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하나님나라
2011-07-25 21:58:02
현대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개인구원일 것이다. 그래서 복음도 개인구원의 복음으로 변질되고 있고 개인 구원이 중심이 된 개인구원 신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은 개인구원신학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구원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이 구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듯이 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구원을 수단으로서 이해할 때 우리는 구원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 되며 소위 구원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게 되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과 하나님나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왜 구원이 하나님나라의 수단이 되는 것인가? 이는 구약역사를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 진리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은 그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을 압제하는 애굽의 권세에서 해방됨이 없이는,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짐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구약의 역사에서 보듯이 구원의 키워드는 해방과 자유이다. 그런데 그 해방과 자유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무엇을 위한 해방과 자유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해방과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게된 것은 해방과 자유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 해방되고 자유를 얻은 자로서 이 땅과 역사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게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공적 사역에서 첫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선언이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즉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은 곧 그들이 목메어 기다리던 메시아의 임재가 가까왔다는 말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시지는 않았지만 천국이 가까왔다는 선포에는 자신이 메시아이심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서 행하신 모든 이적이나 교훈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은 유대인들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메시아상이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천국 선포는 곧 자신의 메시아 선포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천국이 이미 도래하였다고 하시지 않고 왜 천국이 임박하였다고 하신 것인가? 예수님의 메시아시라면 메시아의 도래가 곧 천국의 도래가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신 선포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과연 메시아가 오섰고 그 나라를 다스릴 왕으로서 예수님이 오셨지만 아직 천국이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왕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왕의 다스림을 받을 백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왕이 다스릴 백성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사역의 중심은 자신이 다스릴 천국백성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바로 천국백성을 준비하고 세우는 결정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단순히 나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건인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사건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주신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 그 자체를 주고 끝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우리를 다스리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구원을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차원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구원주의에 빠지게 됨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것 처럼 방향을 잃고 마는 것이다.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수단인 것이지 구원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성격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인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수단이라면 그것은 개인이 구원을 받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의 왕의 다스림을 받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순종을 행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왕의 다스림에 순종하기 위하여 즉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구원없는 순종이 불가능하다면 순종없는 구원은 무가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순종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왕을 왕답게 모시는 것보다 더 큰 순종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을 왕답게 모시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왕외에는 다른 왕의 통치를 거절하는 것이고 오직 예수 왕께만 충성을 드리는 것이고 예수 왕께 자기의 전 존재를 의탁하는 무조건적인 신뢰일 것이며 그 안에 안식을 누리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과 인간 관계에서 왕이신 그분의 왕되심을 증거하고 드러내며 왕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사로잡아 그 앞에 굴복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 백성을 삼으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개인이 구원받고 세상에서 물질의 복을 받고 살다가 죽어서 극락왕생하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교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미신인 것이다.
하나님나라와 구원
2015-04-08 22:29:29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특징 중 하나는 죄의 보편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이스라엘 가운데 예수의 첫 활동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선포로 시작된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죄의 범위와 깊이 그리고 심각성에 대한 예수의 판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마태복음 5:21-22절이다.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이 들어가게 되리라")여기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죄에 대한 수량적 개념을 철폐하고 그 대신 질적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와 같이 예수의 모든 설교는 인간이 모든 성품이 악하고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누가복음 18:9-14에 잘 드라나 있는데 여기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란데 있다. 이런 사상은 유대주의 구원론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주의 관점에서는 회개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지만 이미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여 불명예스러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17:7-10의 종의 상급 비유나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모두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죄사함은 구원의 소극적 측면에 해당하는 것이고 적극적 측면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산상수훈 전체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참여한 사람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또 다른 특징은 구원이 메시아이신 예수의 오심과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메시아의 오심으로 시작된 구원은 "주의 은혜의 해"로 요약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가난하여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빚이 탕감되고 종에서 해방되며 자기들의 소유를 되찾는 "희년 " 혹은 "양의 뿔의 해"를 의미하였는데.(렘25:39, 겔46:1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메시아적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의 답변(마 11:4-6)은 메시아적 구원이 현재적이며 성취중에 있지만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예수가 선포한 구원은 인간의 죄와 무능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여러 명령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세례 요한의 명령(눅14:26-27), 자기 부인과 용서의 명령(마18:1-5),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묘사(마25:31-46) 등은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는 듯한 구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직설법(Indicative)과 인간에게 행위를 요청하는 명령법(Imperative)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주기도문의 첫 세 청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천국 구원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준명히 시사하고 있다. 이 세 청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현과 그의 자녀들이 순종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도하고 있다. 또한 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 5:13-16의 위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빛과 소금"이라는 제자들의 정체성이 선언된 이후에 여러 계명과 명령들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선한 행실은 그들이 천국 구원에 참여한 결과임을 의미할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의 채무자와 채권자의 비유도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상의 고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구원에 관한 복음서의 명령형들은 직설법의 선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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