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로- 최종원
2019-09-22 22:07:46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로
01 텍스트를 넘어서 콘텍스트를 읽다
나는 왜 인문주의자인가
교회라는 콘텍스트에서 믿는다는 것은 정밀한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사람의 가치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현재의 가시적인 교회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뭉뚱그려 우리는 ‘인문주의’ 라고 표현한다. 인문주의는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보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인간이라는 존재는 교의와 도그마 속에 객체가 되고 틀 속에 압도당할 수 있다. 또한 신학적 경계 안에서 설명 가능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강박을 넘어설 수 없다. 창조과학이건, 이슬람 혐오건, 여성에 대한 차별이건, 한국교회는 지금 그 모든 정당성을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는 것으로 환원하고 있지 않은가.
이 틀 속에서 갖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람을 질식시킬 수밖에 없다. 이 틀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엄정한 신학적 사유보다는 품이 넉넉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필요한 상상력은 무엇일까? 교회에 대한 관념적이고 당위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 그 출발일 것이다. 지금의 여정은 비난과 비판, 풍자에 머물기보다 우리가 놓쳤던 또 다른 인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함께 희망을 찾는 것이다.
교회여,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고민하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성경시대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지키자는 의미를 넘어 중세의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새 종교, 새 구조를 만들자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순서는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사회와 문화, 공동체를 읽어 내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천착한다면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토대인 콘텍스트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해석을 전제하지 않으면 텍스트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이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인간에 대한 그들의 특수해 보이는 가치가 보편적인 신적 가치의 반영이었다는 데 있다. 오늘 기독교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은 포스트모더니즘, 이슬람, 동성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기독교의 외피를 입은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 갇혀 있는 현실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문화적 혈통적 인종주의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한 헬레니즘 및 유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교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오늘 몸담고 있는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느냐, 사회가 교회를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나간다면 교회에는 희망이 있다.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성찰
이제 복음주의자가 그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으로 등장하게 된 행동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는 인간을 차별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관에 반하는 차별, 혐오에 맞서야 한다. 사회 개혁에 힘을 보태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복음주의자라면 마땅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지지해야 한다. 복음주의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로 규정되어야 한다. 복음주의의 존재감은 복음의 공공성을 이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에서 드러나야 한다.
면벌부는 살아있다
면벌부 시행은 교회가 대중에게 부과했던 일방적인 은전으로 보기보다는 수요와 공급의 쌍방향 관점에서 봐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권위라는 위로부터의 부과와 대중의 구원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욕구가 결합하여 생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면벌부의 일탈은 진노의 날을 면하고자 하는 대중의 두려움과 이를 악용한 교회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소산이다. 면벌부는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가장 구체적이고 안전한 자선행위이자 연옥의 교통을 획기적으로 줄여 줄 가장 높은 배당이 보장된 펀드였다. 화폐경제의 발전은 면벌부 구매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했다.
루터가 면벌부를 통해 비판한 것은 당대 교회의 오남용이었지만 인지했든 못했든 그는 결과적으로 중세 신학의 불안한 고리를 끊었다. 그 고리를 끊고 유럽을 나눈 것은 면벌부 자체가 아니라 면벌부를 둘러싼 교회와 대중의 욕망이었다. 실제로 면벌부가 용서한 것은 내세의 잠벌이 아니라 현세의 인간 욕망이었다. 교회가 면벌부 판매의 소구점으로 삼은 것 역시 내세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하는 인간의 현재적 욕망 자극이었다.
개신교가 형성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현재와 내세에 대한 욕망과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세에 면벌부를 구매함으로써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게 됐든, 이 땅에서의 성실하고 금욕적인 삶과 그에 따른 성취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다. 또한 구원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받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주어진 소명을 감당했다.
종교적 금욕과 자본의 욕망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중세 말 면벌부가 자본과 결합하면서 확대되었듯, 개신교도 자본주의와 사이좋게 발전했다. 구원은 내세에 약속되는 것일 뿐 아니라 현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되었다. 신의 예정을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자본에 대한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해 주는 면벌부로 작용할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이 땅의 성취를 곧 신의 소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기에 현세적 성취와 자본의 소유는 모든 문제를 정당화해주는 면벌부 역할을 한다. 논리를 거칠게 확대해 보면, 어쩌면 대형 교회는 종교적 심판 및 구원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 현실적 구원에 대한 개인의 욕망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대중이 면벌부를 파는 면벌수사를 경계하고 면벌부를 욕망하는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면벌수사의 인격과 능력에 집중하는 것은 초점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대형교회에 다니거나 욕망하는 대중이 던져야 할 질문이다. 반사회적 행위로 법적인 단죄와 사회적 지탄을 받은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이유로 영혼을 저당 잡혀 준 이들은 더 이상 자유의지를 지닌 시민이 아니다. 이제는 두려움대신 믿음을 갖고 조금은 더 주체적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내면의 욕망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것이 손쉬운 성취를 약속하며 다가오는 면벌부의 유혹을 이겨내는 힘이다.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 할 때
종교개혁의 핵심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이 아니다. 핵심은 근대사회가 열리면서 생긴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 재정립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새로운 근대 세계 속에서 국가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동일한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의 가르침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는 교회국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근대세계는 국가가 종교를 결정하는 국가교회로 탈바꿈했다. 근대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점은 변화된 근대국가의 상황에서 교회가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종교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21세기에 교회가 한국 사회 문법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냉정히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루터에 집중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개혁의 정신에 집중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사상을 참조할 수는 있겠으나 21세기 문법에 맞게 만들어 가는 것은 오롯이 우리가 오늘의 콘텍스트와 씨름하면서 해야 할 일이다. 교회가 각각의 콘텍스트에서 각각의 상황에 맞게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은 그 시대의 맥락에 부합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주류교회가 시대의 문법을 읽지 못하거나 읽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그 도피처로 제한된 경전 텍스트에 자신을 가두고 붙잡고 씨름한다. 그러나 시대의 콘텍스트에 대한 고민에 기반을 두지 않을 경우, 루터도 칼뱅도 심지어 성경 텍스트도 해답을 줄 수 없다.
02 한국교회를 넘어서 보편교회를 고민하다
명성교회 세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명성교회 세습은 예외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은 한국 교회 구조 속에서 일반적으로 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교회는 분명 세속을 초월하는 조직이지만 결코 세속을 등지고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정신적, 영적으로 지향하는 이상이 있지만 제도로 구현되는 것은 오롯이 그 시대의 콘텍스트 내에서다. 근대의 모든 관심은 이성과 합리를 활용한 효율의 극대화이다. 물론 기독교 내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효율성이 위대한 선교의 시대를 열었다는 결과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인 선교를 위해 가장 효율적일 것 같았던 방식이 어느 순간 가장 획일적이면서 다양성을 거부하는 퇴행으로 드러난다. 신학은 급속도로 교회를 위한, 교회 내 학문으로 좁혀졌다. 이러한 협소함이 세상과 소통하고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을 막는 여러 방어기제들을 생산했다. 다시 신학의 지향은 교회를 넘어 세상을 향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제도 속에 길들여지게 할 수 있는 위험을 원천적으로 안고 있다. 한국 대형 교회 교인들이 성찰 수준이 일반 대중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성경과 사회를 읽어 내지 못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현실의 교회, 인간의 탐욕, 그럼에도 지향하는 초월이나 구원에 대한 논의는 어쩌면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일 수 있다. 이제라도 긴 호흡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차근차근 다시 읽고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문제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 새 관점을 가져다줄지 모를 일이다.
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 그리고 대형교회
대중이 권력에 의해 학습되고 내면화된 공포를 인식하기 전까지는 독재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가장 평범하고 순박한 장삼이사가 가장 전투적으로 독재에 옹호할 수 있다. 오늘 대중 독재 패러다임이 교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스캔들, 심지어 사회법과 사회 인식을 거스르는 행위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교인들의 자발적 동의를 공통 기반으로 한 대중 독재의 사례이다. 대중이 원하기에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무모함은 그 내부에 대중독재의 패러다임이 작동한 결과이다. 대형 교회에서는 더 이상 대중이 신앙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 매커니즘에서는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우중이 되기 쉽다. 교회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고 위기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겠으나 이는 교회가 타자에게 일상적으로 획일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21세기 한국 교회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줄어드는 교인이 아니라 대중독재의 주술에 사로잡힌 교회에서 드러나는 일상화된 파시즘의 목소리이다. 지금도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퍼지는 모든 종류의 혐오는 일상화된 파시즘과 다름없다.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여과 없이 제기되는 반이슬람, 반동성애, 창조과학, 맹목적인 이스라엘 칭송.... 오늘 다수의 한국 대형 교회가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현실을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수없이 회자되는 교회 위기의 근본 원인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정서나 신학적 혼란이기보다는, 교회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기독교의 외피를 입은 일상적 파시즘을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오늘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교회는 국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교회하면 자칭 애국보수가 떠오르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교회는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불편할지 모르지만 그 뿌리를 찾아갈 때 우리는 오늘 기독교가 고민하고 돌이켜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적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국가라 해도 궁극의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개별 국가가 요구하는 가치가 인류 보편의 가치와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가치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기에 연대하여 실천하는 것이 요구되기도 한다.
목회를 성직이라 믿는 이들에게
성직주의는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변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종교가 바로 마조히즘(피학대음란증)의 형태를 띨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인간이란 자신보다 우월하고 강력한 존재에게 복종함으로써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독과 허무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카리스마를 갖춘 종교의 교주는 사디즘(가학대음란증)을 보인다. 이 구도 속에서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에서 성추문이 만연한 것은 전혀 낯선 현상이 아니다. 고민할 점은 정통 그리스도교 내에서도 동일한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목회는 성직이 아니다. 목회자는 더 특별한 신분이 아니다. 교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목회자나 일반 신자 모두 이 사실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성직주의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야 한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특별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특별함을 고집하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성직주의는 깨어지는 것이 맞다. 제도 교회나 목회자 제도는 인간이 합의한 시대적 산물이다. 이 인간의 제도가 불완전하므로 다시 개혁하면 된다. 성직주의의 구도를 깨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성령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
대형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사회 속에서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음으로 외면당하는 것이 심판이다. 그것을 손쉽게 회피하는 방식이 종교의 초월성 뒤로 숨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은 최소한의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자인이다.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집단이 내세의 구원을 약속한다면 설득력이 있을까? 구원은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심판은 죽음 이후 임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작은 자들, 대중의 외침에서 이미 선고된다. 대중으로부터 심판받기 전에 이제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구원을 위해 나서야 한다. 교회가 구원받는 길은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공공선을 앞장서서 추구하는 것이다.
03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 포용의 공동체를 향하다
가나안 성도를 재고한다.
가나안 성도 문제는 교회와 개별 성도 사이의 관계로만 접근할 문제는 아니다. 좀 다른 시각에서 교회 이탈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근대 유럽에서 기독교는 엘리트 종교와 대중의 인식에 차이가 생기면서 분화되기 시작했다. 근대에서 종교는 계급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되었다. 정통과 새로운 흐름은 단순히 신학적 이슈가 아니라 사회 이데올로기의 싸움이었다. 유럽이 국가 중심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그 속에 교묘하게 같은 길을 걸어갔던 종교 이데올로기가 벗겨지지 시작한다. 즉 국가의 일방향, 수직적 지배구조가 도전받으면서 동일한 성격을 지닌 종교 이데올로기도 힘을 상실해 간 것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을 엘리트 지배 계층과 대중 사이의 갈등이라는 양상으로 놓고 본다면 많이 다른 해석이 생겨날 수 있다. 기존의 교회가 지배 엘리트의 가치를 공유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유지하는 데 공헌해 왔다면, 이제 그러한 틀이 새로운 시대 속에서 깨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교회에서 청년이 사라진다는 것은 기성 교회 구조에 대해 청년들이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결국 사회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의식을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작고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여야 할까? 작고 건강한 교회는 ‘계급의식’을 좀 더 선명히 반영하는 교회여야 한다. 건강한 작은 교회는 잘 짜인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 교회나 수가 적은 교회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의 이익을 위하는 교회여야 한다. 아쉽게도 교회를 곤란하게 하는 것도 목회자요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목회자인, 모든 것이 목회자 중심인 이 수직적 구도가 도무지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힘들지만 목회자 중심의 이 구도가 깨질 때 한국 교회에 희망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만의 유토피아, 그리고 배제와 혐오
신학계에서는 요즘 들어 환대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을 참 좋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환대하는 대상에 결코 끼지 못하는 부류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동성애, 페미니즘, 이슬람 등이 그렇다. 환대의 기독교를 내세우는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은 실상 혐오와 배제이다. 토머스 모어가 추구한 유토피아의 핵심은 다름이 관용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꿈꾼다는 이들이 지금도 교회 강단에서, 학교 강의실에서 다름에 대한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핵심은 페미니즘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다. 기독교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된다는 데 있다. 어떠한 이유이든 신앙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혐오를 정당화할 수 없다. 다름의 문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가야 하지, 혐오와 배제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제와 혐오가 생산해 낸 괴물
배제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혐오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던 것이 존재를 나타낼 때의 반응이다. 배제와 혐오는 타자에 대한 명시적인 차별과 억압과 함께 내부자 자신들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자아도취를 부추긴다. 이러한 내부의 논리는 타자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 시킨다. 한민족이라는 인종적 순혈주의를 내세우든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순수성을 내세우든, 우리 곁에 존재하는 타자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 버리는 것은 차별이다. 집단의 논리가 차별에 대한 불편함을 손쉽게 없애 주는 현실에서는 다름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쉽다. 그 집단은 외부에서 제기하는 우려를 시기심 때문에 흔드는 것으로 규정하고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내부자들의 마음에 배제와 혐오의 감성을 부추긴다. 그 집단에 속한 수만의 사람들은 그 같은 종교 이데올로기를 복음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실은 그들은 피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줄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타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순수를 지키는 행위라면,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이 아니라 철지난 우생학의 궤변이다.
개인의 영성을 넘어 형제애의 영성으로
구원이 우리의 공로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 우리가 누구를 차별할 수 있을까.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걸 믿는다면 다른 이를 정죄함으로 자기 구원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모순이다. 누가 감히 어줍잖게 심판대에 올라서서 가느다란 양파 한 줄기의 은총을 나누고자 매달리는 이들을 발로 밀어낸단 말인가. 구원의 배타성은 구원이 배타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배타성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구원은 배타함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눔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심판은 우리 몫이 아니다. 우리 몫은 서로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이지, 구별하고 배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절망을 이겨 내는 힘은 이 땅을 넘어 천상의 신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곁을 서로 내어 주는 것이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아까워하지 않고 남겨진 이들을 공동체가 나서서 돌보는 것이다.
04 개인 신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으로 살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 경계인
경계에 서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콘텍스트가 교회일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모든 역사의 진보는 경계인의 희생을 딛고 나왔다는 점에서 교회나 사회는 차이가 없다. 그 점에서 경계에 선 사람들은 전위에 선 자들이다. 그 경계가 유신론과 무신론의 경계이건, 종교 간의 경계이건,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견해 차이에 대한 경계인건 말이다. 오늘 교회의 어려움은 경계에 서서 고민하는 것의 가치를 외면하는 데서 상당 부분 나왔다. 고민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제도 교회는 간편하게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니 거기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떠돌 수밖에 없다. 신앙은 확신을 되새기는 작업이 아니다. 끝없는 모호함 속에서 자신의 선 자리를 확인하며 점검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교회는 너무 안전한 곳이 되어 버렸다. 경계에 선다는 것, 틀을 넘는다는 것은 그저 모든 것을 상대화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우리의 지평이 넓어지고 품이 넉넉해지는 경험이다. 이로써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하고 보듬지 못하던 세상의 타자와 약자, 소외된 자들을 더 넓은 품으로 감싸 아는 것이다.
이제 인본주의자가 되자
휴머니즘은 인간주의, 인도주의, 인문주의, 인본주의 등 매우 다양하게 옮길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강조하고 이 땅의 삶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현대 교회에서는 이 휴머니즘이 인본주의라는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함의를 가진 의미로 변질되었을까? 아마도 인간의 가치를 고대 그리스 로마로부터 재발견하는 것이 중세 그리스도 문화를 부정하는 것, 중세의 신 중심의 사고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신학교 문제는 교단과 학교 간의 싸움이나 교회 정치만이 전부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소위 선지 동산에서 신학생들은 시대의 구조를 넘어선 시각을 고민하기보다, 스콜라주의가 설정한 구조 속에 끌려 들어가고 있다. 헤브라이즘은 신본주의이고, 헬레니즘은 인본주의라는 이 근본 없는 프레임으로 철저하게 길들여지고 있다. 어이없는 것은 대다수가 자신들만이 타락한 세상에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진정 노력하고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는데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는 기득권, 남성우월주의, 성직중심주의, 교권주의가 설정한 가치이다. 이 역시 다양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스콜라주의의 말기적 현상에 내재된 문제일 뿐이다. 그 속에서 어떠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은 잘 엿보이지 않는다. 인간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긍휼,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인정이 없는 스콜라학은 죽은 학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틀 지운 구조를 붙들고 있는 신학은 효용을 다했다. 여전히 신본주의라는 위장된 언어로 사람들을 붙잡고 살아 있는 체할 뿐이다.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소명을 해방하라
개신교들은 금욕적인 태도로 노동을 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해 가는 삶을 소명으로 파악했다. 베버는 직업적인 소명 안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선택된 자들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이었다고 평가했다. 노동은 단순히 삶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노동 자체가 신의 부르심, 즉 소명이 되었다. 그 결과 칼뱅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세계관은 세속적인 번영을 가져왔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란, 자기 비움으로 인한 평안보다는 선택받은 자로서 구원을 보증하기 위한 욕망의 표현에 따른 불안을 내포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심지어 교회나 설교자도 도울 수 없는 예정과 구원의 문제 앞에 개인은 세상 속에 단독자로 내던져진 존재가 되었다. 세속에서의 금욕적인 삶과 선행은 구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의 징표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몫이 되었다. 즉 예정과 구원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리는 하나의 수단이 된 것이다. 성과 속이라는 이원론의 경계는 허물어졌지만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질수록 종교적 금욕과 세속적 욕망 사이의 불안한 줄타기는 계속되었다. 주어진 직업을 통해 예정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소명을 확인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 시대에서 또 한 번의 적극적인 종교적 탈바꿈을 경험한다. 결국 근대 자본주의 세계의 발전 속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트의 소명이라는 관념 속에는 공동체성은 자리 잡지 못했다. 면벌부로 상징되는 중세 말의 가톨릭 체제는 개인의 부를 교회가 관리를 통해 구원으로 전환해 가는 계획경제이다. 반면 세속의 부를 긍정하며 소명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프로테스탄트의 삶은 개인주의와 자유시장경제와 무한 친화성이 있다. 그 안에서 소명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한계 지어졌다. 이 소명에는 공동체가 없었다. 이 소명의 영역에는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없고 오로지 자신에 대한 집중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 공감 능력은 오히려 일반 사회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를 향한 것이다. 진정한 소명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타자를 위한 헌신이자 결단이다. 지금은 잃어버린 공동체성, 공공성을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이제 소명을 개인에게서 해방해야 한다.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보통은 정적주의라고 알려진 신앙의 엄숙주의는 17세기 말 등장한,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고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하며 신과 신성한 것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엄숙주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신비주의를 의미하며, 가장 비현실적인 영성을 떠올리게 되고,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긴다. 엄숙주의가 지배할수록 교회는 천상의 가치를 강조한다. 교회 내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도 덕이 되지 않으므로 경계하게 된다. 엄숙주의를 강요하고 훈련을 강조하는 것은 목표 달성의 효율을 위해 개인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개교회가 땅의 욕망을 벗고 하늘을 추구한다는 명분하에 강조하는 엄숙주의는 효율적인 성장을 위한 수동적 일체화를 낳았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성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고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니고 함께 형제애를 나누는 것일지 모른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 예수님을 닮는 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고귀하고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져 이웃을 향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낮아지는 것이지, 천상의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개인화되고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형제애의 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여, 비판적 성찰을 하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란, 특정한 개혁 신조를 공부하고 붙잡는 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긴장하며 역사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나가는 교회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중세 말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노력보다는, 이른바 은혜가 되거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면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인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추구보다는 거룩, 하나님의 임재, 은혜 등과 같은 온갖 최상의 종교 어휘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강조함으로써 고민 없는 신앙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사실이냐 아니냐를 묻지 않고 은혜가 되는 가 아닌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성찰을 막는 더 위험한 요소는 사실 다른 데 있다. 바로 지나친 텍스트 기반의 해석, 인물 중심의 해석이다. 우리는 성경 해석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인들을 접한다. 그들의 신앙을 본받고자 한다. 영웅에게 집중하고 강조하는 역사인식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구조를 생성하고 신화적 인물을 만들어 간다. 불편하지만 목회자의 유명세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역사인식의 한 단면이다. 비판적 성찰은 읽을 줄 아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그래야 질문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성찰이란 습관적으로 듣는 것을 넘어 두 눈으로 직면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콘텍스트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매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약함을 극복하고 강한 영웅적 위인이 되는 것에 우리 신앙과 삶의 목적이 매이게 된다.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주어진 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넘어 우리 자신과 공동체, 사회에 대해 치밀하고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참된 비판적 성찰 능력은 텍스트만을 고집하게 하지 않고 텍스트가 적용되는 콘텍스트로 우리의 관심을 반드시 전환시킨다. 이로써 개인이 속한 교회와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비판적 성찰은 터를 내리고 선 자리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선 자리는 여느 것과 구별이 없는 세상 한복판이다. 그 자리에 서서 세상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돌아보는, 성찰의 연습을 해나가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 역사의식은 유효한가
기독교 역사의식이란 교회를 중심으로 혹은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역사가 돌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독교 사관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것을 우선시 했다면 이제는 신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고민할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 사관을 넘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떻게 신 의지를 구현해 낼 것이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의 발전, 즉 신의 섭리와 계시의 구현 과정은 공평과 정의를 향한 주체들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이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구현할 부르심을 받은 개인의 자각과 실천 그 개인들의 연대가 작지만 큰 인류 진보의 걸음들을 내디뎠다. 교회가 던져야 할 질문은 ‘교회가 하나님 역사의 주체인가?’가 아니라 ‘교회가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고 실천하는가?’이다. 교회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기독교가 주체인가’가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흐름에 교회가 끈이라도 잡고 좇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 개인을 넘어 공공을 지향하는 신앙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종교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기반이라고 받아들일 때, 전망하기 희미한 새로운 미래에 새로운 빛이 비추일 것이다. 차별과 소외, 불평등이 사라지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란 예배당 안에서 구호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실현해야 할 당위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나라- 윤종하 (0) | 2023.05.17 |
---|---|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1) | 2023.05.17 |
리처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0) | 2023.05.17 |
송영의 삼위일체론- 이동영 (0) | 2023.05.17 |
칼빈주의와 일반은총- 헨리 반틸 (0) | 202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