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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2019-10-14 01:12:57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1. 교회의 시작점에 대한 논의 -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론을 먼저 고민해야하는 이유

교회의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더불어 교회와 예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중요한 질문이다. 그 질문의 유용성은 첫째,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신앙고백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둘째, 오늘의 교회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다. 이제 교회의 출발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지에 대한 주장들을 보자. 먼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견해로 가톨릭교회의 관점을 들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예수의 성육신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견해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가장 열려 있는 견해로 자유주의 신학을 들 수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처음부터 같은 범주에서 시작했고, 명확한 시점을 들 수는 없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점차 분리되었다. 이 시각에서는 예수가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 반면, 복음주의 개신교는 예수의 승천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보면서, 예수가 처음부터 교회를 세울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2. 가톨릭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관은 예수의 성육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1:23)하는 임마누엘이 이루어진 시점에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예수의 탄생의 날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본다. 서유럽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성탄절을 부활절이나 고난의 날, 성령강림일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유럽 가톨릭의 오래된 신학적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가톨릭에서는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예수의 몸과 피를 다시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까? 그것은 바로 교회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톨릭의 교회론이 정해진 것이 언제일까? 아마도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거의 모든 핵심 가톨릭 신학, 특히 화체설이 공식적인 성찬 교리로 확정된 해이다. 화체설이란 사제가 성찬식에서 성체를 들고 축성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핵심은 바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가 몸으로 임재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4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린 시점은 서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의 극성기의 시기다. 이 의미는 그만큼 가톨릭교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교리를 체계화하여 민중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외쳐도 성찬대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서품을 받은 사제는 누구나 다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화체설이 공식화된 이면에는 사제가 무소불위의 권세를 지니는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화체설은 여러 교리 중의 하나를 넘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신앙에 매우 실질적인 변화를 낳았다. 구원은 그리스도가 베푸는 것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교회가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신적인 기관이 된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신학으로 연결된다. 루터가 깨뜨리고자 한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구원은 교회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푸는 것으로 본 것이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매번 미사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가톨릭의 칠성사라는 틀을 갖추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의 성스러운 의식에 참예함으로써 안전한 구원의 여정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생기는 큰 문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남아 있지만, 신자 개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수와 교회가 성육신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본래 이 땅에 올 때부터 교회를 세우기로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땅에 올 때부터 교회를 세우기로 염두에 두었고, 교회를 위해 열두 제자를 불렀고, 그중에 교회의 반석으로 사도 베드로를 택한 것이 된다.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라고 한다. 처음에는 교황은 베드로의 대리자(vicar of Peter)라고 했다가 점차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바꾸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제가 바로 예수의 대리자로 동일한 권세를 지녀 예수와 동일한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이러한 교리는 점차 가톨릭 사제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게 되고 부패를 낳는다. 이렇게 극대화된 사제의 권한은 대중의 마음속에 사제의 수준과 역할에 대한 의심의 싹이 트게 하고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된다. 종교개혁 초기에 성찬 교리 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유가 바로 성찬론이 교회와 사제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 인간 예수와 교조화된 그리스도

가톨릭과 반대되는 극단이 19세기 이래 등장한 자유주의 신학의 교회론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처음부터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서 한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 계명의 뜻을 재해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을 재해석하되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영성을 요구한 도덕선생으로서의 예수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자기 의를 삼고 외적인 모양만을 지키고자 했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향한 도전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가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종교 및 세속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인식한다. 지금의 종교화된 것은 예수를 좇았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서 사후에 가공했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신화화 작업을 통해 기독교라는 종교가 새롭게 탄생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갈릴리에서 살았던 예수와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와는 전혀 별개의 인물인데, 사도 바울이라는 탁월한 유대 율법자가 나타나서 체계적으로 교리화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의는 초대 기독교 때부터 나왔으나, 본격적인 도전은 근대 이후의 산물이다. C. S. 루이스는 계몽주의의 도전으로 18세기 유럽 세계의 대분열이 생겼다고 평가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에서는 교회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오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이런 자유주의 신학 체계를 바닥에서부터 흔들어 놓은 학자가 알베르트 슈바이처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상사에 큰 자취를 남긴다. 그는 현대화된 예수가 아닌 1세기 당시의 실제 예수를 찾아가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실제로 역사적 예수는 우리가 성서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한 인물일 것이라고 보았다. 슈바이처 역시 인간 예수와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실질적 연관이 없다는 입장이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독자적인 교회를 세울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는데,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신화화해서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미지 혹은 종교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톨릭의 등식은 여기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이 견해를 따르자면 기독교회의 출발은 유대교와 그 정체성이 완전히 분리된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정도로 보게 된다.

 

 

4. 복음주의  예수 승천 후 이루어진 교회

이 두 견해 속에서 예수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찾아가야 할 것인지, 즉 교회론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사렛 예수와 우리가 경배하는 그리스도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른바 복음주의 해석에서는 역사적 예수가 이 땅의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은, 슈바이처가 밝혔듯이, 만약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에 가서 예수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육체를 입은 예수를 본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 자신도 예수를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복음주의의 견해에서는 예수가 이 땅에 와서 한 일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처럼 자신의 의지에 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사명 자체에 이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그러면 유대교와 예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가 남는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사두개파 혹은 바리새파처럼 유대교 내의 한 분파 혹은 이단으로 알려졌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을 때 성전의 휘장이 두 개로 찢어졌다. 예수가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구약에서 제시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 것이다. 이 희생은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영원히 구약의 모든 요구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람들은 구약의 제사장처럼 정결예법에 따라 잡은 양을 가지고 지성소에 해마다 들고 들어가 제사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학적 관계는 청산되었다.

예수는 자신이 승천한 후 그 대신 이 땅에 교회를 남겼다. 그때부터 교회가 이 땅에 실재하였다.  예수가 이 땅에서 했던 지상 사역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하는 천상의 사역을 연결시켜는 주는 연결점으로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부분에서 가톨릭의 교회관과 차이가 생긴다. 3년 반 동안 최고의 교육을 받고서도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지상 사역의 목표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했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이를 깨닫지 못하여 다 도망갔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 승천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등장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최초로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주의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시작이다.

 

2. 기독교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초대교회의 형성 배경

 

1. 구약의 세계에서 초대교회의 세계로

신약시대의 역사는 기독교회의 역사와 상당 부분 중첩되기 때문에 신약의 역사와 교회사는 함께 이해해야 한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에 신구약 중간사 시대로 약400년 정도의 공백이 있다. 전반적으로 구약 시대 말을 바벨론 포로기와 귀환기부터 예수의 탄생까지로 볼 수 있다. 이 구약 말기 시대인 중간사 시대는 인도의 석가모니(BC624)부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BC470), 플라톤(BC429), 아리스토텔레스(BC384), 중국의 공자(BC551), 맹자(BC372) 등에 이르는 세계사의 성현들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실제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구약과 신약 시대 사이의 단절이 강화되고 새로운 흐름이 출현한 시기로 남아 있다.

신약시대는 예수의 출생으로 시작되었으며,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을 기점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신약의 예수가 활동하던 세계는 구약의 세계이다. 성서가 맨 처음 기록된 시대부터 예수의 생애까지는 구약의 세계가 핵심 근거지였다. 구약 시대의 핵심 지역인 우르 지역과 페르시아만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 불리는 데, 특이한 것은 예수 탄생까지 핵심 지역이었던 이 지역들과 신약 시대 초대교회의 번성 지역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점인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이 지역은 신약 역사의 중심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신약 시대와 초대 기독교회 시대에 거의 잊힌 지역이었다.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교회 역사의 토대가 마련되었음에도, 초대교회는 이곳에서 형성되지 않고 지중해 지역으로 그 중심이 급속도로 이동하여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어떻게 초대교회가 그렇게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2. 중간사 시대  동서양의 만남

구약과 중간사 시대의 역사는 초대교회의 밑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퍼즐처럼 엮여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동방의 문화와 서방의 문화가 마주쳐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지역에 대한 헬라화를 강하게 압박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고, 안식일에 전쟁을 일으켜서 유대인들을 몰살한 인물이다. 그 결과 유대교는 지배자의 의도에 따라 급속한 헬라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헬라화 운동에 반대해서 유대 독립 운동 내지 유대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마카비 운동이 생겨난다. 헬라화 혹은 로마화는 오늘의 개념에서 서구화 또는 근대화의 개념과 비교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종교로서의 유대교가 조직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성서가 종교적 경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바벨론 유수 이후로부터 완만하게 중간사 시대를 관통하여 유대교가 형성된다. 구약에서는 유대교, 혹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의 모체가 된 유다 지파는 구약의 열두 지파의 하나에 불과했다. 율법에 열심이던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열심당원들 등 구약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던 낯선 개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무리들은 여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들 나름의 종교와 율법과 신앙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유대교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형성되고 더 세분화해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의 종파로 나뉘게 된다. 이런 종파들의 특징 중 하나가 메시야 사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열방들의 정치적인 억압을 몇 세기 동안 받아오던 이들의 삶 속에 묵시를 통해 종말론적인 삶을 추구하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흐름이 들어오게 된다. 메시아는 구약에서는 흔히 사용되지 않던 표현이다. 이 개념이 중간사 시대에 형성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 이후 독립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정복당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태워진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구약의 역사와 기독교회의 역사를 단절시켰고, 신약 교회의 근거로서의 구약 및 유대교의 관계는 끊어진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점으로 유대교와 기독교가 하나의 갈림길에 들어서게 된다. 유대교는 여전히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독교는 이미 오신 메시야를 따른다.

서양 철학사나 사상사에서 서양 사상의 원류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든다. 하지만 당대의 규모에 있어서는 헤브라이즘은 소수에 불과했고, 헬레니즘은 유럽과 소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문화권이었다. 그런 상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헬라 문화권과 더불어 히브리어권의 문화와 사상들이 인정받았다. 이 모든 것이 중간사 시대에 양대 문화권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문화권 위에 1세기 예수의 복음이 들어오고 전파되고 이해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셈이다. 복음의 수용을 가능케 한 토양의 준비라는 측면에서 동방과 서방의 문화권의 만남을 본다면 이해가 쉬워진다.

 

3. 헬레니즘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어떻게 초대교회에 기독교가 문자 그대로 폭발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는가?” 사도 바울의 무대와 예수의 무대가 다르다. 예수의 활동 지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서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의 활동 무대인 갈릴리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역과는 무관한 현대 터키의 다소 지방 출신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거주하던 유대인이 아닌 유대 이주민의 후예였다. 예수는 아람어를 썼다.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두 가지 언어가 공존하였다. 예배 때는 전통 히브리어를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구어로 사용하였다. 셀레우코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게 되면서 대규모 유대인 이주 정책을 편다. 사도 바울도 정통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속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초대교회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그 범위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흩어진 나그네인 유대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엄격히 유지하면서 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다. 그곳은 모두 헬라 문화의 영향권이다보니 헬라 문화와 유대 문화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헬라인의 경우 피부색깔과 인종과 관계없이 헬라어를 말하고 올림픽과 같은 헬라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다 헬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문화적 인종주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혈통적 인종주의자들이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되기가 쉽지가 않았을 뿐더러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율법 준수와 할례를 받아야 되고, 갖가지 음식 규례를 지켜야 한다. 헬라인이 유대인이 되기는 어렵지만, 유대인이 헬라화 되기는 쉬웠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는 보존하지만, 언어와 문화는 헬라의 것들을 수용했다. 헬라 문명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 이질적인 두 세계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언어는 헬라어였기에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게 된다.

 

4. 칠십인역, 기독교 확산의 언어적 토대

성서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그러나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서는 더 이상 자신들의 종교적 일체성을 유지시켜 줄 수 없게 되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읽을 수 있게끔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 구약성서 칠십인역 성서가 나왔다. 70명의 학자(실제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 6명씩, 72명으로 구성)가 번역했다고 하며 셉투아긴타로 불리는 구약 헬라어 번역은 기원전 25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가 위임하여 수행되었다. 성서 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실제 서유럽의 종교개혁기와 그 이후 근대적인 교회의 형성 과정에서 라틴어 성서를 사용하지 않고, 각 민족의 언어로 성서를 번역한 것은 각 개별 국가의 민족 정체성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잉글랜드의 경우 가톨릭 옹호자들, 국교회 신봉자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청교도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었다. 이러한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된 제임스 1의 주도로 킹 제임스 성서로 알려진 흠정역 성서(Authorized Version) 번역이 이루어졌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는 이 히브리어 성서를 세속어인 헬라어로 번역하는 것이 유대교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칩십인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흐름이 존재하였다. 이것이 결국 국수적인 유대 민족주의와 보편적인 인류애를 지향하는 기독교가 결별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 당시 유대의 사상을 헬라인들이 접근할 수 있고, 유대 사상과 헬라 사상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칩십인역의 배경을 알 때 예수 당시와 사도행전에서 몇몇 이방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백부장 고넬료(10:22),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본 백부장(27:54), 병든 하인을 위해 예수를 청했던 백부장(8:8), 이들 모두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 문화권에 속한 로마 군인들이었다. 물론 완전히 유대화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들은 유대 사상과 유대의 세계관을 수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이라고 부른다.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에 이스라엘 첩자를 숨겨 준 여인 라합이 그런 경우다. 헬라 문화권에 퍼진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인해서 지역마다 유대의 신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이 후에 유대교에서 기다려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은 훨씬 더 큰 수용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처럼 엄격한 율법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신 앞에서 의미 있고, 윤리적이며,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헬레니즘 유대교를 문자적인 의미에서 세계 종교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로레마이오스의 토라 번역의 동기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성서 번역을 통해 유대교의 경전을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유대인들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명예를 존중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배경의 흐름을 이해하게 될 때 초대 기독교회의 급속한 확산의 이유가 해명된다. 교회가 설립되기 수 세기 전부터 이른바 사전 정지 작업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간 지역은 아무것도 없던 메마른 토양이 아니라, 바로 이 유대 사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유대의 신에 대해서, 또 메시아에 대해서 기대와 관심을 지니고 있던 곳이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 사상뿐 아니라 헬라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이런 바울이 선교 사역의 방향을 아시아 지역, 즉 구약의 세계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역 초기부터 복음의 세계화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런 모습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교회 내 이방인들의 문제, 유대 율법 준수의 문제 등을 놓고 갈등했던 것과는 분명한 차별을 보여 준다. 바울은 전략적으로 헬라 문화의 중심부에 도전하였다. “내가ㆍㆍ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

 

5. 로마와 초대교회

로마가 세계로 확장하는 방식은 직접 통치 방식이 아니다. 도시 국가 로마가 인접 국가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면 조약을 체결한다. 그 조약은 해당 국가의 지배 체제는 그대로 두고 단지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로마의 법과 행정, 로마의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한다. 지배국가의 종교, 문화, 언어, 관습을 그대로 존중하고 분봉왕을 세워 간접통치하는 방식이다. 복음서에서, 유대 총독으로 온 로마인 본디오 빌라도가 있었지만 갈릴리 분봉왕 헤롯도 있었고, 실질적인 종교 지도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었다. 로마가 이런 식으로 간접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헬라 문화가 전 지역에 충분히 뿌리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로마 역시 이 헬라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다. 로마는 굳이 피지배국가에 라틴어와 라틴문화의 수용을 요구하지도 않았어도 되었다. 근대 제국주의와 달리 로마는 문명이 없는 지역에 들어가서 식민지 건설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인들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지역의 기준을 포도주를 생산하고 올리브가 자라는 비옥한 지역에 둔 것이다(포도주와 올리브 오일은 문명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다.). 다뉴브 강과 라인 강 너머는 포도와 올리브가 자라지 않는 지역이다. 오직 지중해 지역에서만 포도와 올리브가 자란다. ‘포도주와 올리브지역과 대비되는 비문명권의 지역을 맥주와 버터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생태적 경계가 초대와 중세 기독교회의 큰 흐름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재위(98-117) 기간에 비로소 이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넘어 제국이 확대된다. 다키아 지방에 정착된 로마 문명이 루마니아이며, 이 지역이 문명의 생태적 경계를 넘어선 상징적인 지역이다.

 250년경까지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조차 교회에서 사용된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였다. 초대 기독교는 헬라어권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헬라 문화의 전통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대 기독교가 로마 세계 하에서 형성되었지만 아직 라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 균형의 추가 헬라에서 라틴 문화로 이동한 것은 중세교회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 중세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은 정복 지역이 아닌 아무런 문명의 토대가 없어 모든 문명을 이식해야 했던 식민지 건설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 점에서 중세교회를 형성한 서유럽의 교회의 토양과 소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기독교가 생겼을 때의 토양은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는 사도행전 시기부터 교회의 끊임없는 숙제였다. 복음은 기존의 문화를 배제하고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기존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 토대 위에 형성되어야 하는가? 성서의 기록과 초대교회 역사의 기록은 기독교 복음과 문명 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 줄기로 이어져 나갔음을 보여 준다. 기독교가 세계화될 수 있는 환경이 먼저 마련된 것이다. 초대 기독교는 갈릴리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지만, 그 전체의 그림을 좀 더 멀리서 바라보면, 갈릴리는 복음의 완성과 확산이라는 초대교회의 거대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퍼져 나갈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동방과 서방을 아울러서 마련되었다.

 

3.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세계로  유대교와 기독교

 

1. 유대교와 기독교 문화의 흐름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온 종교인가? 기독교와 유대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할 때 가장 명확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신이 유대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일, 즉 구원의 역사를 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대 민족의 배타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기독교는 이러한 유대의 배타성이 가려 놓은 신의 존재와 신에 관한 인식에 존재하던 차별의 장벽을 거두어 해방시켰다. 신의 존재와 신의 성품에 대한 유대인의 인식과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2. 유대주의의 형성과 발전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공동체에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유대주의란, 유다 지역, 구체적으로는 남유다 지역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은 유다 지역의 거주민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유대교나 유대주의 모두 다 유다이즘(Judaism)이라고 쓴다. 이는 혈연 공동체로서의 유대와 종교 공동체로서의 유대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유대교가 형성되어 기원후 130년경까지의 시기를 구약이 확립된 후기 성서 시대 유다이즘이라고 부른다. 느헤미야, 에스라 등이 귀환해서 성전을 짓던 시기라 제2성전기 유대교라고 한다. 귀환공동체 이후 제2성전을 재건하고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의 혼합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독특하게 정형화된 형태의 종교를 확립해 나간 것이다.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헬레니즘은 유대교의 존립을 위협하는 거대한 도전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유다이즘의 고착화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나 이두매인들, 즉 북쪽에 있는 지역의 주민들에게까지 강제로 할례를 행하게 하였고, 유대의 율법을 지키게 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러한 강요된 유대주의로 인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깊은 골과 상처가 생겼다. 이런 민족적 정체성, 민족의식의 고양은 유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것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결국 로마 통치에 대항해서 115년과 132년에 유대인들이 일으킨 봉기가 실패하면서, 그 보복으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더 이상 거주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2, 3차 유대인 봉기 이후, 초기 유대교에 형성된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요소가 사라지면서 변화된 유대교를 랍비 유대교라고 한다. 이는 삶과 종교를 지탱하던 성전이 무너져 내리면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던 중심이 옮겨졌기 때문이다. 기원후 70년의 유대 전쟁과 그 후의 박해를 거치면서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유대주의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바리새파 유대주의가 형성한 것이 랍비 유대교이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종교적정치적 중심 역할을 하던 산헤드린을 대체 하여 랍비 위원회 혹은 랍비 공동협의체가 탄생했다. 이들이 기원후 90, 구약성서 39권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그 후 팔레스타인 본토와 디아스포라 유대교 전체가 랍비 중심의 제도적 협의체인 랍비 위원회를 중심으로 변화하는데, 이 시점을 랍비 유대교의 출현으로 본다. 이들의 특징은 책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경전들이 집대성된 시기이다. 이때 유대의 탈무드의 판례들과 율법의 해석을 나타낸 미쉬나가 집대성되고, 5-6세기경에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바벨론의 탈무드가 편집된다. 그리고 정리된 경전들의 골격이 그대로 랍비 유대교로부터 현재의 유대교로까지 이어졌다.

기독교가 도래한 시기를 30년경으로 간주한다면, 이 시기는 유대교의 다양한 분파들이 형성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이기보다는 유대교 여러 종파 중의 하나였다. 유대교로 발전하는 바리새파와 정체성을 달리하던 나사렛파가 기독교로 분리되었다. 랍비 유대교와 기독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기독교가 유대교의 뿌리에 근거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도행전 24장이나 28장을 보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새번역에서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왜 초대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할 때, 그는 안식일에 복음을 전하러 회당으로 들어갔다. 당시 유대인들의 모임이었던 회당에서 바울을 받아들여 설교단에 세웠음을 말해 준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울이 바리새파이며 학식이 있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듣고 싶어 했고, 회당으로 불러 설교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바울이 초청받아 설교하는 회당마다 분열과 갈등이 생겨나자 결국 그를 배척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당시 사도들도 예수의 탄생과 승천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유대교와 전혀 다른 기독교회가 시작됐다는 자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대망해 오던 약속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유대교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이었지, 유대교와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든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기원후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게 되는 사건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제2성전기의 종말, 성전 중심의 종교가 막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의라는 틀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신앙의 핵심이 이동하면서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종교로 서게 되었다.

 

3. 기독교, 유대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넘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문명인인 헬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그들이 유대인임을 선택하면 선민으로 살게 되지만, 헬라인이 아닌 야만인이 되는 것이다. 헬라 문화를 받아들여 헬라인으로 살게 되면, 신의 선민이 아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모세오경이라는 토라를 수용함으로 정체성을 확보하였지만, 그 결과 폐쇄주의와 배타성을 낳았다.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배타적 권리이며, 유다이즘이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배타성의 강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유대교의 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민으로 천부적 권리를 부여하며 신의 본래 의지를 축소 내지 왜곡시켰다면,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바로잡고 보편 종교 혹은 세계 종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 궁극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더불어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점은 율법의 종교에서 약속의 종교로 나아간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과 함께 성전의 휘장이 찢기어 둘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려 율법의 요구를 불완전하게나마 따르던 것에서 이러한 율법의 요구가 완성된 것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할례와 성전의 속죄 제의가 기독교의 세례와 성만찬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 기독교회는 단순히 종교적 의례뿐 아니라 당대의 철학과 윤리적 가치를 밀접하게 아우르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19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바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약속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신약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가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베드로는 선택받은 백성이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시작은 1세기 종교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래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던 낡은 종교가 새롭게 회복되고 개혁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은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섰다. 결국 팔레스타인과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한 종교는 다름 아닌 기독교였다. 영원히 그렇게 보편성을 보존해 나갈 것인지는 보장할 수 없다. 다만 기독교가 성장하는 시기에 유대교의 배타성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 유대 인종, 유대혈통주의와 선민주의를 벗어나서 세계시민주의를 외쳤을 때, 기독교는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4. 교회의 갱신  자기중심성의 극복

오늘날 과연 기독교가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역사에 나타난 교회의 역동성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오늘의 교회 역시 초대교회와 같기를 바라고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16세기에도 종교개혁자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종교개혁의 혁명적인 운동성을 확보하였다. 이 운동은 17세기 내내 종교전쟁과 프로테스탄트의 분화 과정을 겪으며 역동성을 상실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계몽주의와 탈기독교화로 이어졌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분화를 살펴보면, 오늘날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되고,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바리새파가 지향했던 것도 이스라엘의 신이 어떤 존재이며, 그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철저히 추구하는 것이었다. 신앙의 본질, 삶의 본질에 천착하여 나온 것이 바리새 운동이었다. 이런 신앙의 정화 운동이었던 바리새 운동이 역동성을 상실했을 때, 조직으로 바뀌고,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보편적 가치, 신의 인간을 향한 본질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유대교의 자멸을 낳은 것이었으며, 반면에 인간 본질에 대한 재해석을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기독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현대 한국 교회 역시 교세가 확장된 이후 종교적 인종주의의 덫에 걸려 있다. 사회적 약자, 성 소수자, 타종교 등 타자에 대한 배려를 교회 공동체 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초대교회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심각한 일탈이다. 오늘날 교회 성장의 정체와 교인 수의 감소가 교회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기독교의 외피를 입은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문화적혈통적 인종주의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한 헬레니즘이나 유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4장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 초대교회의 성장과 박해

 

1. 폐허 위에서 돌아보는 초대교회의 성장

초대교회가 성장한 원인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왜 현대교회가 쇠퇴하는가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현상은 초대교회는 그 성장기와 박해기가 중첩된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당대의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을 때에 움츠러들거나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로마의 지식인들은 기독교가 성장한 것은 박해로 인해 위기의식을 갖고 똘똘 뭉쳐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대중에게만 영향력을 준 종교가 아니었다. 네로 황제 때에는 궁중에까지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기독교가 로마의 고위 왕실에도 전해질 정도로 확산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2. 교회, 대안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제시하다

당시 로마에는 다양한 종교, 수많은 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독교라는 신흥종교가 나타나서 지위고하와 지역을 넘어서 로마인들에게 영향을 준 이유는 로마의 전통 종교들이 주지 못하는 뭔가를 기독교가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편적 사랑, 인권과 평등사상 그리고 독특한 내세관이다. 로마사회에서는 남자, 자유인, 성인만이 사람의 범주에 들뿐, 여성이나 미성년자, 노예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와 여성을 사람으로 대접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봤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가 당시 로마인들과 달랐음을 보여준다. 이는 바로 성서의 복음과 예수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인간관 때문이다. 아주 낮은 계급의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까지 흡인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로 치면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고, 근대의 인종적 편견에 비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가히 혁명적인 인간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기독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실질적인 사회 개혁의 선두에 서 있었다.  3세기에 로마에서 해방 노예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 감독, 즉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중세 라틴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같은 그리스도인을 노예 삼는 것을 금했다.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때에 동역했던 사람 중 여성이 많다. 여성에 대한 인식에서 차별이 없었다.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때에는 이미 황제의 아내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초대교회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인생관 혹은 세계관이다. 로마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히브리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신의 창조로부터 종말로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의지가 역사에 실현되며 역사는 신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개개의 인생에 신의 뜻과 목적이 있으며,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런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세계관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낳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내세관 역시 그리스적 사고를 가진 로마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가치관, 세계관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날 때가 바로 박해를 받을 때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을 때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3. 로마의 박해 이유와 양상들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들은 이방인이나 로마제국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이후 당시 지배세력인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박해는 꾸준히 일어났지만 대체적인 주기가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대체로 로마의 지배자인 황제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로마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정도가 달라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일체성을 훼손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두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인들이 출현한다. 순교자들과 변증가들이 그것이다. 자신들의 믿음을 죽음으로 증거한 자들이 순교자들이라면,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서 외친 자들이 변증가들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발전과 형성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로마는 이방 종교에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그들에게 종교란 개개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신념 체계이기보다는, 로마제국이 지향하는 사회통합과 제국의 일체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제였다. 로마인들은 종교를 피에타스(pietas)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종교에 적용되는 경건의 의미와 더불어 충성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로마가 인정하는 종교는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제국의 신민으로서 기여를 해야만 한다. 이런 관점을 지닌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는 제국에 도움이 되는 종교로 볼 수 없었다. 로마에서 기독교는 국가의 일체성을 해치는 미신 중의 하나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리워진 가장 큰 오해는 그들이 무신론자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가진 신관에서 볼 때 기독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었다. 로마인들의 눈에는, 가시적인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경배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는 신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로 보였다. 로마의 시각에서 볼 때, 보이지 않는 신을 숭배한다는 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동일하지만, 신흥종교라는 면에서 유대교와 비교해 기독교는 더욱 열등했다. 기독교회 설립 초기 로마 당국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 기독교를 인식했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을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파악하여 개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대교 역시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은, 유대교는 그 출현 자체가 외세의 핍박과 침략에 맞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형성되었고, 지배 세력인 로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로마는 유대교를 잠재적으로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반국가적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각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은 단순히 인정되지 않는 종교를 신봉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로마시민에게 요구되는 제국에 대한 충성의 결여라는 정치적인 이유에 기인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은 그들이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간주되었다.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범주는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서지 않는다. 반면에 기독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기독교가 잠식하는 세력은 잠재적으로 비유대인들, 즉 로마인들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을 흔드는 새로운 위험 요소로 자라 가고 있었다. 공식적인 기독교 박해는 네로 황제 때 시작되었다. 64 6 19일 발생해 7일간 지속된 로마시의 대화재로 인해 도시의 3분의 2가 불탔다. 황제에 대한 혐의를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참혹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이때 사도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다음 박해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다. 이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갔다고 전해진다. 이 두 박해의 특징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는 모두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트라야누스 황제 때 법에 따른 정교한 박해가 이루어진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로마에 충성하기로 맹세하면 처벌을 면해 주는 것으로 바뀐다. 이때 새로운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배교자들이다. ‘순교는 영광이라고 한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도 이 박해 때에 순교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의 박해 때에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 순교한다. 폴리갑의 의연한 순교 앞에 로마는 기독교에 대한 이런 식의 핍박이 무슨 실효성이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 폴리갑의 순교 이후 아시아에서 순교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좀 다른 동기로 박해를 한다. 그가 볼 때 예수를 신으로 떠받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매한 자들이고, 그들을 몽매한 신앙에서 계몽시키려는 목적으로 핍박을 행했다. 그때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순교했다. 박해는 그 이후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311 갈레리우스 황제가 임종 시 관용령을 내려 박해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4. 박해가 남긴 유산 그리고 오늘의 과제

이 박해가 남긴 문제는 무엇일까? 순교냐, 배교냐의 양 갈래 선택에서는 한 사람의 신앙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제 신앙을 지킨다는 것에 대한 여지를 주는 일이 발생했다. 다만 절하기만 하면 순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인해 교회는 최초로 분열을 경험한다. 무자비한 박해 앞에서 교회는 단결했지만 유화책 앞에서 교회는 분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비교적 관용적이었지만, 사회 기강 차원에서 성서를 압수하는 정도로 박해를 가한다. 배교자를 이르는 라틴어 표현은 둘을 구분한다.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을 apostata라고 부르는 반면에, 책을 넘겨준 배교자들을 traditor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책을 넘겨주는(trade) 박해 때부터 파생한 용어이다. 이러한 형태의 배교는 핍박기가 끝난 후에 교회에 거대한 후폭풍을 남겼다. 핍박을 견딘 사람들과 변절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일어났다. 그들을 교회가 받아줘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는 배교한 자들을 교회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기독교가 공인된 훨씬 이후인 아우구스티누스 때까지 첨예하게 이어졌다. 박해를 통해 교회는 정화되고 성장했다.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말로 증거 되기보다 죽음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보였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증인이란 말이 순교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혹자는 현대 유럽 교회가 쇠퇴한 이유는 교회가 사회적 관용과 사랑,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복음의 본질과 양립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교권주의에 빠진 권위적 종교의 폐해만을 유럽 기독교 쇠퇴의 원인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그 책임 소재를 떠나 기독교 복음의 가치가 부정되고 상대화된 것도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쇠퇴하게 된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교회나 신학계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효용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다원주의 신학, 포스트모던 신학도 이런 컨텍스트 속에서 출현했다. 초대교회의 성장의 원인을 뒤집어 보면 오늘의 교회가 사회 속에서 외면 받고 있는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순교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초대교회가 박해 앞에서 신앙이 정화되고 성장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 시대는 역설적으로 박해가 필요한 시기인지 모른다. 기독교가 정화되기 위해서 그리고 올바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날의 박해? ‘정치적, 국가 권력적 박해에서 경제적, 물질적, 인성적 박해로 ...’ -편저자주)

 

5장 죄인을 구원하는 은총의 통로 - 라틴교회

 

1. 라틴 교회, 헬라 문명을 넘어서다

시기적인 순서를 엄밀하게 따지자면 라틴 교회보다 동방 교회를 먼저 다루는 것이 맞다. 동방 교회의 전통 위에서 라틴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을 먼저 다루는 것이 접근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에, 라틴 신학이라는 통로를 거슬러 들어가야 동방 신학에 다다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문화적 토대였던 동방 교회의 전통을 기반으로 서방 전통을 재고해야 한다. 라틴교회란 라틴어를 쓰는 지역의 교회인 서유럽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뜻한다. 중세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이 이슬람권으로 넘어가면서, 라틴교회는 서방교회, 서유럽교회, 가톨릭교회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라틴교회와 구별하여 지리적으로 소아시아 지역에 위치하며 헬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교회를 통상, 동방교회, 헬라교회 등으로 부른다. 당시 로마제국 기준으로 보면 서로마 지역이 라틴교회이고 동로마 지역이 동방교회에 속한다. 하지만 라틴교회가 동방교회와 대등한 관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언어는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였다. 로마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소아시아 및 헬라 문화권에서 이주한 무역업자나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이민 교회로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를 사용했다. 또 신약성서는 모두 헬라어로 쓰여 있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모두 헬라어를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방 교회에서 헬라어 사용은 3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채 60년이 남지 않은 시점까지 동서방을 막론하고 모든 교회의 언어는 헬라어였다. 초대 교회의 발전에서 동방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바뀐 것이 게르만 민족이 서로마제국으로 이동하면서부터이다. 서유럽 이민족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를 중심한 서유럽은 자연스럽게 라틴 문화를 일구게 되고 중세 내내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데 헬라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로마보다도 독자적으로 라틴문화를 발전시킨 지역이 바로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초대교회의 지형도에서 서방 교회에서 단일 지역으로서 카르타고만큼 기독교 전파와 사상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없었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주교구 교회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다섯 곳에 있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교부로 알려진 인물들 대다수가 동방 교회 출신이다. 헬라 문화의 정수라 하면 무엇일까? 헬라 철학이다. 이 철학이 기독교와 융합되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신학적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크게 보면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로 구분할 수 있는 두 큰 흐름이 다양한 논쟁 속에서 경쟁하고 발전하였다.

 

2. 북아프리카, 라틴신학의 중심에 서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지역이기 때문에 헬라 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라틴교회에서 로마를 대신해 동방의 신학 사상과 견줄만한 성과를 낳은 유일한 지역이 바로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지역은 서방의 단일 신학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초대 라틴 교회의 저명한 학자들은 유럽이나 로마출신이 아니라 대부분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초대교회를 이해하는데 북아프리카 교회는 대단히 중요하다. 7세기에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래 북아프리카에서 교회는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로마의 박해 때 가장 심하게 탄압받은 곳이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순교자들이 많이 나왔고 순수하게 모범적인 신앙을 지킨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이런 신앙적 기조가 이슬람이 침입했을 때 다른 지역처럼 혼합문화를 형성하지 않고 완전히 소멸한 원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그와 다른 지역이 에스파냐이다. 콘비벤시아(Convivencia),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의 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복자와 피정복자 간에 종교 정책을 놓고 일정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슬람의 세력 하에 있었던 소아시아의 이슬람 점령 지역이나 에스파냐나 다른 지역에 기독교가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과거 로마의 박해 때에 꿋꿋하게 박해를 감당하여 순교자를 많이 낳았던 전통처럼, 북아프리카에서는 종교적 관용을 미끼로 회유하는 이슬람의 정책에 타협하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 교회는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가톨릭교회와 달리 순교에 대한 숭배나 천년운동 등과 같은 선택받은 공동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에 교회가 박해 속에서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순수성을 상실했다고 비난하고 자신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배교자를 교회가 다시 수용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교회는 박해 후 분열을 경험한다. 도나투스파가 기존의 가톨릭교회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교회를 형성한 것이다. 이 타협하지 않은 엄정함은 이슬람 세력에 대응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 결과 초대교회 때 강성했던 북아프리카 기독교는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하고 7세기 이후 완전하게 사라졌다. 이는 남부 에스파냐 지역에서 공존하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구원 받고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박해가 잦아든 후 교회가 안정되면서 내적인 갈등과 분열이 싹텄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교회는 자연스럽게 제도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분명 불가피한 변화였지만 아쉬운 방향으로 교회가 변해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도나투스 논쟁의 핵심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다. 가톨릭교회는 기독교 공인 이후 국가체제에 순응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도나투스파는 여전히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분열을 방치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 보고 도나투스파에 대한 제국의 탄압을 용인했다.

 

3. 테르툴리아누스 - 라틴교회의 빛과 그림자

서방교회는 성서와 함께 교회가 결정하여 수용한 전통도 궁극적 권위로 동등하게 인정한다. 서방교회, 즉 가톨릭교회 신학의 뿌리를 형성한 대표적 인물이 테르툴리아누스. 이런 공적들이 있음에도 가톨릭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회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 이유는 그가 정통교회가 이단시한 몬타누스 운동(당시의 재림파 운동)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비록 성인의 반열에 속하지는 않지만 서방신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신학자로 인정받는다. 그는 라틴어를 신학적 언어로 사용한 첫 번째 신학자다.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불가타 번역본으로 기독교의 라틴화가 완성되었다면 라틴화의 시작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 저술부터이다. 기독교의 라틴화란 두 가지 작업이 수반된다. 먼저는 헬라어로 정착된 신학개념과 사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고, 동시에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진화단계에 있던 신학을 라틴어를 사용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라틴신학의 틀을 세우는데 천재적인 기여를 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유명한 말은 동방신학과 서방신학 사이에 가장 큰 획을 긋는 표현이다. 이 말은 동방신학의 전통인 헬라철학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데 대한 나름의 반발이며 나아가 서방의 독자적인 신학적 자의식의 선포라고 볼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은 기존의 동방신학과 큰 차이를 보인다. 동방신학이 헬라철학의 바탕 위에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는 반면에, 서방신학은 로마법 체계와 사상을 빌려 기독교 신학을 변증하고 설명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 큰 위기의식이 있었다. 그는 세속문화를 교회가 거리낌 없이 수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며 교회의 세속화를 반대하며 도덕적, 윤리적 기독교를 주창했다. 무한대로 뻗어 나가는 인간의 욕망은 그 퇴폐성과 비윤리성을 교묘히 위장한 채 상품화되어 팔리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세속화의 흐름이 몰려온 시기이다. 기독교가 세력을 얻고 확장되면서 윤리적, 도덕적 수준 자체도 낮아졌다. 그는 교회가 세속화에 눈감아 버린다면 이는 곧 배교로 향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 구약은 인정할 수 없다는 구약 폐기론을 낳은 마르키온주의라는 이단에도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마르키온이 기독교 사상사에서 끼친 긍정적인 기여는 바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명확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는 성서의 하나님이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총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율법이 아닌 은총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에 나타난 신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구약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마르키온주의에 반대해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주장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부정적이다. 초대교회를 넘어 중세를 관통하는 여성 혐오라는 오랜 라틴 교회의 전통은 그에게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가톨릭 사제의 독신주의 전통 또한 여기서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유아 세례도 반대했다. 유아들이 실제로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죄의 용서가 필요 없기에 세례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라틴 교부로서 테르툴리아누스의 업적 중 하나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고안하여 처음 사용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관계로 설명한다. 즉 각각 독립적인 위격을 가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관계성이란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아타나시우스가 동방신학에서 발전시킨 삼위일체와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강조점은 신앙의 대상이 인격신이라는 것에 있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존재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간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이해했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동방신학이 위로부터 아래로 라는 계서적인 면에서 삼위일체를 이해해고 발전시켜 왔다는 점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4. 라틴 신학, 공로주의의 길을 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율법과 복음을 구약과 신약의 상호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구약을 율법서로 보는 동시에 신약의 복음 역시 새로운 율법이라고 이해한다. 기독교 복음과 유대교의 율법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핵심적이 차이는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보다 요구 수준이 더 높아진 것이다. 그는 유대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이유는 그 법이 충분히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회는 예수가 요구한 도덕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례 이후 중죄를 범한 자들에게 구원이 취소된다는 논리도 이런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신앙의 핵심은 거룩이다. 복음은 유대의 율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부과되는 수준도 더 높아야만 한다고 본다. 이 주장이 바로 가톨릭 신학의 핵심을 형성하였고, 중세 서방 신학의 발전은 이런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 그 의미를 성화와 동일하다고 보았다. 이는 바로 가톨릭 구원교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렇게 복음을 복음으로 이해하지 않을 때 복음은 만족시키기 더욱 어려운 율법의 구실을 하게 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런 관점은 중세를 관통해서 이어진다. 가톨릭교회가 제정하는 여러 가지 성사와 더불어 면죄부의 발급은 바로 교회가 구원을 안전하게 안내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면벌부가 발전하고 매매되면서 공로의 보고라는 교리가 형성된다. 공로의 보고에는 자신의 십자가 피흘림으로 무한한 공로를 쌓은 예수의 공로와, 구원에 필요한 공로를 넘어선 성인들의 잉여의 공로가 저장된다. 일반 신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쌓은 공로 중 부족한 부분을 이 공로의 저장소에서 끌어와서 메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공로를 바로 면벌부를 구입하면서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라틴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바로 공로주의로 가는 가톨릭 신학의 길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그의 신학이 박해 속에서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톨릭의 공로주의에 반대하여 루터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주장했지만 구원을 물리적 실체를 획득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가톨릭 방식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은총의 물리적 범위와 공로의 물리적 범위를 따져 구원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여전히 라틴 신학의 법정적 맥락안의 논의일 뿐이다. 이 지점이 우리가 익숙한 라틴 신학에 대한 논의를 넘어 동방 신학으로 관심을 옮겨야 하는 이유다. 칭의나 정의 논쟁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우선 의롭게 된다는 단어의 중립화가 필요하다. 그 의미의 맥락은 동방 교회의 전통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틀을 벗고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핵심적인 힘 중의 하나는 헬라어 원전을 연구하면서 초대교회의 의미를 다시 돌아본 것에 있었다.

 

6장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 - 동방교회

 

1.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우리는 교회사를 서양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서방신학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기 쉽다. 중세 시대와 근대의 교회를 서구 역사화 동일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초대 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동방교회를 간과할 때는 큰 문제가 생긴다. 가톨릭의 전통과 그로부터 생성된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지닌 서유럽 교회에서도 동방교회는 대단히 이질적이며 낯설며 멀게 느껴진다. 오리엔탈리즘이란 개념도 이와 연관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동양에 관한 인식과 규정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역사를 서술할 때 역사적 텍스트를 선택하고 편집하는 특정한 관점이 존재함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초대교회, 중세 가톨릭교회, 근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등식을 가지고는 동방교회가 교회역사에 미친 공헌이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된다. 보통 서양사의 시대구분에서 헬레니즘 문명을 서구 역사의 기원으로 삼지만 헬레니즘 문명은 유럽문명과 본질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문명이었다. 서구 전통의 신학과 역사 이해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동방교회의 전통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나 존중은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텍스트 지상주의에 매몰되기 쉽다. 모든 신학이나 사상은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여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컨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무리하게 다른 컨텍스트에 적용하는 환원주의에 빠지게 되면 결과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낳을 수밖에 없다.

 

2. 언어의 전환이 만들어낸 다른 전통들

초대교회의 역사는 헬라어와 헬라문화가 발전한 동방교회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역사가 끝날 무렵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문화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예배에서 라틴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약250년경부터 문화적 단절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주요 교리들이 규정되기 시작하는 4세기 말 정도 사이에 초대교회 시대는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헬레니즘 철학과 헬라어라는 동방과 서방이 공유하던 문화의 틀이 서방에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사고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분리의 길을 걷는다. 토양의 차이라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미치게 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에서는 성사를 의미하는 용어는 미스테리온(mysterion)이었다. 라틴어에서는 신비를 의미하는 미스테리온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서방교회에서 이 용어를 번역할 때 사용한 용어가 세크라멘툼(sacramentum)이다. 미스테리온이 mystery ‘신비에 가깝다면, 세크라멘툼은 secret ‘비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신비는 풀려고 해도 쉽사리 풀 수 없는 것, 신비스러움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는 반면, 비밀은 풀어 나가는 것,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 등으로 볼 수 있다. 동방신학은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신비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컨텍스트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테르툴리아누스가 서방교회 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를 들어 서방교회는 세례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인 선포로 본다면, 동방교회는 세례를 더 깊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걸음으로 본다. 서방교회에서 법률적인 관점에서 성사를 구원과 직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동방은 이와 달리 신의 신비를 향해 가는 과정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사의 언어에 대한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교회의 역할의 차이를 가져왔다. 서방교회처럼 법률적 관점에서 성사를 규정하면 한 개인의 구원의 여정에서 교회가 정하는 의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 된다. 이것이 라틴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가톨릭의 체제에서 생겨난 문제다. 즉 교회가 정한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이런 틀이 깨지게 된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어 성서를 번역하여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성서와 비교함으로써 언어의 변환으로 인한 오류를 규명한 것이다.

 

3. 동방교회, 신비를 숙고하다

유대 히브리인의 사유에서 생긴 기독교라는 종교와 당시 헬레니즘 철학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한다. 헤브라이즘은 철학 체계가 아니다. 유일신 여호와와 이스라엘 민족 간의 계약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히브리인의 삶과 문화, 전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그 신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철학적 사유는 없었다. 기독교가 초기에 하나의 운동을 넘어서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게 되면서 기독교의 신과 메시아, 성령, 선악의 문제, 구원 등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게 되었다. 헬라 철학이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 형성을 이해하는 철학적인 사유를 제공했다. 우리가 기독교 신학의 이론과 체계가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방교회의 용어나 개념은 신플라톤 철학과 같은 복잡한 철학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동방교회가 형성된 토대 자체가 서방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로마와 같은 하나의 특별한 중심이 없다.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네 개의 교회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의존하고 있는 신학을 풀어 나가는 철학적인 틀 역시 제각각이었다. 동방에는 서방 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에 비견할 만한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그와 같이 누구나 인정할 대표성을 지닌 학자를 찾기는 어렵다. 각 교회마다 추종하는 철학 학파가 서로 달랐다. 그중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는 데 주류로 등장한 것이 신플라톤주의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신플라톤주의에 기반을 두었다. 플라톤주의에 의하면, 천상이 이데아라면 현세는 그 그림자 세상에 불과한 것이다. 진실한 것, 궁극적인 존재는 개념이고 이데아이다. 가시적인 것들은 궁극적으로 부패하고 한계적인 존재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가장 먼저 일자(一者)라는 개념이 나오는 데, 창조는 일자로부터 모든 실재가 계층적으로 유출되어서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일자와 실재의 관계이다. 실재는 일자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수는 있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계층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의하면 세상은 신을 정점으로 인간, 동물, 사물 등으로 이어지는 계층이 존재한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삼위에도 계층이 나눠진다고 보았다. 성부가 가장 위에 있고, 그 다음이 성자, 그 다음이 성령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를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는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했다. 이 삼위일체에 대한 관점은 구원이라는 관념에도 차이를 발생시킨다. 서방에서는 삼위의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구원이라면 동방에서는 구원을 계층구조를 하나씩 밟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과정으로 본다. 오리게네스 학파는 이런 논리를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가 융합되는 가운데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것은 신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관점으로서 이를 신화’(신화, theosis)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동방교회는 서방과 달리 구원을 특정한 시점에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신화의 과정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법체계에 바탕을 둔 서방신학은 신의 은총과 자신의 공로, 성례전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본다. 결국 신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차이. 서방신학은 비밀은 결국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은 신비에 대한 이런 신학적 태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반면에 동방신학은 신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지 말고 신비 그 자체로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비를 신비 그 자체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동방신학의 이런 태도를 부정의 신학(via negative)이라고 부른다. 부정의 신학은 신의 성품에 대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이 아닌 것을 말함으로 신의 무한성과 절대성을 추구한다.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은 로마법과 그리스철학이라는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바탕 자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융화가 되기보다는 서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초대교회 내내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가 나오게 된다. 바로 예수와 모나키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갈려 동서 교회가 결국 분열된다. 예수를 모나키라고 할 수 있는가? 로마 제국은 제국을 네 부분으로 분할하여 2명의 정제(augustus) 2명의 부제(ceasar)를 두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은 2인의 모나키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처럼, 공적인 권력을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모나키를 통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근원이나 출처라는 의미로 사용할 경우 의견이 갈리게 된다. 성부는 모나키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지만, 성자가 모나키라는 표현은 성립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논리대로라면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르니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동방교회에 성부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였다는 표현에 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였다라고 바꿀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단어 하나를 추가해 줄 것을 요구하는 데, 그리고 성자라는 라틴어 단어가 필리오케(filioque)이다. 이것이 필리오케 논쟁의 시작이다. 사실 이 신학논쟁으로 인해 동서 교회가 분열되었고, 1962년 동서 교회가 상징적으로 파문을 철회함으로써 하나가 되기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화상이었다. 동방은 황제가 교회의 수장을 겸하는 정교일치 지역이었다. 동방에는 네 개의 주교구가 있고, 감독들은 비잔틴 황제가 총괄하는 제1사제였다. 자연히 교회와 황제가 계속해서 마찰을 빚게 되었다. 교회는 수도원에서 성화를 만들어 팔아서 부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황제에 대항해 세력을 키워 갔다. 황제는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서 성화상 제작을 금지한다. 황제의 논리는 우상을 만들면서 무슬림과 유대인을 전도할 수 없으므로 성화 만드는 일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레오 3세 황제 성상 금지령을 내린다. 문제는 로마 교회였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비잔틴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방교회는 성상을 만들기는 하지만 이것을 경배하지는 않는다고 정리했다. 필리오케 논쟁과 성화상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11세기에 이르러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이미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부터 양 교회 사이의 오해와 갈등은,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이런 분리는 신학을 이해하는 컨텍스트가 달랐기 때문에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는 서양과 전혀 다른 컨텍스트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4.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그렇다면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런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다양한 토양 속에 세워진 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신학이나 신앙의 컨텍스트와 정체성을 잘 정립한 가운데, 여러 경향에 대한 포용하는 이해의 자세를 가질 때, 갈등하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고 발전해 가는 신학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신학은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논리 신학으로 모든 신학적 문제들을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특히 법정적 의미의 칭의와 구원 개념을 가진 개신교는 구원을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취한 것으로 보지만, 동방교회는 구원을 미래에 성취될 현재 진행 중인 여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진지하고 끊임없이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과연 구원을 과거 어느 특정 시점에 값없이 얻은 것으로 결코 취소될 수 없는 물리적 성취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충분할 것인가? 구원의 확신의 정도를 이른바 좋은 신앙의 척도로 간주하는 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2:12)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요원할 뿐이다. 개신교에게 동방교회의 구원에 대한 태도는 고민하고 성찰할 지점을 제공해준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명제 속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또 열린 마음으로 낯설지만 더 오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동방교회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7장 근본을 추구하는 급진파들 -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 -

 

1. 교회사 속에서의 이단의 역할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트뢸치는 기독교를 정통교회, 이단, 신비주의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정통의 역사가 흘러온 것과 거의 동시대부터 유사한 강도로 이단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단의 역사가 정통의 부수물이나 부작용으로만 보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은 흐름을 지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류 교회 역사에 다양한 역사의 흐름이 반복되어 나타나듯이 이단사도 어떤 일정한 흐름들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이단의 역사가 과거 그 시대에 있다가 사라져서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비고비 마다 유사한 흐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오늘 우리의 역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단은 무엇일까? 이단을 정의하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실천적이거나 사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이 있다. 주류 교회나 주류 신학이 가진 신학적 프레임에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교파나 교단의 시각이 주관적으로 반영되어 보편성이 결여될 수 있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반면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단이란 사회적으로 건강한 모습을 띠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따지는 경우가 많다. 이단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교리적인 독특성뿐 아니라 해당 집단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 자명할 때 이런 집단을 통념상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2세기 중엽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신학 체계는 잡혀 있지 않았고, 정밀하지 않은 것이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적대적인 문화나 정치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교리적인 문제는 덜 중요했다. 하지만 일련의 분쟁들이 생겨나면서 정확하게 규정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에서 그 핵심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신앙인들이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고백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나오면서 넓은 의미의 신학적 규범과 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생산적인 혼란을 통해서 믿고 따라야 할 체계적인 교리가 자리 잡히게 되는 소위 생산적인 혼란의 시대를 겪게 된 것이다. 어떠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이견이 생겼을 때, 기존의 관점에 대한 도전이 왔을 때, 그중에 어떤 것을 용인하고 수용하고 또 어떤 것을 배척할 것인가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진행된다.

 

2. 이단 - 신비와 논리 사이

공식적으로는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부터 초대교회의 일곱 차례의 공의회 동안 교회가 합의한 신학의 규범이 정의되고, 수용되고, 인증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수용된 것을 이른바 정통이라고 하고, 인정되지 않고 배척된 것은 하나의 의견으로 본 것이다. 이단(heresy)이라는 단어 자체는 부정적인 함의를 갖고 있기보다는 하나의 주장, 의견이라는 의미이다. 정통적인 가르침,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이 강조되면서 잘못된 가르침, 오도하는 가르침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미되었다.

정통과 이단의 관계를 살펴볼 때 정통과 이단 중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을까? 본래부터 정통이 존재했고 이단이 반기를 든 것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궁극적으로 논쟁에서 이긴 것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일까? 사실 이단으로 간주되는 이들은 대체로 그리스도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증거하고자 하는 진정한 열정으로 출발하였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규정하기 위한 초대 기독교의 교리 발전은 일련의 지적 여정이다. 하지만 이것을 승자와 패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교회사에서 과연 이단의 역할은 무엇인가? 원 정통(proto-orthodoxy)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통은 끊임없이 문화 속에서 적응하고, 전승되며, 명확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단이 발생하고 이단과 싸우는 과정에서 정통 교회는 반드시 붙들어야 할 건전한 교리와 주장 등을 더욱 두드러지고 명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단의 도전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초대교회로부터 믿고 고백해 온 것을 확인하고, 보존하고,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교리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의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면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되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정통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암묵적이고 함축적인 정통이었다. 이단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그 정통이 더 잘 설명될 필요가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정통 신학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논쟁인 삼위일체 논쟁에서 드러난 아이러니는 정치적으로 아리우스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정한 후에도 아리우스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인 영향력은 여전하였는데, 그 단적인 예가 콘스탄티누스가 죽기 전에 그에게 세례를 베푼 이가 아리우스파 지도자인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성과 논리로만 따져 보면 어느 것이 더 논리적으로 수용성이 있을까?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하는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수용하기 어려운 신적인 계시, 영감을 강조하지만,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성에 근거한 것이다. 신학과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초월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할 부분까지 이성의 영역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교회가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초대교회 이래 모든 이단이나 수도원 운동은 그 자체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기보다는 제도 교회의 흐름에 대한 대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단이 횡행할 때 이단 자체에 대한 공박을 넘어서서 그 당시 기성 교회가 어떠한 역할을 감당했는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3. 마르키온파와 몬타누스파의 역사적 위치

마르키온주의는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다. 마르키온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율법보다 신약의 은혜의 교리를 강조한 것을 기반으로 구약의 신을 악한 창조자로 신약의 신을 진정한 성부로 인식하였다. 구약의 신을 따르는 유대교와 새로운 구원과 자비의 신을 숭배하는 기독교를 전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구약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의 이해를 기반으로 성서를 편집한다. 당시 교회에 아직 정경이 완벽하게 채택되기 이전이어서 독자적으로 정경을 채택하는 작업을 한다. 사도 바울의 저작들 대부분은 포함시키고 복음서에서는 유일하게 누가복음을 채택하였다. 마르키온주의의 출현으로 교회는 율법과 은총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작업의 결과, 교회가 수용하는 정경을 채택하였다.

몬타누스주의는 초대교회의 신비주의 운동, 성령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세기 중반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역에서 출현한 한 분파로, 몬타누스와 두 명의 여성 예언자인 프리스가 막시밀리아가 새 예루살렘의 출현을 주장하였다. 당대 주류 기독교가 교회의 제도적이고 성례적인 부분에 치중하는 반면, 몬타누스파는 도덕적 순결성과 거룩함이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제시하였다. 몬타누스파의 특징은 한마디로 성령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은사 중지론에 반대하며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사라진 이유는 정경이 마련되고 교회 직제가 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예수의 시대가 가고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성령이 말씀하시고 교회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성령의 음성을 전하는 전달자가 몬타누스와 그의 두 동역자인 세 사람을 통해 신이 직접 말씀하시고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재림과 종말에 대한 강조로 이 세상과 절연하며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에 새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종교 운동이었다. 성적인 금욕생활을 통해 더 높은 종교적 무아지경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몬타누스파와 가톨릭 사이의 분열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몬타누스파의 긍정적 기여를 보자면 성령의 계시의 지속성, 즉 성령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 교회의 주의를 새롭게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몬타누스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은 교회의 교회다움, 본질적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단을 판단할 때에 교리적인 것과 더불어 사회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는지가 중요한 요소다. 교회에 기대하는 도덕 수준을 낮추고 보편을 지향할 수 있다면 정통 제도교회에서 인정되지만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자들에 대한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태도는 주류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몬타누스파와 유사한 주장은 종교개혁기 재세례파 운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폴란드 츠비카우에서 시작된 이들은 교황이나 루터의 성서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지상왕국 건설을 꿈꾸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군이 재세례파를 흩어 버리는 위기 속에서 메노 시몬스(1496-1561)가 지도자로 등장하여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이렇게 모인 재세례파는 후에 메노나이트파로 불린다.

 

4. 개혁 -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이단은 전통적인 개념에 따르면 참된 믿음의 경계를 넘어간 외부자들이다. 이제 학자들은 기성 교회의 신앙 체계로부터 벗어난 이단과 신앙의 실천이나 방식에서 차이를 가져온 분열을 구별한다. 급진이라고 부르는 영어 단어 ‘radical’의 라틴어 어원은 뿌리를 의미하는 radix이다. 즉 원천, 근원이다.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는 표현에 들어 있는 함의는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이상을 추구하고 본질을 추구하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실상 사회와 제도 교회가 흘러가는 관성을 거스르는 급진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뿌리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변화는 자주 보이지 않았다. 교회의 변혁은 이상을 지향하나, 철저하고 냉정한 현실 인식과 구조 파악이 뒤따라야 한다.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는 이단 운동들에 대해 초대교회는 정경(신약성서 27)을 정하였고, 믿는 바를 언어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서(사도신경이 5세기경 완성)를 작성하였으며, 교회의 직제(3세기에 이르러 감독, 장로, 부제 등의 성직 계급의 서열 확립)를 마련하였다.

결국 이단 사상의 출현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는 제도화, 안정화 작업을 하게 된다. 이에 교회는 불가피하게 역동적인 면이 사라지고 점차 사회 주류와 기득권에 편입되게 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신앙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을 지향하고 주장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기고, 그 대신 보편적인 것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종교적도덕적 수준은 하향 평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도 교회의 권위가 다양한 목소리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제 정통과 이단이라고 편리하게 규정하는 이분법을 넘어서 다른 목소리들이 전해 주고자 했던 핵심이 무엇이었는가를 곱씹어야 한다. 그곳이 잃어버린 지점, 돌아갈 지점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주류 교회가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를 추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통찰, 원천적 가치에 대한 천착,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급진성은 신학적 사유의 진보성, 개방성에 근거하기보다 복음의 근원적인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타협 없는 용기와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상 위클리프, 루터, 웨슬리 등 많은 개혁가들이 이단으로 몰려 탄압과 비판을 받았다. 개혁을 꿈꾸는 이들은 이런 의미에서 급진적이어야 한다.(* “느헤미야가 가야할 방향-발췌자 주)

 

8장 세속화에 맞선 사막의 영웅들 - 수도원 운동 -

 

1.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위치

초기 수도원 운동은 3세기 말에서 4-5세기에 크게 확대된 교회 내의 운동을 말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세 시대의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연장된 것이 아니라 단절되었다는 단절론의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연장이 아닌 초대교회에 대한 재발견이 된다. 그 결과 루터의 신학이나 사상은 중세의 학문적 진보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성서의 재발견, 복음의 재발견으로 본다. 하지만 그들 역시 중세의 종교적 전통의 세례를 받고 자라 온 중세의 자녀였음을 부인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근대의 형성에 대한 중세적 유산 및 연결성이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역사학에서도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표현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근대의 형성에 대한 중세적 유산 및 연결성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를 넓은 범위에서 살펴보면, 적어도 주류 교회와 이단 운동, 수도원 운동 등 세 가지 다른 독자적인 세력이 상호 견제하며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의 역사를 수도원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관통해서 통시적으로 볼 때, 주류 교회사가 한 흐름으로 끊이지 않는 전통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면 수도원은 시대마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들이 나타나 그 이전의 운동성을 상실한 수도원 운동을 대치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양상을 보였다. 수도원은 새로운 운동성으로 주류 교회를 견제하고 주류 교회의 종교적 생명을 강화해 주는 보조적 역할(수도원을 제도 교회와 비교하여 파라처치라고 표현)을 담당한 듯 보이지만 수도원 자체가 역사 발전을 위한 중요한 일을 해왔다. 분명한 것은 기성 제도 교회가 사회적 역할을 담보하지 못하고 종교성을 상실했을 때 교회를 일깨우고 새롭게 한 이면에는 항상 수도원 운동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수도원이 영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가졌다는 평가는 상호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수도원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은 이 평가가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수도원은 초기부터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 하나는 은둔 수도생활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동 수도생활이었다.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우스는 마가복음 10 21절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자기 재산을 다 기부하고 이집트 광야로 들어가서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수도원의 시초로 본다. 안토니우스가 최초의 기독교 수도사로 불리는 이유는 아타나시우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저술하고 이 책이 오늘날 서방 교회의 수도원 운동이 전파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2. 세속화를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

성 안토니우스를 비롯하여 초기 수도사들의 수는 4-5세기에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이 시점은 기독교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된 후에 비주류의 길에서 주류에 들어오게 된 시점이다. 이때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오히려 차별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가 담지하고 있던 도덕적 영적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질 것은 명백하였다. 승리와 함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1차 니케아 공의회(325)는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했다. 이때 로마 제국이 주도하여 공식 신학을 형성한다. 즉 국가가 교회를 장악하고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기독교가 활용되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주류 교회사가 위로부터 아래로 부과된 형식으로 발전해 나갔다면 그에 저항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래로부터의 움직임, 새로운 종교적인 흐름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수도원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시대마다 이러한 흐름은 발견할 수 있다. 공인 이후 종교의 세속화를 피해서 자발적으로 금욕적인 삶, 이 세상을 벗어난 삶을 선택하며, 독신이 순교에 비견할 만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강조되고, 타락한 세상으로 인해 곧 세상의 끝이 올 것이고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종말론은 수도원 운동의 강력한 금욕주의로 이어졌다.

수도원운동은 초기부터 두 가지 형태,  공동수도회 독거수도회로 나누어진다. 단독 고행자들이 종교적 엘리트를 추구한다면, 공동수도회는 대중적인 운동을 한다는 면에서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동수도회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든 개개인을 위해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 교육시키는 사회복지 시설과 같은 목적으로 시작했다. 독거수도회는 개인의 영성과 신비를 추구하고 성서적 교리에 대한 엄밀성을 추구했다. 수도원을 monastery라고도 하고 abbey라고도 한다. 수도원장(abboy)이라는 단어는 아버지(abba)와 연관된 단어이다.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 공동체라는 것이며,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순종이 강조된다. 제도화의 길을 걷는 기성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수도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수 있다.

사막 교부들을 포함한 은둔 수사들은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는데 수도사들은 대개 신학자가 아닌 영성가를 추구했고, 수도회 운동은 속인 중심의 운동이다. 수도원 운동은 태생적으로 반계서적, 반성직주의의 성격을 지닌다. 초대교회 이단 운동들과는 달리 수도회 운동이 장기간에 걸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원 운동과 제도 교회를 이어준 인물들 덕분이다. 대표적인 예가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를 들 수 있다. 타코미우스가 실천적인 측면에서 수도원을 이끌었다면, 그는 수도원의 이론적인 토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수도회 내에서만 보내지 않고 일반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그것은 공동수도회가 가지고 있는 목적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과 올바른 가치관을 훈련하는 것이고, 이론으로서의 영성이 아니라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서 이웃을 살피고 도우는 실천적으로 예수의 겸손과 낮아짐을 배워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서방의 수도원들

서방의 수도원은 동방의 수도원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론으로 인한 박해를 피해 서유럽에 머물던 때 수도원의 삶을 서유럽에 소개했다. 표준적인 서방의 수도원 하면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들 수 있다.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오늘날 서유럽의 기독교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도원의 회칙의 핵심은 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수도원의 교육 과정은 자아를 비우는 것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즉시’, ‘자발적으로’,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는 이 세 가지가 수도원 순종의 핵심이다. 학교를 의미하는 스쿨은 스콜라에서 파생되었다. 스콜라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는 학교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군대라는 의미다. 수도회란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라는 의미와 함께 교회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선발대이자 정예부대 역할을 하는 엘리트, 종교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수도원의 핵심이며, 기도와 노동을 강조한다. 수도사들은 사제들과는 달리 안수 받지 않은 속인들이었다. 기본적으로 교회 계층 구조의 감독 하에 있지 않고, 수도원장이 독자적으로 책임지고 운영하는 구조였다. 미사 중심이 아닌 성서 중심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 결과 서유럽의 가톨릭은 재속사제(secular clergy) 계율 수도사(regular order)로 크게 분류된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가장 큰 기여 중 하나가 학문을 보존하고 전수한 점이다. 서유럽에서는 초기부터 수도원이 교육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서유럽에서 7-12세기는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시대라고 표현된다. 수도원이 비대해지면서 타락의 양상을 보이는 데,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는 형식을 빌려 자녀에게 편법적으로 상속했으며, 노동을 농노들이 대신하여 수도원 본질의 성격을 잃어갔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에라스무스 역시 수도회 출신이다. 여러 수도회가 등장하고 소멸해 갔지만, 그 속에서 수도회는 나선형적으로 진화되었다. 서유럽에서 수도원의 폭발적인 생명력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중세 유럽의 대학이다. 이러한 대학의 등장 시기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중세의 대학은 독자적인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학 총장도 독자적으로 재판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외부의 교회 권력이나 국가 권력으로부터 대학의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고, 대학이 루터를 교회와 군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대학은 중세에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대학을 통해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고, 중교개혁 이후 수도원이 감당하던 사회의 사상적 지도의 역할을 대학이 계승할 수 있었다. 수도원의 두 흐름은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이 교차된다. 수도회는 세속화된 세상을 떠나 예수의 말씀만을 듣는 마리아의 영성에 출발했다. 하지만 그러한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세상과 단절되고 무관심해졌을 때는 새로운 형태의 영성, 마르다가 구체적 행동으로 섬겼던 것과 같이 세상에 봉사하고 섬기는 수도원이 탄생했다. 이 흐름 속에 지금도 가톨릭 수도회는 관상 수도회(contemplative order) 활동 수도회(active order)가 공존하며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4.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책임

수도원이 혼란하고 타락한 각 시대마다 내세웠던 핵심적인 주장이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서유럽 기독교가 최고조의 번성기에 이르러 타락하기 시작했을 때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하여 초대교회처럼 사도적인 청빈을 추구하는 삶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종교적인 담론을 제시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수도원에서 감당한 것이다. 반면 세상과의 분리, 현실 세계에 대한 무관심, 현실과의 유리 등 수도원이 낳은 부정적인 유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결국 수도원이 스스로 배만 불리고 힘만 키우는 권력 추구로 나아가게 했다. 수도사처럼 자신을 버리고 수도원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좀 더 천국에 가까운 삶이라는 이원론을 낳았다. 이런 정서는 필연적으로 선행에 의한 구원이라는 사상을 뒷받침하여 종교개혁 전까지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즉 스스로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신학으로 연결된다. 수도사로서 성서 연구를 통해 복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은 루터의 생애와 삶은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유산과 부정적인 유산을 동시에 보여 주는 사례일 것이다.

이 수도원 운동이 오늘날 어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 수도원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 영성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개인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 속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부딪치는 소외와 고독의 문제, 박탈감의 문제,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 등은 개인의 역량과 역할로만 맡겨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교회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을 때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교회가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사회적 성취와 세속적 욕망의 추구를 신앙의 승리인양 정당화하고, 그러한 욕망을 긍정의 힘이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그럴 듯한 용어의 외피로 포장한다. 이것이 타락이다. 베데스다 연못의 구조가 근본적인 해결을 주지 못한다는 구조에 대한,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답을 찾는 여정을 출발해야 한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자유를 갈구하고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주고 치유해 줄 공동체를 간절히 찾고 필요로 한다. 수도원이 추구할 영성은 형이상학의 초월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아픈 이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것이다. 수도원의 긍정적, 부정적 역할을 떠나서 수도원이 한 시대에 바로 명상과 사색 가운데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것을 기성 교회에 전해주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9장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전환점 - 기독교 공인 -

 

1.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한다

초대교회에서 기독교 공인은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다. 기독교 공인은 기독교의 출발 이래 지금까지 지속되는 하나의 논쟁적인 주제를 안긴다. 바로 국가와 교회의 관계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을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국가의 존립 목적과 국익에 합치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 암묵적으로 상호의존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초기 기독교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 열세에 있는 현실에서 세속 군주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회 자체가 국가나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국가적인 정치적 혁명을 추구하지는 않았고, 수동적인 입장을 취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세력이 점점 커져 감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갈등이 불거졌다. 로마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의 지배권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지는 중요한 요소였다. 로마에서는 다신론을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의 신들이나 여러 다른 신들을 제국의 통합에 유익이 되는 한까지는 받아들이게 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이 안에서 자신들의 공동생활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합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대주의와 결별한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종교는 성격이 달랐다. 로마가 지니고 있던 제국의 일치를 위한 보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기독교의 복음이 위협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삶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출발해서 전체적인 삶의 방식으로까지 믿음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을 지향했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사회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려는 로마제국의 통치 방식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국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여 교세의 확장을 막고자 하였으나 극심한 박해를 받는 중에도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출발했던 것이 제도적 발전을 거듭하며 실제적으로 규모 있고 의미 있는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기독교가 공인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직제와 교회를 지도할 사제들이 견고하게 마련되었던 것이다.

 

2. 기독교 공인, 교회의 힘에 대한 로마의 인정

기독교가 공인되던 시점에는 로마 제국도 이러한 기독교의 체제를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점차 세속 권력의 유지, 관리에 기독교 성직자들과 교회 행정 체계가 활용되기 시작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때, 무너진 제국의 행정 체제를 복구하고 발빠르게 대체하여 황제 대신 로마를 지배하게 된 것이 교황으로 불리는 로마 감독이었다. 로마의 제국 통치 방식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면 피정복지의 통치를 그 지역의 본래 지배층의 자율에 맡기고 세금만 걷어 가는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정복한 지역을 왕국으로 지정하고 토착 세력을 왕으로 임명해 통치권을 위임하여 식민지를 경영했다. 성서에도 등장하는 분봉왕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팔미라 왕국의 제노비아 여왕은 안디옥 감독인 사모사타의 바울을 임명하여 그 곳을 통치하게 했다. 272년 로마가 이 지역을 다시 통치하게 되었을 때 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는 기독교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를 믿는 것을 이제는 로마의 종교 행위의 하나로 인정했다. 이 사례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인식이 미신에서 정식 종교로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로마의 힘은 점점 쇠락하고 반비례로 기독교의 힘이 점점 성장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로마는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와 관계를 유지했다. 기독교 공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경험한 특별한 사건으로 갑작스레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기독교를 공인할 여건이 조성되었기에 가능했다. 기독교 공인 후 기독교가 급격히 세속화되자 한 부류는 그런 세상을 떠나 고행을 하며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으로 나아갔다면, 노바티안주의자나 도나투스파는 교회가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는 신자들이 일사 분란하게 단결하여 교회를 지켜 냈으나 박해가 끝나자 오히려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요크에 주둔하고 있던 로만 브리타니아 군대의 총지휘관을 맡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차지하면 서로마의 정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센티우스를 치러 로마로 진격한다. 312 10 28일에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십자가의 표식을 보는 회심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로마로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용의주도하게 정적들을 하나하나 격파하며, 결국 사분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일했고, 하나의 제국, 하나의 종교, 하나의 법률, 하나의 시민이라는 제국의 일치를 이루었다.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내릴 때 기독교가 제국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지배하던 서방으로 제한되었다.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물리친 324년에야 기독교가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밀라노 칙령이 전체 제국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비안 다리의 전투가 끝난 후 채 2주가 지나지 않아 로마시 인근에 제국의 토지를 기증하여 교회를 건축했다.

 

3. 국가주의 교회의 출발

기독교 공인은 교회에는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지만, 제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로마를 새로운 가치 안에 하나로 묶기 위한 통치 이념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제국의 정신적사상적종교적 통일을 구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기독교가 내부적으로 크게 분열되어 있어 제국을 분열시킬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제국 안의 모든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전체 교회회의를 개최하였다. 이것이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는 일반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 수행하게 되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는 황제로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며 이교 축전에 참석했다.

기독교가 공인됨으로 교회 성직자라는 직위는 합법이 되었고 다른 종교와 똑같이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종교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정해서 휴일로 지키게 한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 성직자에게는 군복무와 세금 납부의 의무가 면제되었는데, 유럽 여러 국가에서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오래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제국이 교회를 인정하게 되면서 교회 내부 문제들이 국가의 정책에 따라 결정되었다. 감독이 있는 지역 교회는 교구라는 행정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교회 법정을 제국의 사법 제도에 편입시킴으로 교회 내부의 분쟁에 제국의 사법권이 간섭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등 교회가 성장하고 세력이 확대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러한 현상은 동시에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위험성에 직면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공인 되고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개념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이런 교회의 변화에 반대한 것이다. 교회는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 도나투스파의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도나투스파는 박해 시 배교했던 자들을 교회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이 개념은 14세기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 다시 중요하게 등장하기도 했다. 도나투스파와의 문제를 이단 논쟁으로 부르기보다 교회 분열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교회론이다. 교회의 분열이 구원론이나 기독론이 아닌 교회론 때문에 생겨났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의 교회론이 유일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이 타자를 배척하기보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름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재세례파는 도나투스파와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한 집단이다. 4세기부터 시작해서 16세기까지 서유럽 교회는 국가교회였고, 모든 신학이 교회와 국가를 동일하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관심이 일치할 때,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지배는 일반적인 것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작한 종교개혁 역시 세속 군주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때도 시의회가 지지하고 뒷받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세례파는 신앙이란 자발적인 의지로 개인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위정자들의 시각에서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 전체를 생각할 때 이런 사람들이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4.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

도나투스파는 진정한 교회란 세상과 타협해서 특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으며 참된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라고 본 것이다. 사실 2천 년 이상의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단 한 번도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은 적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교회는 충실하게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프랑스혁명 때 성직자회가 가장 큰 타도의 대상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클뤼니 수도원이 시민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교회가 스스로 정화하여 사회를 개혁할 동력을 상실하고 사회 변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가 시민들에 외면당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속 권력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종교는 타락하였다는 것이다.(*고려 말, 불교의 타락-발췌자 주)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로마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정치종교적 구조를 마주했다. 과연 기독교로 개종한 황제와 교회 권력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과연 이 땅에 신의 의지를 대리하는 것이 교회일까, 아니면 이제는 황제일까? 독특한 종교적정치적 지형에서 유세비우스는 이 땅에서 황제를 신의 섭리를 구현하는 신의 대리인으로 설정하는 정치 신학을 구축했다.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을 때 내밀한 힘을 키워 나갔다. 교회가 진정 위기에 처했던 때는 박해를 받았던 때가 아니라, 박해가 사라지고 새 세상이 도래하던 때였다. 국가의 공인과 지원 하에 교회는 독자적인 힘을 키워 가기보다 가장 기생적인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자신들에 주어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에 앞장서는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 황제가 주도해서 교회 공의회를 고집한 것 등이 남긴 역사의 부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정치 신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기독교의 국가 종교화는 오늘의 교회에 어떠한 유산을 남겼을까? 교회와 국가 권력의 긴장 관계가 사라진 후 교회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국가주의에 봉사할 것인가? 인간의 본원적인 존엄성을 지켜 나갈 것인가? 국가주의는 유한하다. 신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에 맞서 순교를 택한 것이 기독교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국가 권력보다 더 지고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위정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국가 없이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등등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래 내려온 국가주의와 교회가 만나 엮어 낸 신화의 구성물이다. 313년 이래 내려온 이 신화를 이제는 재고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의 이해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10. 제국 교회, 제국 신학의 탄생

 

1. 공의회, 제국 신학의 출발점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324년에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를 정벌한 후 밀라노 칙령은 비로소 동·서방 로마 지역 모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 서방교회는 도나투스파로 인한 교회분열을 겪게 된다. 또 동방도 아리우스파의 출현으로 예기치 않은 분열을 겪게 된다. 아리우스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325년과 381년에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교회 내의 분열이 제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리우스파 문제가 공의회에서 다루어진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후 신학 논쟁이 정치화되고 기독교가 제국 종교로 변신하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회 공의회는 교회에서 소집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소집했으며, 공의회 장소에 감독들과 함께 자리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와, 또 그 이후에 열렸던 공의회에서 공식 신학을 형성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모든 지역으로부터 온 교회 대표들이 모여 합의를 이루고 체계를 세웠던 것은 최초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함께 모인 공의회는 1054년 동·서 교회가 분리되기 이전까지 일곱 차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르러 확립이 되는 교회의 신조들, 교리들을 정리해 나갔으며, 공식 신학(official theology)을 형성했다고 평가받지만, 그것은 양면성을 지닌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교회의 중요 사항을 공식적으로 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공의회의 소집은 황제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황제의 관심사는 아타나시우스파냐, 아리우스파냐 등의 신학적 주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기독교 세력이 분열을 극복하고 로마 제국의 새로운 정신적 일체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삼위일체 신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황제가 제국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다시 말해 황제가 처한 정치적 입장이 바뀔 경우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또다시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가 니케아 공의회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은 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 덕분이다. 그는 공의회에 중요한 인물로 참석해서 기록을 남겼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는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가 있지만, 유세비우스의 기록 자체가 당대의 지배자의 견해를 확대, 강화해 나가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여졌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많다.

 

2. 아리우스파, 그 길고 긴 논쟁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고 여러 가지 안건이 논의 되었으나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못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았는데, 바로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를 이성본질(heteroousios, 헤테로우시오스), 즉 하나님과 예수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온건한 아리우스파는 성부와 성자가 유사본질(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이라고 주장했다. “이성본질 성부고난설을 주장하던 극단파는 퇴장하고 동일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가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연단에서 끌어내림으로 마무리되었다. 에드워드 기번 이오타(i)’ 하나를 두고 벌어진 어리석은 논쟁 하나가 교회를 찢어 놓았다라고 비판하였다. 결과적으로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신조를 채택하게 된다. 이 신조가 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수정되고 결정되어 니케아 신조로 알려진 것이다. 황제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추방했다. 이들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교회 직분을 박탈당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문제를 야기했다. 첫 번째,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관여한 황제의 결정이 신학적 입장에 따른 것이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큰 문제이고,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낳았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대단한 정략가로 알려져 있고 황제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그는 황제를 설득해서 아리우스를 귀양에서 풀려나 복권되도록 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친아리우스파로 돌아서게 된다. 자신이 니케아 공의회에서 관철했던 결정사항을 스스로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이는 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중유럽지역에 선교사 울필라스를 파견했다. 서유럽에서 온 교회의 대표들은 아리우스파 문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 있게 대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유럽에서는 이미 테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상태여서 자신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필라스의 선교 이후 6세기까지, 서유럽의 기독교는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주류가 되었다.

476년에 서로마 멸망 이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대제는 다른 게르만족들이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로마 가톨릭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었다. 6세기 전까지는 로마 가톨릭과 아리우스파가 공존하고 있었으나 로마 교황에 충성하는 클로비스의 프랑크족은 삼위일체 신앙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이후 가톨릭이 서유럽 전체로 전파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 결국 프랑크족을 계승한 프랑스는 중세 동안에도 로마보다 더 가톨릭적인 지역이 되었고,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학으로 유명한 파리 대학이 설립되어 유럽 전역에서 신학자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프랑스는 중세 내내 로마 교황과 대립하거나 동맹하면서 가톨릭의 발전에 기여했다. 니케아 공의회 소집이 아리우스파 문제 해결 등 신학적 이슈가 주요 안건이었지만 동방 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그 후 330년에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급부상한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예루살렘이 5대 교구를 형성하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다음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의 갑작스러운 성장을 경계하게 된다. 이것이 로마가 독자적으로 교황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시작점을 제공한 것이다.

5대 교구 중 하나인 로마의 교황, 가톨릭의 수장이 어떻게 세계 교회의 수장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교황을 여전히 로마의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러 교회의 감독 중 하나였던 로마 감독이 전 세계 교회에 대해서 유일한 권위를 주장하게 된 이론적 토대는 5-6세기에 발전하여, 8세기에 완성되었다. 가톨릭은 교황 제도의 기원을 사도 베드로로부터 찾고 있지만, 실제 교황 제도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4-5세기 무렵이다. 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가 자신을 가톨릭의 수장이라고 표현한다. 로마의 감독이 교황으로 된 것은 다른 주요한 교구들, 도시들과의 경쟁 관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경우에는 황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고, 자기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라틴어권의 세속 군주들의 후원을 필요로 했다. 클로비스는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해 주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로마를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황제의 관을 받는다. 그리고 753년에는 피핀 대제가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과 펜타폴리스를 교황령으로 교황에게 바친다. 이것이 피핀의 기증이라고 불리는 교황령의 기원이다. 서유럽에서 로마가 동방의 교회들과 분리되어 자신만의 권위를 획득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기독교의 수장이라고 선포하는 동안, 동방은 세 교회(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가 서로 경쟁했기 때문에 로마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하나의 절대적인 중심 도시가 떠오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7세기 이후에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교회가 이슬람권에 정복당하면서 세력 균형이 급격하게 로마로 쏠리게 되었다는 점도 있다. 이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던 콘스탄티노플이 로마를 압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의 발전은 동방 교회를 중심으로 한 헬라 문화권에서 계속 이어졌다.

 

3. 니케아 공의회 그 이후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서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것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단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파 감독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죽는다. 그리고 자기가 귀양을 보냈던 아리우스를 복권시키고 대신 아타나시우스를 유배 보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권력을 물려받은 세 아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아리우스파 지지자인 콘스탄티우스2가 세력을 확보하며 제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등장하였다. 정치적으로 아리우스파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오히려 강력하게 등장하였다. 황제가 된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콘스탄티누스와 그 일가가 자신의 일가친척을 숙청하는 것을 보며 기독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기독교에서 다시 이방 종교로 돌이켰다. 하지만 그는 362년 보편적 관용령을 내려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대접하면서 이교를 복원하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교 복원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후 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하여 정치적·종교적으로 어지러워진 상황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러한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등장하여 헬라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이교도의 도전에 대응하는 변증신학을 발전시켰다. 또한 아리우스파에 대응하여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379 테오도시우스 황제 전까지, 대부분의 동로마 황제들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지지했다. 정치적으로는 아타나시우스파, 즉 삼위일체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늘 소수였고, 핍박을 당하는 편에 서 있었다. 이러한 경향이 아타나시우스의 삶으로 대표되어 나타났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여섯 번이나 추방을 당했다. 인상적인 것은 아타나시우스가 탄압에 대해서 정략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핍박에 물리적으로 맞서고 충돌하기보다는 묵묵히 감수했다. 이러한 자세는 아타나시우스가 로마에 있을 때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서서 수도원 운동을 서방에 전파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4. 동방신학의 황금기

국제 정세의 부침에 휘둘린 이 망명의 때를 아타나시우스의 황금 시기’(golden decade)라고 부른다. 동방과 서방을 두루 경험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동방 신학과 서방 신학의 교두보를 이어주고, 서방 교회 모두에 큰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아타나시우스와 더불어 아리우스파와의 논쟁 속에서 위기를 이겨 내고 삼위일체를 지켜 낸 인물들이 등장한다. 흔히 위대한 갑바도기안들로 알려진 교부 ()바실리우스,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그들이다. 그들이 활동한 이 4세기를 동방 신학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대바실리우스는 학문적으로 어느 누구보다 탁월했기에 명성을 떨칠 법하지만, 실제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가진 지식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수도사로서 거룩하게 드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돕는 자선사업으로 인해서 대바실리우스로 불리게 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해서 니케아 신조를 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의 친구로 함께 수도생활을 하며 교리를 삶으로 실천했다. 이 세 사람은 아리우스파가 전 로마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때 자신들이 신봉하는 가치를 수호하고자 했다. 교리와 교회의 신학 체계가 혼란스러워져 가고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결탁되어 가는 시점에서 교회와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 신학적 주제에 대한 정밀한 논리적 변증도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에서 아타나시우스나 삼위일체를 신봉하는 이들의 주장이 살아남은 것은 논리적 타당성을 넘어 그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은 아닐까?

서방 신학, 즉 가톨릭 신학의 황금기는 스콜라철학이 융성했던 12-13세기이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는 데, 스콜라철학은 어떤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학문이다. 스콜라철학은 무엇을 연구할 때 신학자들은 함께 모여서 그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설명을 내놓는다. 그러면 설명들 사이에 상충하는 모순점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모두 기입해 놓고, 토론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동방 신학의 황금기는 4세기이다. 신학은 삶이라는 것이 동방 신학의 핵심적인 명제이다. 신은 이론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하지만, 그 근본적인 앎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들은 삼위일체의 본질에 어긋나는 이단에 대해서 논리로 싸우고 제압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삶으로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적인 삶으로 점점 나아갔다. 황제가 인정할 정도로 초대 기독교회는 자선과 박애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터는 신학을 한다고 말할 때, 신학의 본질을 세 가지로 꼽았다. 기도, 말씀과 묵상, 그리고 시험 혹은 고난이 그것이다. 특히 루터는 참된 신학, 참된 성서 해석은 기도나 말씀 묵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번민과 고뇌와 절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탁월한 신학자가 되는 것은 학문적 엄정성을 배워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고난을 받으며 사상을 구현해 나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아타나시우스의 삶과 같은 것이다. 오리게네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가 신학적으로는 매우 뛰어나지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을 넘어서, 고난의 신학, 삶의 신학을 형성했기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1. 다름이 틀림으로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1.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과정

초대교회에 접근하는 가장 손쉬운 접근법 중의 하나가 교리 형성을 중심으로 놓는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하여 칼케돈 공의회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다. 하지만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의 정립이라는 조직신학적 관점만으로 공의회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주요 신학이 규정되는 역사는 뒤집어 표현하면 교회의 분화, 분열의 역사이다. 기독론에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가 교리를 확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제들 중 하나였으며,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가 이를 주요한 논제로 다루었다. 삼위일체론이 중요한 교리로 다루어진 후, 이어서 왜 기독론이 중요한 교리의 주제로 제기됐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계기는 예수와 하나님이 동등하지 않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명제가 확립되면서 그리스도관에 대한 출발점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한 인격 속에 양자가 연합될 수 있는 것인지가 또 다른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여기로부터 그리스도의 양성론 논쟁이 나오게 된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신인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

 

2.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결국 기독론에서 핵심은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 속에 어떻게 공존하느냐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사실 이 문제는 신비이기 때문에 설명하려 할수록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공의회는 기독론에 관한 사상 세 가지를 단죄했다. 첫째로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이다. 이 사상은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완벽한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지닌 예수에게 특별한 신성이 들어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육체도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를 위한 공의회의 소집은 순수하게 신학적인 것만이 아닌, 교회 사이의 정치적 혹은 신학적 대립과 경쟁으로부터 빚어진 것이었다. 기독론 문제는 안디옥 학파와 콘스탄티노플 학파 사이의 경쟁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신학적 대립은 안디옥 학파와 가까운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3,4차 공의회가 개최된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테오토코스), 혹은 하나님을 잉태한 여인 등으로 불렀다. 이것은 가톨릭의 성모 숭배와 연결되는 사상이다. 서방 교회에서 성모 숭배 경향은 12-13세기에 큰 발전을 이룬다. 무흠수태설이 공식 교리로 채택된 것이 1854년이었고, 성모승천설은 1950년이 되어서야 교리로 지정되었다.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다.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자기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을 역임했던 키릴리우스가 개입한다. 결국 이를 둘러싸고 대규모 논쟁이 벌어진다. 결국 양 교회는 각자의 견해에 대한 지지를 황제에게 요청하였고, 누가 황제로부터 정치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431년에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열기로 한다. 에베소 공의회에서 결국 네스토리우스가 단죄되고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는 교회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는 오해 받고 동방 교회로부터는 배척당한 사람으로, 이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동쪽에 근거지를 세우고 교회를 이루게 된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를 동쪽 선교에 기여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3. ‘부정의 신학의 결정체

위와 같은 배경에서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 역시 황제가 소집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 분이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동방 신학은 부정의 신학이다. 칼케돈 공의회의 절묘한 성과는, 주장하지 않으면서 주장하는 그 성격에 있다.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것만 남게 하는 것이 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이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족한 것이고, 그 빈틈에 신성이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봉투와 편지의 비유에 대해서 반박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섞이거나 변화되지 않는 두 본성, 즉 물과 포도주가 섞여서 혼합되어 새로운 것이 되었다는 유티케스주의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섞이거나 변화된 것이 아니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또 네스토리우스주의에서 주장하는 두 본성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나뉘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한 것이다. 분리되지 않는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방식으로 규정함으로 해서 오히려 오해의 여지가 없게 제대로 설명한 것이다.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실제 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한계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어떤 공의회도 이것을 완벽하게 정의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또 다른 편에서 반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겨두는 결정을 한 것이다.

 

4. 공의회가 남긴 유산

이렇게 기독론에 대한 차이로 교회가 분리된다. 교회의 분열은 오래전부터 일어났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가 분리되기 이전에,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에베소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분리되었다. 단성론자들이 칼케돈 공의회로 인해서 분리되었다. 그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하고 이집트, 서아시아, 에티오피아 등에 정착하여 토착 기독교로 자리잡았다. 이들이 오리엔트 정교회이다. 시리아 정교회, 마론교, 이집트의 곱트교, 인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그리스 정교와의 분리 이전에, 5-6세기에 걸쳐서 형성된 또 다른 기독교라고 보아야 한다. 동방 지역에서는 7-8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넘어가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공의회의 결과는 이같이 교회 내 분리를 낳고, 서로 독자적인 신학의 형성을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초대교회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중세교회사에 대해서 논할 때는 초대교회의 주요 교회들 중 하나였던 가톨릭 교회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나뉘었지만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회 역시 초기부터 민족과 종교가 밀착되어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와 같이 성서 텍스트 해석 문제를 놓고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데 익숙한 분위기 속에서 동방의 소수 기독교 종파를 같은 뿌리의 기독교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의 발전은 성서 텍스트뿐 아니라, 언어·문화·사상 등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2.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1. 초대교회의 끝자락에서

왜 아우구스티누스인가?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 모두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중세교회사의 첫머리이고, 중세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종교개혁사의 첫머리이다. 북아프리카 출신인 그는 신학의 주류로부터 영향을 받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가톨릭이건 개신교건 동일하게 아우구스티누스를 기억하는 공통분모는 바로 당대의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지,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 인식 혹은 역사철학을 정립하여 신의 도성이라는 관념으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사람들이 제기한 교회와 사회 문제에 대한 질문에 통찰을 제시했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를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도 부른다. 초대 교회의 가장 큰 역설은 기독교가 공인된 후 신학적으로 체계를 잡아 가던 때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공의회들을 통해서 살펴봤던 초기의 신학 논쟁들이 위기에 처한 사회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논쟁이었던 것이 아닌가?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 받고 국교가 되면서 세계의 주류가 되었지만 로마의 멸망이라는 사건 앞에서, 어떠한 것이 교회의 나아갈 길인지 방향을 제시하는 고민이 부족했다. 근대 세계에서 이러한 현상이 단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프랑스혁명 때였다. 가톨릭교회는 민중의 외침에 무심했다. 1930-40년대에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당시 이탈리아에 등장한 파시즘 정권과 정치적으로 협력했고, 독일의 루터파 교회는 히틀러 정권을 지지하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묵인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교회는 그 이후 펼쳐질 수많은 사례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생각하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사회와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역사적 교훈을 찾고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여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기말적인 현상을 겪고 있는 오늘의 교회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는 한 변방교구의 감독이었을 뿐이었다. 기독교는 민족과 인종과 계급을 넘어선 보편적인 가치와 구원을 담보하고자 하는 집단이었다. 로마는 팍스 로마나로 대표되는 제국의 이상과 가치를 보편적으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로마 제국이 혼란한 시점에서도 기독교는 성공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 덕분에 유럽 중세의 지배적 정치사상으로 기독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중심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중산층 출신 이교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우스파 선교사였고 이후 6세기까지, 서유럽의 기독교는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주류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카스테라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이때는 아주 방탕하게 지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다. 마니교는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펼친다. 마니교는 논리와 수사학으로 죄와 어둠, 선과 악의 문제를 접근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에 경도된 이유는 기독교의 교리보다 마니교의 교리가 훨씬 더 세련된 설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악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마니교에서 궁극적인 해답을 찾지 못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연 악을 신이 만들었는가를 고민했다. 악은 신이 만든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 즉 선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악은 실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x nihiio), 즉 선이 충만하게 임하지 않을 때 선이 결핍된 자리에 악이 들어온다고 설명한다. 종교적인 방황 속에서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에도 기웃거리다, 결국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감독인 암브로시우스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아 그를 찾아갔다고 전해진다.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과 아타나시우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고, 결정적으로 로마서 13 13-14절의 구절을 읽고 극적으로 회심하였다.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히포에서 감독으로 세워진다. 바실리우스나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가 히포의 감독이 되고 나서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현실적인 논쟁과 갈등, 대립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3.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는 컨텍스트, 그가 처해 있던 그 시대의 현실적이고 급박한 상황을 중시해야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부작이라고 하는참회록』 『신국론 그리고 삼위일체는 모두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410년에 이민족에게 약탈당한 로마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가 맞닥뜨린 내적인 병폐들과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교회 외적인 문제 등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배경은 너무나 긴박하고 치열했다. 그가 신학을 정리하고 고민해야 했던 시기는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 즉 교회가 지속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었던 때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히 신학자라는 관점을 넘어 정치사상과 역사를 포괄하여 다각도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보자. 펠라기우스는 브리타니아 출신으로 합리적 도덕관을 가지고 이성적인 신앙을 전파하던 사회개혁자라고 보통 알려져 있다. 그는 브리타니아 제도에서 이탈리아로 와서 로마를 방문하면서 매우 실망한다. , 기독교화 된 로마, 그 로마의 교회가 여느 교회나 도시보다도 더 종교적·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이면서, 기독교 신학은 공식 신학의 비호 하에 죄의식을 완화하고 덮어 버리는 상태에 있었다. 펠라기우스의 고민은 은총이 잘못 적용되어서 모든 문제를 넘어가고 덮어 주는 신학적인 문제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낳았다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펠라기우스의 지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도덕 개혁과 기성 교회의 오류를 부르짖는 그의 주장은 교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교회가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구를 종교적인 외피를 입혀 포장해 주는 경우가 교회 역사에는 늘 있어 왔다. 대중의 세속적 욕망을 합리화해 주고 도덕적 책임감을 완화해 주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 펠라기우스가 문제를 제기한 부분도 바로 여기였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은총론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 이론과 사상의 기초는 구약과 신약에 나온 예수와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의 명령은 인간이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신이 무엇인가 명령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의지를 사용하면 신의 명령을 준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결국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 명령을 어기고 행한 모든 죄의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 범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범죄 하지 않을 의지와 현실은 인간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펠라기우스의 주장의 컨텍스트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서방 라틴 교회 지역에 속한 신학자인 펠라기우스가 라틴 교회 신학의 영향보다는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강조하는 동방 교회의 신학을 반영한다. 서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하는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 성화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 등을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타락과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인간은 완벽한 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새 사람이 된 인간은 새로운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더라도 성령의 도움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예수의 속죄, 대속 자체를 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는 이유로 단죄된다. 두 주장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서 수용한 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529년에 펠라기우스 주장이 단죄되고,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수용되지만, 실제로는 펠라기우스주의가 중세의 가톨릭에 영향을 주어 로마 가톨릭의 신학 속에 자리잡았다. 여러 가지 성례전을 규정하고 준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중세 가톨릭의 특징은 오늘날에도 가톨릭에 영향을 주고 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놓고 논쟁하고 결별했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바뀌고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입각한 자유의지론을 쓴다. 루터가 이것을 보고 반박하여 의지의 속박,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한다. 마치 펠라기우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서로 논쟁하듯이 이 현상은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펠라기우스가 가톨릭 위계질서 속에 제도화된 교회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모든 개별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강조한 점은 중세 말 유럽 교회의 사제 중심주의의 폐해를 고스란히 겪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 공동체에 돌아볼 지점을 고민하게 한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사회 문제에 있어서 어느 시대, 어떤 집단보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 것 역시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이라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모두 루터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재발견에만 초점을 둔다면, 종교개혁기에 되살아난 인문주의의 흐름, 펠라기우스의 재발견, 더 나아가 재세례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안의 흐름을 외면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사상을 통합하여 서구 사상의 근간을 놓았지만, 교조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방어하고 전적인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극도로 부정적인 인간관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그늘이다.

 

4.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의식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그 후로부터 만들어진 신학은 황제가 교회 공의회를 주도함으로 이루어졌다. 로마라는 국가를 신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신학이 탄생했다. 교회사를 쓴 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는 로마를 지상에 세워진 교회라고 불렀다. 413년에 있었던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약탈 사건은 서로마가 476년에 멸망하지만 이때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것이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로마가 기독교가 공인된 후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망해 버렸다.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할 것 없이 어떻게 신의 택함을 받은 로마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가 허망하게 이교도들에게 짓밟힐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졌다. 교리와 관계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 기독론, 성령론 등의 논쟁과는 전혀 다른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당대 로마인들은 그 불행의 원인을 기독교에 돌렸다. 이교도들이 분개해서 그 재앙의 원인을 가차 없이 혹독하고 신랄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신을 모독하는 상황이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기독교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다. 외부의 모독과 내부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해답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 413년부터 13년간 저술하였다. 신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 것이라고 믿었던 로마 제국의 공식 신학의 가르침이 갑자기 무너지게 된 상황에서 그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다. 그는 제국을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제국 너머의 신국으로 전환하고자 시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의 논의를 끌어가는 핵심은 사랑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느냐, 세상을 사랑하느냐의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세계의 역사는 긴장 속에서 움직여 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작용할 때는 아무리 그것이 교회고, 하나님 나라의 현현으로 위대하게 보이는 국가라도 지상의 도성일 뿐이며, 반대로 사람들이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든 하나님의 도시, 천상의 도시가 될 수 있다. 신의 도성은 인간의 도성과 분리되는 영원한 종말이 오기까지는 공존하게 된다. 지상에서는 두 요소가 함께 존재하며 다투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 로마 역사를 보는 관점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은 역사는 계절이 반복해서 순환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주기가 반복되며 순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문명이나 국가의 번성과 몰락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헬레니즘의 역사관이었다. 반면 히브리인들은 역사를 창조로부터 완성으로 진행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역사는 신의 뜻, 의지의 구현이지 단순히 계절의 순환과 같은 반복되는 자연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인의 역사인식의 핵심에는 신이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 이해에서 히브리적인 관점의 가장 중요한 점은 신의 뜻 혹은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뜻이 역사에 개입된다. 이러한 히브리 사관을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한다. 역사를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적인 관점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고 이민족이 들어오는 것도 결국은 신의 섭리의 한 과정이다. 가인에서 출발한 자기를 사랑하는 지상의 도성 아벨에서 출발한 신을 사랑하는 신의 도성 함께 움직여 가고 있으며, 이 가운데서도 신의 도성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종말의 왕국, 하늘의 왕국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로마가 멸망한 것이 기독교의 신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구속사의 섭리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 시대의 처한 상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고, 목적을 탐구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이성의 관점 너머의 신의 섭리 편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체계화하고자 시도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인간을 역사의 주변부로 몰아낸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인은 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신의 역사가 합쳐지는 과정이 바로 기독교적 역사의식 혹은 기독교적 역사관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세 내내, 혹은 근대와 현대까지도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은,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과정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은 신의 뜻과 목적을 헤아릴 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상 인간이 그 속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는 환원론으로 비판 받을 여지도 충분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념 속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선함과 행복, 이상적인 국가와 정의, 평화를 이 땅에서 구현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자리하고 있다. 천국을 향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이 땅의 부정과 불의, 제도적구조적 모순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성과 속의 이원론적 삶을 추구하게 했다. 제도에 대한 순종이 인간이 최소한의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방편으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교회 지배의 중세를 열게 하는데 기여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면이다. 이러한 문제가 있음에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남기지 않았다면, 로마의 멸망은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비극적인 제국의 쇠망사로만 기억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대의 세계관을 뛰어넘어서 목적론적인 역사관 혹은 기독교적 역사관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에 대해서 능동적인 주체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다. 18세기까지도 섭리사관이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였다. 기독교가 쇠퇴한 이후에 신의 의지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섭리사관은 이성에 의한 역사 발전으로 대체된다. 헤겔, 계몽주의가 들어서면서 신의 자리를 이성이 대체하였다. 인간이 역사에서 거대한 메커니즘이나 자연적인 질서의 부품의 하나가 아니라 신의 뜻을 알고 찾고자 할 때 주체적으로 역사와 사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란 신의 뜻에 맡겨버리는 종속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이자 적극적인 해석자로 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