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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기독교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015-04-08 12:43:03


이원론(dualism)의 극복

 

   로잔언약으로 대표되는 총체적 복음주의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열된 세계관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로잔언약은 교회의 선교적 관점을 복음 전도에서 사회정의로 확장하려는, 다시 말하면 복음화의 과제에서 사회적 실천을 통합하려는 선교론적 동인이 주된 흐름이었다.  총체적 복음주의는 복음과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탐색이 문제의 핵심이었고 그것은 교회의 선교적 방향에 전환점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세계관적 관점을 갖지는 못했다.

 

 기독교세계관은 신앙과 삶, 교회와 세상, 사적신앙과 공적 신앙 사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기독교세계관은 신앙의 관점을 구원중심의 기독교에서 창조중심의 기독교로 종교적 삶에서 세상속에서의 삶을 중시하는 기독교로 확장하려는 세계관이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의 삶을 종교영역에서 세속영역으로 끌어내어 삶의 전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지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근본주의 기독교나 성장주의 기독교 그리고총체적 복음주의 패러다임보다 진일보하였더 더 포괄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흐름이었다고 평가된다.  기독교세계관의 사상적 뿌리는 아브라함 카이퍼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칼빈주의는 기독교를 종교나 구원종교로 머물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삶의 체계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세계관은 신앙을 삶의 총체와 관련시키고자 한다. 기독교세계관에 의하면 기독교는 구원종교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신앙의 관점에서 조망하여 종교생활을 넘어 세속적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삶의 체계이고 삶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세계관은 종교과 세속이라는 이원론에 갇혀있던 사람들에세 세속의 영역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영역임을 일깨워주었다.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전영역을 그리스도의 주재권(lordship)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의 패러다임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영역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삶의 모든 것을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세계관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기독교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심각하게 던진다.

"  왜 성경의 가르침, 권위, 가치관은 전도, 세례,기도,예배,교회봉사 등과 같은 종교영역에만 국한되고 정치,경제, 기술공학, 자연과학, 노동,예술 등 인간 삶 전체와 연결되지 못하는가? 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삶의 전 영역에서도 성경적 전망과 관점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태도와 고백을 형성하지 못하는가? "

 

  기독교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이 사적 종교영역과 공공의 삶의 영역을 통합하는데 실패했던 원인은 종교영역과 세속영역을 이분화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낸시 피어스느 이런 이원론의 뿌리에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하층부에 자리잡은 과학은 공적으로 검증가능한 사실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객관적 진리가 되는데 반해 상층부에 자리한 윤리나 도덕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주관적 신념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대중적 복음주의 흐흠에서 종교는 사적인 감정체험이라는 관념을 형성하는한편, 학문은 공적인 지식으로서 종교적으로 중립상과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종교는 공적영역에서 제거되어 사작영역에 한정되었고 이 과저에서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그 공백을 차고 들어와 재빨리 공적영역을 독점하였다. 기독교세계관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하고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통합한 세계관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이 극복하고자 하는 이원론은 존재하는 사물을 영적, 종교적인 차원과 육적,세속적인 차원으로 분리하여 사고하는 존재론적 이원론과 교회속의 신앙과 세상속의 삶의 불일치가 보여주는 윤리적 이원론이다. 기독교세계관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종교와 일상, 신앙과 학문, 사적경건과 공적영역의 삶 사이의 분리된 이원론을 극복하고 통합적인 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이 단지 종교적 영역이나 개인구원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구현하며 복음의 원리가 사회의 공적광장에서 보편성을 확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는 우리는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셨다고 말하면서 종교적 개인주의나 경건한 내면성으로 후퇴하는 종교화된 신앙으로주처 세속성의 삶을 신앙의 의미로 새롭게 분석한 본회퍼의 사상과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세계관의 패러다임

 

   기독교세계관의 신학적 계보는 네델란드의 신칼반주의에서 유래하는 카이퍼리안 사상체계이다. 기독교세계관은 역설적 이원론에 기초한 루터의 두왕국 세계관과 현저하게 대조되며 나아가 가톨릭의 종합주의 세계관이나 아나뱁티스트의 대립적 세계관과도 다르다. 기독교세계관은 신앙과 삶, 교회와 세상, 등 삶의 전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 다스림 안에서 통합한다. 기독교세계관은 어떤 피조물도, 어떤 삶의 영역도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으므로 그것들을 신앙의 빛 아래 통합하려고 한다. 기독교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이 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종말론적으로 변형되어 천국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변혁적 세계관이다. 기독교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역동적인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타락보다는 구원을 구원보다는 창조에 강조점을 둔다. 물론 타락의 심각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타락의 비관성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구속의 감격에만 머물러 있지도 읺으며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의 회복을 강조한다. 이점에 대해 존 볼트는 구원은 창조로부터 도피나 상승이 아니라 창조의 회복이라고 말했으며 낸시 피어시는 타락을 너무 강조하면 비관주의와 부정주의로 흐르게 되고 구속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승리주의와 무사안일주의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러한 창조중심적 도식체계는 신칼빈주의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이다.

 

   기독교세계관에서 문화명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부여받은 창조명령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문화와 역사의 발전을 행해 진행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응급처방으로 구속이라는 방식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문화와 역사의 발전과 완성을 향해 지음받았기에 그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는 구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세계관은 타락을 설명하면서 구조와 방향을 구분하여 말한다. 구조란 창조의 질서로서 사물의 불변적 창조구조를 말한다. 구조는 창조의 법, 즉 창조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근거를 둔다. 방향은 타락으로 말미암은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말한다. 기독교세계관은 타락에서 구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선한 것을 존재하며 단지 방향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에서 구속은 방향의 구속이지 구조의 구속이 아니다. 타락으로 왜곡되고 변질된 방향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바로잡히고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세게관의 출발점은 인간의 타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이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손상되고  왜곡된 것이다.  타락이란 방향의 왜곡이지 구조의 상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게관이 말하는 구속은 타락으로 왜곡된 방향을 바로잡는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 영혼의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창조만큼 크고 광범위한 것으로서 창조의 선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세계관은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에 만연한 세상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세상을 창조해가며 더 나은 창조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에서 세상을 긍정하고 타락으로 드리운 저주를 없애며 샬롬이 증진되는 천국을 이 땅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은 종말론적 구속이 가져오는 미래 천국의 소망에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만물의 구속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창조세계의 변혁을 위해 헌신하는 역동성을 제시한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근거한 기독교사회형성론이다. 이는 그리스도는 종교영역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님이 되셔야 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카이퍼리안의 전통에서 형성된 기독교세계관은 종교와 삶을 분리하고나 영적인 구확과 세속적 구확을 분할하는 것을 거부하며 삶의 모든 영역과 피조물 전체를 그리스도 한 분의 통치와 그의 주재권 아래 두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세계관은 분리모델의 왜소성과 적응모델의 이중성과 타협성을 극복하면서 현실영역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 참여를 촉구한다. 기독교세계관의 사회형성론은 중세의 가톨릭 사회이론처럼 국가과 세속실서가 교회와 통합되어 크리스텐돔을 구축하는 "영역종합론"도 아니고, 루터파의 두왕국론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을 종교영역에만 국한하여 세속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세속의 자율권으로 양도하는 "영역공존론"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편주권 사상을 원리로 하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본래의 규범적 원리 곧 창조질서에 의해 개현되어야 한다는 "영역주권론"이다. 그래서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기독교세계관의 초점은 교리나 교회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세계의 문제에 있다.  기독교세계관의 뿌리인 신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론을 구원론과 종말론으로 연결시킨다. 신칼빈주의적 관점에서 구원이란 인격적 차원의 죄용서, 칭의, 중생만아 아니라 초인격적인 구조의 구속과 만물의 회복을 향한 우주적 차원의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개인을 넘어 사회, 문화, 구조마저 변형하는 구속이며 새창조를 향한 구원이며 종말의 실재를 앞당기는 선취적 구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변형적 구원론은 당연히 세계형성적 책임윤리로 연결되는 바, 이것이 신칼빈주의 세계관의 토대임을 주목해야 한다.

 

 

일반은총론(common grace)

 

   창조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세계관의 이론적 토대는 일반은총론이다. 일반은총이란 성령의 일반사역으로서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에세 개방된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은총이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일반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과 도덕, 문화, 역사가 유지되고 보존된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퇴거하거나 중단되지 않고 여전히 그 창조세계를 향한 섭리적 통치를 진행해 나가신다는 것이 바로 일반은총론인데, 이것은 신킬빈주의 세계관의 핵심 교의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일반은총을 강조한 이유는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그의 확신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을 통해서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므로 신자는 특별은총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반은총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은 칼빈에게 거술러 올라가지만 칼빈이 일반은총을 이 세상에서의 죄의 억제라는 소극적 기능으로 이해한데 바해 카이퍼는 이 세상에서 일반은총으로 형성된 인간의 문화적 산물이 미래의 영광의 나라로 편입된다는 더욱 적극적인 이해를 이끌어 내었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은 타락이전의 본래적 창조능력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는 영속적 작용과 진보적 작용이 있다고 설명한다. 전자가 죄를 통제하고 억제하는 작용이라면 후자는 인류문화의 발전과 진보를 촉진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이자만 후자는 인간을 그 사역의 도구와 동역자로 삼는 협력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동역없이 죄를 통제하시지만 인간 문명의 발전과 진보는 인간의 노력, 투쟁, 발명, 협력, 독창성이 발휘되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카이퍼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시므로 그의 통치는 교회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창조세계 전체에 미친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그리스는 구속의 중보자이실 뿐 아니라 창조의 중보자이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조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일반은총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왕적통치를 일반은총과 연결시킨다.

 

  카이퍼는 문화는 역사속에서 형성되어 가는데 인간은 역사 속에서 창조세계의 잠재능력을 개현시녀 나간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는 진보와 발전을 향해 진행하며 이런 진보와 발전은 일반은총의 혜택일 뿐 아니라 복음전파를 위한 특별은총의 도구가 된다고 보는 진보적 낙관주의 역사관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카이퍼는 현세적 문화의 업적들이 미래 천국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세적 문화의 업적들은 잠재적 씨앗이나 문화의 본질만이 보존되며 미래의 하나님나라에서는 그것이 발아 성정하여 완전하고 새로운 형태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신칼빈주의적 종말론은 현세적 삶과 역사속에서 인간의 문화활동에 대한 비관적 태도를 유발하는 세계폐기의 종말론이 아니라 미래 천국에 이르가까지 현세 문화의 계발과 발전을 향한 참여와 활동을 추동하는 세계변형의 종말론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영역주권론(sphere sovereignty)

 

  카이퍼가 주창한 영역주권론이란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모든 다양한 영역속에 각각의 고유한 주권을 위임하시어 각각의 영역들이 그 고유한 영역주권의 빕질서에 의하여 유지되도록 하셨다는 주장이다.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정립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고유한 우주적 법질서를 부여하셨는데 모든 피조물은 각각의 고유한 영역 안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우주적 법칙들에 다스림을 받는다는 점에서 종속성의 측면과 함께 침해되지 않는 고유한 자기 법칙성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교회,국가, 학교, 학문, 기업 등 삶의 모든 영역에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유의 법질서인 영역주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부가 학문이나 교회에 간섭해서는 안되며 교회 또한 국가나 학문의 문제를 결정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루터의 두왕국론이 세상나라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게 하여 종교와 국가가 각각 자율성을 확보하게 하였다면 영역주권론은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 사이의 영역의 고유성과 기능적 독립성을 규정함으로써 다원주의 사회에서 영역의 분화를 통하여 각 영역의 조화와 균형을 촉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예베르트에 의하면 역사의 진보는 미분화의 형태에서 분화된 방향으로 전개됨으로써 창조세계의 잠재력이 실현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창조의 법에 따라서 각각의 고유한 특성이 더욱 드러나고 펼쳐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명령의 역사적 실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역사적 과제는 분화된 영역속에서 각각의 영역이 그 고유한 규범적 본성을 실현하도록 도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영역이 다른 영역에 의해 지배되거나 특정 영역의 지나친 확장은 창조질서의 분화에 해롭다고 주장한다.

 

   영역주권론은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이 삶의 전 영역에 미쳐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주권을 중심으로 한 일원주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삶의 각 영역은 서로 침해 받을 수 없는 고유한 주권에 따라서 분화와 개현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다원주의 사회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역주권론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피조세계 전체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신주권중신적 사고만이 아니라 종교,정체, 경제 등 삶의 모든 영역의 유기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사고가 동시에 함축된 것이라고 평가된다.  영역주권론은 창조계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의 실현이라는 원리를 기초로 하면서도 사회내의 제 영역간의 주권의 독립성을 설정함으로써 세속화 과정에 있는 근대유럽의 다원주의 사회론의 틀을 제시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영역주권론은 중세적 크리스텐돔의 복고를 꿈꾸는 전근대적 사회이론이 아니라 근대적 다원사회에서 종교와 삶의 제 영역들 사이에서 상호존중과 포용성을 보장하는 근대적 의미의 사회이론인 것이다.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평가와 비판

 

   기독교세계관은 한국교회가 이원론적 세계관의 포섭되어 있을 때는 이원론을 급곡하기 위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세속화적 세계관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다. 한국교회는 세속화 과정을 거쳐 이미 초세상적 초월의 구원보다 창조의 현재를 긍정하는 현세긍정적이 되었고 관념적 내향주의보다는 유뮬론적 행복주의로 기울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적세계관은 더이상 강력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 더구나 기독교적세계관은 모든 창조가 선한다고 고백하는데 그렇다면 세속화된 교회에서 창조에 대한 긍정은 오히려 적응주의적 기독교를 양산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온 세상과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독교세계관은 세계변혁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와 신정정치적 승리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내재해 있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에는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라는 두개의 영역이 존재하지 앟으며 삶의 전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있으므로 어떤 것도 그리스도 밖에 존립할 수 없다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점이 기독교세계관의 논리안에 과도한 은총의 승리주의가 내재해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의 왕적통치론을 문자 그대로 현실세계에 적용하려고 할 때 이갓은 기독교의  세상 지배의 원리로 차용될 수 있고 타종교나 타영역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 그리스도의 왕적통치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이지 기독교의 세계지배나 교회의 세상 통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은총의 과도한 강조는 구속은총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일반은총론은 창조를  강조하는 기독교세계관의 논리체계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도 되지만 일반은총이 과도하게 강조되면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긴급성의 약화를 가져온다. 창조세계 안에서 구속은 완료형이 아니고 셰게현실은 여전히 죄와 구속의 갈등 안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서의 세상만 말할 것이 아니라 선하게 창조된 세상의 심각한 타락의 실체를 인식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 적응형 기독교 패러다임 시대에는 죄와 타락의 심각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일반은총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창조중심의 신학체계는 세상문화와 사회질서의 타락된 실상을 심각하게 보기 보다는 창조현실을 긍정함으로써 현세적 삶이 주는 번영과 풍요, 유물론적 행복주의, 건강과 성공 등 세속적 가치를 일반은총의 결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원론적 세계관이 통용되던 분리형 패러다임에서는 신칼반주의 세계관이 이원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지만 이미 세속화된 적응형 패러다임에서는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 구원과 복지, 복음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를 구분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신칼빈주의 세계관은 세계 전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추구함으로써 기독교사회 형성의 주요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교회에 소개된 신칼반주의는 사회구조와 사화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변혁원리로는 그다지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거나 현실정치 영역에 적용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초기부터 기독교 정치운동이나 사회변혁 운동에 큰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원류인 신칼반주의가 정치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국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비정치화 현상은 기독교세계관의 수용주체들이 신학적 사고의 편협한 성격과 신킬반주의의 사화변혁적 측면에 대한 미온적인 이해에 기인한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기독교세계관 운동에서 정치를 퇴각시킨 한국의 기독교세계관운동은 그 강조점을 일상생활 신학이나 기독교 문화, 학문운동 등에 초첨을 둔 결과 사회변혁을 위한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사실 신칼빈주의 사상에서 영역주권론은 국가와 정치를 비롯한 삶의 전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제 영역간의 관계를 다루면서 특히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정치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세계관을 수용한 주체들은 국가와 관련한 정치신학적 담론은 비껴가면서 문화 영여과 일상생활의 영역을 중심으로 다르어 나감으로써 기독교세계관의 비정치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세계관은 신앙과 삶의 통합을 꿈구는 이들에게 필요한 기독교 사상으로서 소중한 유산이다. 오날날 한국교회의 과제는 개인구원과 교회주의를 넘어 기독교신앙의 공공성을 회복해야하는 일이다. 사적종교로서의 복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의 본질이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삶에 전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실천적 과제를 역사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 신칼빈주의 세계관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닐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독교세계관의 바른 방향과 적용이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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