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하나님 나라
2011-07-23 02:01:41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였다. 그것은 유대민족이 고대하고 갈망하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의 하나님나라였다, 물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처음에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나라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의미하는 것은 이미 자명한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후의 사역의 내용과 방향은 자신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것과 그 나라를 준비해 가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가지 비유로서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증명하시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나라를 세우시는 일을 진행하여 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오셨고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으며 하나님나라를 증명하셨고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실망하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부활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가르침 특별히 그의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그 의미를 가르치시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 그 당시는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했던 말씀)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그의 죽음과 교훈들이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을 것이고 특별히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닫고 놀라운 확신 가운데 도달하였을 것이다. 베드로의 오순절 연설은 이런 추측을 분명히 뒷받침 해주는 증거이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들이 보인 이적과 기사 또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였고 사도들은 이미 그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를 증거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소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로 증명된 그의 죽음의 의미와 그의 존재(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이 대속적 죽임이며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메시야) 이심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을 것이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도들의 모든 행동과 말은 예수님이 선포한 그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사도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그 나라의 복음이 아닌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그의 메시아 되심을 선포하는 복음을 전하였을까? 그것은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사도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임박한 나라가 아니라 이미 도래하여 실재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던 그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이미 이루어졌고 실재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선포할 복음은 이미 도래하여 실재하는 하나님나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포하지 않았을 까? 그렇지 않다. 사도들은 선포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그의 메시아 되심이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앞에서 전개한 추론이 맞다면 이 두가지 선포는 밀접한 관계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관계를 알게 될 때 우리도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시대에 실재하며 믿는 자는 이미 그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는 알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알지 못하고 그 나라의 백성 된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가?
예수의 죽음과 그의 메시아 되심은 모두 부활사건의 빛을 통하여 조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서 부활은 이미 전제된 사건이며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죽음과 존재에 대한 선포는 모두 부활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그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사실 부활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 사건과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것인가?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도래라면 부활 사건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 사건은 아담의 타락이후 모든 인류를 짓누르고 있던 사망의 권세가 벗어진사건이며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의 세력이 깨뜨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믿는 자가 죽음 이후에 참여할 미래의 소망일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누려야 할 하나님나라의 능력인 것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죄의 책임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면 예수의 부활은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사건과 하나님나라의 관계는 자명해진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죄책으로 부터의 해방과 사망의 권세로 부터의 자유를 맛보고 누리는 것이다. 특별히 사망의 권세로 부터 우리가 자유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죄책으로 부터의 해방은 결국 사망의 권세로 부터의 자유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망의 권세로 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것의 실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할 몸을 가지고 있는데 사망의 권세로 부터의 자유는 결국 우리가 죽음 이후에 기다려야 할 먼 미래의 소망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오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도래하여 실재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망의 권세로 부터의 자유는 미래적이기 이전에 현재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망의 권세가 현재적으로 인간 실존에 미치는 영향은 막강한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으면 죽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기를 두려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그것을 산상보훈에서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그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의 권세하에 있는 모든 인생은 세상의 염려와 수고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거기에 매여서 종노릇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비유인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현상을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망의 권세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이생의 염려에 매여 있는데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는 그 염려를 해결해주는 것이 재물이라고 속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 맘몬을 숭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망의 권세에 있는 인간은 모두 맘몬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 대신 맘몬을 숭배하는 인간에게 안식이란 있을 수 없고 염려와 고생은 더욱 깊어만 가는 것이고 재물을 섬기느라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온통 이해관계로 변질되어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라는 인간 소외외 경쟁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이미 도래하여 우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어떻게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현재적인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이미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이생의 염려와 싸우는 것이고 재물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며 맘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추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안식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그 안식을 나누어 주고 그 안식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주 예수께로 오라 그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외쳐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 안식이야 말로 하나님나라의 능력인 것이다. 이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인간 간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임할 것이며 하나님나라의 충만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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