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소고

십계명과 하나님나라

십계명과 하나님나라

2011-07-22 12:33:22


십계명의 구조가 나타내는 큰 정신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1,2,3계명)에서 진정한 안식(4계명)을 누리며 사람들과의 화평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이 구조는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시사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 땅과 역사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려면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그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간에 정상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며 그 백성은 백성이 되는 관계하에서만 하나님의 통치는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되었고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 그러니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기 위해서 가장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죄 문제의 해결일 것이다. 구약의 역사는 결국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정상적인 통치가 역사 가운데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신약 성경은 이 문제의 해결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을 통하여 해결되었음을 증언하였고 이것이 신약성경의 복음을 구성하는 중요한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과 함께 복음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은 그의 부활인 것이다. 인간이 범죄로 인하여 그 결과로 주어진 저주가 죽음이었고 인간은 너나할 것 없이 사망의 권세의 지배를 받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의 해결은 반드시 사망의 문제의 해결을 가져와야 하는 것인데 예수의 부활사건이 바로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 사건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예수의 부활사건은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십계명의 두번째 구조인 인식일 계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발견되는 것이다.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사망의 권세의 인간 실존적 현상은 죽기를 두려워 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즉 사망의 권세는 인간의 육체적 소멸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생 먹고사는 문제에 매여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며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 실존현상에서 사단은 인간의 염려를 해결해주는 것이 재물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비유로 제시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열매 맺지 못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상 보훈에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재물을 섬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인간을 짓누르던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진 것을 의미하고 이는 결국 사망의 권세의 실존적 현상인 이 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가르키는 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어떻게 인간이 누리는 안식으로 연결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구약은 반복하여 안식일 계명의 법정신이 자유와 해방인 것을 보여주었는 데 이 법정신이 신약적으로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해방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부터의 자유함으로 성취된 것이다. 신약이 증거하는 복음을 구성하는 두가지 핵심 내용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면 복음이 지향하는 목표점은 결국 안식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이 진정으로 선포되고 수납되는 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진정한 안식의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나라와 안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나라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가 안식임을 알 수 있다.

 

십계명의 그 다음 계명들의 존재는 하나님나라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안식일 계명이후의 5,6,7,8,9,10 계명이 가르키는 것은 인간  상호관계의 문제를 의미하는데 이는 안식일 계명을 징검다리로 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회복이 사람들간의 정상적인 관계회복으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안식의 복을 누리게 된다면 그 복은 이제 인간 상호간의 샬롬, 평화, 사랑의 복을 누리는 것으로 발전되어 나감을 알 수 있다., 사실 하나님나라는 개인적 치원이기  이전에 공동체적 차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 공동체적인 것과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통치는 공동체를 통하여 공동체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사랑과 샬롬이 나타난다면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최고, 최종의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계명의 구조가 보여주듯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을 통한 안식의 복을 누림을 거쳐서 이루어 져야하는 것이지 인간의 자의적이고 인본적인 제도나 프로그램으로 기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간의 상호 사랑과 샬롬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창조목적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분이 공동체를 이루신 하나님이 상호 사랑과 샬롬을 이루시듯이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동일한 샬롬과 사랑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을 것이고 사도들도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사실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새계명이라 함은 옛계명을 대체한다는 의미보다는 옛계명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새계명에는 옛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다 그대신 예수님이 사랑한 방식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 있는데 이것은 옛계명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진 계명이다. 이웃 사랑의 방식이 "네 몸같이" 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로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은 옛계명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하나로 통합된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분리될 수 없이 통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 사랑의 출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인간 사랑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구약의 십계명은 단순한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나타내는 계명인 것을 알 수 있고 결국 십계명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1,2,3 계명이 하나님과의 샬롬이라면 안식일 계명인 4계명은 자신과의 샬롬일 것이며 5,6,7,8 계명은 인간 상호간의 샬롬일 것이다. 하나님, 자기 자신, 다른 인간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진정한 샬롬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본질적 성격임을 십계명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소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과 하나님나라  (0) 2023.04.29
복음과 하나님 나라  (0) 2023.04.29
부활과 하나님나라  (0) 2023.04.29
하나님나라와 사도신경  (0) 2023.04.29
하나님에 대한 지식  (0) 202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