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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송영의 삼위일체론- 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이동영

2019-08-22 01:31:25


송영의 삼위일체론(이동영)

 

프롤로그

 

이 책의 저술의 목적은 삼위일체론의 내용과 의미 그리고 이 교리가 가지는 예배적, 실천적 함의를 우리의 신앙과 삶과의 관계 속에서 바르게 이해하고 해명하는 데 있다. 삼위일체론은 초기 교부들의 신학적 사변의 산물이 아니다. 이 교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초기 교회가 삼위 하나님께 돌렸던 경배와 찬양 속에서 현시되었던 교리이다.

 

1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

 

우리나라 말로 신학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테올로기아 하나님이라는 뜻의 테오스  또는 말씀이라는 뜻의 로고스의 합성어로서 신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고 노래하는 것, 즉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행위를 신학이라고 불렀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에서 크고 중심되는 주제는 하나님이다.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교의학(신학) 전체의 유일한 교리이자 독점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바빙크는 교의학이 취급하는 그 신론이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이고 전제이며, 신론 외의 다른 교리들, 즉 인간, 구원, 교회, 종말 등에 관한 교리들은 단 하나의 중심 교리인 신론,  신 지식(cognito Dei)”에 대한 해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학은 곧 신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고독하게 독존하는 전제군주적인 일신(一神)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즉 창세전부터 성부(Pater), 성자(Filius), 성령(Spiritus sanctus), 곧 삼위(tres personae)로 존재하시며 상호 간에 사랑의 관계 속에 교제 소통 어우러짐(Harmonie)”으로 온전히 하나(Eins, unitas)”이신 분이다. 그래서 삼위 하나이신 하나님이 신학의 유일한 주제이며 독점적 내용이다. 신학은 신론 곧 삼위일체론을 의미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예배와 찬양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생사가 걸려 있다.

 

신학은 구원의 하나님이신 삼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 삼위 하나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이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찬양인 영광송”,  송영(Doxologia)”을 지향한다. 왜 신학은 송영인가? 그 이유는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지 아니하셨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처음부터 찬양을 위한 지식이었지 가치중립적인 지식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학 곧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허한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존전에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삼위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를 높이며 찬양하는 지식이다.

 

2장 신학, 경륜 그리고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나님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2인칭으로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찬양하는 것이다.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이 신학자다. 그러므로 신자가 곧 신학자다.

 

고대 동방의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사유하는 교리인 삼위일체론을 신학으로 규정했고, 그 외 다른 교리들을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다루는 경륜(. 오이코노미아)”에 관한 교리로 구분했다. 인간이 ”(, scientia)으로 논구할 수 있는 영역은 하나님이 세상과 관계하시는 경륜의 영역이다. 우리는 동방의 견해에 너무 지나치게 경도되어 삼위일체론만이 신학이며, 나머지 교리들은 경륜에 속한 것이라고 협소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협의의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직접으로 사유하고 사색하는 삼위일체론만이 신학이라고 할지라도, 광의의 의미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도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도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불려야 한다.

 

성경은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결코 철학적관념적형이상학적으로 사변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며, 역사 속에서 인간과 함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말씀이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성육신(incarnatio)”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아들을 역사 속에 들어오게 하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분여(imparatio)”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오직 그의 계시적 행동을 통하여만 알려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동적으로 파악해야지, “그리스 철학을 따라 형이상학적사변적인 관점에서 정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 및 세계와 관계없이 하나님을 순수 형이상학으로 사변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다. 성경은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기를 시작한다. 성경은 창세 전의 하나님의 존재와 삶에 대하여 사변적인 논의를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은 구체적인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서 진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말씀(성경)”을 통하여 그때 그곳에서 하나님이 인간 및 세상과 관계하여 어떻게 행동하시고,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그러기에 그때 그곳에서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 사이에 무슨 사건이 발생했는지를 통찰해내기 위하여 해석학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 의존해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으려면, 성경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그때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해야만 한다. 이러한 질문을 무시한 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비성경적인 추상화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칼뱅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 관계하여 어떠한 분이 되시고자 하는가에 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인간과 역사 및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획득되는 소통적 지식이며 무시간적·초역사적·정태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입장을 칼뱅이 천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스 철학을 따라 사유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존하여 사유했기 때문이다.

 

3장 구약의 신론과 신약 신론의 강조점의 차이

 

성경이 인간 및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구약성경의 하나님 개념과 신약성경의 하나님 개념 사이에는 서로 다른 강조점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구약의 신론 신약의 신론
출현 형태에 고정되지 않음 예수 그리스도로 단 한 번 고정되어 계시됨
어디에도 매이지 않음 아들에 매이고,
아들 안에서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심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인간이 아닌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분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됨
(내재성을 함께 말함)
하나님의 내재성이 강조됨
(초월성을 함께 말함)
주의할 점: 구약과 신약의 신론은 상호대립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약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내재성은 상호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상관성 속에서 파악되고 인식되는 하나님이다. 초기 교회의 이단이었던 영지주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인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에도 마르키온과 유사하게 구약의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율법폐기론자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구약의 율법이 결코 폐기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칼뱅과 개혁신학의 전통에 따르면 제사법”(의식법)은 폐기되었지만, “도덕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권위를 가지며, 우리의 신앙과 삶을 위해서 여전히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으로 간주된다.

4장 말씀의 신학이냐, 경험의 신학이냐?

 

성경 계시가 형성되던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및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시며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신현 행위(이적)”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선지자나 사도들의 인간적 경험을 배제시킬 수 없기 때문에 계시 경험”, 이 양자를 구분은 해야 되겠지만, 그것들을 예리하게 분리시켜 양자택일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계시)이 필요하지만 또한 여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경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학함에 있어 신학의 객관적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그 하나님의 게시의 말씀에 의존하여 사색할 때, 우리의 지성과 정서와 의지에 역사하시어 그것들을 조명하시는 성령의 사역, 즉 신학의 주관적 원리로서의 성령의 내적 조명은 필수적이다. “계시 경험이 만나고 통합되는 곳에서 참다운 하나님 인식과 참다운 신학의 원리를 도출해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성경 계시에 의존하는 인식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경험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인식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경험과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속에서 삶의 경험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해야만 한다.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경험이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살아 있는 신학이 형성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로써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신학을 하는 우리의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조명해주실 것을 간구하면서 겸손히 신학작업을 수행해 가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조명과 그 조명이 수반하는 사랑만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하고, 성실한 실천으로 우리를 인도해간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기 이전에 기도로써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간구해야만 하고,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비추시는 그 조명의 빛을 공손히 받아들여 그 조명의 빛에 의존해야만 한다. 신학은 오직 신앙의 행위로서만 가능하며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

 

5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

 

구약성경에서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야다이다.(4:1, 1:25) 신학이 추구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서의 야다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획득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바빙크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귐이 성령을 통한 양자 사이의 신비적 연합이자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긴밀한 인격들의 연합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연합을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순한 관념적사변적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고 성령에 의해서 조명된 지식이며, 특별히 성령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더불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시어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하심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부여하신다. 성육신을 하나님의 자기전달로 파악하는 이러한 사상은 가톨릭의 신학자인 칼 라너 계시론 그리스도론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라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전달한 사건이며, 그러한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하나님의 자기전달에 대한 바빙크의 이해는 삼위일체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균형 잡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자기전달에 대한 라너의 이해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위일체적인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성령론적 차원이 결여된 불균형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야다의 지식, 즉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획득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신앙(fides)”이라고 부른다. 칼뱅에게 있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삼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신앙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칼뱅이 말하는 신앙으로서의 지식은 단순히 주지주의적인 지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께 참여하여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획득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의 뜻까지도 통찰하는 지식이다. 삼위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은 참된 신앙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칼뱅에게 삼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한 순간의 고정적인 실체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성화의 과정 속에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획득되는 지식이다. 그래서 이 지식은 되어감 속에 있는 역동적 지식이고 도상의 지식이며 나그네의 지식이지, “본향의 지식이 아니기에 고정적·정체적·교조적 지식일 수 없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무시간적 맥락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6장 그리스도교의 신론으로서의 삼위일체론

 

이성 중심적 신학이야말로 계몽주의 이래로 서방 신학의 가장 심대한 오류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이성 중심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계몽주의 이래로 서방 신학이 빠졌던 가장 심대한 오류다.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지만 방점은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 오직 성령이 당신의 말씀을 조명하시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조성하시고, 우리가 성령의 선물인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연합은 예배 속에서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을 통하여 구현되는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이다.

 

기독교 신론은 삼위일체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과 관계하고 소통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천명한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려면, 세상에 내주하시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초월하실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면 이 세상보다 큰 초월적 존재이어야만 가능하다. 초월해서만 계시다면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이기에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전제군주적 유일신은 이 세상을 초월하고만 있기에 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는 신일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 내재성이 동시에 확립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세상에 내주하시는 동시에 세상을 초월하시기에 구원의 신이 될 수 있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밖을 향하여 관계하시어 이 세상 속에 내주하시며, 동시에 성령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이 세상과 이 세상의 밖을 향하여 관계하시어 이 세상을 초월해 계신다. 기독교는 성부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삼위일체 교리의 서방적 이해에 대한 반성적 성찰

서방신학은 그리스 신 개념의 영향으로 철저히 삼위일체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삼위에 앞서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의 본질이 강조되었고, 그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로 존재하는가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전개되었다. 그 결과 삼위일체 교리는 전제군주적 일신론 내지는 일위일체신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으로 오해되게 된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신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20세기엔 칼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를 기독교적 일신론”‘이라고 까지 명명했으며, 한 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삼위일체론이라고 주장했다.  한 분 하나님(Unus Deus)”, 곧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전제한 후 그 유일하신 하나님의 삼위성”, 즉 그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세 개의 존재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의 위험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주류의 세계관에 대항한 초기 교회 교부들의 반전: “태초에 삼위가 있었다!”

고대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태초에 삼위가 계셨다고 천명함으로써 부동의 일자로부터 만물이 유출되어 나왔다는 당시 그리스 주류적 세계관을 뒤엎었다. 이러한 혁명적 신론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색하되 그리스의 유일신론적인 유신론 철학의 전제 위에서 사색한 것이 아니라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주도하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삼위로 사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통행위와 사랑

고대 동방의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고 또한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인식한 경륜적 삼위일체를 견지했다. 경륜적 삼위일체로부터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영원한 본질의 삼위일체를 추론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우리는 경륜적 삼위일체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를 추론적으로 사유함으로써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고독한 유일자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상호 간에 지극한 사랑 사귐의 존재였음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상호 대상성과 상호 관계성, 그리고 그것드로 인한 상호 소통과 사귐을 함축하고 있는 내러티브적 진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소통행위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고독한 유일자로서의 이기적인 자기애에 사로잡힌 전제군주 신과는 거리가 멀다하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관계적 존재였으며, 또 그러한 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사귀는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7장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의 이해방식의 차이에 대한 드 레뇽의 통찰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테오도르 드 레뇽의 공헌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의 이해방식의 차이를 19세기 로마카톨릭교회의 교부학자 테오도르 드 례뇽이 정리했다. 서방 신학은 한 분 하나님의 본질 또는 주체를 전제한 후, 그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 어떻게 삼위, 즉 세 위격들로 존재하시는가를 해명하려고 한다. 반면 동방 신학은 세 위격들, 즉 성부, 성자, 성령을 전제하고, 이러한 세 위격들이 어떻게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가를 해명하려고 한다. 서방세계는 위격을 본질의 한 양태로 간주하지만 동방세계는 본질을 위격의 내용으로 간주한다.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

서방과 동방의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 방식의 차이를 질문 형식으로 정리하면,

서방의 질문 :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동방의 질문 : 세 위격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즉 서방은 한 분 본질로부터 시작하여 삼위를 설명한다. 곧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 삼위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동방은 삼위 즉 세위격들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 됨을 본질로 파악한다. 이 경우 삼위 곧 세 위격들이 한 하나님의 본질보다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8장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삼위일체론

기독교의 예배 대상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신론이다. 이 교리는 교리들 중의 교리이며 그만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로 인하여 유대교 이슬람교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할 뿐 아니라 힌두교와 같은 다신 종교 및 불교 같은 무신론 종교로부터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할 수 있었다. 개혁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고백과 더불어 전체 기독교는 서고 넘어진다.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모든 교리의 뿌리이며, 새 언약의 실체다....삼위일체 교리는 한 편의 형이상학적 교리 또는 한 편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의 심장이고 본질이다.” 십자가의 구원의 진리는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비로소 역사적 사건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삼위일체 교리를 앞선다

삼위일체 교리는 철학적·사변적·형이상학적 탁상공론으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초기 교회 신자들의 실제적인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즉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경험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될 수 있었다. 신약을 보면 삼위의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에 대한 송영적 고백  예전적 축도 형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삼위 교리는 초기 교회의 예배 속에 자신의 신학적 자리를 정위하고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렸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으며, 성만찬의 성령 임재의 기원 속에서 성령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빵과 포도주에 역사하셔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공동체 속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케 해주실 것을 기도로써 간구했다. 교부 프로스페르 아퀴타누스 예배의 법(예전)이 신앙의 법(신학)을 앞선다.”고 예리하게 갈파했다.

예배 속에서 경배되던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기도를 모으고 정리해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해설을 붙인 것이 삼위일체 교리이지, 삼위일체 교리가 먼저 정립되고 난 후 삼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의 후계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자신의 명저 <신학총론>에서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고 쓰고 있다. 즉 신학은 사변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경배와 송영을 위한 지식이라는 의미이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사변하는 것보다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다. 삼위 교리를 이론으로 배우기 이전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선행되지 않는 한, 삼위 교리를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9장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와 한국교회의 무관심

 

신학의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냉대의 원인

초기 교회 성도들의 하나님 체험과 그것을 통한 그들의 구원 경험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그러기에 이 교리는 그들의 구원 경험에 관한 구체적인 신학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후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교회 성도들의 구원 경험의 구체적인 신학적 표현으로 온당하게 취급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내적 신비를 존재론적으로 사색하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교리로 치부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관한 교리, 즉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실로 중요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사변적으로 사색하는 이해불가의 교리로 폄하되었다.

4세기 아리우스 아타나시오스 사이의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신학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교리의 논쟁에 관한 일련의 노정을 살펴보면, 이 교리는 초기 교회의 구원경험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이탈하여, 매우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분리되지 않고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되었던 오이코노미아(구원 경륜)” 테올로기아(신학)”가 분리되게 되었으며, 삼위일체 교리는 오직 신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논구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오인되었다.

이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의 역사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도인의 신앙 및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사변으로 폄하하는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칸트 삼위일체론을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삼위일체성의 교리로부터 문자를 따라 어떤 실천도 만들어낼 수 없다.” 삼위일체 교리를 윤리적 실천과 무관한 무의미한 사변으로 간주하며 이에 대항하여 강력한 윤리적 일신론을 주장했다. 슐라이어마허도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성도의 삶과는 무관한 무의미한 사변으로 간주하며,. 경건한 자의식과는 무관한 추상적 무의미한 교리로 여겼다. 하르낙도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같은 교리들을 기독교 복음의 그리스화의 산물 내지는 그리스적 변질로 간주했다. 삼위일체론을 예수의 복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비본질적인 교리라고 주장했다. 반면 헤겔은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적 관념속에서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절대정신의 3중적 자기 전개로 삼위일체를 파악하는 헤겔의 이해는 양태론적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18-19세기 사상가중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거의 유일한 계몽주의 계열의 사상가였다.

 

20세기 중엽까지

20세기 중엽까지도 삼위일체 교리는 성도의 신앙 및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사변이라는 편견이 서방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형성되었다. 칼 라너는 이를 대단히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성도들이 입술로는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 신앙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신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

18-19세기에는 폄하 내지 무관심이라면 20세기 중반 1970년대부터는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에 대한 재발견과 더불어 급속하게 교정되었다. 1952 클로드 웰치가 이미 예견하였고, 엘빈 쉐델은 오늘날 신학 안에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음을 천명했다. 세례 요한과 같이 그 길을 준비한 신학자들이 벤자민 위필드 헤르만 바빙크이다. 위필드(1851-1921) 1915 <성경적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론이 성경 속에 뿌리 박고 있는 교리임을 천명하면서, 비록 성경 속에 삼위일체와 관련한 명시적인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교리에 대한 흔적들과 암시들이 성경의 도처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바빙크(1854-1921)는 아무 의미없는 교리로 냉대받던 시절에 삼위일체론이 담지하고 있는 신학적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재천명하면서 오늘날의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기를 예비했던 위대한 예언자적 신학자였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고백과 더불어 전체 기독교는 서고 넘어진다...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모든 교리들의 뿌리이며 새 언약의 실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편의 형이상학적 교리 또는 한편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의 심장이고 본질이다.” “기독교의 심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박동한다. 따라서 모든 오류는 삼위일체론의 이탈에서 비롯되거나 또는 더 깊이 숙고해보면 그 이탈로 귀결된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삼위일체 르네상스를 견인한 신학자로는 칼 바르트(1886-1968), 블라디미르 로스키(1903-1958), 칼 라너(1904-1984) 등이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모든 다른 종교들의 신론으로부터 기독교의 신론을 구분 짓는 교리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종교의 계시 개념들로부터 기독교의 계시 개념을 구분 짓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교리라는 것이다. 로스키는 <동방교회의 신비 신학에 대하여>에서 삼위일체론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초석이자 모든 교리들의 근저요 토대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 실체라고 설파하였다. 칼 라너는 서방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신론에서의 전제군주적 일신론의 경향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서방 신학이 삼위일체론을 신론 그 자체로 취급하지 못하고 신론과 삼위일체론을 구분하여 신론에서 한 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우선적으로 취급한 후 삼위일체론을 한 분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세 번째 항목으로 논구하다 보니 삼위일체론에 전제군주적 일신론의 무거운 암영이 드리워지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의 신비와 삼위일체의 신비를 분리시키지 말고 하나로 보아야만 하며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 즉 경륜으로부터 인식할 것을 제안했다. 라너의 법칙이라고 불리며, “일치성의 원리 또는 동일성의 원리라고도 불리는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자신의 유명한 명제를 삼위일체론의 근본공리로 천명했다. “경륜의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 위 세 명의 영향에 힙입어 1980년대 들어와 몰트만, 판넨베르크, 윙엘, 콩가르, 카스퍼, 보프, 캐서린 모리라쿠나 등 오늘날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기를 형성시켰다. 17장에서 더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무관심

한국교회에서의 삼위일체 교리는 성도들의 신앙 및 삶과는 무관한 하나의 장식 교리로서 단지 예배 말미에 목회자의 축도속에서 그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목회자들도 이 교리를 신앙 및 삶과 무관한 사변적이고 불가해하며 무의미한 교리라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의 자세보다는 불가지론의 입장 또는 파악할 수 없는 신비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신약학자 이상근이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성과 이해 불가능성을 강변하였다면,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삼위일체 교리의 무의미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이 두 분만의 주장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퍼진 주장을 대변하는 이야기이다. 한국교회는 교리 교육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배우는 것이기에, 예배, 신앙, 삶을 통하여 이 교리를 실천하는 것과 관련하여는 매우 약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하기는 불가능하기에 그 신비 앞에 종국적으로 침묵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신비에 대한 반지성적 몰이해적 입장을 견지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변하고 논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경배하고 묵상하며 찬양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10장 삼위일체론과 교의학의 구성 문제

 

서방 교회의 신학적 전통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론 그 자체로 취급되지 못하고 신론의 부록으로 취급된 측면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론의 세 번째 항목에서 삼위일체 교리,  삼위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trino)를 취급했고, 개신교 스콜라주의 신학도 그 입장을 따르므로해서 삼위일체론을 구원사로부터 배제시켜 한 분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 사변이 되게 만들었다.

 

계몽주의 이래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예배(경건)와 삶(실천)을 지배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로 이해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사변으로 간주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 교리를 교의학의 맨 마지막 말미에 취급함으로 해서 가장 가치 없는, 말미를 장식하는 부록으로 간주되는 위험성을 노출시켰다. 칼 바르트는 이에 대항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교의학 전반부에 취급하였지만, 이는 다른 교리들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고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그리스도론 성령론 전제적 선취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장 칼뱅이 보여주는 교의학의 삼위일체론적인 구조와 구성은 그리스도교 교의학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전개 방식이다. 하지만 서방 신학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측면이 있어 참으로 애석하고 아쉬운 일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며 심장이라고 갈파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론이라는 심장의 박동과 더불어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참으로 위대한 예언자적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독일 신학자 빌프리트 예스트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을 차례로 취급한 후, 그것의 종합으로서 삼위일체론을 논구하는데, 슐라이어마허 바르트보다 더 진일보한 전개방식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예스트의 체계를 교의학 구성에 있어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삼위일체론의 토대 위에서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차례로 취급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유일한 체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퀴나스적 결함, 슐라이어마허적 결함, 바르트적 결함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진일보한 체계로 고려해볼 만하다.

(* 저자는 위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만 하지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논리도 빈약하다.)

 

11장 삼위일체 교리의 예비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양대 이단

 

삼위일체 교리의 예비

삼위일체론은 과연 성경적인 교리인가? 오래전부터 이 질문이 제기된 것은 구약과 신약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명시적으로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교리가 성경의 증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사고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비판하면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인정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배척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내적 본질에 대하여 불가지론  알 수 없음을 강변했다.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의 토대 위에서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종속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공의회 교부들이나 종교개혁자들, 개혁파와 루터파의 정통주의자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비록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삼위일체 교리의 뿌리요 근거가 되는 수많은 암시 구절들을 구약과 신약의 도처에서 발견했다.

 

구약성경과 삼위일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복수성을 표현하는 구절, 1:26 우리라는 의미의 복수형 엘로힘이 발견된다. 이것이 세 위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충만함 가운데 다양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구약성경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 구약의 본문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존재의 충만함과 그의 행위의 역동적 생명력”, 그리고 그의 존재의 내적인 공동체성 다양성  복수성을 표현하는 구절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본문들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흔적들이자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 구절들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과 삼위일체

신약성경에서는 세 위격이 예전적인 기도와 더불어 송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고후 13:13)”

또한 세 분의 성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세례명령 안에서 나타난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28:19)”을 명한다. 삼위일체론은 초기 교회의 세례식 속에서 자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곧 삼위일체론이 초기 교회의 구원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으로 통합된다. 삼위일체론은 초기 교회의 세례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실천되는 삼위일체론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정형화되고 체계화된 삼위일체 교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세례 시에 그리고 예배 중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호가 찬양(송영)되고 경배(예배)되었다.

 

그리스의 철학적 일신론과 구약의 유일신론의 결합, 그리고 잘못된 신론들의 발생

그리스도교의 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은 교회가 뿌리내리고 성장했던 정신사적종교사적 환경과의 만남 속에서 정립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은 궁극적 일자 사상으로 대변되는 그리스의 철학적 일신론 안에서 구약성경의 유일신 신앙과의 유사점을 발견했고, 그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의 철학적 일신론을 구약성경의 일신론과 결합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철학적 일신론과 성경적 신론을 결합하려는 변증가들의 신학적 시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 분 하나님의 전제군주적 지배를 강조하는 잘못된 전제군주신론이 교회 내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이 신론은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첫째는 역동적 전제군주 신론(종속론)이고, 둘째는 양태론적 전제군주 신론(양태론)이 그것들이다. 이 두 개를 소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양대 이단이라고 부른다.

 

역동적 전제군주 신론(종속론)을 주장한 사람들로는 고대의 에비온파, 아리우스 등이 그들이다. 이에 따르면, 원래적 의미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버지, 곧 성부뿐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피조적 존재들로 이해되었다. 오직 성부만이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능력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세례 시에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의 통일성은 의지 사랑의 통일성이지 본성 실체의 통일성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과 성령의 종속성을 가르치기에 이를 종속론이라고도 명명한다. 아리우스주의라고도 한다. 그리스도적 관점에서는 세례 시에 성령의 능력에 의거한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입양 내지는 승격을 가르치기 때문에 양자 그리스도론 혹은 양자론 또는 영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된다.

 

양태론적 전제군주 신론(양태론)은 고대의 노에투스, 사벨리우스 등이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여러 시대에서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드러남의 방식들 내지는 나타남의 방식들”, 즉 모두스(modus; 양태)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여러 개의 양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에 양태론이라고도 명명된다. 이는 성부수난설이라고도 명명되는데, 이 교리가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벨리우스주의라고도 한다. 이 신론은 하나님의 통일성 또는 단일성이 유지되고 보장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한동안 삼위일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으로 초기 교회에서 통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세 분, 즉 삼위의 이름들이 단지 구원의 경륜 속에서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의 방식에 불과한 것인가를 질문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독자성을 가진 위격으로 등장한다.(고후13:13) 요한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지 결코 한 분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보아 양태론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도 양태론적 전제군주 신론의 허구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 만약 이것을 양태론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기도는 한 분 하나님의 자기 독백 또는 자아 분열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와 인격  인격으로 대면하여 기도하셨다. 성경은 신적 위격들을 명백하게 서로 구별한다.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의 본질로서 세 가지 계시 양식들이 아니라 각각 고유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양태론은 성육신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의문시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수의 성육신 및 인성을 거부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그리스도론,  假現說의 오류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결국 양태론적 전제군주 신론은 공교회에 의해서 이단적 邪說로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양태론은 서방에서, 종속론은 동방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이단 사상들이었으며, 둘 모두 삼위일체론을 가장하여 주장된 전제군주적 ()일신론이다.

 

12장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 그 이해 방식의 차이

 

삼위일체 교리의 동방적서방적 유형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 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니케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방과 동방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방 교회에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대동소이한 이해 방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삼위를 전제한 후 삼위가 어떻게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이전과는 달리 한 분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시작하여 삼위를 설명하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다른 이해 방식을 전개했으며, 이것이 서방의 주류의 이해 방식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즉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오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 암브로시우스에 이르기까지 동서방 교부들의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 방식은 거의 대동소이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세 위격들의 하나 됨 일체”(unitas)로 파악했다. 고대 동서방의 교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체성을 한 분”(Unus)으로 파악하지 않고, 세 위격들(tres personae) 하나 됨”(unum) 또는 일치성으로 파악했다. 교리사적으로 보면 당연한 이해방식이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의 발단 자체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그리스도론 논쟁으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동일본질에 대한 강조로부터 삼위일체 교리가 시발했기 때문에 초기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복수성, 즉 세 위격들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

그러나 서방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이전의 삼위일체론에 속에서 종속론의 위험을 보았다. 신성의 근원(원천)인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generatio)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processio)을 가르침으로써, 신성의 근원과 관련하여 성자와 성령에 대한 성부의 유일한 모나르키아 즉 유일한 전제군주적 지배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속론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한 분 하나님의 본질 내지는 실체로부터 시작하여 세 위격들의 위계 없는 동등한 구분을 강조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서방 안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주도적 이해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 방식의 차이

1) 동방의 삼위일체론: 세 위격들은 하나다. 한 분이 아니라!

(세 위격들한 본질)

이 공식은 동방의 교부들인 카파도키아의 세 명의 교부들, 즉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에 의해 정교한 형식으로 정립되었다. 세 위격의 구분을 먼저 강조하고 그 구분된 삼위들 상호 간의 사귐  연합 또는 하나 됨을 강조, 즉 세 위격들의 상호관계성  사회성 내지는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이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의 방식으로,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의 방식으로 각각 성부가 가진 신성의 본질을 함께 공유하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 동일하신 하나님, 곧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동방의 이해 방식을 서방은 종속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신성의 근원을 한 분 하나님의 본질에 설정하지 않고 성부의 위격에 설정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에 있어서 성부의 모나르키아”(전제군주적 지배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성부에 대한 성자와 성령의 종속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신성에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성부가 신성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신성 즉 동일본질로 인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하나님이므로 종속론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2) 서방의 삼위일체론: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신 한 분 하나님이 세 위격들로 존재한다.

(하나의 본질세 위격들)

이 공식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개진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교하게 구성되어, 오늘날까지 서방의 삼위일체론 이해에 주도적 흐름을 형성하였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essentia) 내지는 실체”(substantia). 이 한 분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이야말로 세 위격들이 공동으로 근거하고 있는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을 세 위격에 앞서 강조하다 보니 너무나 자주 세 위격들은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의 모두스”(modus),  양태(樣態)”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동방은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한 서방의 이해 방식 속에서 양태론의 위험성을 보았다. 어쨌든 서방의 이해 방식은 동방의 종속론의 위험성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양태론의 위험성에 노출되고 말았다.

 

동방이나 서방의 교부들은 종속론과 양태론을 배격하는 일에 있어서는 모두 이견이 없었으며 이 점에서 철저하게 뜻이 같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으로 명백하게 정의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의 신비를 완벽하게 해설하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그중 어느 하나를 택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상보적인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속론에 대항한 페리코레시스

동방의 교부들은 종속론에 대항하여 세 위격들의 동일성과 그 동일성을 가진 위격들의 상호 간의 내주 또는 상호 간의 침투”,  상호 간의 내향적 순환을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와 더불어 세 위격의 동등성과 통일성, 곧 하나 됨을 굳건히 견지했다. 그리스어 명사 페리코레시스 회오리’, ‘빙빙 돌기라는 의미인데, 세 위격들은 비록 구분된다고 할지라도, 서로 간에 폐쇄된 존재로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페리코레스적인 상호 간의 순환 운동을 통하여 서로에게 침투한다. 그 결과 그들 각자 속에 다른 위격들이 내주하며 상호 의존 관계 속에서 공동의 삶을 영위하고 안식한다. 세 위격들은 상호 간의 내향적 운동을 통하여 각각의 위격들 속으로 상호 침투할 뿐만 아니라 세 위격들은 서로 간에 머무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되어 줌으로써 서로의 위격들 속에서 내주(inhabitatio)하며 영원히 안식한다. 다마스쿠스의 요한 위격들은 서로 혼합되기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그래서 세 위격들 안에 어떤 혼합이나 혼란없이 하나의 페리코레시스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양태론에 대항한 아프로프리아치오

서방의 교부들 또한 양태론에 대항하여 세 위격들 각자의 고유한 전유”(appropriatio, 또는 占有)를 강조하는 아프로프리아치오 교리,  專有 교리와 더불어 세 위격들의 개별성 독자성을 굳건히 함으로써 세 위격들에 대한 실재적인 구분을 견지했다. “전유 교리에 따르면 창조의 사역이 삼위의 공동 사역이라고 할지라도 성부는 창조의 사역을 전유하시고, 구속의 사역이 삼위의 공동의 사역이라고 할지라도 성자는 구속의 사역을 전유하시며, 성화의 사역이 삼위의 공동의 사역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은 성화의 사역을 전유하신다. 그래서 전유 교리를 따라 서방의 교부들은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Creator), 성자 하나님을 구속주”(Redemptor), 성령 하나님을 성화주”(Sanctificator)라고 불렀다.

 

우리는 동방을 따라 삼위로부터 본질의 하나 됨, 곧 일치성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역으로 서방을 따라 본질의 단일성으로부터 삼위로 나아와야만 한다.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의 이해 방식은 역동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상보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한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격의 삼위성과 본질의 일치성, 즉 하나 됨은 양자 중 어느 쪽도 다른 한 쪽을 앞서지 아니하며 동시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질의 하나 됨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고, 삼위의 구별을 위하여 본질의 하나 됨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삼위일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인 것이다. 우리의 신학적 사유와 기도와 묵상과 송영은 하나님의 삼위성과 일치성(하나 됨) 사이에서 끊임없이 약동해야만 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은 작은 구멍 속에 모든 바닷물을 퍼 담으려는 행동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이다. 삼위일체론을 논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사변이나 논쟁이 아니라 찬양 곧 송영이며, 경배이며, 묵상이어야만 한다.

 

13장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에 관한 교리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에 관한 교리는 동방의 카파도기아 교부들, 특히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에 의해 주도적으로 정립되었고, 이후 동방과 서방에서 삼위일체의 내재적 구성의 원리에 대한 공교회의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이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부는 기원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성자와 성령의 기원이시고 이 양자의 신성의 원천이시다(비출생성).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며(출생성),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 분이시다(발출성).

 

성부, 영원한 신성의 원천이시며 삼위의 통일성의 원리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1위격의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신성의 원천으로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을 영원히 나오시게 하신 분이시다. 1위격의 하나님을 성부라고 부르는 것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명명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라는 호칭은 각각 서로가 서로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신성의 원천이신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을 영원히 내쉬신다. 그러므로 성부의 위격은 성자와 성령이 지니신 신성의 원천이며 삼위일체의 일치성과 동일성의 원리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동일본질을 소유하는 까닭은 신성의 원천인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성자는 출생의 방식으로 성령은 발출의 방식으로 성부의 신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이 두 위격들의 유일한 기원이신 성부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상호관계성의 원리를 세 위격들 바깥에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매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 정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바빙크는 신적인 본질은 세 위격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본질, 즉 성부로부터 성자와 성령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동일한 신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삼위의 통일성(단일성)의 원리를 성부의 위격으로 보지 않고 삼위 바깥의 한 분 하나님의 본질로 설정하게 되면 삼위 하나님의 상호간의 관계와 사귐에 대한 사유는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의 다양한 나타남의 방식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사색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 최악의 결과가 바로 사벨리우스주의, 곧 양태론이다.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다. 2위격의 하나님이 성자로 불리는 까닭은 그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라는 호칭은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명명된 것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한 출생의 방식으로 성부가 소유하신 신성의 본질을 공유함으로써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성자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성부에 의해서 창조된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부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신 것처럼 성자도 어떤 한 특정한 시점에서 출생하신 분이 아니시다. 성자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시기에 존재에 있어 성자 역시 시작과 끝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다. 아리우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로 창조된 완전한 피조물이란 의미에서 아들로 불린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용인될 경우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 중에 으뜸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자가 십자가에서 이룬 대속의 사건은 온 세상을 위한 구속의 사건이 아니라 한 의로운 인간 예언자의 죽음이 되고 말 것이다.

 

성부로부터 성령의 영원한 발출

3위격의 하나님이신 성령은 신성의 원천이신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 분이시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 분, 즉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부의 영원한 숨결로 내쉬어진 분이시기에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성령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성령을 의미하는 라틴어 스피리투스’, 그리스어 프뉴마’, 히브리어 루아흐는 모두 호흡, 입김, 숨결, 바람이라는 뜻이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내쉬어짐)의 방식으로 성부가 소유하신 신성의 본질을 공유하심으로 성부와 동일본질을 가진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이고, 성부와 성령이 동일본질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동일본질이시다. 성령이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했다는 것은 성령이 어떤 한 특정한 시점에 성부로부터 발출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성부로부터 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령을 발출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며 성령 또한 성부로부터 발출되지 않으신 적이 없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되신 분이시기에, 존재에 있어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지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신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결론과 요약

삼위 중에 성부만이 가지는 존재방식, 즉 비공유적 속성, 곧 성부됨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비출생성 및 신성의 원천성이다. 비출생성 및 신성의 원천성은 성부가 성자나 성령이 함께 공유하는 속성일 수 없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한 출생을 통해,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한 발출을 통해 성부의 신성을 공유하신다. 그러므로 성부는 삼위의 통일성(일치성)의 원리이며 기반이시다. 성자됨의 속성, 즉 출생성은 삼위 중에 오직 성자만의 존재방식, 즉 성자의 비공유적 속성이다. 성자는 이런 출생의 속성을 성령과 공유하지 않는다. 성령됨의 속성, 즉 발출성은 삼위 중에 오직 성령만의 존재방식, 곧 성령만이 소유하는 비공유적 속성이다. 성령은 이런 발출의 속성을 성자와 함께 공유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분되며, 동시에 동일한 신성을 공유함으로 동일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으로 일치(통일)되신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표현은 숫자적인 단일성으로 이해돼서는 안 되고 신성의 동일성 즉 본질의 동일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신성의 본질을 세 위격들 밖에 존재하는 추상적 보편개념으로서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삼위가 소유하는 신성의 본질은 세 위격(개별 실체)들 바깥에 또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들 안에 있는 하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위격에 있어 세 분이시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Unus, one)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 (unum, oneness) 하나님 즉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14장 성부, 성자, 성령은 누구신가?

 

성부는 누구신가?

1위격의 하나님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성부이신 까닭은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 속에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라는 호칭은 각각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 카파도기아 교부인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본질이며 성부와 성자의 호칭은 관계적 호칭이지, 양자가 서로 다른 본질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님을 명백하게 가르쳤다. 동방 교부인 고백자 막시무스도 성부라는 호칭은 본질 또는 사역의 이름이 아니라 성자, 곧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명명된 이름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성부가 아들을 낳으셨다고 해서 성부를 일방적으로 남성적 표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특정한 성에 고착시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적 사고를 하나님 이해에 투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雌雄同體인가? 이런 생물학적 논리에 근거한 발생론적 사고를 신론에 투영하는 것은 대단한 이교적이고 위험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성부로부터 성자의 출생을 고백한 것은 생물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경계시에 의존해서 사유한 결과였다.

 

성자는 누구신가?

2위격의 하나님이 성자이신 까닭은 그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자 호칭 역시 성부와 관계 속에서 불리는 관계적 호칭이다. 아들은 출생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신성을 아버지와 함께 공유하고 계신다. 아들은 자신의 신성과 존재를 아버지로부터 받지만 신성의 원천을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원천은 오직 성부에게만 귀속되는 비공유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신성의 원천을 성부와 공유한다면 삼위일체 안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동방교회가 성령의 발출문제를 놓고 서방교회의 필리오케(Filioque: “또한 아들로부터”) 주장을 단호하게 반대했던 이유.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출하실 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필리오케) 발출하신다면 삼위일체 내부에 암암리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 동방교회의 비판이었다. 그러나 서방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원문에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훗날에 첨가한 것은 삼위 내부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성령은 누구신가?

3위격의 하나님이 성령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유는 그가 영원 속에서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신적인 능력일 뿐 아니라 인격적 실체라는 것은 동서방의 공동 고백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격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도출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성령이 너무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권능을 통해 오직 성부와 성자만을 드러내시고 정작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은 단 한 번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셨다. 성령은 성부의 창조사역에서 창조의 영이셨지만 창조주이신 성부를 돋보이게 하시고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은 숨기셨다. 또한 성령은 성자의 성육신, 시험과 사역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 가운데 능력으로 함께 역사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은 구원의 역사에서 구세주이신 성자를 돋보이게 하시고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은 숨기신 분이다. 이렇게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성품을 고찰할 때, 우리는 성령이 지극히 겸손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성령이란 호칭도 성부나 성자에 비해 인격적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도 성부의 창조사역이나 성자의 구원사역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현시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령은 성자와 비교해볼 때 신자들과 약한 인격적 관계에 있다. 성령님의 이런 독특한 성품으로 인해 고대의 양태론자인 사벨리우스는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성령을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가시적 표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도 성령을 단지 교회공동체의 집단적 자의식으로서의 교회의 영일뿐이라고 정의하고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성령이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는 처음부터 성령이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으며 신자가 성부와 성자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아들로부터 발출하지는 않는다. 만약 성령이 아들로부터도 발출한다면 아들은 제2의 성부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만 발출하시지 아들로부터도 발출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빙크와 몰트만이 잘 지적했듯이 아들을 말씀(로고스)으로 규정할 때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가진 관계가 잘 규정될 수 있다. 성부는 그의 영원한 말씀(성자)을 그의 성령을 영원히 내쉬는 가운데 하신다. 말씀을 하시는 것과 성령이 내쉬어지는 것은 나뉠 수 없고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함께 그리고 동시에 성부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은 동등하시고 양자 간에 서열을 정할 수 없다. 성령은 아들처럼 신성과 본질을 성부로부터 받으시기에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본질을 소유하시는 한 하나님 즉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15장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적 사변이 아니라 예배(송영)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 교리의 배후에는 초기 교회공동체의 구원의 경험이 엄존한다. 초기 교회 성도들의 구원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삼위로 고백하게 했으며 그들의 예배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경배되고 묵상되고 찬양되었다. 이런 초기 교회의 구원의 경험을 신학적 논리를 따라 정리하고 해석을 가한 것이 삼위일체 교리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예배야말로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이며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교부 프로스페르 아퀴타투스 예배의 법이 신앙의 법을 앞선다고 말하며 예배가 신학이나 교리의 모태임을 천명했다. 삼위일체 교리를 사변하는 것보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서 삼위일체론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는 이 교리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시도되고 있지만, 이 교리가 정작 교회의 예배(예전)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16장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개념과 그 신학사적 배경

 

내재적 삼위일체

내재적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의 신비를 묘사하는 삼위일체를 말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영원 전부터 홀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신비를 규정하는 교리다. 우리는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와 더불어 자기 자신 속에 계신 하나님, 즉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곧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자기 자신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질문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창조, 타락, 구속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결코 인식될 수 없었던 감추어진 삼위일체다. 전통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는 두 가지 사역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는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이며 둘째는 성부로부터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다.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에 있어 성부는 신성의 기원 없는 기원이시며 원리 없는 원리이시다.

 

경륜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란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계시된)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밖을 향하여 행하신 삼위일체의 사역이라고 말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시는지를 질문한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자기 자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말한다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 교리의 뿌리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에 놓여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경륜 안에서 자가 자신을 삼위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사역은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원, 성령의 성화로 구성된다. 그러나 세 위격의 사역 속에는 매번 한 분의 인격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누어지지 않는 협력 속에서 세 위격이 활동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 위격의 어떤 행위도 고립적이지 않으며, 다른 위격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교리의 신학사적 배경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는 전통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중세의 교부들을 거쳐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발견된다. 처음에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대항한 초기교회의 투쟁 속에서 특별히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구분되었다. 2세기에 활동한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는 구원사에 있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분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세 명의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신학 전체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이론이라고 간주했으며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에 내재와 경륜 사이의 구분을 설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안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 즉 하나님의 내적 본질과 밖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 즉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구분하여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안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은 구분된다 그러나 밖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은 구분되지 않는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은 루터와 칼뱅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삼위일체의 안을 향한 사역보다는 밖을 향한 사역에 더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부터 삼위일체를 인식하기를 원했다. 물론 그들이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고 수용했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관심을 집중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없는 자들에 대한 오직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신론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결론

고전적 신학은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 자기 자신 속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내적 신비를 취급했고, 경륜적 삼위일체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 즉 구원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을 취급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고전적 구분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적 우위성을 강조했고, 그것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유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강조한 측면이 있다. 그러다보니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념성과 추상성이 경륜적 삼위일체 이해에 짙은 암영을 드리우게 되었다. 그 결과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교회의 구원의 경험이라는 교리 형성의 원래의 삶의 자리로부터 이탈하여 삼위하나님의 내적 존재의 신비를 추상적으로 논구하는 난해한 사변으로 전락하게 된 측면이 있다.

 

17장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

 

삼위일체에 대한 칼 러너의 명제

고전적 견해는 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분해야 하지만 분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향후 양자 사이의 관계 구분을 강조하는 경향은 양자 사이의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삼위일체론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행위 또는 구원사건에 대한 서사 속에서 취급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내적 존재의 신비를 해명하는 고도의 관념적 사변으로 기울어지게 된 측면이 있다. 칼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관계를 소위 라너의 법칙이라는 명제로 요약하였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분리에 대한 현대 신학자들의 비판과 그 문제점

오늘날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은 양자 사이를 분리하는 견해를 비판하며 구원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고전적 입장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분리하는 배후에는 플라톤주의적인 이원론의 도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비판하며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이해한다. 반면 베르크호프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을 통해 발생하는 구원 사건의 구조에 대한 묘사로 이해한다. 그리고 윙엘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화로 이해하며, 라쿠나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내적 구조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신학적 사유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역사가 창조와 함께 시작되기 전부터 아들과 성령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1:1, 1:15, 1:1-2) 우리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기반과 원천으로서의 내재적 삼위일체를 창세 전부터 존재했던 영원한 삼위일체 그 자체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블라디미르 로스키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는 창조 사건과 관계없이 영원 전부터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으며, 홀스트 게오르크 푈만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인식론적인 관점에서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 내재적 삼위일체가 인식된다고 할지라도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가 나왔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의 원천으로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고 양자를 단순히 동일시하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종속되고 환원되어 폐기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 구분’(discreti)해야 하겠지만 그 양자를 '분리'(separati)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일치

하나님의 계시는 언제나 하나님의 본질에 일치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표리가 부동한 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되며, 이 양자는 서로 일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가 상호 간에 일치한다는 개혁신학자들(, 바빙크, 베버)의 입장을 우리가 견지할 경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무관하게 단지 경륜적 삼위일체의 영역 안에서만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베버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한 예언자의 돌발적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존재와 관련된 사건, 즉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 속에서 결정된 영원히 효과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올바른 관계 설정: 칼 라너의 명제는 수정되어야만 한다!

라너의 스승이었던 에리히 프르치바라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자기전달 즉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전달하신 성육신 사건 안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그의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며 오직 삼위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역사의 맥락 속에서만 삼위일체를 파악해야 한다고 의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사역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없었더라면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삼위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래 삼위일체론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원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초기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의 활동으로 이해했으며 세 인격의 공동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즉 경륜적 삼위일체 또는 계시의 삼위일체로부터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를 추론하였다. 라너는 단지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의 신비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 의거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경우 삼위일체 교리에 드리워질 수 있는 고질적인 관념적 사변의 그림자를 걷어내고자 했다. 라너는 삼위일체 교리를 교회의 예전 및 신자들의 삶과 관련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리로 회복시키기를 원했다.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일치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를 명백하게 말하지 않아 그의 사후 신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라너는 몰트만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개진한 견해 즉 십자가 신학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과도하게 역사 속에 내재하는 분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한 것을 보았을 때, 라너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양자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견해라고 판단된다. 필자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다라는 주장은 가능하다. 그러나 역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라는 명제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고 더욱더 부요하다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기원이고 원천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가 나오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주장하게 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환원, 축소, 폐기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삼위 하나님은 세상에 종속되어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신학적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라너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보충되고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고, 더욱더 부요하다.”

 

18장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의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인가?

 

이상적 사회의 모형으로서의 삼위일체

몰트만, 카스퍼, 보프 등은 삼위일체론 속에서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삶과 바람직한 사회의 모상 내지는 모델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신적 세 위격의 동등성과 페리코레시스적인 사귐과 일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삼위의 공동체성 내지는 사회성에 주목하는 소위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했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신비인 다양성 일치성 묘합”(Harmonie),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성 일치성 속에서의 다양성을 인간의 삶과 공동체(사회)의 이상적인 모상 또는 모델로 간주한다. 이들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그의 본질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람직한 인간상의 확립과 이상적 사회의 건설을 위한 기준 원리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고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이상사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구약성경 창세기의 가르침을 삼위일체론의 관점에 비추어 이해할 경우,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 내지는 사회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거룩한 세 위격들의 하나 됨, 곧 일치성 또는 통일성을 세 위격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연합 속에서 인식할 경우,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고독한 인간적인 주체나 자신의 권력의지 속에 있는 하나의 단일한 인간적인 주체로 간주 될 수 없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과 자연 만물들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사귐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삼위일체성은, 홀로 존재하는 인간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다른 동료 인간들 그리고 우주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전제군주로 이해하는 전제군주적 일신론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담론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을뿐더러 지상에서 폭군이나 독재자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이념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것은 18세기 프랑스혁명 직전까지의 프랑스의 왕들과 20세기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제정 러시아 시대의 차르들의 전제군주정 및 20세기 독일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치하에서 증명되었다. 반면에 세 위격들의 독자성과 동등성 그리고 페리코레시스적인 연합 안에서 파악되는 일치성은 전제주의적인 독재를 배격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의 폐단을 넘어서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상적 사회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성은 이상적 사회를 위한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인가?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니콜라스 페도로프는 이상적 사회의 모형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의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이다는 그의 명제는 위르겐 몰트만, 레오나르도 보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페르도프는 하나님의 거룩한 삼위일체성 속에서 특권 차별이 없으며 또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적 사회의 전형을 발견했다. 페르도프에게 있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한 삼위일체성에 대한 공명은 자유와 평등 안에 있는 인간 공동체를 위한 모범”(전형)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명제와 더불어 자신의 사회 이론을 전개했다.

필자는 페도로프의 오류는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의 일치성을 인간 공동체(사회) 속으로 일방적으로 투사하여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거룩한 신적 세 위격들의 일치성과 우리의 사회적 일치성 사이에 엄존하는 경계선을 무시한다는 점에 있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른 대상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없으며 다른 대상들을 자기 자신 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거룩한 삼위의 완전한 공동체성은 현존하는 인간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 쇄신하는 비판이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성과 인간의 공동체성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론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에 관한 교리다. 이 교리는 우리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해명하는 교리이지, 이상적 사회를 위한 사회적 프로그램에 관한 교리가 아니다. 구원 경륜의 역사 속에서 삼위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및 만물 사이의 친교는 단지 개인 구원이라는 협애한 차원에서만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와 역사와 자연 만물을 포괄하는 전 우주적 차원에서 파악되어야만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및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완벽한 사귐은 오직 종말에 이르러서야 성취될 것이다. 신정 정치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종말을 하나님 나라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적 사회의 모델은 페드로프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내재적 삼위일체의 내적 사귐으로 추상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구원 경륜의 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나라(통치)를 이상적 사회의 모델로 간주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더 정당한 구상일 수 있다.

 

다양성, 일치성, 상호관계성, 사귐, 그리고 봉사

우리는 삼위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 경륜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숙고하면서 삼위일체성 속에 함축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삼위가 수반하는 다양성

2) 삼위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일치성

3) 삼위 사이의 그리고 삼위와 인간과 만물 사이의 상호관계성

4) 삼위와 인간과 만물들의 사귐

5) 인간과 만물들에 대한 삼위의 봉사

이러한 다섯 가지 원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사회란 다양성이 존중되고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성이 추구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양성과 일치성으로부터 형성되는 관계성에 의거하여 우리 삶의 제 영역들 속에서 사귐과 봉사를 고양시키는 사회일 것이다.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성 분열이 아니고 일치성 획일성이 아니다. 다양성과 일치성이 상호 간의 페리코레시스적인 관계를 통하여 역동적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친교와 봉사를 증대시키는 사회와 인간의 삶이야말로 거룩한 삼위일체에 부합되는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며 우리가 지향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의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는 페드로프의 명제는 긍정될 수 있다. “다양한 신앙적 차이를 초월하는 보편적 그리스도교는 없으며, 오직 다양성 가운데 현존한다.”(바빙크)

 

에필로그 -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실천에 관하여

 

삼위일체, 그 영원한 신비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위에 그 존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삼위일체의 내적 신비,  내재적 삼위일체는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신비로서 우리의 경배와 묵상과 찬양의 대상이지, 논의와 탐구와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성이 아니라 특별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삼위일체를 사유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원래 하나님의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의 신비는 역사 속의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구원의 행동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 즉 창조 구원 성화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곧 삼위가 일체이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의 삼위일체 또는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내적인 존재의 신비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하셨다. 계시를 의미하는 라틴어 레벨라티오나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 그리고 독일어 오펜바룽이나 네덜란드어 오펜바링이라는 말 자체가 덮개를 벗기다”, “베일을 벗기다 또는 뚜껑을 열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계시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는 사건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열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존재의 지극한 신비를 보이신 이유는 우리 인간과 세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서 연유한 그의 구원 의지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이 수행하시는 이 세상 속에서의 구원의 역사 우리와 이 세상을 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정의될 수 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셔서 외부와 관계하시어 외부의 것들을 자신 안에 품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자기 구분이 있어야 한다. 자기 구분이 없는 하나의 단자라면, 그런 고립된 단자로서의 하나님은 외부를 향하여 관계할 수 없고, 외부의 것들과 사귀며 그것들을 자기 자신 속으로 포용할 수 없는 폐쇄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삼위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요일4:8)라는 성경진술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외부의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외부의 세계를 자신 안으로 포용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당하는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세상과 사귀시며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시고 그 고난당하는 세상을 당신의 품에 안고 치유하시며 구원하신다. 바빙크의 말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사랑의 친교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가 계시도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 속에서 당신 자신을 삼위로 드러내 보이신 까닭은 우리 인간들 및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고 구원하시며 사귀시려는 그 분의 지극한 사랑의 결단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계시 사건은 단지 인간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 전달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 사건의 절정인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정보 전달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전달하신 사건이다. 바빙크가 묘파한 것처럼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사건이다. 성육신은 삼위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며, 삼위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은총의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은총을 말할 때, 은총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자기전달로서의 성육신 사건의 배후에는 인간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약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총, 성령의 친교 가운데서 우리에게 임한다. 우리가 삼위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랑과 은총과 친교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살아내지 않는 한, 삼위일체에 대한 모든 가르침은 단지 교리적 사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을 삼위로 인식하고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은 성부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온 세상을 사랑하시어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만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우리가 그분 안에 온전히 거하는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도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내주 속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삼위일체를 향한 우리의 지식은 종말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신학적철학적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통찰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지식이다.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하는 지식은 존재하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건을 그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존재라는 범주는 피조물의 존립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위에 그것들을 넘어서 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존립 방식으로서 존재를 파악하고 인식하는 이성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계시를 쫓아 하나님을 삼위로 이해하고 그 삼위의 지극한 사랑을 본받아 지금 여기서”(nunc et hinc) 사랑을 실천하므로 삼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깨달은 바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부분적인 지식일 뿐이다. 지상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은 순례자들이 본향을 사모하는 그리움의 지식  모방의 신학이지 본향 속에서 향유하는 완성된 지식  원형의 신학은 아니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성취될 것이며, 그때에 그 지식의 秘意 또한 우리에게 밝고 맑게, 깊고 넓고 풍성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때에 모든 만물들과 천군천사들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영광 중에 바라보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이웃과 자연 만물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전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의 신비를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도록 하자!

 

알파이며 오메가로서의 송영

종말에 삼위일체의 구원의 신비(경륜적 삼위일체)와 본질의 신비(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가 될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사랑의 신비 속에 현존하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삼위일체를 지극한 복락 속에 마주 뵈옵고 삼위의 영광과 일치의 신비를 찬양하고 묵상하며, 삼위일체의 사랑과 은총과 친교(교통) 안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2세기부터 초기 교회의 예배 속에서 찬양되던 성 사뮈일체에 대한 영광송, 글로리아 파트리(영광이 성부께)라고 불리며, 영광송이라고도 불림) 이것이 태초”(A)의 송영이자 마지막”(Ω) 송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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