전통과 그것을 부인하고 율법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에 국한시키는 루터파의 전통이 그것이다. 전자가 율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가지를 다 인정한 반면 후자는 주로 율법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신칭의로 요약되는 종교개혁 사상에서 율법을 믿음의 대립적인 위치에 놓은 점은 킬빈주의나 루터파나 동일한데 이것이 율법의 정당한 위치를 좁게 국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율법을 독립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초의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창조목적을 반영한 것인데 그것은 아담을 비롯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근본적인 행동강령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악과 금령의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이 관계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법이 선악과 금령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이후로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은 여러가지 다양한 명령과 교훈을 주시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과 인간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근본관계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계명과 율법은 단순한 법이 아니라 관계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법, 즉 관계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하나님나라를 본격적으로 새롭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특별하게 관계하시면서 다양한 법도와 규례를 주셨으며 특별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공적인 언약을 맺으시면서 부터는 십계명을 비롯하여 엄청나게 다양하고 세부적인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공적인 언약을 맺으시면서 다양하고 세부적인 법도와 규례를 주신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에서 발생한 언약법인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창조주와 그 피조물의 관계에서 간헐적으로 대체적으로 주어졌던 법도가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공적인 언약을 맺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행하신 언약적 행동에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반응으로 요구된 것이며 그래서 십계명의 첫 계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법도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십계명의 첫계명에서도 보듯이 율법이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정신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선악과 금령의 법정신과 동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순종이란 단순한 복종이나 맹목적인 굴종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정당한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순종인 것이다. 결국 순종이란 인간이 하나님은 정당하게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시요 인간의 주인이시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대주재요 인간의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율법이 요구하는 본질적인 법정신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율법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오는 관계법인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그래서 율법은 근본적으로 외적인 행위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순종이지 마음에는 없이 외적인 행동만 취하는 위선적인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지적했던 이스라엘의 죄악은 행동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죄악이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마음을 갖지 않고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여호와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떠나려고 하였던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늘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다른 이방신을 함께 섬기려고 하였던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며 언약을 배반한 것이라고 정죄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의 법정신 그 법적 요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곧 그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율법의 존재는 필수적일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 곧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모시는 것은 율법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사도들이 가르친 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는 교훈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율법 준수 그 자체가 하나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율법 준수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율법준수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요 그 분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을 왕으로 모신다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소위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신칭의를 주장한 종교개혁의 전통은 오직 율법을 믿음의 반대개념으로 설정하여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에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사실 성경은 율법행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상을 가르친 적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준 것도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준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은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법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순종의 마음이 없이 외적인 행동으로 율법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위선과 외식을 지적하신 것이다. 결국 율법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라는 관계로 부터 발생한 관계법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삶의 원리인 것이다. 이러므로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다시리심 곧 그의 왕권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법에 순종함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진리는 동일한 것이고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믿음의 반대개념으로 위치시킨 종교개혁의 전통때문에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인가?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고 무관심할 수 밖에 없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에만 관심을 보이고 하나님이 주신 역사와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그분의 왕권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성경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그래서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여 살 것인가? 그래서 그분의 나라가 그 분의 백성을 통하여 역사 가운데 나타날 것인가 일 것이다.

 

 

[추기] 2011. 12. 4 주일

 

하나님나라와 율법은 필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는 나라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인데 율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취해야 할 정당한 태도는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나라를 논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며 바로 이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데 이 순종의 기준은 역시 율법인 것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순종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순종이 율법을 통하여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과 율법의 정당한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면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든 영역과 정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연구하여 우리 삶 가운데로 가져오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개인적인 도덕적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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