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리처드 니버의 생애
인물별/리처드니버
2019-09-17 21:22:38
헬무트 리처드 니버의 생애
1. 니버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영향력 아래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니버도 자신의 교단이 미국 문화의 본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내의 분열은 신학적 차이나 교단적 구조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경제적인 문화구조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문화에 대한 그의 개방적 성향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열매 맺기 시작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하면 이 세상과 관련지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니버는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신학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로서 교회의 갱신을 주창한 바 있다. 물론 니버가 주창한 교회의 개혁은 개혁 자체를 위한 개혁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그 본분에 해당하는 가능을 담당하기 위해 신앙의 통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개혁이었다.
2. 니버는 성경의 지혜가 현대적 사고와 문화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개신교도들의 확신을 공유했다. 니버는 과학교육과 종교교육의 관심은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과학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견해를 유지했다. 혁명적인 과학적 진보를 깊이 인식했던 니버는 기독교의 메시지도 “재상징화”의 과정을 밞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단순한 재번역이 아니라 현대적인 사고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재해석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3. 이 세상에 대한 신앙의 참여라는 측면에서 자유주의에 동조한 니버였지만 그가 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인간적인 가치 척도에 따라서 판단하는 자유주의의 치명적 약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니버는 교회가 세상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복음운동의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했지만, 이 운동 안에서 하나님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니버는 사회복음운동은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앙의 토대위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버는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신학적인 규제를 가능케 하는 대표적인 신학적 확신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바르트의 확신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바르트의 실재론을 통해 트뢸치의 관념론과의 신학적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니버는 바르트의 계시 실증주의에도 만족하지 않고 슐라이어마허는 트뢸치가 강조하는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4. 니버가 볼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부정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상대성을 어떻게 관련짓거나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니버는 “철저한 유신론”을 통해 그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니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다”라는 두 개의 명제로서 대표되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이 관계하시지 않는 부분은 없으며,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서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이 니버의 신중심주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이 된다면 문화의 어떤 유형에서도 선함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아무리 신앙적으로 보이는 문화의 유형이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떠나서 선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5. 니버는 그의 형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비판하면서 라인홀드 니버의 하나님은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여전히 숨겨진 분으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리처드 니버의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현존하시는 나타나신 하나님이었다. 니버는 일생을 통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역사 안에서의 사회적 책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통전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했다. 그리스도와 문화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통일성과 문화적 응답의 다양성을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이해하며 조화시키려 했던 역사적 모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머릿말: 기독교윤리의 유형들
2019-09-01 17:27:04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머리말: 기독교 윤리의 유형들
유형론적 방법과 발생론적 방법
1. 발생론적 방법은 단 하나의 아이디어나 원칙이 어떤 개별적 현상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발생론적 척도는 발달의 정도에 따라 나누며, 개별적 사건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의 수단이 된다.
2. 윤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분야에서 유형론적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은 개별적 사건을 이해하는 면에서 발생론적 방법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유형론은 많은 요소를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그래서 유형론은 단 하나의 기독교 윤리만 있다고 가정하는 입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유형론은 가치의 척도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의 신학적 유형들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과 성경을 통해 알려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이성을 통해 알려진 문화에 내재된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양축 사이에서 움직인다. 전자가 교회와 성경을 통해 매개된다면 후자는 문화적 공동체와 그 지혜를 통해 매개된다. 기독교 윤리의 여러 유형을 분석하려면 이 두 갈래가 서로 어떻게 결합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2.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윤리의 주요 유형은 (1)새로운 법 유형 (2)자연법 유형(3) 종합적 유형 (4) 이원론적 유형 (5) 전환론적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참고)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 기독교나 재세례파의 경우에 보듯이 기독교가 소수집단으로 존재할 때는 분리유형을 보이다가 점점 교세가 증가하면서 역설형을 거쳐 중세 기독교에서 보듯이 종합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성의 시대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 이후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에서는 일치유형으로 나아갔다. 일치유형에서 기독교는 윤리 종교화될 위험성이 있다.
새로운 법 유형(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1. 새로운 법 유형은 유대문화를 통해 알려진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법 사이의 뚜렷한 반립관계를 전제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본개념은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법을 가진 새로운 백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문화(스토아철학)에서 도입한 원리들에 입각해 그 법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 채지 못했다.
2. 이 유형은 도덕법의 내용을 그리스도에게서 끌어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가치관만이 타당하고 이 윤리를 가진 공동체는 당연히 잘못된 윤리를 가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삶은 내세 지향적 방향성을 지니게 되고 종파적 특징을 띠게 된다. 초기 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 중세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근대의 레오 톨스토이가 이 유형의 대표적 대변자로 보인다.
(참고)
1. 이 유형의 대표적 사례는 초기 기독교와 재세례파이다. 이 유형의 신학적 입장은 이원론적 분리주의라 할 것이다. 아 유형의 특징은 교회와 세상을 선명하게 구분하여 양자를 비타협적이고 대립적인 구조로 보는 도피적 반문화주의다. 이런 유형에서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교회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이원론적 삶의 태도가 나타나며 부정적으로는 구조선 신앙, 방주신앙의 모습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분리유형은 창조세계의 선함이나 구속을 통한 세상의 변혁보다는 세상의 전적타락에 강하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을 장차 멸망할 도성이며 세상의 삶은 임시적이고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고 본다. 이 유형에서 신적 소명은 세상으로부터 나오라는 부름이지 세상으로 향하라는 부름은 아니다. 그래서 직업 활동과 일상적 삶은 종교적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다.
2. 하워드 요더는 분리 유형이 반드시 도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투쟁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변혁모델을 내세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세상을 긍정함으로서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세상과 더불어 사는 기독교 윤리 운동 정도로 변질된데 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세속화된 경우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분리유형은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대립, 구별의 의미가 강하다.
자연법 유형(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1. 이 유형은 새로운 법 유형의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 유형은 문화적 유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문화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고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문화 사회의 일원으로서 선한 것과 옳은 것을 해석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가치관과 규범을 자신의 문화가 지닌 이성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또한 이들은 교회를 문화와 융합하고 문화적 선과 법을 기독교적 선이나 법과 동일시하거나, 문화적 목표와 규범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이 유형이 새로운 법 유형과 유사한 점은 이들도 일련의 규범 아래서 살며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진력한다는 점이다.
2. 이 유형은 복음의 권고와 가치관을 사회의 가치관과 융합하려 한다. 그래서 예수의 계명을 이성의 법이나 자연법의 다른 형태로 간주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인간 문화가 지닌 자연적, 사회적 존재에게 필요한 최상의 가치관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본다. 이들은 복음적 가치관과 요구를 문화적 견지에서 해석하므로 복음에 대해 아주 선택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복음의 요소들 가운데 문화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들을 먼저 선택하고 그것들을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3. 이들은 문화 윤리의 요소들 가운데 신약성경과 가장 부합하는 것을 규범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니까 이 유형은 자연법이나 상식적 윤리를 단순히 재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이상형을 강조하며, 그 이상형과 기독교의 본질 사이에 전혀 차별성이 없다고 본다.
4. 이 유형의 특징은 조화와 적응에 있다. 그 전략은 분리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이 아니라 개량주의적이다. 또한 다른 세계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 시대의 최상의 부분이 연장된 것으로 본다.
5. 초기 기독교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 유형에 속한다. 그에게 헬레니즘의 이상주의와 기독교의 하나님의 사랑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클레멘스의 윤리에 담긴 정신과 내용은 모두 교회가 아니라 주변 문화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 내용만큼은 문화적으로 해석된 복음에 비추어 선택된 것이다. 중세의 아벨라르도 이 유형에 속하는데, 그는 이성으로 알게 되는 자연법이 복음의 윤리의 기본토대를 이룬다고 보았다.
6. 이 유형의 가장 뚜렷한 본보기는 근대 자유주의 기독교이다.
- 그 특징은 윤리가 신학의 바탕을 이룬다는데 있다. 슐라이어마허나 리츨은 기독교 윤리와 문화 윤리가 완전히 종합된 형태를 보여준다.
- 이 유형의 지배적인 성향은 도덕의식을 계시나 신앙보다 앞선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 도덕의식이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이들은 도덕의식의 제1원리를 찾고, 이 원리들을 복음의 요구사항과 가치관을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 자유주의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실현으로 보며, 그 나라를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개인들의 회합, 혹은 자유, 평등, 박애가 다스리는 나라와 같이 일종의 문화적 이상형으로 규정한다.
- 자유주의는 사랑의 규범을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계명으로 선택하되, 그것을 현세에서 도달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복음이 지닌 종말론적 견지는 간과하고 사람의 미덕을 그저 필수 요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자유주의는 개인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근대 사회의 가치관을 수용하며, 그래서 생명 혹은 영혼의 가치에 관한 복음서의 진술들을 이런 견지에서 해석한다. 이들은 복음의 윤리를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할 뿐 아니라 문화적 윤리의 요소들 가운데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선택한다.
(참고)
이 유형은 기독교를 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고 기독교를 문화와 일치시키고 조화시키는 유형인데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나 자유주의 신학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치유형은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 시민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중간에 위치한 유형들
1. 새로운 법 유형이나 자연법 유형은 모두 일련의 규범 아래서 살며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진력한다. 그러나 그 중간에 위치한 유형들은 일종의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2. 중간 유형들은 신적인 가치관을 교회 안에서와 문화 안에서 혹은 영원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며, 신적인 명령은 그리스도(성경, 교회)와 자연(이성, 문화)의 두 가지 매체를 통해 온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법이나 자연법 유형은 한 세계를 중심으로 삼는데 반해(물론 그 세계는 서로 다르지만), 중간 유형들은 두 세계 중심적이다.
3. 이들은 이 두 쌍의 가치들이나 명령들은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를 통해 (흡수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어느 한 쌍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조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4. 이 중간 유형들 사이의 차별성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두 쌍의 가치들이나 명령들)을 함께 묶는 방법상의 차이로 발생한다. 그것들은 크게 세 집단- 종합적(조형적), 이원론적(왕복운동), 전환론적으로 나눌 수 있다.
A. 종합적(조형적) 유형 :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1. 초대교회에서 이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은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거대한 사회조직은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다.
2. 이 유형은 자연의 명령과 복음의 명령을 모두 신적인 명령으로 간주하되, 둘 사이에 부분적이고 진정한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법은 부분적으로 자연법의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그 가운데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3. 그러나 이 불연속성에는 실질적인 대립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문화를 통해 알려진 자연의 가치관과 명령은 복음의 가치관과 명령을 매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수용하도록 준비시킨다. 이 유형은 자연-이성의 가치관과 명령이 인간의 노력으로 실현될 수 있고 또 복음의 명령을 위한 준비작업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실제적인 강조점을 둔다. 그러나 이 유형이 자연법 유형과는 서로 다른 별개의 유형임이 분명하다.
4. 이것을 조형적 유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쌍(복음과 자연)의 가치관과 명령들을 서로 동일한 차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복음의 명령들은 문화에 속한 이들에게 필요한 지침을 공급하지 않으며 자연의 명령들은 하나님과 및 동료 인간과 영적관계를 맺은 이들에게 필요한 지참이나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참고)
종합유형은 신앙과 이성, 자연과 은총, 철학과 신학, 교회와 국가를 종합하려는 모델로서 대표적인 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이 유형은 문화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특징으로 하는데 중세의 크리스텐돔, 로마카톨릭교, 일반은총이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B. 이원론적(왕복운동) 유형 :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1. 이는 복음의 윤리를 급진적 형태 그대로 수용하지 자연적인 지성에 타당하게 보이려고 재해석하지 않는다. 또 조형적 유형의 경우처럼 복음의 윤리를 미래에만 국한한다든지 영적인 귀족층이나 영적인 차원에 국한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
2. 이는 자연과 문화의 요구사항(예: 출산, 자기보존, 질서유지) 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요구로 수용한다.
3. 복음의 가치관과 명령들, 그리고 문화의 가치관과 명령들은 서로 번역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4.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를 실현하지 못한 죄를 사람에게 깨우쳐 주고, 자연과 문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이 단지 복음의 요구만 실현하고 자연과 문화를 내버리는 것이 죄임을 깨닫게 해준다.
5. 영과 육으로서, 초월적 인격과 경험적 개인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요 사회 속에 있는 존재로서, 본질과 실존으로서, 인간은 이중적 존재다. 하나님은 이중적 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자비, 세상에 대한 분노와 형벌. 세상은 이중적 장소다. 창조된 것이자 타락한 곳, 좋은 곳이자 부패한 곳. 이런 식으로 현 상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6. 마르틴 루터가 단연코 이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에른스트 트뢸치, 라인홀드 니버, 고가르텐, 에밀 브루너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루터는 복음의 명령과 가치관은 도덕법과 사회법의 기능과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문화-자연적 세계의 명령들은 창조세계의 타락된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타락된 창조세계를 위한 질서라고 주장한다.
(참고)
1. 역설 유형은 그리스도는 문화와 섞이거나 일치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신다고 본다. 하나님은 교회를 은혜로 다스리시며(은혜의 왕국) 세상은 권능으로 다스리신다.(권능의 왕국) 루터의 “두 왕국론”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유형은 세상과 교회가 서로 다른 두 원리 아래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현실적응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세상 안에 공존하면서 삶의 긴장을 덜어주는 유익은 있지만 세상과 타협하고 순응하여 세상과 동일화될 위험을 안고 있다.
2. 이 유형에서 신앙과 이성, 철학과 신학은 대립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초기교회의 분리유형으로 복귀도 아니고, 중세의 종합유형의 계승도 아닌, 교회와 국가의 두 영역을 구분하여 두 영역의 공존과 병립을 인정하는 두 질서, 두 영역의 사회형성 이론으로 평가된다. 한 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세우시고 각각의 왕국을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시는데, 그리스도의 왕국은 은총과 자비로, 그리고 세상의 왕국은 진노와 형벌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나라, 하늘의 나라이지만 세상의 왕국은 시간의 나라, 장점적인 나라, 지상의 정부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복음과 말씀으로 인간의 내면적 영역을 다스린다면 세상 왕국은 율법과 강제력으로 외면적 영역을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구원을 목표로 하고 세상 왕국은 유지와 보존을 목표로 한다. 루터는 이 두 영역이 서로 섞이거나 혼동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두 통치와 두 질서 속에 가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실존방식을 잘 설명해주며 이중 윤리의 합법성을 열어주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다.
3. 이 유형은 세상의 삶에 긍정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세상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일상의 삶이 소중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긴장하고 갈등하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신앙으로 방식으로 사랑과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면 되고 세상 나라에서는 세상의 법과 권력의 강제력 아래 살아가면 된다. 이 두 나라는 서로 섞이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세상 왕국의 질서로 살아가서도 안 되고, 반대로 세상 왕국에서 그리스도 왕국의 질서로 살아서도 안 된다. 두 왕국론에 의하면 교회는 영혼의 구원만을 관장하며 세속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군주들에게 자율적이며 합법적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불의한 통치자나 악법에 대한 저항권이 무력화되고 기성 체제를 유지, 보전하는 숙명적 묵종을 초래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이원화하여 한 영역을 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으로 남겨둠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이중적이 되며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역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유형은 교회 밖의 영역을 긍정하고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공존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현대와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유용한 유형으로 평가된다.
C. 전환론적 유형(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1. 이성으로 파악하는 자연법은 자연에 의해 매개되는 진정한 하나님의 법이 아니고 타락한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법이다. 이 측면에서 종합적 유형과 구별된다. 하지만 그 명령들은 타락한 질서를 위한 명령이 아니라 참된 질서로부터 나오는 타락한 명령들이다. 이 축면에서 이원론적 유형과 구별된다.
2.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가치들은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가치들이지 세상의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들은 이성과 문화에 의해 혼란스러워졌고 하나님에게서 동떨어져 있다.
3. 복음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명령들은 자연과 이성에서 나오는 명령들을 대치하지 않으며 복음을 통해 파악되는 가치들도 이성으로 파악되는 가치들을 대치하지 않는다. 복음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명령과 가치들이야말로 진정한 궁극적 명령이요 가치들이다.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의 발견과 그분을 통한 궁극적 계명의 수용은 자연-문화에 내재된 타락된 질서를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고 자연의 명령들을 재해석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5. 이 유형은 복음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법 유형과 비슷하지만 복음의 기능은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보다는 기존 사회를 전환시키는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전환은 도덕적 성격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 급진적 혁명을 의미한다. 이 측면에서 자연법 유형과 구별된다.
6. 이 유형에 속한 대표적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들 수 있으며 칼뱅이나 조나단 에드워즈, 대체로 칼 바르트도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
1. 변혁유형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주님이시므로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고 본다. 요더와 하우어워스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여 세상과 분리되어 교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세상을 변혁하는 진정한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유형의 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에 기초한 문화변혁 신학이다.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의 전 포괄적 구속과 다스림에 근거한 역사참여와 문화변혁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자칫 승리주의나 정복주의로 오도될 위험이 있다.
2.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적, 개인적, 종교적 영역에 국한될 수 없으며 창조세계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새 창조를 향해 나아간다는 이론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악한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이므로 현실구조를 변혁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본다.
3. 루터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신앙의 영역에 제한한데 반해 칼빈은 세속국가의 영역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불의한 세속 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말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의 저항권을 인정했다. 칼뱅주의 전통에서는 세속영역의 신학적 의미를 인정하여 세속정치에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모든 영역에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에 근거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이 그리스도인의 이중윤리, 교회의 세속화, 세상과의 타협 등의 위험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은 신정주의적, 승리주의적 위험이 있다.
1장 늘 제기되는 문제
2019-09-01 17:27:52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1장 늘 제기되는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1. 오늘날 기독교와 문명의 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측면에서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 논쟁은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는 만큼 무척 혼란스러운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먼저 기독교와 문화를 둘러싼 문제를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좋다. 이 난감한 문제는 늘 있었던 것으로 기독교 역사 내내 언제나 제기되었던 그야말로 영속적인 문제다. 그리고 또 상기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와 줄곧 씨름하면서 단 하나의 해답만 내놓은 게 아니고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싸우는 교회의 여러 전략적 국면을 보여주는 복수의 전형적인 해답을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전형적인 대답들을 소개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기독교 집단들이 서로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작업의 배후에 있는 신념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역사와 인생 전체를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시되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면서도 그들의 부분적인 통찰과 필연적인 갈등을 사용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는 확신이다.
2.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과거 이천년이 이 문제를 둘러싼 온갖 씨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뿐 아니라 그리스인, 로마인, 중세인과 근대인, 서양인과 동양인 등 그리스도가 자신의 문화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그분을 배척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건들은 지극히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질적인 비판가들 사이에도 상당한 정도의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두 복음이 지닌 동일한 요소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복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변호하기 위해 비슷한 논리를 편다.
3. 이 논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주장은 기번이 로마인과 관련하여 진술하듯이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존재양식을 경멸하고 불멸성을 신뢰하는데서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로마의 옹호자들과 현대문명을 찬양하는 자들, 옛 질서의 보존자들과 과격한 혁명주의자들, 문화 낙관론자들과 비관론자들 모두에게 좌절감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난감한 태도인 이유는, 얼핏 보기에 현재의 존재양식을 경멸하는 것 같으면서도 현존하는 인간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고, 인간의 모든 업적이 파멸에 처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절망감이 아니라 담대한 믿음을 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문화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소망하게 함으로써, 불안정한 대규모의 사회적 유산을 보존하려고 혹은 개혁하려고 쉴 새 없이 일하는 동기를 앗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 여러 세대에 걸쳐 그리스도에게 반기를 든 또 하나의 논리는 그분이 인간들에게 인간적 업적을 쌓아올리도록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도록 유혹했다는 것이다. 현대 문화철학자들은 이처럼 하나님만 의존하는 신앙은 인간의 노력만 강조하는 문화적 윤리와 이율배반적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를 천국에 대한 소망만큼 강력한 수면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인을 정숙주의로 비난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그분을 믿되 만일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은혜에 대한 불신을 은근히 표현한다.
5. 그리스도와 교회를 고발하는 세 번째 고소장에는 그들이 편협하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문명이 기독교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마가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들에 대해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조롱하는 언사를 퍼부었다. 로마는 사람들이 무슨 종교를 따르든지 관용적이었지만 시저에 대한 충성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문화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오늘날과 같은 관용적인 문화가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는 현상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종교적이란 말을 공인된 신성한 기관이 집행하는 특정한 의식에 한정하거나 종교를 경제, 예술, 과학, 정치와 같은 여러 관심사의 하나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문화가 기독교의 일신론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종교가 정치나 사업에 간섭하면 안 된다든가 기독교는 타종교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식의 권고로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주장 일체가 그런 공적인 영역들, 곧 이른바 가치라고 불리는 다른 신들이 다스리는 영역들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함축된 고소장은 사실 고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그들을 문화의 적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럿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용서는 정의나 자유인의 도덕적 책임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가르침은 사회생활상의 의무와 함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비천한 자를 치켜세우는 기독교는 한편으론 귀족들과 니체주의자들에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옹호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그리스도의 지혜가 현명한자들에게는 닫혀 있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자들에게만 열려있다는 주장은 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거나 그들의 조롱을 불러일으킨다.
6.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런 공격들이 문제를 강력이 제기하고 그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면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문제는 그들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집단과 반기독교 집단이 만나는 곳에서 싸움과 타협, 승리와 화해가 공공연하게 나타나곤 하지만, 이보다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논쟁이 더 자주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주의의 정착, 위대한 신조들의 정립, 교황제도 도입, 수도원 운동,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주의 ,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부흥운동과 계몽주의,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주의 등은 이 영속적인 문제가 교회 역사에 등장한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 문제는 모든 시대에 등장할 뿐 아니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때로는 이성과 계시의 문제로 종교와 과학의 문제로, 자연법과 신법의 문제로, 국가와 교회의 문제로, 무저항과 강제력의 문제로, 각각 그 면모를 드러낸다.
7. 이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문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교회, 신조, 윤리, 사조 등 어느 것으로 정의하든지 기독교 자체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양축 사이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은 이 두 권위의 관계가 문제인 셈이다. 기독교가 이성과 계시의 문제를 다룰 때 궁극적으로 의문시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와, 문화를 지배하는 이성의 관계다. 기독교가 이성적 윤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서로 구별하거나 대조하거나 묶으려고 애쓸 때, 결국 옳고 그른 것을 문화적으로 규정하는 문제와 선악을 그리스도의 조명을 받아 판단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공동체적 믿음이 워낙 다양하고 그분의 본성에 대한 해석이 각양각색이라서 기독교가 믿는 그리스도가 정말 단 한분뿐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기독교 안에 있다고 해서 가장 근본적인 통일성, 곧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한 인물로서 그 가르침과 고난이 일관된 존재라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최종 권위로 받아들이는 그분은 어디까지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 예수 그리스도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 역사적인 인물, 곧 우리가 기억하고 몸담은 이 역사에 속해 있고 또 현재로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양향을 미치는 그 역사에 속한 인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경험하고 묘사하는 방식이 아무리 각양각색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권위고, 이런 다양한 권위를 행사하는 그분이 바로 그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점이다.
2. 그리스도의 미덕이란 한편으로는 그분이 몸소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탁월한 성품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을 일컫는다. 종교적 자유주의가 다른 모든 미덕보다 더 크게 확대한 그리스도의 미덕은 사랑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잘 검토해보면 사랑의 윤리라는 예수 윤리의 절대성과 완전성과 같은 표현이 과연 예수를 잘 묘사하는 것인지 무척 의심스럽다. 예수의 성품이 지닌 그리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미덕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을 위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사랑은 분노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분노의 동기도 될 수 있다. 예수가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 주신 이웃사랑이라는 미덕은 그보다 우선하는 하나님 사랑에서 떼어 놓으면 결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나 사람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저 보편적인 박애 장도가 아니라 결정적인 신적 아가페의 행위임을 제자들은 분명히 알았다.
3. 이처럼 사랑의 미덕을 크게 확대한 자유주의에 이어서 그분을 희망의 인물로 보는 종말론적 해석들과 그분을 철저히 순종의 인물로 보는 실존주의적 해석이 등장했다. 또 그 이전에는 그분을 대표적 모범이자 믿음의 덕을 주는 분으로 보는 정통개신교가 있었고 그분의 위대한 겸손에 매료되었던 수도원운동도 있었다. 슈바이처를 필두로 한 종말론자들은 예수의 독특한 특징을 사랑이 아니라 장래에 대한 소망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종말론자들은 예수의 소망이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잊을 때가 많다. 예수에게 하나님나라는 만물의 행복한 상태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명백한 통치를 의미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은 장차 임할 그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가 일상적인 사건과 자연적인 사건을 통해 실현되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미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 실존주의자들은 그 선배들이 단 하나의 위대한 덕울 중심으로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을 묘사하려 했던 덕을 주심으로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을 묘사하려 했던 전통을 물려받아 파격적인 순종을 그 특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한 가지 미덕을 다른 모든 미덕을 이해하는 열쇠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 미덕을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미덕을 파격적으로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분리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초점을 두는 개신교의 입장과 그분의 겸손에 관심을 갖는 수도원 운동도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4. 이처럼 예수의 미덕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해서 그분의 성품과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쇠로 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각 미덕의 파격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문화에 걸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믿지 않고는 아들을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경배와 순종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분이 한 결같이 가리키는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지닌 도덕적 의미의 반쪽일 뿐이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사랑, 소망, 믿음, 순종, 겸손을 보여주어 하나님의 도덕적 아들임을 입증했으므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덕적 중재자인 셈이다. 이는 이중적 움직임으로 인간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또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들에게 나아가는 것, 세상으로부터 그 타자에게로, 또 그 타자로부터 세상에 나아가는 것, 일로부터 은혜로 또 은혜로부터 일로,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또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행사하는 그 능력과 풍기는 매력은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의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살아있는 인간이자 인간들과 함께 사는 하나님이라는 이중적 신분을 가진 아들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때로는 신학자들마저 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자신의 문화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잘 인식한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1. 우리가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룰 때 염두에 두는 문화는 인간 활동의 총체적 과정과 그 활동으로 인한 총체적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란 인간이 자연에다 덧붙이는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환경이다. 거기에는 언어, 습관, 관념, 신념, 관습, 사회조직, 물려받은 인공물, 기술적 과정, 가치관 등이 모두 포함된다.
문화는 인간의 사회생활과 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문화는 사람들이 물려받고 전수하는 사회적 유산이다. 사회생활로부터 나오지도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순전히 사적인 것은 문화에 속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사회생활은 언제나 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문화를 벗어날 수 없는데, 이는 자연의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고 원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2. 문화는 인간의 성취물이다, 문화에는 인간의 목적성과 노력이 담겨 있다는 면에서 자연과 구별된다. 사람이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의 설계와 수고가 담긴 것들이 문화다. 하지만 인간 이외의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거나 인간을 통해 오긴 했지만 의도하지 않았거나 통제가 없이 생긴 결과는 문화가 아니다.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과거의 인인간이 이룩한 업적이라면, 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아무도 자기편에서 노력하지 않고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이 손으로 만든 세계, 인간의 의도가 담긴 세계가 바로 문화의 세계다.
3. 이런 인간의 업적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세계는 곧 가치관의 세계다. 자연에 대해 가치와 관련된 질문을 던져야 할지 자연현상에 대해 자치판단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문화적 현상과 관련해서는 이런 의문이 결토 제기되지 않는다. 인간이 이미 만든 것과 현재 만드는 것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무엇이든 가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인간의 업적과 관련된 가치들은 주로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문화 활동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규정할 때는 스스로를 최고의 가치이자 다른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여기면서 시작한다. 이처럼 문화 활동에서 인간을 위한 유익이 압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인간 중심주의가 모두 배타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의 문화든 주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가치 실현에 관심을 갖지만, 인간이 실현하려는 그 유익이 반드시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들이 언제나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필요를 충족하려고 한다고 해서 모든 문화를 물질주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4. 목적의 구체적인 표현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문화 활동은 가치의 실현만큼이나 가치의 보존에도 관심을 갖는다. 한 세대 동안만 교육과 훈련을 폐지한다면 과거에 이룩했던 업적은 모조리 폐허로 변할 것이다. 관습이든 인공물이든, 사람이 보존 작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문화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5. 우리는 문화가 다원주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문화가 실현하려는 가치들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다. 많은 가치가 존재하는 부분적 이유는 다양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제도나 관습들에 구현된 가치들은 다수인데다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전형적인 대답들
1.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실재들이 이처럼 복잡한 만큼 기독교의 양심과 공동체 내에서 끝없는 대화가 오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자세로 사람들이 문화의 현세성과 다원성에 등을 돌리게 한다. 또한 문화는 과거의 많은 가치를 보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은혜에 의지하도록 권하는 그리스도를 배척한다.
2. 이런 와중에서 어느 지점에서 대화를 중단하고 약간의 질서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 이는 어떤 전형적인 대답들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기 보다 그 문제의 본질과 그 용어의 의미의 산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러싼 거창한 대화를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으며 그 논의의 결과도 파악할 수 있다. 그 전형적인 대답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나눠지는데, 그 중 셋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모두 그리스도와 문화를 구별하는 동시에 양자 모두를 긍정하는 중간 유형에 속한다.
3. 첫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 몸담은 사회가 어떤 관습을 갖든, 그 사회가 보존하는 업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는 그 문화와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자택일의 결정을 하도록 도전받는다.
4. 둘째 유형이 제시하는 답변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합의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자들은 예수를 인간 문화사의 위대한 영웅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가장 위대한 인간적 업적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인간이 열망하는 가치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도달한다고 믿으며 그리스도가 과거의 최상의 것을 확증해주고 문명을 합당한 목표로 인도해 준다고 생각한다.
5. 이 밖의 세 유형은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의 중간에 속한 유형들인데,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차이점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 둘을 어떤 식으로든 함께 묶어 보려고 시도한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이들 사이의 차별성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서로 묶어 보려는 방식에 있다.
6. 이 중간형에 속하는 첫 번째 유형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는 두 번째 유형과 다소 비슷하다. 그리스도를 문화적 열망의 완성이요, 참된 사회제도를 회복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형은 그리스도 안에는 문화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문화에 직접 기여하는 것도 아닌 그 무엇이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문화와 연속성이 있을뿐더러 불연속성도 있다는 것이다. 문화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므로 누구든 정말 그분께 도달하려면 커다란 도약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실로 문화에 속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문화 위의 존재이기도 하다.
7. 이 중간형에 속하는 두 번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이원성과 권위를 모두 인정하되 둘 사이의 대립관계도 받아들인다. 이 유형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평생 긴장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데, 그 긴장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두 권위 모두에 순종해야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세속 사회의 권위에 타협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사회제도에 대한 순종도 요구한다고 믿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 도덕에 종속된 존재로 여겨지며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에 속한 시민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문화가 양극화되고 긴장관계에 있다고 믿게 되면 그저 불안하고 죄 많은 인생을 살면서 역사 너머에 놓인 의롭게 될 그날만을 소망하게 된다.
8. 중간형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형은 첫 번째 유형이나 중간형의 두 번째 유형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이 타락했다고 믿고 그 타락상이 문화에도 반영될 뿐 아니라 대대로 전수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인간의 모든 제도 및 관습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첫 번째 유형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거나 중간형의 두 번째 유형처럼 역사 너머에 있는 구원만 바라보며 참고 견뎌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는 문화와 사회에서 분리된 인간이 아니라 문화에 사회에 몸담은 인간을 회심시키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문화가 없으며 자연도 없고 인간이 사회에 몸담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우상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전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9.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영속적 문제에 대한 여러 대답을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인위적인 시도임이 분명하다 사실 역사상의 어느 인물이나 집단도 어떤 유형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이처럼 유형론은 역사적으로는 부적절한 방법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영속적 문제를 붙들고 오랜 씨름을 하는 가운데 반복해서 등장했던 중요한 노선들을 주목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장점을 지녔다. 아울러 우리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으려 할 때 의미 있는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2장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2019-09-01 17:28:33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2장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새로운 백성과 “세상”
1.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첫 번째 견해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권위자로 인정하고 문화의 권위는 단호히 거부하는 비타협적 입장이다. 이 입장은 논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으로는 이 입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라는 성경적 원리에서 직접도출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연대기적으로는 이 입장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전형적인 태도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근거는 모두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이 대답이 교회역사상 아주 초창기에 나타난 것이라는 점과 다른 입장들 보다 더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2. 신약성경에서 이런 입장을 보여주는 책이 여기저기 있지만 아무 조건 없이 그것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은 새로운 법과 옛 법을 대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유대사회의 지도자들의 요구에도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명시적인 주장을 한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세상을 배척하는 면에서는 아주 과격하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는 상황을 고려하여 이 주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아마도 이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는 책은 요한일서일 것이다. 요한일서의 중심 주제는 사랑의 개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여기서 복음과 새로운 법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법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및 형제애 대한 사랑의 건너편에는 문화 사회에 대한 배척이 놓여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관계와 이 세상 사이에는 양자를 구분하는 뚜렷한 선이 그어져 있다.
4.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은 악한 세력 아래에 있기에 빛의 나라에 속한 시민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어둠의 영역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세상의 악한 세력의 일을 파괴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신자의 충성심은 세상을 배척하고 그리스도가 가져올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일서에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참여해 그것을 변화시킬 의무가 있다는 말도 없거니와 국가나 재산 자체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대목도 없다. 저자는 이 세상의 끝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권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저자는 현 상황에서 한시적인 문화에 신경 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충성하고 형제들에게 헌신하는 것만 필요하다고 여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5. 요한일서와 비슷한 태도가 주후2세기 다른 저술들에도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테르툴리아누스의 것이 가장 급진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기독교를 문화와 동떨어진 방식으로 기술하며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을 세상과 구분된 새로운 공동체, 별개의 공동체에서 사는 것으로 간주한다. 주후2세기 저술에 나오는 이런 진술의 밑바닥에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제3의 종족, 곧 새로운 백성이라는 신념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그 기저에 있는 근본 신념은 물론, 이 새로운 사회, 종족, 백성이 입법자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믿음이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지 않는 것은 모두 악의 지배하에 있다는 생각이 추론되었다. 주후2세기 저술에 나타난 이런 입장은 복음의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라 할지라도 다른 규칙에 의해 움직이며, 비기독교 문화의 경우에도 나름대로 덕과 악이 공존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 입장이 문화적 제도 안에 신적인 통치가 임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백성과 옛 사회 사이에,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순종과 무법 사이에 너무 뚜렷한 선을 그었다.
6. 초대교회 당시 이 유형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 테르툴리아누스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그분의 계명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엄격한 도덕률을 주장한다. 문화의 권위를 배척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태도는 상당히 급진적이다. 그는 신자가 갈등을 느끼는 것은 자연과의 관계가 아니라 문화와의 관계에서인데, 이는 죄가 주로 거하는 곳이 문화의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가 신자들의 일상사를 모두 쓸모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문화의 많은 것들이 이방종교와 연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과 법에 위반되는 생활양식을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자들의 정치참여나 군복무를 멀리하라고 권고할 분 아니라 철학과 예술 활동도 반대한다. 당시 일부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 간의 긍정적 관계를 보여주려고 애썼는데, 그는 그런 입장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런 입장이 스토아적 성분, 플라톤적 성분, 변증법적 성분이 섞인 얼룩진 기독교를 만들려는 시도로 간주하고 적극 반대했다.
문화를 배척하는 톨스토이
1. 초기 기독교에 등장했던 이런 노선은 중세 수도원 운동으로 이어졌다. 베네딕투스 규율로 대표되는 수도원 운동의 주류는 배타적 기독교의 전통을 견지했다. 개신교의 종파주의도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해 동일한 대답을 내놓았다. 16세기와 17세기에 세속화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많은 종파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극히 소수이다. 그 중에 이론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은 메노나이트 종파이며, 현대의 퀘이커 교도들도 그리스도를 문화의 대변인으로 보는 기독교에 크게 반기를 든 종파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집단과 종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문화에서 물러나고 세상에서의 책임을 모두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2.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이 입장이 그리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침내 다른 해답을 찾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고대의 테르툴리아누스만큼이나 완강하고 일관성 있게 급진적 입장을 견지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레오 톨스토이다. 그가 회심하게 된 계기는 예수가 한 일이 바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법을 준 것이고 그 법은 사물의 본성에 기초한다는 깨달음이었다. 톨스토이는 특히 마태복음5장에 나오는 새로운 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다섯 개의 명령으로 요약한 후, 그리스도께서 이 다섯 가지 법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세웠다고 믿었다.
3. 다른 사례들과 마찬 자기로 톨스토이의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헌신의 반대편에는 문화적 제도들에 대한 철저한 반대가 놓여 있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이런 제도들은 모두 복잡한 오류들로 이루어진 토대위에 세워진 것 같았다. 톨스토이에게 인간의 타락상이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한다는 생각은 테르툴리아누스보다 약한 것 같다. 그는 오히려 악이 인간 본성보다는 문화에 내재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는 의식적인 신념, 구체적 제도들, 사회적 관습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것들에서 물러나 수도사의 삶을 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법이란 깃발을 흔들며 문화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군의 길을 택한다.
4. 톨스토이에게 문화는 모든 국면이 고발대상이다. 국가, 교회, 경제 제도가 악의 요새지만, 철학과 과학과 예술도 정죄의 대상이 된다. 특히 그에게 선한 정부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적 의무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다. 충성의 맹세, 세금, 법적 소송, 군복무 등이 모두 그렇다. 국가와 기독교 신앙은 한 마디로 양립 불가능하다. 국가는 권력에 대한 집착과 폭력의 행사에 기초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인 사랑, 겸손, 무저항은 정치적 조치와 기관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교회를 스스로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기중심적 조직, 국가의 종, 폭력과 특권을 수호하는 조직, 불평등하고 재산을 중시하는 조직, 복음을 가리고 왜곡하는 단체로 본다. 그는 교회와 국가 모두 폭력과 사기가 제도화된 전형적인 모형이라고 말한다.
5. 경제제도에 대한 톨스토이의 공격도 급진적이었다. 그는 재산권이 강도행위에 기초하고 폭력에 의해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는 노동 분업도 반대했는데 그의 눈에는 그것이 예술가나 지식인과 같은 특권층이 자신들이 노동자 계층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스스로를 정당화해서 그들의 노동을 흡수하는 수단으로 보였다. 톨스토이에게 특권층의 사회적 기여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특권층들에게 기득권과 차별성을 버리고 노동을 해서 자신과 타인의 생계를 유지하라고 촉구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배운 철학, 과학, 예술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이것들이 인생의 의미와 경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에 답을 줄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데 아마 소용이 없고, 뿐만 아니라 거짓에 기초하기에 나쁘다고 했다.
6. 이 유형에 속하는 시례는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동방 가톨릭과 서방 가톨릭, 정교회와 종파적 개신교들, 천년왕국론자와 신비주의자들, 고대와 중세와 근대의 그리스도인들 등 아주 다양한 부류가 포함될 것이다. 그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고 기존 문화를 배척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고하는지 아니면 신비주의적으로 사고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나라가 가까웠다고 확신하고 그런 확신에 걸맞게 사는지 아니면 하나님나라가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다고 생각하여 느슨하게 사는지의 여부다.
필요하면서도 부적절한 입장
1. 반문화 운동을 펼치는 진영에는 다른 입장을 취하는 자들 못지않게 설익은 자들과 멍청한 자들, 또 위선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입장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이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일편단심의 자세와 성실성에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위해 가정과 재산과 정부의 보호를 포기하는 등,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감수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박해로부터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지녔던 독일과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수감되었던 일에 이르기 까지 그런 사람들은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주는 매력은 이처럼 입술의 고백이 행동과 일치하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언행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임을 우리자신과 타인에게 입증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2.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이처럼 사회제도들로부터 물러나고 그것들을 거부하는 입장이 교회와 문화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로마황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 계시와 이성을 뚜렷이 구별해 왔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도한 적은 없지만 교회와 세상이 개혁되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가들은 베네딕투스가 유럽을 중생시키고 사회의 해체를 중단하고 정치질서의 재편을 준비하고 공교육을 재건하고 문학과 예술을 보존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혼과 수도사들의 영혼을 중생시키는 일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생시키려고 꿈꾼 적이 없었다.
3. 문화의 문제에 대하 이처럼 급진적인 응답을 내놓는 일은 과거에 필요했던 만큼 현재에도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이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인데, 만일 그런 게 없었다면 다른 기독교 집단들이 균형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문화로부터 물러나고 또 그것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런 움직임이 없을 때, 기독교 신앙은 사적인 성공이나 공적인 평화를 이룩하는데 필요한 실용적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한 어떤 우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는 권위를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와 문화가 완전히 융합할 수 없는 한, 이런 급진적 응답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4. 이런 면에서 대립유형은 꼭 필요한 것이나 동시에 부적절한 입장이기도 하다. 문화를 완전히 배제한 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는 순전히 자연적 존재로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문화 속에서 사람이 된 자를 대상으로 한다, 사람은 문화에 몸담을 뿐 아니라 문화에 침투를 받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가 외적인 제도들을 물리친다고 해서 정치적 신념과 경제적 관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진공상태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문화의 언어, 사고방식, 도덕률을 갖고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급진적인 그리스도인도 언제나 자신이 표면상 배척하는 그 문화를 혹은 그 문화의 일부를 활용하는 셈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하는 말에는 그가 거의 모든 점에서 로마인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는 로마의 법적 전통 가운데 성장했고 그 철학에 의존도가 높아서 그런 도움이 없이는 기독교의 입장을 진술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를 이해하려면 그가 당시의 문화운동과 러시아의 신비주의적 공동체 의식에 참여한 19세기 러시아인으로 보는 게 필요하다. 이는 급진적 기독교 집단에 속한 모든 구성원에서 공히 적용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날 때는 어떤 문화의 상속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일부가 된 그 문화를 배척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문화적 업적의 본존과 선택과 변경은 엄연한 하나의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배타적인 그리스도인도 사람이기에 반드시 만족시켜야 할 도덕적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려면, 그 문화에서 글어온 단어와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5. 배타적 기독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만 국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마르틴 디벨리우스는 이런 문제를 지적했다. 예수의 말은 본래 기독교 문화를 위한 윤리적 규율로 의도된 게 아니었고, 설사 그런 식으로 적용된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의 모든 의문에 답해 주기에는 부족하다. 그 밖의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도움을 초기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유대인의 일반 윤리와 헬레니즘의 윤리에서 찾았다. 스스로를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새로운 종족으로 여겼던 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신들이 결벌했던 자들의 법률과 관습에서 빌려오면서도 그것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베네딕투스가 성경의 규정과 성경 이외의 규정들을 제시한 것만 봐도, 문화를 도외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중용과 인내를 권할 때는 언제나 스토아학파의 뉘앙스를 풍기곤 했으며 톨스토이가 무저항을 거론할 때도 루소의 관념이 그 배후에 있었다. 설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유산 이외에 다른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공동체는 공동생활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문화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6. 급진적 그리스도인이 이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자신의 사회를 다룰 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에서 직접 끌어낼 수 없는 어떤 원칙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중간기에 사는 삶이 문제로 떠오른다. 그 기간의 성격상 그들은 주변문화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으며, 그 문화를 필요로 하는 스스로의 욕구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온 세상이 어둠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 세상 속에서 상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야 하고,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급진적 그리스도인이라도 자신이 거부한 악한 문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그 문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급진주의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계속 말한다. 이는 이들이 아직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풀지 못했으며 단지 어떤 노선을 따라 해답을 찾고 있을 따름이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신학적 문제들
1. 급진주의자들은 그들이 처한 딜레마를 풀려고 할 때, 윤리적 문제뿐 아니라 신학적 문제에도 봉착한다. 첫째 문제는 이성과 계시의 관계다. 급진주의 운동은 “이성”이란 단어를 문화사회에서 볼 수 있는 지식의 방법과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반면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 및 의무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용어에 대한 이런 정의는 결국 이성을 깎아 내리고 계시를 치켜세우는 셈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성을 계시로 대치한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계시를 변호하는 반이성적 옹호자로 유명해진 것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강력한 믿음의 고백 때문이라고 보다는 철학과 문화적 지혜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문화적 이성에 대한 이런 태도는 수도사들과 초기 퀘이커교도 그리고 개신교 종파주의자들 가운데 많이 발견된다.
2. 이들은 문화 속에서 꽃을 피우는 인간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고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오류가 많고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성을 배척하고 계시만 수용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은 타락되지 않은 인간 영혼이 지닌 단순한 자연적 지식과 문화에서 발견된 타락된 이해를 구별하기도 하며 내적인 빛에 의한 계시와 역사적으로 주어진 성경을 통해 전수된 계시를 구별하기도 했다. 그들이 기독교 밖에서 진행되는 추론 및 거기에 내포된 지식에 대해서도 그런 구별 작업을 할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3. 둘째 문제는 죄의 본질 및 보편성에 관련된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은 원죄교리 자체가 타협적인 기독교의 자기정당화의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죄의 유산을 사회적인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점에서 그들이 신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런데 죄와 거룩함의 문제에 대한 이런 해결책이 배타적 그리스도인들 자신에 의해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삶을 살라는 그리스도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서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와 세속주의 사이의 차별성이 단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만일 죄가 급진적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이 뿌리박혀 있고 더 널리 퍼져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 신앙으로 세상을 이이기 위한 전략에 문화로부터 멀어지는 전술과 새로 얻은 거룩함을 지키는 전술 이외에 다른 전술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4. 이런 문제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다. 배타적 유형을 반대하는 자들은 흔히 그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이 은혜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혹은 선택받은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법을 기독교의 특징으로 너무 강조하다보니 그것이 만인을 위한 복음이란 사실을 망각한다고 비판한다. 급진주의자들의 행위에 대한 강조는 자세한 규칙으로 이어지고 그런 규칙에의 순종에 관심을 갖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보다 본인의 의지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5.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운동이 제기하는 가장 어려운 신학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피조세계 및 기독교 공동체에 내재하는 성령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자연의 창조주며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과의 관계다. 일부 종파주의자와 톨스토이 같은 자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아무런 윤리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타락한 교회의 창안으로 간주한다. 급진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중심으로 그분의 권위를 변호하고 그분의 계명을 정의하고 그분의 법이나 통치를 자연 및 세속사회에 속한 자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는 그 능력과 연결하려 할 때, 이 문제가 실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들이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직면하는 가장 큰 유혹은 윤리적 이원론을 존재론적 이원론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다.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물질적 영역과 영적인 영역으로 나누어, 전자는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원리에 의해 후자는 영적인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는 것으로 간주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이런 경향은 테르툴리아누스의 몬타누스주의, 영적 프랜시스파, 퀘이커교도의 내적인 빛 교리, 톨스토이의 심령주의 등에 뚜렷이 나타난다. 그래서 급진주의 운동의 변두리에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적 이단이 언제나 자란다. 이런 경향은 배타적 기독교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연 및 자연의 창조주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원리로 대체해 그분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런 문제는 급진적 기독교가 교회의 한 운동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것 또한 다른 유형의 기독교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3장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2019-09-01 17:29:14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3장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의 문화적 적응주의
1.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예수를 사회의 메시아로, 자신의 소망과 열망의 성취자로, 참된 신앙의 완성자로, 가장 거룩한 영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급진주의자의 정반대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문화 공동체 안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며, 교회와 세상, 사회적 법률과 복음, 하나님 은혜의 역사와 인간의 노력, 구원의 윤리와 사회적 혹은 진보의 윤리에 긴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문화를 해석하고 문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한다., 그래서 이들은 문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역 및 인격과 일치하는 요소를 중시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위, 기독교 교리 가운데서 최고의 문명과 일치하는 부분을 끌어낸다.
2. 이들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성적이고 영구적인 요소와 역사적이고 우발적인 요소를 서로 분리하려고 애쓴다. 이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이 세상에 있지만 그렇다고 내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나 성격 면에서 초월적인 영역이 현세와 연속성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은 현세에 속한 인간들을 장래의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가로, 철학자로, 개혁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근대에 들어오면 이들이 개신교의 상당부분을 지배했고 이들을 일컬어 흔히 자유주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보다는 “문화개신교(culture- protestantism)라는 용어가 더 적합한 것 같다.
3. 이 유형이 근대세계나 종교개혁 당시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런 움직임은 기독교 초창기부터 있었다. 초기 이방인 기독교의 경우,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문화에 대한 다소 적극적인 관심과 예수에 대한 충성을 서로 묶어 놓았다. 그 가운데 극단적 태도에 속하는 기독교 영지주의는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완전히 문화적 견지에서 해석하고, 그리스도와 사회적 신념이나 관습 간의 긴장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버키트 교수는 영지주의 사상이 추구한 것은 복음을 당시의 과학 및 철학과 조화시키는 일이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는 마치 19세기 변증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진화의 견지에서 기술하려 했던 것처럼, 당시 영지주의자들도 당대의 훌륭한 관념에 비추어 그것을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하나님과 역사에 관한 야만적이고 구시대적인 유대적 관념으로부터 단절하려고 했다. 기독교를 신념의 수준에서 지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더욱 매력적이고 강력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4. 영지주의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타락한 물질세계에 혼돈된 상태로 갇혀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우주적 구원자요, 존재의 심연과 인간의 상승 및 하강에 관한 바른 지식을 되찾게 해주는 회복자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를 당대의 그리스 문화에 맞추려 한 영지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래서 기독교는 일종의 종교적, 철학적 체계로 변모되었다. 물론 그것은 최상의 체계이지만 유일한 체계는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종교이므로 인간 삶 전체를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구원자이지 인생의 주인은 아니며 예수의 아버지 역시 만물의 근원도 만물의 통치자도 아니다. 새로운 백성에 해당되는 교회는, 문화에 몸담으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운명을 추구하되 문화에 대해 갈등을 느끼지 않는 계몽된 자들의 모임으로 대체되었다.
5. 영지주의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문화와 관련된 인간 업적의 최고봉에 위치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사안이었다. 그 지식은 물론 윤리와 연관되어 있지만 이 윤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이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신자의 충성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윤리는 물질세계와 사회적 세계를 뛰어넘는 그런 운명을 추구하는 개인적 열망에 관한 윤리인 동시에, 아무래도 졸은 이 세상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개인적 윤리였다.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영지주의자가 그리스도와 당대의 과학 및 철학과 조화를 꾀하려 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은 이를 통해 새로운 신앙과 옛 세계 사이의 모든 긴장을 완화하는 일이었다.
6. 영지주의 운동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운동의 하나였다. 그 운동의 중심에는 기독교를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로, 교회를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종교적 협회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 진리의 계시자요 종교적 예배의 대상자이지만 삶 전체의 주인도 아니고 더구나 만물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아버지의 아들도 아니다. 그 결과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종교성은 보유하되 그 윤리는 빠뜨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영지주의와 같이 소위 종교라는 것이 윤리와 분리되면 기독교는 그 본연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이 이제는 삶 전체를 주관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형이상학, 즉 “그노시스(영지)”를 주구하는 신비적 종파로 변한다.
7. 그리스도와 종교의 관계, 종교와 문화의 관계와 연관하여 영지주의가 제기한 문제들은 소위 기독교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첨예해졌다. 중세 사회가 아주 기독교적 사회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종교적인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을 괴롭혔던 질문,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질문이 똑같이 떠올랐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이 등장했다. 일부 수도원운동과 중세의 종파들이 테르툴리아누스의 노선을 따랐다면, 아벨라르(Abelard)는 주후2세기에 기독교 영지주의자가 제시한 것과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교회가 믿음을 진술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런 방식이 유대인과 특히 그리스 철학을 좇는 다른 비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동의하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에 다른 행위규범을 문화적 최상급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즉 실재에 대한 철학적 지식과 삶의 향상을 위한 윤리 정도로 전락시켰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뛰어넘는 위대한 도덕선생이었다. 아벨라르의 이런 태도는 비그리스도인을 향한 넓고 관대한 정신을 잘 보여주지만 이는 복음을 이해하는 면에서 급진적 그리스도인의 그것과 아주 확연히 다르다. 그에게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갈등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사실상 교회가 그리스도를 오해한데서 생긴 것이라는 것이 아벨라라의 생각이다.
문화적 개신교와 리츨
1. 중세에 아벨라르는 비교적 외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래 그는 많은 추종자를 갖게 되었고 과거에 이단으로 간주되던 내용은 새로운 정통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유형 속에는 서구세계의 크고 작은 사상가들, 사회지도자들과 교회지도자들,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정립한 수많은 견해가 존재한다. 그것은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등 여로 사조에 등장하며, 루터교도, 칼뱅주의자, 종파주의자, 로마가톨릭 등 다양한 교단이 나름의 견해를 개발했다.
2. 여러 인물 가운데 “기독교의 합리성”이란 책을 쓴 존 로크에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은 이성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니츠, 칸트, 토마스 제퍼슨 등이 모두 이 진영에 속한다. 제퍼슨과 함께 그리스도에게 갈채를 보내는 철학자, 정치가, 개혁가, 시인, 소설가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위대한 계몽가요, 위대한 선생이요, 문화에 몸담은 모든 사람이 지혜와 도덕의 완성과 평화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지도하는 분이라고, 또 때에 따라 그분을 위대한 공리주의자, 위대한 이상주의자, 등으로 칭송하기도 한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어떤 범주를 사용하든지 간에 한 가지 불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훈련을 통한 평화롭고 협조적인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3. 19세기의 여러 대표적인 신학자가 이 운동에 합류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젊은 시절에 쓴 책 “종교에 관한 강연들”은 종교를 멸시하는 자들 가운데 문화인들을 겨냥한다. 그는 자신이 영지주의자와 아벨라르가 그랬듯이 넓은 의미의 문화의 대표자들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지주의자와 아벨라르와 마찬지로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과 의식이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종교의 견지에서 다룬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를 문화에 적응시키는 한편 문화로부터 그리스도에 가장 순응하는 요소들을 끌어내는, 이 유형에 속하는 인물임이 확실하다. 19세기 칸트, 제퍼슨, 슐라이어마허의 시대로부터 헤겔, 에머슨, 리츨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주제곡은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어 거듭하여 울려 퍼졌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 시대 전체를 뭉뚱그려 “문화적개신교의 시대”라고 부른다.
4. 그리스도와 문화를 동일시하는 운동이 19세기 후반에 절정에 도달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이 유형을 대변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앨버트 리츨(Albert Ritschl, 1822-1889)이란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리츨의 신학은 두 가지 토대를 지닌다. 그것은 계시와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다. 그는 만인에게 자명한 궁극적인 이성의 진리를 찾아내 기독교의 자기비판을 해야 입장을 단호히 배격한다. 그는 기독교우의 진정한 내용을 긍정적인 형태로 설명해야 하는 신학은 그 내용을 오직 신약성경에서만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리츨은 단연코 신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출발점으로 삼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학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또 하나의 출발점을 지녔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 의지를 그 원리로 삼는 문화공동체다. 근대인이자 칸트주의자였던 리츨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기본적으로 사람과 자연의 갈등관계에 입각해서 이해한다. 그러나 도덕사상가요 칸트주의자인 리츨의 관심을 더 끈 것은 윤리적 이성이 인간 본성에 내면적인 양심을 각인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즉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자유로우나 상호의존적인 덕스러운 인간들이 사회에서 덕스러운 존재로 사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세우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리츨에게 있어 문화적 작업은 모두 자연과의 갈등에 그 뿌리를 두며, 그 목적은 개인적, 도덕적 실존의 승리에 있다. 이것은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목적의 왕국을 이룩하는 일이고, 신약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일이다. 리츨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직면하는 이유는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문화와 자연 사이에 이원성은 있을지언정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자체를 하나의 중심만 있는 단일원이 아니라 두 개의 초점이 있는 타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한 초점이 칭의 혹은 죄 사함이라면 다른 초점은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윤리적 노력이다. 리츨은 교회와 문화공동체의 경우에도 이원성은 있으니 그 사이에 갈등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는 수도원 운동과 경건주의를 맹렬히 공격했다.
5. 리츨이 기독교와 문화의 완전한 화해를 이룩한 것은 대체로 하나님나라 개념을 통해서였다. 리츨이 이 용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만큼 예수를 문화의 그리스도로 해석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고 보존하려고 진력할 때 그들을 인도하는 안내자로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의 문화적 관념에 의해 이해된 그리스도로 본 것이다. 그의 하나님나라 개념은 그 구성원들 간에 서로 도덕적 행위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가장 포괄적인 협회인 전 인류의 친밀한 교제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마지막에 하나님이 현현하실 것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소망이 빠져있을 쁜 아니라 현재도 그분이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우주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는 비종말론적 소망도 빠져있다. 인간의 문화적 활동의 목적에 대한 이런 진술은 19세기 사상과 완전히 맥을 같이 한다. 리츨의 하나님나라 개념은 칸트의 목적의 왕국 개념과 같으며, 인류를 사랑, 평화, 공동의 필요, 도움으로 한 가족으로 모으고자 했던 제퍼슨의 소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6. 리츨은 두 번의 세계대전 이전에 널리 퍼지고 깊이 뿌리박혀 있던 관념을 명시적으로 만든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한 그의 견해는 여러 신학자와 성직자들에 의해 재생산되어 왔다. 월터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은 리츨에 비해 신학적 깊이는 얕지만,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대중적인 신학은 기독교 사상 전체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관계로 축약한다. 이와 같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배후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폭넓게 수용되는 공통관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의 특징은 사람과 자연의 갈등관계에 있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문제를 일단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 문화적 운동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로,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분투와 열망을 지도하는 자로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피해 진다. 따라서 문화신학에서는 인간이 처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자연과의 갈등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갈등관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갈등의 한복판에 희생자요 중재자로 서 있다는 생각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문화신학의 눈에는 인간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반계몽주의자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왜곡하는 자로 비친다.
문화적 신학에 대한 변호
1. 우리시대에는 문화적 개신교에 대한 폭넓은 반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유형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입장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첫째로 그것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들 가운데 자신들이 배척하는 그 태도를 오히려 공유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리스도를 문화에 이식하는 영구적인 작업은 그분의 통치영역을 확장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적 개신교를 자유주의라고 자주 공격하는 현상은 그 자체가 일종의 문화적 충성심의 표현이다. 반자유주의자 가운데 많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관심보다는 옛 문화의 우주관과 생물학적 관념을 보존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평가기준은 창조의 방법과 지구의 멸망에 관한 오랜 문화적 관념의 수용여부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근본주의자들이 그리스도와 연결 짓는 관습이 그들의 반대자의 경우만큼 신약성경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주로 사회적 관습과 관계가 많다는 점이다.
2. 문화적 개신교에 대한 공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한 이는 핵심사항에 대해 입장을 같이하는 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집안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이고, 사람의 최대의 과업은 최상의 문화를 보존하는 일이라고 믿는 입장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문화적 가톨릭만큼 문화적 개신교를 닮은 것이 없고 미국식 기독교만큼 독일식 기독교와 비슷한 것도 없으며, 노동자의 교회만큼 중산층 교회와 유사한 것이 없다, 이는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논리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최고로 훌륭한 이념, 최고로 고상한 제도, 최상이 철학과 동일시하는 논리다.
3. 급진적 유형이 그렇듯이 이 입장도 그 반대자에게 안 보이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적 이식 작업이 역사상 그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오랜 옛날 사람들이 기존 관습에 순응하라는 대중의 요구와 공식적인 명령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의 한결같은 자세에 감동을 받았다면, 기독교 메시지가 당시 최고의 스승들의 도덕 및 종교철학과 조화를 이루고 기독교적 행습이 그들의 훌륭한 영웅들의 그것과 일치하는데 매력을 느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4. 그리스도를 어떤 문화의 메시아로 해석하는 자들은 일차적으로는 그 문화의 구원이나 개혁을 목표로 삼지만 복음을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하고 자기들의 문화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한 자극을 주는 것이 문화적 그리스도인이다. 복음을 통속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을 번역하지 않은 채 버려두면 그것을 낯선 사회의 죽은 언어로 묻어두는 위험을 끌어안는 셈이다. 문화적 기독교를 향해 성경적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는 비판가들은 성경에 여러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5.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장하는데 기여한 점이 또 하나 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보통 사회의 지도층, 특히 종교를 멸시하는 문화인들을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이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입장은 이런 방식으로 복음의 인류 보편적 의미, 곧 예수가 선택받은 소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의 구원자라는 진리를 유효하게 만들어 준다. 이들은 또한 급진적 그리스도인이 간과하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 내포된 특정 요소들을 분명히 포착한다.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세속적 지혜를 가르치는 현인이나 개혁가로 보는 것이 잘못리라고 할지라도, 이런 해석은 적어도 그 정반대의 잘못, 즉 그리스도의 안목은 하늘에 고정되어 이 망할 세상에서 인생살이에 필요한 그런 원칙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오류를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6. 급진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명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영역은 모두 똑같이 어두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커다란 차별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잘 관찰해서 선교의 접촉점을 찾을 뿐 아니라 문화개혁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문화와 접촉하면서 예수를 현인으로, 예언자로,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타락할 수 없는 재판관으로, 서민을 위한 개혁가로 제시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는 교회가 세상과 동떨어진 종파가 되는 걸 막는 역할을 한다, 아벨라르는 중세 사회의 철학적, 과학적 계몽과 참회제도의 개혁을 위한 길을 예비했다. 또 문화적 개신교도는 부패로 위험에 처한 문화를 향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다.
신학적 반론
1. 예수를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로 제시하면 입장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는 정통파뿐 아니라 이교도 저자들에게도 공격을 받았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를 얻는데 문화적 기독교가 급진적 기독교보다 더 효과적이 아니라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전도자는 문명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자들의 요구를 충족할 만큼 멀리 나가지는 못하는 한편, 다른 입장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너무 멀리 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문화적 개신교의 응답은 신약성경의 예수를 왜곡하는 경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입장에 반대하는 반론의 공통된 내용은 당대의 문화에 대한 충성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너무 제한하는 바람에 그분이 그분의 이름을 빙자한 우상으로 인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주류는 문화적 기독교의 입장이 명백한 위험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한결같이 그 입장을 배격해 왔다. 게다가 그와 정반대에 있는 급진적 입장을 거부할 때 보다 더 확고한 태도로 그렇게 했다.
2. 극단과 극단은 서로 만나는 법이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은 교회의 신학에 대한 일반적 태도에 있어서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이상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들은, 이유는 정반대지만, 급진주의자들처럼 신학을 무척 의심한다. 후자가 신학을 계시의 영역에 세상의 지혜가 침입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해, 전자는 그것을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이성에 완전히 종속될 수 없는 계시가 현존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극단과 극단이 만나는 일은 죄, 은혜와 율법,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에서도 일어난다. 이른바 전적인 타락이란 개념은 두 진영 모두에게 생소한 것이다. 양자는 모두 죄의 출처는 한편으로 동물적 정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회제도들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급진주의자는 모든 문화가 죄와 연루되어 있다고 본다면 문화주의자는 악의 현존을 초인간적인 악의 세력들 등 일부 악한 제도들에 국한한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급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다룰 때 율법의 편에 서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과 이성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절대 진리를 아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이 베푸는 은혜의 행위는 인간의 사업을 보조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3. 급진적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신학의 발달이 신자가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생긴 결과가 아니라 문화철학이 기독교 신앙에 도입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철학을 중시하는 문화주의자들도 이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지주의자는 삼위일체 이상을 요구하고 자유주의자는 그 이하를 요구한다. 이들의 전반적 성향은 예수를 사람 속에서 작동하는 내재적인 신의 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내재적이고 합리적인, 또 영적이고 도덕적인 원리가 자연 및 자연을 낳고 주관하는 그 권능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전능한 창조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문화의 보존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사변적인 질문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직면하는 근본적인 문제다. 문화적 기독교가 견지하는 심령주의와 관념론은 자연주의로부터도 도전을 받는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라는 고백 이상의 것을 고백할 수 없다면 아무도 정직하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4장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2019-09-01 17:30:05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4장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중립적 교회
1.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두 가지 원칙을 놓고 보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에 대한 헌신과 문화에 대한 헌신을 비합리적으로 섞어 보려는 타협적 존재로 비칠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기독교 운동(이를 중립적 교회라 부르자)은 반문화적 급진주의와 문화적응을 추구하는 입장을 모두 배격해왔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풀려는 노력을 타협적인 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고 보고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접근하게 되었다.
2. 중립적 교회가 문화의 문제에 접근할 때 품는 신학적 신념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다. 그들은 이 믿음을 근거로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러싼 토론장에 모든 문화의 기초에 해당하는 자연의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그 질서를 유지하는 선한 자연이란 개념이다. 선한 자연이란 개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단지 대립적인 관계로만 있을 수 없다. 문화로서의 세상이 단순히 하나님이 없는 영역으로 간주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은 자연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존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3. 보통 중립적 집단이 가진 공통의 신념은 사람은 그 본질상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과 그 순종이 자연인과 문화인으로서 영위하는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종의 대상은 창조주와 분리된 예수라든가 예수와 분리된 창조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다. 사람이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으며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면 문화 그 자체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필수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 주류파의 또 다른 특징은 죄의 보편성과 심각성에 대해 비슷한 신념을 지녔다는 점이다. 급진적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공동체를 죄의 영향권에서 제외하려고 하고,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죄가 인격의 깊은 부분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중립적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자기 안에서 거룩함을 발견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은혜와 율법의 문제에 있어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은혜의 우선성과 순종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분리 될 수 없다고 믿는다.
5. 중립적 그리스도인이 이런 공통점을 지녔음에도 그들이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적어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각각 종합론자(synthesist), 이원론자(dualist), 전환론자(conversionist)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
1.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다룰 때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다룬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하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문화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보기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신약성경의 재가도 없이 당대의 정신과 조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합론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모두 긍정하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주인으로 고백한다.
2.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하나님을 인간화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차별성을 없애고 신성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나 인성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 둘 중 하나를 예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종합론자는 그 차별성을 유지하는 것과 더불어, 예수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믿음, 즉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라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수한다.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존재에 관한 사변적 진리나 가치에 관한 실천적 지식의 형태로 계시되었기 때문에 복음과 시대정신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종합론자는 가치를 존재에 혹은 존재를 가치에 종속시키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3. 이 점은 문화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합론자들은 문화를 신적인 기원과 인간적 기원을 모두 가진 것으로, 거룩한 동시에 죄스런 것으로, 필연성과 자유를 모두 지닌 영역으로, 이성과 계시가 모두 적용되는 분야로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종합론자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관한 견해에서 문화적 신자와 뚜렷이 구별되고, 문화를 긍정한다는 면에서 급진주의자와 확실히 의견을 달리한다.
4. 종합론자는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어떤 간격을 보게 되는데, 이는 문화적 신자가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고 급진주의자가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는 그런 것이다. 종합론자가 보기에 문화적 기독교나 급진주의적 방식은 모두 그리스도와 문화 어느 것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다. 그 이유는 그런 방식들이 그리스도의 진지함이나 창조주의 불변성 중 하나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이 둘을 서로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리스도나 문화 중 양자택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양자 모두에 하나님이 관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차별성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 모두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 대신 종합론자들은 우리의 법, 우리의 목표, 우리의 상황이 지닌 이중적 성격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문화 모두라고 말한다.
5. 지금까지는 종합론자가 중립 지대에 속하는 다른 유형들과 대체로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닌 이중성을 분석하고 서로 다른 요소들을 단일한 구조로 묶으려 할 때 다른 점이 발생한다. 특히 계시와 철학적 지혜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합적 응답을 제시하는 잠정적 시도는 주후2세기의 변증가들 가운데, 특히 순교자 저스틴에서 찾을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동시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이 유형을 대표하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예수의 명령과 더불어 문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자연(본성)의 요구사항 둘 다를 공평하게 취급하려고 노력했다. 클레멘스에게 그리스도는 문화와 대립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줄 때 최고의 문화적 산물을 도구로 사용하는 분이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문화의 그리스도인 동시에 문화 위에 계신 그리스도다.
클레멘스는 윤리적 차원에서 신약성경과 세상에서 요구되는 삶을 종합했을 뿐 아니라, 철학과 신앙의 차원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는 예수라는 인물을 당대의 사변적 체계와 완전히 양립시키려고 재해석하지도 않았고 그리스 철학을 세상적인 지혜라고 배격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문화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한 예비훈련과정으로서 주어진 진리의 형상이고 신의 선물이었다. 문화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함께 종합하려고 했던 클레멘스의 주된 관심은 문화를 기독교화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6.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합론자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위대한 제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완전히 떠맡았던 그런 기독교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토마스는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해 양쪽 모두의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그가 믿는 그리스도는 문화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큰 간격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생활방식 자체가 이 두 가지 권위, 두 가지 희망, 두 가지 출발점을 어떻게 연합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급진적 그리스도인처럼 속세를 버린 수도사인 동시에 당시의 문화의 수호자인 교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러니까 토마스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거대한 중세 교회 조직 자체가 이미 실질적인 종합이 성취된 것을 대변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체계에는 철학과 신학, 국가와 교회, 시민의 덕과 그리스도인의 덕, 자연법과 신의 법, 그리스도와 문화 등 양자가 서로 혼합되지 않고 잘 종합되어 있다.
7. 토마스가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하는데 사용한 중요한 지침은 자연의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와 내재적인 영이 모두 동일한 본질을 갖는다는 신념(삼위일체 교리)이다. 그는 사람은 진리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아니라 세 가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받았으며 이 세 진리는 단일한 진리체계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토마스는 본성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이자 인간의 활동인 이성을 통해 본성에 대해 숙고할 때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존재 속에 내재된 그 목적이 인간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 곧 보편적인 진리 앞에 있는 지성 그리고 보편적인 선 앞에 있는 의지가 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8. 토마스는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견지했다. 그는 명상적 삶을 실제적 삶보다 우위에 놓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복했을 뿐이고 지성적 비전의 대상에 하나님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그는 또한 수도사의 삶을 칭송하되, 그것을 타락한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서가 아니라 감각과 현세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솟아올라 불변하는 실재를 명상하는 노력으로 높이 평가한다. 최종목적을 이렇게 규정한 만큼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그런 최종목적과 인간의 문화 활동들을 서로 조화시키는 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데 그는 문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인간이 문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이고 그 너머에 영원한 다른 목표가 있는데, 그 궁극적 행복에 도달하는 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주신다고 가르쳤다.
9. 토마스는 사람에게 이중의 행복이 있는데 하나는 문화 안에서 영위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자는 인간의 자유가 낳은 산물인 동시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 영역에서도 하나님이 가정, 국가, 교회 등 위대한 사회제도들을 통해 인간을 돕고 지도하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 앞에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또 다른 행복, 곧 궁극적 행복이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오직 신성에 참여하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인간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특별한 원리들을 덤으로 받을 필요가 있는데, 그래야만 자연적인 원리들에 의해 자연적인 목표를 지향하면서도 초자연적 행복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10. 토마스의 법 이론도 이와 똑 같은 특징을 지닌다. 인간은 법아래 있지 않고는 자유로이 살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은 문화에 몸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법은 강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서 발견된 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토마스는 복음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위한 규율을 찾으려하지 않는다. 그런 규율들은 이성으로 찾아야 한다. 그것들은 모든 이성적 인간들이 분별할 수 있는 일종의 자연법이며, 궁극적으로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한 법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문화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 이룩한 업적이기 때문에 문화는 문화에 필요한 규율을 파악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연법 이외에 또 하나의 법이 잇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자기 아들을 통해 계시하신 신의 법이다. 토마스는 신의 법은 부분적으로는 자연법과 일치하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이런 법 이론을 가지고 토마스는 위대한 사회제도들을 옹호할 뿐 아니라, 각각의 특성에 적절한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는 급진주의자가 크게 의문시하는 사유재산을 정당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법에 저촉되지 않고, 인간 이성에 의해 고안된 일종의 추가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재화의 사적인 운용은 정당하지만 그것을 순전히 사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옹호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정부, 국가, 정치권력 등이 존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창조했으며 사회는 법적인 지침이 없이는 인간적 차원에서 존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너머에 교회가 있다. 교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목적을 지향하게 하고 신의 법의 관리자로서 현세적 삶이 질서를 유지하도록 돕는다. 이성은 때로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에 계시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이성은 행동의 배후에 있는 내면의 근원과 동기까지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11. 토마스의 종합적 체계를 보면 이 모든 기관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서 각기 특정한 목적을 이루는 동시에 다른 목적들도 이룬다. 토마스의 사상에 교회가 정점에 있는 위계적 원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각 기관과 각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부여했다. 그는 각각의 기관과 개인이 고유한 목적을 지니고 각자가 공통된 이성을 통해 자기 행동의 목표와 법을 이해하고 어느 방향을 나아갈지 원칙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 공동의 정신이 13세기 문화에 현존했고 또 당시의 제도들이 서로 큰 긴장 없이 통일성을 이루었던 만큼 토마스의 종합적 체계는 대단히 지적인 업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을 상징하는 철학적 신학적 성취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와 비슷한 본보기를 후대 역사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다.
12. 톨스토이와 리츨의 동시대인으로서 19세기 가톨릭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 교황 레오13세(1810-1903)가 토마스주의를 추구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이 물론 그들의 목표이긴 했지만 토마스처럼 그리스도를 현재의 문화, 철학, 제도들과 종합한 것이 아니다. 레오 13세가 추구한 것은 그리스도와 현재 문화의 종합이 아니라 또 다른 문화의 철학과 제도들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런 기독교는 종합 유형에 속하기보다 오히려 문화주의에 속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특히 교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그런 문화다. 여기서는 예수의 통치와 주되심이 문화적 종교기관이 교회의 도그마, 조직, 관습과 너무 동일시되는 바람에 토마스의 종합이 지녔던 역동적인 균형상태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입장은 로마가톨릭의 문화적 기독교라고 볼 수 있으며 개신교의 사회복음주의에 상응하는 것이다. 양자의 일차적 관심은 모두 문화에 있으며, 단지 사회조직과 인간이 추구한 가치에 대한 사상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논쟁은 교회가 아니라 문화, 사회 속에서 일어난다.
13.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을 보여주는 더 나은 본보기는 성공회 주교였던 조셉 버틀러(1692-1752)다. 그는 과학, 철학, 계시, 이성적 자기사랑의 문화적 윤리를 기독교적 양심의 윤리, 하나님 및 이웃사랑의 윤리와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미국에서는 로저 윌리엄스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해, 특히 정치 제도에 대해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해결책은 사회의 영역에서는 이성에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에 각기 권위를 부여하는 형식이었으나, 종합작업을 하지는 못했다. 현대 기독교에서는 토마스와 같은 종합론적 해답을 찾아볼 수 없다.. 위대한 사상가도 없을뿐더러 활발한 사회참여, 모든 곳에 침투하는 살아있는 신앙을 찾아볼 수 없다. 종합을 위한 해결책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종합론자의 장점
1. 종합론적 응답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종합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욕구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기 때문에 더더욱 통합을 추구할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다가 자연과 문화를 부정할 경우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그런 부정 자체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어긋나는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와 문화 가운데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고 양자 사이에 모종의 조화로운 관계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2. 종합이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 되게 하는 영의 형태로 인간 본성과 이성과 사회 속에서 활동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로고스를 통해 스스로를 그렇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종합론적 응답은 이런 욕구와 요구를 충족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매력적인 유형으로 남을 것이다. 설사 그 응답을 둘러싼 포장은 배격해야 하더라도 그 응답 자체는 궁극적인 정답의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
3. 토마스주의의 특징은 정의의 기초를 이미 주어진 인간 본성과 세계의 본질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 있다. “당위(ought)란 존재(is)”에 기초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 실재론으로 인해 희망적 사고의 위험을 인식하는 모든 자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희망적 사고는 사회생활뿐 어ㅏ니라 믿음에도 위험하다. 장차 임할 하나님나라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쉽게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지 않는 것을 향한 요구는 자칫 현존하는 것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 자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언할 위험이 있다.
4. 종합론자의 분명한 선언들, 곧 장차 통치하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통치하시고 과거에도 통치하셨다는 것, 그분의 통치는 사물의 본성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바로 이 확고한 사실을 토대로 무엇이든 세워야 한다는 것 등은 호소력이 큰 게 사실이다. 종합론자들은 다른 어떤 기독교 집단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할 필요가 있는 원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창조주와 구원주가 하나라는 원리, 그리고 구원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코 피조물의 파멸을 뜻하지 않는다는 원리다.
5. 이런 주장과 함께 종합론자는 신자들에게 불신자와 손잡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지적인 태도를 마련해 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자들도 불신자와 일상의 삶을 공유함을 인정했지만,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그런 연합을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으며, 어떻게 또 어디까지 협력할 수 있는지 그 지침도 제시하지 않는다.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불신자들과 공동의 목적을 설정한다. 그런데 종합론자만이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독특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세상의 일에 신자와 불신자가 서로 협조하는 든든한 지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 같다.
6. 이외에도 종합론적 유형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은 복음이 약속하고 요구하는 바가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계획에 관한 이성적 지식과 자연법에 대한 순종,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증언한다는 점이다. 급진적 비판가들은 클레멘스와 토마스가 제시한 율법관과 사랑의 목표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를 곧잘 잊어버린다. 진정한 종합론자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경우처럼 추후에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7. 교회뿐 아니라 문화도 이런저런 면에서 종합론자들에게 빚진 바가 대단히 많다. 서구 문명의 역사에서 클레멘스와 토마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미친 영향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은 예술, 과학, 철학, 법, 정치, 교육, 경제제도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그리스의 지혜와 로마법을 현대 문화에 중재하는 역할도 했다. 이들은 현 문명에서 단일한 종교기관 가운데 최대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로마가톨릭교회를 형성하고 지도한 자들이다.
종합에 대한 의문
1. 다른 유형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종합론자들의 이런 시도가 저절로 오류에 빠질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 율법과 은혜 등을 단일한 시스템으로 묶으려는 것은 결국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무한한 것을 유한으로 축소하며, 역동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피조물의 구조 자체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졌기에 이성을 통해 그 법을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 법을 문화적 조건 아래 있는 이성의 언어와 개념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2.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종합론자들은 창조 때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대한 문화적 견해와 그 법 자체를 늘 동일시했다. 그러나 창조의 법에 대한 문화적 견해는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역사적인, 따라서 상대적인 견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종합이든 그것은 잠정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다. 만일 종합론자들이 이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결국 그들이 만든 견해도, 교회와 사회에 미친 업적과 같이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함을 시인하자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3.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해 종합론적 해답이 제시될 때,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은 복음 자체를 변호하는 일보다 그 복음과 합쳐진 문화를 변호하는데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복음을 어떤 문화와 종합하든지 간에, 종합론자는 한 문화의 회복이나 보존에 몰두하게 되므로 결국 문화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다. 문화적 보수주의가 이 유형의 특유의 질병이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4. 다른 한편 이런 종합에의 노력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스스로 교회라 부르는 사회적 종교기관도, 국가나 학교 혹은 경제적 기관과 마찬가지로 현세적 질서에 속한 인간의 성취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종합론적 응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5. 이 모든 반론은 한 가지 점으로 귀결된다. 온전한 통합과 평화는 그리스도인이 영원히 추구할 목표라는 것과, 그 통합을 인간이 고안한 일시적 형태로 구현하는 일은 결국 시간이 영원의 능력을 행사하려는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의 법을 공식화할 때, 그것이 잠정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어떤 종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종합 작업이란 것을 순전히 상징적 행위로,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겸손한 시도로, 하나님의 행위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인간 편에서의 행위로 이해하는 입장과 하나님나라에서 모든 것이 들어맞는 권위 있는 진술로 보는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종합이라고 할 수 없다.
6. 이밖에 잠깐 언급하고 싶은 것 하나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묶으려는 노력은 그리스도인을 등급에 따라 나누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을 낮은 법을 따르는 자와 높은 법을 따르는 자로, 심령주의자 혹은 영지주의자로, 세속적 신자와 종교적 신자로 구분할 경우 거기서 온갖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런 판단은 죄인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런데도 종합론자들은 이런 단계의 도움이 없이는 세상에서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서로 묶을 수 없는 것 같다.
7. 문화적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모든 신자들이 종합론자에게 제기하는 주된 반론은 종합론자들이 자신들도 다른 신자와 똑같이 인간의 죄성을 믿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과 위대성을 믿는다고 아무리 큰소리로 고백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모든 인간 작업에 내재된 악의 존재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장 문화와 역설 관계의 그리스도
2019-09-06 18:22:53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5장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이원론자의 신학
1. 급진주의자들은 종합론은 복음을 문화에 적응하려는 위장 전술에 불과하고 좁은 길을 고속도로처럼 넓히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종합론자들이 미성숙한 구식 사고방식을 복음적 진리로 보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종합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좌파나 우파가 아니라 중간파에 속한 다른 집단에서 나왔다.
2. 이들은 종합론자처럼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 모두를 지향하는 중간파에 속한 집단인데, 편의상 이들을 이원론자(dualist)라고 부르자. 이들은 종합론자의 견해에는 반대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에 대한 책임을 서로 구별하는 동시에 그 둘을 함께 붙들고자 노력하는 자들이다.
3. 이들이 급진주의자나, 문화주의자나, 종합론자와 달리 가지고 있는 커다란 이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다. 이들이 문화적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논리적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신과 인간의 싸움에서 발생한 화해와 용서라는 위대한 행위다. 이원론자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으로서, 이는 아무 자격도 없는 인간들을 용서해주고 그들을 자녀로 영접하며, 그들에게 회개, 소망, 구원의 확신을 제공하고,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게 해주는 것이다.
4.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기적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지만 은혜와 죄의 근본적인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 죄는 사람 안에 존재한다. 은혜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사람에게 매개되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아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행위 안에 있다. 반면에 죄는 사람 안에 있고 사람은 죄 안에 있다. 이원론자는 인간 타락의 정도와 범위를 깊이 이해한다는 점에서 종합론자와 상당히 다르다.
5. 종합론자들은 사람의 이성이 어두워지긴 했어도 그 본질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종합론자들은 기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종교 문화(거룩한 교회의 기관들과 교리들)는 타락의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루터 유형에 속한 이원론자는 모든 인간의 일에서 타락과 부패의 증거를 발견한다. 인간의 문화는 타락한 상태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작업을 포함한다. 교회 밖에서 인간이 이룩한 업적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성취한 것도 포함되고 철학과 신학도 거기에 포함되며 유대인의 율법의 변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기독교 교훈의 변호도 포함된다. 이원론자는 하나님 없이 신처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노력의 형태로 드러나곤 한다고 즐겨 지적한다.
6. 이와 같이 이원론자의 눈에는 모든 문화의 산물이 금이 가고 심히 비틀린 것처럼 보인다. 종합론자는 법과 사회제도의 합리적 속성에 대해 기뻐하는데 반해 이원론자는 회의적 태도를 품고서 그 모든 사회제도에 담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권력욕과 강자의 의지에 주목한다. 종합론자가 문화에 담긴 합리적 요소들을 변호할 때마다 이원론자는 이런 치명적 결함을 발견한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기적 속성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원론자는 급진적 그리스도안과 의견을 같이 하여 모든 인간 문화가 하나님을 부인하며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들과 이원론자가 다른 점은 자신도 그 문화에 속했기에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 문화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지탱하신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그 은혜로 지탱하지 않으면 그것은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이런 상황에서 이원론자는 역설적인 말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런 긴장 가운데 계시와 이성, 율법과 은혜, 창조주와 구원자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율법 아래 있지만 은혜 아래 산다. 그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그는 의심을 품은 신자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 있지만 불안감을 안도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지만, 만물은 태초부터 있던 그 모습 그대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으나, 그 계시 가운데 스스로를 감추기도 하신다.
8.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자의 응답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율법과 은혜의 역설, 그리고 신의 분노와 자비의 역설이다. 이원론자는 급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법이 만인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으며, 문화적 혹은 종합론적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교훈을 희석하는 것을 반대하며 그것을 문자적 의미로 진술하는 편을 택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법은 인간의 본성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되게 진술한 것이며, 영적 슈퍼맨을 위한 것이 안라 평범한 인간을 위한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그 법을 좇아 아무리 자기수양을 해도 죄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9. 이원론자가 보기에 자연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자비와 분노의 이중성을 가진 분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와 자비는 시종일관 얽혀 있는 관계다. 그래서 이원론자는 이 두 원리를 떼어놓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분노의 긴장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바울의 이원론적 특색
1. 바울의 사상을 보면 문화주의적 특색은 말할 것도 없고 종합론적 혹은 급진주의적 특색보다 이원론적 특생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종합론자는 문화로부터 그리스도로, 혹은 훈련가 그리스도로부터 구속자 그리스도로 움직이는데 반해 바울은 문화의 심판자요 구속자인 그리스도로부터 문화로 움직인다. 종합론자는 문화 자체가 불완전하나마 어떤 긍정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반해 바울은 문화가 일종의 부정적 기능, 즉 긍정적인 선을 증진하는 것이라기보다 죄가 파괴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바울의 두 가지 윤리는 삶에 내포된 두 그지 모순된 성향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는 중생과 영생의 윤리고 다른 하나는 죄를 억제하고 타락을 방지하는 윤리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원론자라 할 수 있다. 그의 두 윤리가 서로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로 통합된 체계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두 윤리가 두 개의 모순된 결과, 즉 생명과 죽음과 관련이 있고 두 개의 상이한 전선에 대한 전력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루터와 근대의 이원론
1. 마르틴 루터는 이 유형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성과 철학, 사업과 상거래, 종교 조직 종교 의식, 국가와 정치 등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지닌 것 같다. 그는 현세적 삶과 영적인 삶,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몸과 영혼, 그리스도의 통치와 인간의 노동 혹은 문화의 세계를 서로 뚜렷이 구별한다.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그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루터는 농민을 반대하는 소책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인데 반해, 세상나라는 진노와 가혹함의 나라다. 이 두 나라를 혼동하는 자는 진노를 하나님의 나라에, 자비를 세상의 나라에 둘 것이다. 그것은 마귀를 천국에 하나님을 지옥에 두는 것과 같다.”
2. 그러나 루터는 구별은 하되 나누지는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문화에 몸담은 삶, 하나님나라에서의 삶과 세상 나라에서의 삶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진노의 한 하나님에 대한 단번의 순종의 행위로 둘 다를 긍정해야지 이중적 충성심과 의무감을 가진 분열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루터는 종합론적 해결책은 배격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통일성과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삶의 통일성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3. 루터는 종합론적 해결책이 그리스도의 급진적 계명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소수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나 미래의 삶에만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종합론이 그리스도를 다른 스승과 구속자들과 너무 연결 짓는 바람에 입법자인 동시에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루터는 복음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절대적 주님의 절대적 요구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칫하면 배타적 기독교의 입장을 취해서 문화적 삶을 복음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배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법이 급진적 그리스도인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4. 또한 루터는 법과 약속으로서의 복음이 사람의 공공연한 행위와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라 행위의 원천과 관계된 것임을 깨달았다. 즉 그는 하나님이 복음을 수단으로 인간의 영혼을 재창조해서 그로 하여금 정말 선행을 하도록 만든다고 확신했다. 루터는 인간 스스로 자기 사랑을 극복할 수 없고 오직 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고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자기를 잊은 채, 이웃을 섬길 수 있을 때, 자기사랑이 극복된다고 생각했다.
5. 이것이 바로 루터의 이원론의 바탕이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삶의 근본문제를 다루시고 인간 행위의 원천을 깨끗이 하신다. 또 그분은 모든 행동이 일어나는 공간인 궁극적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재창조 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외적인 행위를 직접 다스리시거나 사람이 자기 업무를 수행하는 현장인 일차적 공동체를 건설하지도 않으신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별한 직업을 발견할 필요성과 신을 위한 특별한 공동체를 건설할 내적 필요성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수도원과 종교적 비밀집회에서 해방시켜 모든 평범한 직업을 통해 세상에서 이웃을 섬길 수 있게 해준다.
6. 루터는 이전의 어떤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가 문화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고 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강력하게 문화적 삶에서 따르는 규율은 그리스도의 법이나 교회법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철학이 믿음에 이르는 길을 제공하진 못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철학의 길을 따라 도달 가능한 목표에 다다르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롭게 된 사람의 경우 그가 가진 선천적 지혜나 교육은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요 작품이다. 정치활동이나 군인의 직업도 공동생활에 필요한 것이고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문화 안에서 일할 자유가 있으며 거기서 요구하는 전문적인 방법들을 선택할 자유도 있다고 말했다.
7. 결국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루터의 해결책이 지닌 이원론은 행동의 “방식”과 행동의 “내용”을 나누는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문화가 요구하는 것(행동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행동의 방식)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동의 내용은 이성과 문화로부터 나오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은 행동의 방식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루터는 어떤 영역에서 어떤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이성과 문화지만 그 일을 어떻게 믿음으로 바르게 수행할 것인지는 그리스도가 알려준다고 믿었다. 그는 문화는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 속에 있는 영을 새롭게 할 수 없지만, 새롭게 된 영혼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화영역에서 이웃을 섬기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8. 루터는 이 두 요소가 서로 연관된 것은 인정하나 그것들을 혼동하지 않고 서로 구별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는 둘을 서로 혼동하면 양자가 모두 손상을 입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질학 지식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계시를 쳐다보면 그 계시를 놓치고 만다. 거꾸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얻으려고 지질학을 쳐다보면 그분과 지질학을 모두 놓치고 만다. 만일 우리가 정치체제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하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를 볼 수도 없게 된다. 이 점에 대해 루터는 아주 분명한 입장을 표명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만 있는 경우에는, 믿음에는 그리스도의 법의 요구사항, 즉 도둑이나 폭군이나 원수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나 총독처럼 남을 보살필 책임이 있는 경우에는 아웃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에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비가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곳에서 자비를 발휘하든가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9. 진정한 루터교도는 시간과 영원, 분노와 자비, 문화와 그리스도 사이에 살기 때문에 인생은 비극인 동시에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이편에서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길이 없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한 루터의 응답은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사상사의 것이었다. 하지만 자칭 루터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재생산한 것을 보면 너무나 정적이고 비변증법적이다. 그들은 루터가 밀접하게 묶어 놓은 윤리를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가지 도덕으로 대치해 버렸다. 신앙이 매순간 하나님을 지향하는 인격적인 신뢰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모든 문화 영역에서 자율성을 확보하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루터의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문화의 세계에서 사랑으로 일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상호작용주의인데, 이를 루터의 후예들이 영적인 삶과 현세적 삶이 따로따로 평행선을 긋는 이원론으로 혼동되는 것은 커다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10. 우리 시대에도 여러 형태의 이원론적 견해가 존재한다. 가령 신앙과 과학은 전혀 다른 진리들을 각각 대표하므로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없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고 종종 주장된다. 사람은 두 영역에 몸담은 양성적 존재며, 한쪽에 접합한 관념과 방법을 다른 쪽에도 사용하면 안 된다. 이원론은 실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같은 이론적 정당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이런 이원론을 대표하는 인물인 로저 윌리엄스는 정치와 복음을 합치려 한 성공회의 종합론적 입장과 청교도의 변혁론적 입장을 모두 배격했다. 그 이유는 영적인 힘을 물리적 강제와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을 변질시키기 때문이고, 또한 정치영역에 전혀 생소한 요소를 끌어들임으로써 정치를 오염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1. 이원론적 해답은 문화를 옹호하는 자들의 이론과 실천에도 등장한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정치인, 경제생활의 자율성을 위해 싸우는 경제학자, 종합론자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제안한 이성꽈 신앙의 조화를 배격하는 철학자 등은 종종 전혀 反기독교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니콜라이 하트만은 기독교 신앙과 문화 윤리가 서로 대립한다고 보지만, 이 문제를 문화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이율배반적 관계로 남아있도록 내버려두려고 한다. 신앙의 근거를 이성의 영역에서 도무지 찾으려하지 않는 실증주의자조차 신앙을 무시하길 꺼린다. 이는 인간 실존의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12.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이원론적 입장은 도덕적 진지함과 이성적 깊이를 결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원론은 그리스도를 향해 약간의 경의라고 표하고 싶은 세상적인 사람이나 문화를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고 느끼는 경건한 영성주의자가 숨는 피난처일 수도 있다. 복음이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픈 정치인들과 가난한 작 천국을 유산으로 받는다는 소리에 귀를 막고 오직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인들이 이원론을 합리와의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이원론이 남용되는 것은 사실 다른 입장들이 남용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급진적 기독교는 위선적인 종교가들을 배출했고, 문화적 기독교와 종합론자는 권력욕과 오랜 우상숭배를 정당화하도록 허용했다. 이 가운데 어느 입장을 택하든 도덕적 일관성과 성실성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론 입장들 모두가 그리스도 아래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원론의 장점과 단점
1. 이원론은 중간기에 사는 그리스도인, 곧 은혜의 때에 갈등 가운데 살면서 마치 자신이 고대하는 그 영광의 때의 윤리에 의거해서 사는 것처럼 추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실질적 몸부림을 반영한다. 이 입장은 조직적인 운동을 펼치기 위한 계획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적 체험에 관한 강조라 할 수 있다. 이원론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실존에 스며있는 죄의 위력과 보편성을 망설이지 않고 인정한다. 이들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뿌리박은 그 죄를 인정한 면은 급진주의자와 종합론자들이 묘사하는 거룩한 국가와 완전한 사회보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자기와 교회에 대해 아는 바에 더 부합한다.
2. 이원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 인간, 은혜, 죄 등의 역동적 성격을 고려하는 면에서 단연 선두다. 급진적 그리스도인이나 종합론자의 신앙은 다소 정적인 면이 있는데 반해, 이원론자는 실존의 역동적 성격을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지식과 행위에 관련하여 독특하고도 위대한 기여를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과 정신 깊숙이 침투하여 생명의 원천을 깨끗케 하는지를 보여주는 등 그 사역의 깊이와 능력을 주목하게 해주었다.
3. 이들은 인간의 악에 대한 피상적인 분석들을 모조리 제쳐놓고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갖는지를 밝히 드러내려고 애썼다. 그런 통찰로 인해 그들은 기독교와 문화를 모두 활성화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한 점, 전투적 삶을 살도록 새로운 결의를 다진 점, 살아계신 주님을 대신했던 여러 관습과 조직으로부터 해방시킨 점 등이다.
4. 이원론에 대해 흔히 지적되는 두 가지 점은 하나는 도덕률 폐기론을 초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보수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사회의 법과 이성의 법 등 인간의 모든 업적을 상대화한 입장이 문명인의 삶에 필요한 규율들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절망적인 태도로 제쳐놓게 만드는 계기를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원론자가 의도적으로 법과 문화적 표준에 못 미치는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방종적인 자와 약자에게 시험에 저항하는 걸 그만두도록 유혹하진 않았더라도, 일종의 합리화 장치를 둔 책임만은 인정해야겠다.
5. 바울과 루터는 모두 문화적 보수주의자로 흔히 분류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고는 결과적으로 문화적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그들이 당대의 거대한 문화적 제도들과 관습들 가운데 단지 종교 제도를 변화시키는데 몰두했고 문화 영역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현상유지에 만족했던 것 같다. 이런 보수주의는 실로 이원론적 입장과 직결된 것 같다. 사회의 여러 제도, 법, 국가 등을 사회공동체에서 이웃을 섬기고 참된 삶을 증진하는 긍정적 통로로 생각하지 않고 죄를 저지하며 무정부 상태를 막는 억제력으로 간주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보수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원론자의 눈에는 그런 제도들이 죽어가는 한시적인 세계에 속한 것으로 비칠 뿐이다. 이원론은 일시성 혹은 유한성을 죄와 연관 지어 창조와 타락을 대단히 가까운 이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불공평하게 취급한다.
6장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2019-09-09 23:09:27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6장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신학적 신념
1. 우리가 전환론적 응답이라고 부르는 이것을 제시한 자들은 확실히 교회의 주류 전통에 속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과 문화 속에 있는 사람의 사역을 서로 뚜렷이 나누지만 배타적 기독교처럼 문명에서 고립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들은 주님에 대한 순종의 일환으로 사회적 의무를 받아들이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날카로운 심판을 수정하려 들지 않는다. 기독론에 있어서는 종합론자 및 이원론자와 비슷한 견해를 갖는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법을 주는 입법자로서보다 구속자로 부르며 하나님을 인류 최고의 영적 자원을 대표하는 존재로서보다 사람들이 실존적으로 만나는 분으로 부른다.
2. 죄를 이해하는 면에서는 전환론자들이 종합론자보다 이원론자에 가깝다. 그들은 죄가 사람의 영혼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만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국가의 일원으로서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수행하는 모든 문화적 작업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점도 주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문화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인은 주님에 대한 순종의 일환으로 문화적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3. 전환론자가 이원론자와 다른 점은 문화에 대해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긍정적 입장은 세 가지 신학적 신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창조와 관련된 것이다. 이원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에 너무 집중하기에 창조를 위대한 속죄 사역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서문 정도로 취급한다. 이에 비해 전환론자는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창조 행위를 하나의 중심 주제로 여긴다. 이 주제는 속죄의 개념에 압도되지도 또 속죄의 개념을 압도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 능력과 섭리에 힘입어 산다고 믿는다. 비록 아직 구속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신의 진노 아래 헛된 것들 가운데 산다고 믿을지라도 말이다.
4. 창조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지닌 전환론자의 문화론은 여러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전환론은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섭리행위에 대해 긍정적이고 질서정연한 반응을 보일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창조에 대한 이런 관심과 관련하여 이원론자에 의해 무시되어 온 기독론의 새로운 국면을 개발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측면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 그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아들의 죽음, 부활, 재림에서뿐 아니라 그의 성육신에서도 발견한다. 이는 창조와 구속, 성육신과 속죄 등 여러 주제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묶으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을 창조 및 성육신과 연결하는 견해는 문화에 대한 관점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던 그 말씀, 이 창조세계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아들은 언제나 그분의 섭리로 존재해 왔던 인간 문화 속으로 들어오셨다.
5. 인간의 일과 관습에 대한 전환론자의 견해를 특징짓는 두 번째 신학적 신념은 인간의 타락을 보는 관점이다. 이원론적 그리스도인은 문화적 제도들이 한시적이고 타락한 세상에서 소극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환론자는 이원론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을 믿는다. 그러나 그는 타락과 창조, 타락과 몸을 입은 실존적 상태를 아주 뚜렷이 구별한다. 타락은 창조가 역전된 것이지 결코 창조의 연속이 아니다. 타락은 완전히 인간의 행위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지 신체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는 이원론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락한 상태를 위한 질서가 아니라 타락된 질서인 셈이다. 그것은 악이 아니라 왜곡이며 존재 자체가 악하게 된 것이 안라 그 방향이 왜곡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방향 전환의 문제이지 새로운 창조에 의해 다른 것으로 대치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6. 전환론자는 역사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들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담은 이야기로 생각한다. 이들은 다른 유형의 그리스도인과 달리 “중간기”에 산다는 생각은 좀 희박하고 신적인 “현재”에 산다는 생각은 좀 강한 것 같다. 종말론적 미래가 이들에게는 종말론적 현재가 되었다. 따라서 전환론자는 창조 때 주어진 것을 보존하는 문제나 최후의 구속 때 주어질 것을 준비하는 문제보다 현재 하나님이 행하시는 갱신 작업에 더 관심이 있다. 전환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을 역사로 보는 만큼, 창조세계와 문화가 결국 마감되는 그 날을 기대하며 살기보다 만물을 자기 자신에서 끌어올려 그것들을 변혁하는 주님의 권능을 의식하며 산다.
제4복음서의 전환론적 특색
1. 요한복음은 말씀을 통한 창조와 말씀의 성육신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 전체에 대해 긍정적인 관계를 맺으신다는 신념을 표명한다. 창조란 곧 구속이 행하는 그것을 의미한다. 제4복음서가 가진 분명한 역설의 하나는 창조세계 전체와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류를 지칭하는 말인 “세상”이란 단어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어둠 가운데 살며 악한 짓을 일삼고,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그 아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요한이 두 가지 별개의 실재, 곧 물질의 세계와 영의 세계, 혹은 마귀의 세상과 하나님의 세상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요한복음에는 타락의 개념, 곧 선하게 창조된 것이 왜곡되었다는 사상이 깔려있다.
2. 요한은 아버지, 아들, 세상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하나님은 선한 존재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 공존한다는 확신에다 역사에 대한 견해를 통합한다. 그의 역사관에서는 현세적 차원들이 대체로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종속된다. 이와 같은 역사관에 내포된 전환론적 주제는 요한이 인간문화와 그 제도들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에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유대주의, 영지 주의, 초기기독교 성례에 대한 요한의 양면적 태도는 그를 전환론자로 생각해야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양면적 태도는 당시 문화적 종교사상을 기독교적으로 변혁하려는 전환론적 견지에서 볼 때야 더욱 이해하기 쉽다. 요한복음은 종교적 문화와 인간 제도들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인간 행위의 전환자요 변혁가로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3.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사람의 영이 중생함으로 문화생활의 방향이 전환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육신한 말씀, 부활한 주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보혜사에 의해 모든 인간의 영이 중생하는 일과 모든 문화적 존재가 변혁되는 일은 그의 안목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은 전환론적 모티브를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분리주의와 합친 셈이다. 이처럼 전환론과 분리주의를 합친 예는 주후2세기에 쓰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편지에는 두 가지 진술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혁된 문화적 존재양식이라는 주장과 영혼이 몸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세상 속에 있다는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인류가 문화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 완전히 전환될 것을 바라보는 소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문화의 방향 전환
1.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보편적인 중생에 대한 기대는 주후4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더욱 선명하게 등장한다. 물론 그 당시에도 아직 방향전환의 개념이 완전한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전환론자들이 요한복음의 경우처럼 양대 전선에서 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배타적 기독교의 반문화주의를 상대로 한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적응주의를 대상으로 싸운 것이다. 이 두 가지 성향은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 수용됨에 따라 더욱 강력한 추진력을 얻었다.
2. 찰스 코크레인은 이교도의 원리를 삼위일체 원리로 대체하여 인간사회의 중생을 이룩하는 일이 아타나시우스와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시작되어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절정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에 의하면 전환론적 특색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이나 천상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를 반립관계로 본 것은 그의 사상이 급진파와도 가까움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문화적 기독교와 손을 잡게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리스도에 대한 문화적 변혁을 주창하는 신학자로 해석하는 입장은 그가 정립한 창조, 타락, 중생의 이론,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의 내력, 그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과 맥을 같이한다. 그의 눈에 그리스도는 문화를 변혁하는 분으로 비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 곧 본래는 선한 것이었으나 현재를 타락하고 왜곡된 상태로 변질된 인간의 모든 일을 거듭나게 하고 다시 활성화하며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4.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 좋은 것이긴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18세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옳은 것이라든가, 오직 사회제도들만 나쁜 것이어서 원시상태로 돌아가면 지복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타락했고 그의 문화도 타락하게 된 것은, 타락한 본성이 타락한 문화를 낳고 타락한 문화가 본성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인간의 이런 타락이 인간 자체가 나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한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본성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마귀의 본성조차 악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본성인 한, 타락했기 때문에 악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근원적인 죄의 결과는 인류의 사회적 타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회적 악은 기본적으로 선한 창조질서의 존재에 의존해있다고 보았다.
5.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그리스도는 이처럼 타락한 자연과 문화를 가진 인류에게 찾아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하고 몸을 다시 소생시키신 분으로 이해한다. 그분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인간의 뿌리 깊은 죄를 밝히 드러내셨다. 또 계시와 가르침을 통해 인간 영혼을 그 존재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시 붙이시고, 그에게 올바른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키며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게 하신다. 그는 사람들이 타락한 문화에서 함양하는 도덕적 미덕들은 새로운 은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그 성질이 전환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 이성의 삶이 새로운 근본 원리를 부여받아 그 방향이 바뀌고 재정립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문화는 인간의 사람의 방향전환에 따른 수혜자인 동시에, 그분의 창조세계를 즐거워하고 모든 피조물을 섬기는 새로운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6. 만약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환론적 관념만 따라가면, 그를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지향하면서 전 세계적인 조화와 평화의 비전을 내놓는 인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방향을 자기 사상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해 입증되고 약속된 그 거대한 종말론적 사건의 실현을 기대하지 않았다. 창조와 타락을 거친 인간 세상의 구속과 인류의 모든 문화 활동의 변혁이 일어나는 그 날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대신 그가 제시하는 종말론적 비전은 일부 선택받은 인간들이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저주받은 이들과 영원히 따로 공존하는 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인간 본성 및 문화에 대한 전환론적 견해의 토대를 놓았던 신학자가 그런 신념에 따른 자연스런 결ㄱ하를 도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다.
7.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어적 입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서 죄와 은혜의 고백에 이어, 이방인들의 비난에 직면하여 교회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화의 방향전환에 대한 희망에 등을 돌리고 기독교 문화의 변호, 곧 기독교 사회의 제도와 관습들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다. 이처럼 자기 정당화 쪽으로 돌아선 결과, 그의 기독론은 바울이나 루터의 기독론에 비해 비교적 약하고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그 영광스런 비전이 서로 영원히 떨어진, 두 부류의 인간들로 구성된 두 도성에 대한 이원론적 비전으로 바뀐다.
8.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하게 전환론적 관념이 그의 사상과 활동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그는 복음이 약속하고 또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과 문화 등 인류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나라로 변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이 삶이 모든 영역에 스며들기를 기대하는 정도는 루터를 능가한다. 그러나 칼뱅에게도 그리스도가 인류의 망가진 삶을 변혁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희망이 육체적 죽음의 종말론과 일부 인간이 현세의 삶과 영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분리된 영광의 삶으로 구속될 것을 바라보는 종말론으로 바뀌고 만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대립관계에 한시적 존재와 영원한 존재의 이원론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의 이원론까지 덧붙인다. 칼뱅주의는 그리스도에 의한 변혁을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희망과 그 실현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그 특징으로 삼아왔으나, 거기에는 항상 분리적이고 억압적인 색체가 루터주의보다 더 농후하게 깔려있다.
모리스의 견해
1.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란 관념이 다른 윤리적 유형들과는 달리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교회 역사에서 완전성(perfection)의 개념이 얼마나 끈질기게 내려왔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웨슬리가 바로 이 완전주의를 대표하는 위대한 개신교 지도자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의 약속이 현재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관심사는 현세적 인간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 또 그 사랑을 향해 살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요한의 사상이었다.
2. 조나단 에드워즈, 톨스토이, 리츨, 키에르케고르, 레오13세 등으로 대표되는 19세기는 전환론적 개념을 옹호하는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그 가운데 모리스(1805-1872)라는 영국신학자가 있는데, 그는 요한의 사상을 따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곧 자기 땅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왕권을 행사하는 분은 성육신한 말씀이 아닌 다른 대리자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상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공동체는 단지 인간의 공동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즉 인간들이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 공동체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과 또 서로서로 하나가 되어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분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공동체를 이루는 그런 인간 존재를 구속하실 뿐 아니라 창조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삶의 진정한 본질과 사회의 법을 계시하신다.
3. 모리스는 사람의 뿌리 깊은 질병, 곧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갖는 자기모순은 바로 자신의 실존적인 법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은 신체적 유익이든 영적 유익이든 서로 주고받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것을 혼자만 소유하려고 애쓴다. 모리스는 우리가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타락하고 비참한 우리의 상태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 모리스가 가장 일관성 있는 전환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는 왕이시므로 인간은 자신의 죄보다 그분에게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을 꽉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죄를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원칙으로 여길 경우에는 자기모순의 심연에 더 깊이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리스는 죄를 모든 신학의 근거로 삼는 독일과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이유로 모리스는 모든 이원론적 경향을 배척하고 적극적 활동으로부터 소극적 황동으로, 협조로부터 비협조에 대한 공격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도모하는 노력으로부터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과의 싸움으로, 죄인의 용서로부터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4. 인류가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환되는 일은 현재 보편적으로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모리스는 생각했다. 보편적이란 말은 거기에 모든 인간이 포함된다는 의미다. 모두가 그 말씀 안에서 창조되었고 실존하는 영적인 조직 아래서 사는 만큼 그리스도의 나라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란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온 인류가 하나님을 다스림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도록 교회가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모리스는 그리스도인의 증언 내용에 이중 예정론과 영원한 형벌 교리를 포함하는 것은 부정적인 기독교에 기인하는 일종의 탈선이라고 생각했다.
5. 모리스에게 인류 보편적인 구원은 개개인이 진정한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말씀을 통해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각각 별개의 인간 조직들을 하나의 새로운 보편 사회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조직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보편적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낮아짐과 높아짐의 과정을 거쳐 변혁되는 것을 의미한다. 낮아짐이란 그 몸의 지체들이 자기가 모리가 아님을 기꺼이 받아들을 때 일어나는 것이고 높아짐이란 그들이 머리와 다른 지체들을 섬기도록 각기 특정한 일을 부여받았음을 알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모리스는 사회관습, 정치제도, 언어, 경제조직 등 문화의 모든 국면을 다루었다. 현존하면서도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소명과 기독교 민족주의를 논하는 개신교, 철학과 사회도덕을 중시하는 토마스주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가톨릭, 특별한 진리를 부각하는 종파주의 등 이 모두가 합쳐서 위대한 진리, 곧 인간의 문화 가운데 그리스도가 다스리지 않는 영역이 하나도 없고 자기 의지 위에 군림하는 그분의 변혁의 권세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의 작업은 전무하다는 진리를 확증해 준다.
6. 모리스는 이 보편성의 원리를 즉각적 종말론과 서로 결합했다. 영원이란 그에게 시간의 부정이 아니라 신이 활동하는 차원을 의미했다. 창조란 것이 시간이 생기기 전의 하나님의 작업이 아니라 영원한 그분의 작업이었던 것처럼, 구속이란 것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한시적 행위에 맞서 펼치시는 영원한 작업을 의미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다스리시고 앞으로도 다스릴 분이다. 인류가 기대하는 더 나은 질서는 새로운 창조가 가져올 물리적 조건의 변화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 모리스는 장래에 대해 소망을 가지라고 격려했으나 현재 우리 삶의 신성함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미래만 바라보는 기대감은 결코 부주키지 않았다.
7. 근대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전환론적 사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물이 모리스다. 그는 말씀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에 문화에 대해 시종일관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는 문화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 등 문화전반이 타락했다고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적응주의가 아니라 전환론적 입장을 철저히 견지한다. 그는 몸으로 말미암은 영적 타락의 개념과 인류를 구속받은 자와 정죄 받은 자로 구분하는 관념을 모두 배격하기 때문에 결코 이원론에 빠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죄에 대한 소극적 행동을 배격하고 교회와 공동체 내에서 믿음에 입각한 적극적이고 하나님중심적인 행동을 언제나 요구하는 면에서 일관성이 있다.
7장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
2019-09-16 19:58:51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7장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
최종 결론으로서의 결단
1. 우리가 이 주제를 아무리 연장하고 정교하게 연구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틀림없는 정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다양한 유형들이 완전히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과, 이 다양한 입장들이 여러 지점에서 서로 화해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틀림없는 대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이 그런 정답을 제시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찬탈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아직 끝나지 않은 교회의 역사에 해를 끼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시도를 하고 싶다면, 교회와 역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그야말로 결정적인 위치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듣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 전체를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 말씀을 해석하고 그에 순종할 때, 우리가 유한한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마치 인류를 대표하는 보편적인 것인 듯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에 대해 비교적 포괄적이고 똑똑한 대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 대답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도덕적인 정언명령- 그대는 거기까지만 가고 더 이상 나아가지 말지어다. -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
2. 그러나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결론에 도달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단계는 지식의 차원에서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적인 숙고에서 행동으로 통칠에서 결단으로 움직일 때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편히 앉아 글을 읽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재 벌어지는 전쟁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일종의 도약이 있어야 자기 나름의 최종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현실을 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어느 유형을 선택하여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어떤 유형에 속한 존재인 동시에 그 이하의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3.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에 어떤 응답을 했는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거나, 무슨 추론과정을 통해 그들 나름의 자유롭고 상대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그 대상 및 그 대상을 믿는 모든 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 맥락을 의식하는 가운데 결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최선을 다해 그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그 맥락 안에서 자기 의무를 다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이러한 결단은 개인적 결정이지만 개인주의적은 아니며 자유로운 결정이지만 독립적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실존적 결정이지만 역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신앙과 상대주의
1.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과 관련하여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 면에서 상대적인 성격을 지닌다. 첫째, 그것은 개인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단편적 지식에 의존되어 있다. 둘째, 그것은 본인의 신앙의 분량에 따라 좌우된다. 셋째, 그것은 개인의 역사적 위치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넷째, 그것은 사물의 상대적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2. 정치, 경제, 의료 등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아는 사물의 본질과 자연현상에 기초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최선이란 것도 언제나 단편적인 사회적 지식과 이보다 더 단편적인 개인적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해결책과 결정이 상대성을 갖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신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한 그리스도인을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신앙의 단편을 가진 건 아니지만 우리 신앙은 단편적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추론하고 행하면서 기독교적 응답을 내놓을 때도 부분적이고 조각난 신앙에 기초해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 응답 속에 왜소한 기독교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많다.
3. 우리의 추론 작업과 결정이 역사적 문화적 상대성을 안는다는 사실은, 지식의 역사적 변천을 고려해도 알 수 있고 역사적 과정이나 사회구조에서 우리가 맡은 책임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역사적 상황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의 사회적 역할이 지닌 상대성으로 인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책임을 지닌 특정한 한 사람으로서 결정을 내리고 추론작업을 수행하며, 경험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릴 때마다 고려해야만 하는 가치의 상대성이 존재한다. 진리는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영원한 가치를 지니지만, 인간의 이성, 인생, 사회, 질서, 자아 등과 관련해서는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모든 문화적 활동은 사람, 관념, 자연의 물체, 자연의 과정 등이 모두 상대적 가치와 관계된 것이다.
4.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대성을 인식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절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대성이 모두 종속되는 무한한 절대에 대한 신앙과 함께 자신의 상대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믿음의 확신과 겸손한 태도에 입각해서 신앙도 고백하고 결정도 내릴 수 있다. 여기서 겸손한 태도란 그 절대자와 동등한 관계를 맺는 타인들과 자신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로부터 교정도 받고 심지어 그들과의 갈등까지 수용하는 그런 자세를 뜻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단편적이고 상대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자기에게 진리인 것을 확신 있게 진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완전힌 진리이고 그것만이 진리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독단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5.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리스도가 무엇인가를 진술할 테지만 자신의 상대적 진술과 절대적 그리스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모리스가 J. S. Mill 로부터 배운 원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긍정하는 것은 옳은데 자신이 부정하는 것을 틀릴 때가 많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보통 우리의 경험 바깥에 있는 것이라 그에 관해 할 말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화가 악하다고 해서 톨스토이처럼 그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이 상대적인 관점을 초월하여 하나님처럼 판단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셈이다. 신앙은 한 가지 절대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신자의 상황과 지식의 상대성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실함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상대성을 분별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신앙이나 사회적 신앙을 절대시하려고 애쓸 것이다.
6. 우리가 당연히 인격, 사물, 운동 등 상대적 가치를 지닌 것들을 다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상대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가치를 지님을 기억할 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내 이웃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가치만 생각하고 타인들에 대해 갖는 가치를 무시한다면 상대적인 정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어지는 게 사실이다. 반대로 이웃이 나와의 관계에서 갖는 가치만 생각할 경우에도 정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우리가 이웃을 생각할 때, 그가 맺는 이웃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는 가치를 모두 고려하여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상대적인 정의가 들어설 여지뿐 아니라 절대적 관계에 비추어 상대적인 판단을 내리고 또 그것을 수정할 여지도 있게 된다.
사회적 실존주의
1. 우리가 문화사의 흐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려야 할 결정은 상대적 성격을 지닌 동시에 실존적 성격을 지닌다. 키에르케고르는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주관적인 진리를 오직 신앙과 결단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 결단은 주체에 속해있다. 그리스도이닝 되는 것은 기독교의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어떻게]에 달려있다. 이 [어떻게]가 바로 신앙이다.” 이는 우리의 당면한 문제, 곧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와 관련해 내려야 할 선택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결단을 해야 할 처지에 있다. 역사와 심사숙고를 넘어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인 책임을 지고 우리에게 옳은 것에 기초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결단이 개인적이라고 해서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 홀로 내리는 결정이 아니란 의미다. 절망이나 신앙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이 실존적인 문제는 단순히 “나”의 견제에서만 진술될 수 없다. 거기에는 “우리”가 개입되어 있으며 “나”라는 존재 각각은 “우리”의 구원이나 심판 안에서 자기 운명을 접하게 된다.
2. 물론 실존적 질문들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개인적, 개별적 자아를 잊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실존적 의문이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독존적안 생태에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동료관계 속에서 가장 뜨겁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적 인간이 던지는 실존적 의문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개별적 결정이 개인주의적인 아닌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내게 옳은” 진리에 기초하여 독자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면하는 그리스도는 그분을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동떨어진 그런 고립된 그리스도가 아니다. 물론 그분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없다면 그런 증언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참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증인들이 없으면 나는 그리스도를 내 마음대로 상상하게 될 것이다. 권위 있는 매체와 증인이 없이 내게 말씀하시는 그런 그리스도는 실제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는 역사상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기대나 강박관념이 투영된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이제까지 우리는 현재의 결정적 특성을 강조하고 그것과 우리가 사색하는 과거나 미래 혹은 초시간성 사이에 불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우리의 현재적 결정이 과거 및 미래와 연결되지 않는 비역사적인 현재에 이루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매순간은 기억과 기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매순간마다 우리가 과거에 만난 적이 있는 타자와 장차 만나길 기대하는 타자가 현존한다. 이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자아가 여기에서 홀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4. 그리스도인의 경우, 본인의 문화적 활동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충성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현재의 결단은 언제나 이와 같은 역사적 결정이다. 신자는 자신과 함께하는 동시대적인 인물인 그리스도를 대면한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며, 기억되는 존재인 동시에 기대되는 존재다. 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역사적 관계를 갖는다. 그리스도인은 본인 및 그리스도와의 역사적 관계를 가진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과거에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했고 지금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와 함께 하는 그분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죽은 자가 생물학적으로 실존하는 자 못지않게 속해있는 그런 역사를 가진 인류와 동시대인이다. 우리는 보편적 교회, 곧 모든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동시대에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결단을 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원 속에 거하는 그분이 행한 역사적 행위들, 우리가 기억하는 그 행위들에 의해 거룩하게 된 역사적 존재들 앞에서 내리는 결단이다.
의존된 자유
1. 우리가 자유롭게 결정하는 이유는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우리가 비록 자유롭게 선택할지라도 독자적으로 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가치들과 권세들 가운데 그것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선택을 해야만 인간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보다 앞선 선택이 언제나 거기 있으며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리며 살 때 이전에 내려진 선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유로운 결정을 할 때, 이처럼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기원들에 의존할 뿐 아니라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결과들에도 의존한다.
2. 이처럼 의존된 자유의 실존적 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한 궁극적 문제는 우리가 이성이나 신앙 중 어느 것에 맞춰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을 활용하되 신앙을 갖고 택할 것인가 신앙 없이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신앙 없이 선택한다는 것은 의지할 수 없는 우연에 자기 존재를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그런 인간의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결정에 대해 추론할 때는 우연의 요소가 그 선택의 내용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작동하는 일종의 자의적인 자유가 우리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속에서 스스로 고개를 치켜든다.
3.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신앙 안에서 선택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신앙이 마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처럼 논하지만, 자세히 보면 오히려 삶과 이성 이상으로 신앙이 하나의 능력이요 가치이며 신앙을 위해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 같다. 여기서 신앙은 우리가 동의하고 영접하고 견지해야 할 일종의 선이지, 우리가 독자적인 자유를 품고 창조해 내고 선택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신앙은 모든 추론작업보다 앞선다. 왜냐하면 대의(진리든 생명이든 이성이든)가 없으면 추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그 대의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좌절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4. 여기에 두 갈래의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나는 충성스런 타자를 신뢰하고, 믿을만한 타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신앙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내가 충성하는 그 대의에 중성을 다하는 모든 자에게 충성스럽게 행한다는 의미도 있다, 만일 진리가 나의 대의라면 나는 진리에 충성할 의무가 있고, 그 진리에 충성하는 모든 자와 그 진리에 신실하게 대하는 자들에게도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다. 진리에 대한 나의 신뢰는 그 진리를 따르는 모든 동반자에 대한 신뢰와 떼어놓을 수 없다. 신앙은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둘러싼 충성과 신뢰의 양겹줄이라고 할 수 있다.
5. 대의와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신뢰가 없으면 실존적 자아는 자유를 행사할 수도 없고 생각하면서 살 수도 없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깨졌고 모양도 이상하다는데 있다. 우리의 대의들도 너무 많고 서로 충돌하며 한 가지 대의에 충성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대의를 배신한다. 이 지점에서 커다란 불합리성이 들어온다. 그것은 무한자의 성육신, 절대자의 현세 진입이라는 불합리성이다. 여기서 불합리한 것은, 하나님께 절대 충성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과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 신실한 하나님 안에서 신앙이 창조된다는 점이다. 이 신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건을 통해 우리 역사 속으로 우리 문화와 우리 교회와 우리 인간 공동체 속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그 신앙을 품으라는 요청이 왔다.
6. 이 신앙에 토대를 두고 우리는 추론 작업을 한다. 신앙에 근거할 때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이제는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신앙을 신조의 형태로 명시화하려는 종교집단의 노력을 훨씬 뛰어넘어 문화 전반에 걸친 우리의 추론 작업에 토대를 제공한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 우리의 충성, 우리의 신뢰가 너무 작아서 언제나 신앙 없는 상태로 빠지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신앙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는 것을 아는 가운데서도 실존적인 현시점에서 신앙 안에서 의사 결정을 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늘 신실하게 대해주신 그 많은 신자에 의해 우리가 교정되고 용서받고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7. 우리가 신앙 안에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어느 한 인물이나 집단이나 시대도 보편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유념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 안에 몸담으면서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일도 감당할 수 있는 교회,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교회도 존재한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세상의 구속자가 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세계(인간의 업적)가 은혜의 세계(하나님의 나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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