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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18장 천국에서 누가 큰가?

마태복음 18장 천국에서 누가 큰가?

Tolle Rege/마태복음

2012-06-17 23:09:0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충격적인 계시가 16, 17장에서 반복하여 주어진 직후 18장에서 제자들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큰자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진 것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심각한 계시에 대하여 매우 근심하였지만 그 근심은 단지 인간적인 근심이었을 뿐 그 거대한 계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이 논쟁은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어이없는 논쟁을 일축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도래할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교훈을 하셨다.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자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자 곧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교훈과 함께 만일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가 주어진다.이어지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스스로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자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 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어지는 용서에 대한 교훈과 천국에서 누가 큰자인가라는 논쟁은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일견 앞의 논쟁에서 주어진 교훈과 관계없는 새로운 교훈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적인 관계는 긴밀한 것이다. 즉 인간 상호간의 용서의 문제는 바로 스스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용서는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악은 하나님과 관련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상대하여 권고하여야 하며 만일 그 권고를 듣지 않을 때는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을 간과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 자신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용서였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못한 것에는 무제한적인 용서를 요구하시며 그 요구의 근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은 것이었다. 결국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근거는 바로 자신의 죄악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정당한 인식인 것이며 그 겸비함의 증거는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용서라는 것이다.

 

[추기] 2019-11-06 17:10:38

마태복음 18장

왜 제자들은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질문을 한 것일까? 이 질문은 제자들의 천국관에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에게 천국이란 왕적 메시아가 와서 이방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만방에 가장 뛰어난 나라로 만들어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이 메시아로 믿는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할 천국에서 자신들이 어떤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물은 것이다. 16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고 예수는 그들의 고백을 암묵적으로 시인했지만 그 메시아인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며 다시 살아날 것을 두 번에 걸쳐 말씀하신 바 있다. 예수의 그런 수난 고지는 그들이 가진 메시아관에 대한 엄청난 충격울 주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은 반발했고(16장22절)근심하였다.(17장 23절) 하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아관을 고수했고 따라서 그 메시아관에 의거한 천국관을 가지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메시아관과 천구관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다. 메시아가 누구냐는 인식에 따라 그 메시아가 이룰 천국이 무엇이냐는 인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의 이런 질문을 계기로 그들의 천국관을 교정시켜주고 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수난고지 못지 않게 충격적인 것이었는데, 것은 그들이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그곳에서 누가 크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대답은 천국에 들어감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그들의 전제를 부수는 놀라운 대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어린아이들 같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라고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로 여기는 자기 인식, 이것이 바로 어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6절 이하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작은 자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천국에 대한 놀라운 두 가지 진술이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라는 것 그리고 천국에서는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 나라의 왕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한 심판이 지극히 크고 엄중함을 경고하신다.(6-7절) 그리고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곧 자기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손이든지 발이든지 눈이든지 작은 자를 업신여기게 만든 것이라면 잘라버리고 빼어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한다.(8-9절) 결론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스스로 작은 자로 여겨야 하면(3절) 또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10절)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천국관과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예수의 천국관은 얼마나 다른가? 메시아관이 다른만큼이나 천국관도 달라지는 것이다. 군림하고 영광을 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낮아지고 죽는 메시아가 이루는 천국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어지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 비유는 천국에서 작은 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상식적으로는 목자가 아흔아홉마리 양을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지 않을 것이지만 천국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는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두 가지 교훈을 가르치시는데 그 핵심은 그가 권고를 들으면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권고를 듣지 않을 때는 그 죄를 개인적으로가 아니리 공동체적으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15-17절) 이 교훈도 천국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이는데 그것은 이어지는 18-20절이 천국에서 형제의 죄를 신중하게 또 공동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18잘의 언급은 이미 16장 18절에서 나왔던 말인데 그 당시는 그 의미가 불분명했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를 19절에서 설명해주고 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거도 풀리리라는 말은 결국 이 땅에 존재하는 메시아의 공동체가 합심하여 구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이루게 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만큼 이 땅에 존재하는 메시아 공동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서 이룰 하나님의 경륜적 도구인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메시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 거기에 메시아도 함께 있을 것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20절)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냐는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다. 이 비유 이야기는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천국에서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단지 자비를 베푸는 문제가 아니라 의무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형제에 대한 죄 용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죄를 용서해 주신 일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는데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가 그 죄를 뉘우치는 한 언제까지든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에 도래할 천국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