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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칼빈주의와 일반은총- 헨리 반틸

칼빈주의와 일반은총- 헨리 반틸

2019-06-04 23:14:27


 1. 카이퍼가 일반은총이란 대작을 발간한 후 부터 문화와 일반은총이란 두 단어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로 개혁주의 교회에서 생각해 왔다. 적어도 두 세대동안 킬빈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이 문화의 기본이라는 카이퍼의 말에 승복해왔다. 카이퍼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일반은총을 통하여 피조세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공허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일반은총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전제에 서 있다. 일반은총은 제약적인 그리고 소극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고 진취적으로 문화활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스킬더는 문화의 창작력으로서의 일반은총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고 문화의 발달을 하나님의 섭리에 돌린다. 일반은총의 문제는 반위관계, 그리스도의 왕직, 세상에서의 기독교인의 사명 그리고 기독교인의 세계관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 우리는 여기서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그 하나는 카이퍼의 견해로 일반은총이 문화와 역사의 기본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킬더의 견해로 일반은총은 문화적 유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이 없다면 세상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우주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인간을 창조주로부터 윤리적으로 멀어지게 한 아담의 범죄가 창조주에 대한 존재론적 관계로 변했다는 의미의 성경적 증거는 없다. 죄는 세상을 무와 혼동으로 돌아가도록 위협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짐승이나 괴물로 변하지 않았으며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관계를 가짐으로 문화사명을 감당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가운데 원상을 회복하시기 때문에 문화와 은총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신자들의 문화활동은 단지 일반은총의 역사로서만 해석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간이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3. 피조세계가 무기치한 것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카이퍼의 사상은 칼빈주의 사상에서 최선의 전통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창조를 무존재의 한계선으로부터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로마카톨릭 신학에 가깝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지으신 이를 미워한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피조물이다. 그러니 만일 일반은총이 없다면 세계가 사라지든지 혹은 일반은총이 문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카이퍼의 주장은 근거없는 가설이다. 하나님이 악한자에게나 선한자에게 모두 빛을 비추고 비를 주신다는 구절은 일반 은총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삶 일반에 대한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카이퍼의 극단적인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 반드시 스킬더의 주장처럼 문화에 대한 일반은총의 관계를 부정하고 이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스킬더는 역사의 어떠한 단계에서도 진노의 그릇인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 편에서 내리는 일반적 은총을 거부한다. 이점에서 스킬더도 전통적 칼빈주의 교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칼빈이 죄를 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때, 이것은 스킬더가 반대하는 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은혜로운 성질을 부정하지 않는다. 칼빈은 하나님의 일정한 은총이 중생받지 않은 죄인들에게도 역사 가운데 부여되었음을 인정한다. 이로 인해 저들은 상대적 선을 행할 수 있으며, 물질에 관한 많은 진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스킬더는 인류의 문화발달이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함으로써 이 문제를 한 면으로만 해석하고 말았다. 그는 선택된 자가 아닌 사람은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신자에 대해서는 어떤 사랑이나 은총도 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택한 자나, 택하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에는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다고 하는 알미니안의 주장이 그릇되었듯이, 택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무런 은총도 베풀지 않으신다는 스킬더의 주장도 잘못이다. 카이퍼가 일반은총을 문화의 근원으로 생각함으로 성경을 넘어섰다면, 스킬더는 버림받은 죄인도 하나님의 은총을 통하여 죄악에서 견제되며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4.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칼빈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칼빈은 한편으로 자연인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이므로 세상에는 하나님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종교적 관계라고 지칭하는 바, 창조주와의 언약관계가 포기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록 죄인이지만 근절할 수 없는 신의식을 가진다. 범죄한 인간은 바록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 법에 순종하지 않지만, 악을 견제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상대적인 선을 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를 부정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문화적 피조물이며 법의 순종자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인간은 번성해 왔으며 창조시에 부여된 문화명령에 따라 땅을 정복하고 개발해 왔다. 그러므로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문화라고 할지라도 문화로 남을 것이며 비록 악한 예술일지라도 예술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카이퍼의 일반은총 교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의 일반은총은 종종 중보자 그리스도의 일에서 분리되어 왔고 이리하여 창조와 구속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이원론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로마카톨릭주의에서 발견되는 자연신학적 경향에서 이성과 신앙의 분리이고 그 결과는 문화와 종교를 분리함으로 모든 생활영역에 미치는 그리스도의 왕권에는 선택의 자유가 없게 되었다. 나아가서 교회의 전투적 성격과 현실문화에 대한 교회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일반은총 교리가 갖는 또 다른 위험은 문화의 근본을 일반은총으로 간주함으로써 날로 더해가는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적대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5. 그리스도는 문화와 역사에 대하여 열쇠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 기록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원론적인 섭리의 목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일반은총에 입각한 문화적 목적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난 특별은총의 열매로서 왕국이란 두 가지 목적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 불신자와 함께 신자에게 내리는 자연적인 생의 축복의 전달을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돌리는데는 위험성이 있다. 신자들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지만 생의 정상적인 축복이나 선물은 하나님을 통해모든 인간에게 부여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기독인이 두 영역에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을 자아내게 한다. 이리하여 자연과 은총 사이의 중세기적 대립이 다시 대두된다. 과거의 교회는 생활 전부를 거룩하게 한다는 세례의 교리를 통해 모종의 연합을 가장할 수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종교와 문화 사이에 관여하기를 거부함으로 말씀의 권위가 생의 전 영역에서 거부되었다. 그 결과 생을 특별은총이 작용하는 영역과 일반은총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갈라놓음으로 빚어진 이 무서운 결과를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은총 안에서 단순한 인간으로 먹고 마시고 문화활동을 하면서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다른 동료가 성취한 업적에 감사하며 즐길 것을 배우게 된다. 이와 같은 문화에 대한 애호감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반위개념이란 아주 생소한 것이 된다.

 

 6. 이 두 영역론(일반은총의 영역과 특별은총의 영역)은 성경에 배치될 뿐 아니라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는 관대한 (문화)중립주의로 이끌어 가거나 기독인이 이 세상 문화와 맞서서 싸워야 할 전투 에 무관심하게 되기 쉬운 까닭이다. 이러한 형태의 일반은총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의 전투상태를 부정한다. 이리하여 바울이 촉구한 선한 싸음은 내면화되고 종교화되고 개인화된다. 중생의 능력은 부인되고 신자는 일반은총 영역에서 자연인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문화)사이에 중립적 입장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목과 세상에 대한 급격한 적대관계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권은 위기에 처해지며 조직체로서 교회의 투쟁은 힘이 없어진다. 일반은총론의 비극적 결과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문화적 낙관주의와 중립적인 인간과 그 인간의 업적을 높이는 것이다. 이리하여 기독인의 문화사명은 망각되었고 문화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무시되었으며 반위 의식은 조롱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화란 중립적인 기업이란 개념에 근접하게 되고 생과 인간의 모든 실존을 포함하는 것으로서의 종교의 본질이 부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