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장 예루살렘 입성
Tolle Rege/마태복음
2012-06-23 22:59:4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은 이미 20장에서 명백히 밝혀졌다. "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입성이 왕이 시온에 임하시는 것인데 그 왕은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메는 짐승의 새끼를 탄다는 예언이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일은 시온의 왕으로서 시온성에 임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하며 그분의 메시아되심을 고백하였지만 정작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그분을 자신들의 왕으로 알지 못하고 다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제일 먼저하신 일은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쫒으시며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업으신 일이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지적하셨다. 소위 성전청결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이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마자 이런 일을 행하신 것일까?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 즉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일과 관련이 있는 계시적 사건임이 분명하다. 원래 성전은 하나님과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언약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었다. 그런데 성전의 이런 본래적 의미는 상실되어 버렸고 성전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강도의 굴혈과 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소위 성전 청결사건은 성전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일은 결국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계시적 사건일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참 성전이신데 참 성전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더럽혀진 성전의 종말과 정결하게 된 성전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전 청결 행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전의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화목과 교제가 회복될 것을 예고하는 계시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맹인과 저는 자들을 성전에서 고쳐주신 것이나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양할 때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성전의 주인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신 것이다. 이어지는 무화과 나무 사건은 열매없는 예루살렘성의 실상과 그것에 대한 심판이 임박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시어 가르치셨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도전을 하였다. 그들의 도전은 권위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권위는 제사장과 장로인 자신들의 독점적인 권위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냐 즉 사람으로부터냐 아니면 사람으로 부터이냐라고 반문하셨다. 이것은 요한의 권위가 사람이 아닌 하늘로 부터온 것이듯이 예수님의 권위 역시 하늘로 부터온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며 동시에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주장하는 권위는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사람들이 만든 거짓 권위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향하여 두가지 포도원 비유를 하셨는데 이 비유들은 결국 그들의 위선과 불순종을 고발하는 신랄한 비유였던 것이다.
[추기] 2019-11-06 17:12:13
마태복음 21장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며서 나귀를 탄 것은 분명히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마태는 구약을 인용하여 사온에 임하는 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탓다고 설명한다(5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시온에 임하는 왕의 귀환이었다. 그러나 그 왕은 압제하고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겸손한 왕이었다. 예수의 입성을 환영하는 많은 무리들의 행동은 그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6-9절)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는 예수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11절) 아직도 사람들에게 예수의 정체는 모호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성전에서 소동을 벌인 일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상징하는 핵심이었고 당시 유대 종교의 중심이요 권위였다. 그러니 성전에서 벌인 예수의 소동은 바로 이것을 부인하는 행동이며 나아가 성전을 심판하는 상징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이런 행동의 이유를 예레미아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13) 예레미야의 맥락에서 강도의 굴혈이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불법과 외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가 성전에서 벌인 상징적 행동은 언약을 실제로는 배반하면서 외적인 종교행위로 언약을 지키는 처럼 꾸미는 이스라엘의 위선에 대한 심판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마자 성전에서 보여준 이런 상징적 행동은 그가 왕으로서 언약을 배반한 자기 백성을 심판하는 왕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이런 행동에 대해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 권위의 문제였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 권위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물었다.(23절) 이 질문에 대해 예수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지 곤란한 질문에 대답을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가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예수는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지만(27절) 이어지는 세 가지 비유는 예수가 어떤 권위를 가진 자인지,그리고 예수에게 권위를 묻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두 아들 비유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권위를 묻는 자들이 첫째 아들과 같이 순종하는 척 하면서 실제는 불순종하는 위선자들이며 동시에 그들에 대해 예수가 가진 권위는 아들에 대해 아바저기 갖는 권위와 같은 절대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이 정죄하는 세리나 창녀들을 둘째 아들로 비유하며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언하신다. 두번째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진 권위는 포도원 주인으로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그 포도원의 소작농으로 비유되면서 그 소작농들이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심판받기에 합당한지를 보여준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외식을 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를 빼앗길 것이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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