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의 내러티브
2019-05-23 16:55:44
이사야 1장
이사야가 보기에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주님을 거역하였고, 주님을 알지 못하며, 주님을 버리고, 업신여기고, 등을 돌린 자들이었다. 이사야의 이런 책망의 배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있다. 주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런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책망하시고 듣지 않으면 때리기까지 하신다. 주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고 때리시는 이유는 단하나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맞고도 더 맞을 짓만 하므로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속은 골병이 들었지만 그것을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도성 시온은 외롭게 남아 있는 포도원 초막과 같이, 포위된 성읍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절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얼마를 살아남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때리는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고 언약에 신실하기를 바라서이지 그들의 멸절을 바래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언약을 배반하고 주님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거나 멸절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가 바로 주님의 신실하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주님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절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들의 실상은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의 통치자들이며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멸절당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달라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이다. 지금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10절)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이 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이사야의 책망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업신여기고, 등을 돌렸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이었고 분향하고 초하루와 안식일을 지키며 기도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 종교적 제의는 넘쳐났지만 그들은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종교적 제의를 미워하시고 역겨워하시며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기도하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제의를 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가득한 피를 씻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는 일이다. 악한 행실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정의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옳은 일, 정의를 찾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하는 자를 책망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며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는 일이다. 남을 억압하지 않는 것은 악행을 그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정의를 찾는 일은 아직 아니다. 정의를 찾으려면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고 억압하는 자들을 꾸짖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주님은 이스라엘의 지난 죄가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기꺼이 용서해주실 마음이 있으시다. 왜냐하면 주님의 책망과 징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절하고 배반한다면 칼날이 그들을 삼킬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개한다면 주님은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시지만, 그들이 돌이키기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그들을 괴롭히고 때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주님은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시거나 포기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신실하던 성읍이 창녀와 같이 되었고,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던 성읍 안에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고 한탄한다. 신실하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자들이고 도독의 짝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쫒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을 귓전으로 흘리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그들을 원수로 여기시고 보복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형벌하고 멸절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때려서라도 그들을 씻고 모든 불순물을 없애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보내실 것이며 그런 다음에 예루살렘을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 부르실 것이다. 시온은 정의를 행할 때 구속을 받고 이스라엘은 공의를 행할 때 구속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시온이라는 이름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그들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그들은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 죄인들, 주님을 버리는 자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패망하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우상숭배를 즐겼고,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다고 비난한다. 주님의 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생각, 자기 욕망이 주님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이 주님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다를 수 없다. 주님의 법을 거절하는 것은 곧 주님의 주님되심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종교적 욕망에만 충실한 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사야 2장
하나님의 법에 귀 기울이지 않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책망하고 정죄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던 이사야는 이제 후일에 온 세상에 편만하게 임할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날에 주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이 모든 산 가운데 가장 높아지며 모든 민족들이 물밀듯 그리로 몰려올 것인데, 그들은 시온산으로 몰려오면서 주님께서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그 길을 따르자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주님의 말씀은 장차 온 민족들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는 민족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율법과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에 천하만이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의 죄악을 책망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살고 그 율법을 천하만민에게 전달해야할 사명을 가진 민족이다. 모든 민족이 주님의 율법을 배우고 그 길을 따라 행하게 될 때, 온 세상에 주님의 다스림이 편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날에 주님은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시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들이 주님의 길을 배우고 그 율법을 따라 행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 나라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강압과 위협으로 군림하고 다스리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고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 다스려진다. 그래서 율법이 중요하고 주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그런데 바로 그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그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야곱족속을 부르며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고 다시금 회개를 촉구한다. 그런데 이사야가 보기에 주님은 주님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동방의 미신이 가득하고 그들의 땅에 우상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동방의 미신과 우상이 가득하다는 고발 사이에 그 땅에 은금이 가득하고 군마와 병거가 셀 수 없이 많다는 지적이 들어있다. 은금이 가득하고 군마와 병거가 많다는 것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다가 경제가 풍부하고 군사력이 강성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강한 시대의 유다에 동방의 미신이 가득하고 우상들로 꽉 차있었다함은 미신의 성행과 우상 숭배가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군사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우상 숭배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유다 백성들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은 하나님 대신 은금과 군마와 병거를 더 의지하고 신뢰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야곱족속들은 천박해졌고 비굴해져 버렸기에 이사야는 주님이 그들을 용서하지 마시길 기도한다. 예언자라면 마땅히 언약의 중보자로서 주님이 언약백성을 용서하시길 기도함이 마땅할 것인데 용서하지 마시라고이사야가 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며 또 지금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분노에 깊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주님의 그 두렵고 찬란한 영광이 나타날 때, 그들은 두려워서 바위 틈으로 들어가고 띠끌 속에 숨을 것이다. 주님이 준비하신 그날이 오면 모든 교만한 자, 모든 오만한 자들이 낮아지고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우상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모든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오는 바로 그날, 주님이 온 민족을 다스리시는 바로 그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날은 주님의 모든 악이 제거되고 모든 교만이 낮아지며 모든 우상이 사라질 것이다. 이사야는 주님의 법을 떠나고 언약을 배반한 유다백성들의 암담한 현실을 보면서 동시에 주님이 장차 온 세상을 다시리시는 영광스런 미래를 본다. 비록 현실은 암담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장차 임할 주님의 나라의 기대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나라가 임하는데 유다 백성이 감당해야 할 중대한 사명을 가진 자들임을 상기시킴으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이사야 3-4장
이사야는 다시 유다의 현실로 돌아와서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실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의지하는 빵과 물을 없애시고 그들이 의지하는 지도자들을 없애신다. 그리고 철부지와 어린 것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결국 예루살렘은 넘어지고 유다는 쓰러질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것,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존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지도자들을 의지하는 유다 백성들도 문제지만 문제의 근원은 그들을 오도하는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래서 주님은 백성의 장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먼저 심판하신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약탈해서 자기들 집을 가득채운 자들이며 가난한 백성들을 짓밟은 자들, 결국 주님의 포도원을 망처놓은 자들이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것을 빼앗아 온잦 사치를 누리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날에 시온의 성문들이 슬퍼하면 곡할 것이며 황폐된 시온은 땅바닥에 주저앉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심판하시는 그날은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주님의 삼판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이사야는 그날이 오면 주님이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이 남겨두신 자들, 곧 이스라엘 안에 살아남은 자들이 거룩하게 되며 그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심을 통하여 주님은 딸, 시온의 부정을 씻어주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말끔하게 닦아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시온에 모인 회중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이렇게 이사야는 장차 임할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그 심판이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복을 누리게 하는 구원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주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주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멸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고 소망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5장
이사야가 부른 포도원 노래는 그가 사랑하는 주님께 바치는 애가였다. 포도원 주인은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신실하게 다 완수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으며 그 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틀도 마련했다. 주인이 이렇게 수고한 것은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열린 것이라고는 아무 쓸모가 없는 들포도뿐이었다. 포도원 주인은 정성을 들려 포도원을 가꾸웠지만 이제 포도원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그 밭을 짓밟게 하며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기로 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이 심으신 포도나무였다. 주님은 그들이 선한 일, 옳은 일을 기대하셨지만 그들은 살육을 행했고 그래서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었다. 그들이 행한 악행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자기만 잘 살려고 가난한 자들을 약탈한 짓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치로운 생활을 즐기며 주님이 하시는 일이나 주님이 이루시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주님의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되었지만 오히려 이들은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빨리 하라고 해라 그래야 우리가 볼게 아니냐고 말하는 뻔뻔한 자들이다. 이들은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이며 스스로 지헤롭다 하며 스스로 슬기롭다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하는 자들이며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재앙이 닥치며 주님은 이들에게 진노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포도원의 주인이시며 주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과 이스라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언약관계로 묶여 있다. 그렇기에 주님은 이스라엘의 악행에 분노하시고 그들의 위선에 괴로워하신다. 이스라엘에 주님의 심판과 징벌이 닥치는 이유도 이스라엘은 주님의 언약백성이기 때문이다. 차리리 그들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방백성이라면 주님은 그들의 악행에 대해 이렇게 분노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며 그들도 주님의 심판으로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사야 6장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이야기기 등장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이사야서의 맨 처음에 나와야 할 대목이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고 이후에 보냄을 받은 예언자로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미 1-5장에서 핵심적인 예언이 선포된 후에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그만큼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급박하게 수행되어야 할 중대한 사명이었으며 남조 유다의 상황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핵심적인 예언이 선포되었기에 이사야는 자신이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예언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차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성전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기도를 하며 온갖 종교적 열성을 다하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종교적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종교적 행위에만 치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섬기는 위선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스랍들은 주님이 만군의 주님이시며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기득한 거룩하신 분이심을 찬양한다. 이사야는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뵈옵고 재앙이 자신에게 닥쳤음을 알고 두려워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입술이 부정하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종교적 제의에는 열심을 내면서 정작 주님의 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위선을 가리킬 것이다. 이는 입으로는 주님에게 가깝지만 정작 마음은 멀리 있는 유다 백성들의 위선적 상황을 의미한다. 주님은 즉각 이사야의 악을 제거하고 그 죄를 사하셨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사는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자각하고 주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사야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기 원하셨지만 이사야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렇게 자문하신다. 주님의 이런 자문은 그만큼 이스라엘 안에 예언자로 보낼 자가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이시며 동시에 이사야의 자발적인 반응에 대한 기를 반영할 것이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런 심정을 깨닫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요 라고 말씀드린다. 그런데 주님이 이사야를 보내면서 그에게 주신 예언의 메시지는 당시 유다백성들의 심각성을 반영한다. 그들의 문제는 듣기는 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늘 보지만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고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와 눈을 막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과 죄악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를 보내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삼각한 실상을 경고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이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걱정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의 이런 심각하고 암담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주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님이 없어질 때까지 그들이 먼나라로 흩어져 이곳 땅이 온통 버려지며 남은 자들도 다 불에 타죽을 때까지 이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주님의 심판으로 유다 백성이 거의 진멸될 지경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돌이키기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유다가 멸망하고 소멸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니다. 주님은 결코 유다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야곱 족속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야곱 족속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야곱 족속을 부르셨기에 그 목적을 이루시는 날까지 결코 그들을 포기하거나 진멸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가 남듯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면서도 거룩한 씨를 남겨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7장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왔을 때, 아하스와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 주님은 이사야를 아하스에 보내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런데 주님은 이사야를 보내면서 그의 아들 '스얄야숩'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셨다. 주님은 아하스가 믿지 못할 것을 아시기에 징조를 보여주시려고 하였지만 아하스는 징조구하기를 거절했다. 아하스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속마음에는 이미 앗시리아의 도움을 얻어 이 위기를 극복해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하스는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되어 자기의 합리적인 생각과 꾀로 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 계시는 주님과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탁월함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부각된다. 다윗은 언제나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 너머에 계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윗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동했던 사람이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맞닿아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그분의 종임을 늘 잊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노릇을 하며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을이기 보다는 자기 꾀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려고 한 사람이다. 아하스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징조 구하기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아하스에게 징조를 주신다. 그것은 한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는 징조였고, 이 아이와 관련되어 두 가지 소식이 전해진다. 하나는 이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은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성년이 되기 전이란 의미로 보면 아마도 13년 정도의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그 아이가 버터와 꿀을 먹게된다는 소식이다. 다른 하나는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이하스가 두려워하던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소식이다. 문제는 첫번째 소식인데, 이것은 유다가 앗시리아로 말미암아 전무후무한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스가 주님을 의지하는 대신 앗시리아를 의지했기에 주님은 앗시리아로 인하여 유다가 엄청난 재난과 고통을 겪게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가 버터와 꿀을 먹게 된다는 말은 앗시리아로 인해 유다가 황무지가 될 것이고 그 땅에 남은 자들이 목축을 통해 버터와 꿀을 먹고 살게된다는 의미일 것이니 이는 곧 유다가 당할 재난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유다가 앗시리아에게 재난을 당한 후에 그 땅에 살아남은 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 '스알야숩'이 의미하듯이 이 남은 자들은 주님께 돌아올 것이며,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의미하듯이 주님은 이 남은 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이사야 8장
이사야가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 주님은 그 아이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하라고 명하셨다. 노략이 속히 올 것이란 의미를 가진 이 이름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징조였다. 주님은 앗시리아로 말미암아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할 것이고, 그 다음에 유다가 앗시리아에게 엄청난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런 재앙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노래한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서 그 남은 자들을 보호하실 것이므로 유다는 고난을 당하지만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유다의 고난이 끝난 후 주님이 유다를 괴롭힌 앗시리아를 벌하실 것이고 망하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아무리 전략을 세우고 계획을 말해도 실패할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주님이 남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힘센 손으로 이사야를 붙드시고 이 백성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주님은 이사야에게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만군 주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명하신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이 섬기는 성소에 계시는 주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거치는 돌과 바위가 되신다. 이렇게 보면 이하스에게 주신 징조는 결국 이사야에게 주신 계시가 되는 셈이며, 주님이 듣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백성들에이사야를 보내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된다. 주님은 이사야가 이 중대한 계시를 듣고 깨닫고 잘 간직하여 후대에 전달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가 깨달은 이 계시를 증언 문서로 밀봉하고 자기 제자들도 읽지 못하게 (아마도 제자들도 이 계시를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겠다고 말한다. 이제 이사야는 분명한 확신에 이르렀기에, 그는 주님이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이사야는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아이들이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는 살아있는 징조와 예표임을 깨달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백성들은 신접한 자와 무당에게 물으며, 산 자의 문제에 교훈과 지시를 받으려면 죽은 자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고통과 흑암, 무서운 절망이 선고된다.
이사야 9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앗시리아의 압제하에 멸시를 받는 북 이스라엘 지역은 물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주님이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해메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빛이 비침으로 사람들이 크게 기뻐할 것이다. 어둠의 땅에 빛이 비친다는 의미, 그리하여 사람들이 기뻐하게 되는 구체적인 내용은 주님을 그들을 위하여 행하실 일들 때문이다. 첫째로 주님은 그들을 내리누르던 이방의 멍에를 부수시고 그 압제의 뭉둥이를 꺽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둘째는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다스림으로 더는 이방의 침략이 없고 평화가 주어질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한 아기가 이스라엘을 위해 태어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이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릴 왕을 세우실 것임을 의미한다. 그가 공평과 정의로 다스림으로 그 나라는 굳게 서고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며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왕의 이름이 놀라운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그대로 반영하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사야기 보여준 나라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의 언약적 열심이 반드시 이것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했다. 이사야기 이렇게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에 이어서 놀라운 소망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단지 심판의 메시지에 이스라엘이 절망할까 걱정되어 다시 희망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정죄와 심판이든 소망의 메시지든 이사야의 모든 메시지의 목적은 단 하나, 곧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이것을 이룬다는 말은 이스라엘 없이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그 나라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정죄와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 하는 것이지 단지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이루어지는 나라기에 그 나라의 비전을 말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은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에 이스라엘은 스스로 각성하고 돌이켜야 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기를 멈추지 아니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택하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멸하시며 돌아오는 자, 곧 남은 자들을 통하여 언약의 목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가 보는 이스라엘의 현실은 암담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그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대적을 일으키시고 진노를 풀지 않으시며 심판을 계속하신다. 주님의 심판과 진노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회개의 촉구이다. 회개하는 자는 살 것이고 거부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
이사야 10장
이스라엘은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는 주님의 통치를 세상에 구현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들이 주님의 통치를 드러냄을 통해 주님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사야가 보는 유다의 현실은 그 반대였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을 제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학대하였다. 불의와 불공평이 판치는 세상이 바로 이사야가 보는 유다의 실상이었다. 주님이 그들을 징벌하시는 날에 누구도 도울 자가 없을 것이며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진노를 풀지 않으시며 그 심판을 계속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며 주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그 나라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앗시리아에 닥칠 재앙이 선포된다. 주님은 앗시리아를 진노의 몽둥이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다. 그런데 앗시리아 왕은 교만하여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다 이루고 나신 후에 거드름을 피우는 앗시리아 왕을 벌하실 것이다. 앗시리아에 닥치는 재앙과 이스라엘에 임하는 심판은 다르다. 앗시리아에 닥치는 재앙이 단순한 형벌이라면 이스라엘이 임하는 심판은 회개의 촉구이다. 주님이 앗시리아를 벌하신다는 말은 주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을 포함한 온 세상의 하나님이심을 전제한다. 앗시리아에 대한 재앙의 선포 이후에 다시 소망의 메시지가 등장하는데 이는 이미 언급했듯이 단순한 소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다. 이사야의 예언은 일관되게 그것이 정죄든 심판이든 소망이든 회개의 촉구를 는향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몽둥이인 앗시리아에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고통을 당할 것이지만 그들이 완전히 소멸하지않는다.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들과 야곱 가운데 남은 자들이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인 주님만을 진심으로 의지할 것이다. 남은 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모래 처럼 많다고 할지라고 오직 남은 자들만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 남은 자들을 통해 주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곧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나 애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진노의 뭉등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를 푸시는 날, 주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날이 오면 주님은 앗시리아가 지운 무거운 멍에를 이스라엘의 목에서 벗기실 것이다.
이사야 11-12장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 그 뿌리에서 나오는 한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줄기에서 나오는 싹이나 그 뿌리에서 나오는 한 가지가 다윗에서가 아니라 이새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그 인물이 다윗의 뒤를 잇는 왕이지만 다윗의 혈통적 후손과는 다른 인물임을 암시한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심으로 그는 지혜와 총명, 모략과 권능,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다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다스린다. 그것은 곧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실로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른 삼는다고 말할 정도로 주님의 공의와 정의를 충만하게 실현하는 자이다. 그 결과 놀라운 평화가 이뤄지는 세상이 도래한다. 주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사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사라진다. 이는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 왕이 공의와 정의로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분쟁과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주고 고통을 받는다. 그 갈등과 분쟁은 이 세상에서 결코 해결된 적도 없고 해소될 가능성도 없다. 어떤 정책과 프로그램을 동원해도 이 세상에 편만한 갈등과 싸움은 해결되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의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는 왕이 등장함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 이 새로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은 바로 이 나라를 이루시려고 세상을 칭조하셨으며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언약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실현이다. 이사야가 타락한 유다백성들을 정죄하고 심판을 선포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일관되게 유다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을 뿐이다. 정죄와 심판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회개의 촉구라면 하나님나라의 비전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회개의 촉구이다. 정죄와 심판이든 하나님나라의 비전이든 이 모든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목적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려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언약의 목적인 하나님나라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언약에 신실하게 행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만일 이스라엘 언약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주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나라임을 상기시킴으로 이스라엘이 자기 사명과 정체성을 자각하고 언약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사야의 메시지는 그것이 정죄나 심판이나 소망이나 어떤 것이든 결국 일관되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는 그날이 올 때 이뤄질 놀라운 세상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한 싹은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 깃발을 보고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주님은 이방민족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실 것이다. 물론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과 흩어진 유다 사람들도 모두 그 깃발을 보고 찾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에브라임과 유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가 된 이스라엘을 대적할 이방나라들도 없게 될 것이다. 다윗의 뒤를 이어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는 왕이 등장하는 그날은 주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위로하시는 날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님이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노래, 힘이시라고 찬양하며 감사를 드릴 것이며, 주님이 하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온 세계에 알릴 것이다.
이사야 13-18장
이사야는 바벨론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사람의 영예요 자랑거리인 바벨론을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때에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시대에는 아직 바빌론이 강국으로 등장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이 멸망할 것이 예언된 이유는 무엇인가? 14장으로 이어지는 예언을 보면 바벨론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해방과 관련된다. 주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날은 곧 주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고향 땅에서 살게 하실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방사람들도 그들에게 와서 야곱의 겨레와 함께 살 것이다. 여러 민족이 이스라엘의 귀환을 도우며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은 곧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것이란 예언인 셈이다. 하나님이 앗시리아를 멸하고 바벨론을 심판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백성들에게 씌운 멍에를 벗겨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돌아와 살게 될 때,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귀환을 도우며, 그들과 함께 산다는 예언이다. 결국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은 바벨론에게 한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루실 놀라운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언은 셈이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과 일관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기 이렇게 미래에 하나님이 이루실 세상에 대한 비전을 예언하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게 하려함이다. 훗날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은 자기의 사명을 각성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블레셋, 모압, 시리아, 에디오피아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런데 에디오피아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면서 이사야는 그 민족이 만군의 주님께 예물을 드릴 것이며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곳 시온산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이방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장차 이루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이방이 주님에게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이사야 19장
애굽에게도 엄한 경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애굽은 다른 이방나라 보다도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인접하여 늘 영향을 준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강국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이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기억을 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신 결과 애굽 사람들은 유다 땅을 무서워하고 주님의 이름만 들어도 모두 무서워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뿐만 아니라 애굽 땅의 다섯 성읍에 사는 사람들이 가나안 말을 하며 만군의 주님만을 섬기기로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애굽 땅에 주님을 섬기는 제단과 돌기둥이 세워지겠고,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애굽 땅에 계시다는 징표와 증거가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 백성들과도 함께 하시며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을 애굽 사람들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날에 애굽 사람들을 주님을 올바로 알고 주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며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시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애굽아,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나라가 주님이 복을 받고 주님의 소유가 되는 세상, 이 환상적인 세상을 이루시려고 주님은 이 세상을 지으셨으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사명을 기억하고 대오 각성하여 주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 20-23장
앗시리아가 이집트의 아스돗을 점령하던 해에 주님은 이사야에게 삼년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면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 이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가 벗은 몸과 맨발로 앗시리아에 끌려갈 것임을 보여주는 행위예언이었다. 이사야에게 이런 행위예언이 요구된 것은 그만큼 유다 백성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배척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앗시리아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집트와 에디오피아에게 도움을 바라던 유다에게 이사야의 예언은 지극히 거리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열방을 심판하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사실 유다를 향한 예언이었다. 그것은 유다로 하여금 열방의 위협을 피하려고 열방을 의지하지 말고 온 세상의 주인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하는 예언이었다. 다시 바벨론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등장한다. 주님은 내가 바빌론의 횡포를 그치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짓밟으며 타작마당의 곡식처럼 이스라엘을 으깨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에돔과 아라비아, 이스라엘 그리고 두로에 대한 경고가 등장하면서 열방들에 대한 예언은 끝난다. 만군의 주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온갖 영화를 누리며 으스대던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시며,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을 보잘 것 없이 만드시려는 것이다.
이사야 24장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심판하신 결과 땅은 텅 비고 황폐하게 되며, 땅이 뒤집어지고 주민들은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은 백성이든 제사장이든 종이든 주인이든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똑같이 미칠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율법을 어기고 주님의 법을 거슬려서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열방들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이 아니지만 주님은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주님의 법을 거슬린 것을 언약을 깨뜨린 것으로 간주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소리를 높이고 기뻐서 외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함정이고 피할 수 없는 올가미가 될 것이나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구원이 된다.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세상의 모든 질서들은 무너질 것이며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왕들은 형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편만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악과 불의가 제거되며 정화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해 불가피하다. 이렇게 온 세상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끝난 후에 만군의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이니 그날에는 주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인하여 달도 빛을 잃고 해도 부끄러워할 것이다. 주님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
이사야 25장
만군의 주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날, 사람들은 주님을 높이며 그 이름을 찬양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고 예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계획대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는 강한 민족이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며 포악한 민족들이 주님을 경외할 것이다. 참으로 주님은 가난한 자들이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에게 피난처와 그늘이 되시나, 흉악한 자들의 기세는 잠잠하게 하시며 포악한 자들의 노랫소리를 그치게 하실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또 주님께서는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며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며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니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말할 것이다.
이사야 26장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 성문들이 열리고 믿음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며 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주님은 그들에게 평화에 평화를 더하여 주실 것이다. 주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그 나라에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고 영원한 평화가 넘치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주 하나님만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영원한 반석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비천하게 되고 견고한 성들이 무너진다. 전에 억압받는 사람들이 이제는 무너진 그 성을 밟고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이 그 성을 밟고 다닌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다. 주님은 의로운 자들의 길을 평판하게 하시니, 이들은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희망을 거며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억하는 자들이다.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실 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의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주님은 심판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주님의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는지를 대적들에게 보여주심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주님의 백성을 다스렸지만 이제는 오직 주님만이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큰 민족으로 만드셨고, 큰 나라로 만드셨다. 주님은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여 온 세상의 왕이 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이 세상의 악과 불의 가운데 주님의 백성은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지만 그들은 이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했고 이 땅에 살 주민을 낳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이 왕이 되심으로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이다.
이사야 27장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좁고 예리한 큰 칼로 매끄럽고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처치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바다의 괴물을 죽이심으로 온 세상을 어지럽히던 악의 뿌리가 뽑히게 된다. 주님은 그동안 주님의 포도원에 가득했던 찔레와 가시덤불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실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 주님의 포도원에서 야곱이 뿌리를 내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니 그 열매가 땅 위에 가득 찰 것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이 맺은 열매가 땅위에 가득 차는 일, 이것이 바로 주님이 야곱과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주님의 포도원이 심으신 목적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을 인도하여 오신 이유는 바로 그들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하심이었다. 그렇기에 주님은 이스라엘을 견책하시고 그들을 쫒아내셨지만 그들을 아주 멸하지는 않으시며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돌이키게 하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이집트 강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알곡처럼 일일이 거두실 것이다. 그날이 오면 큰 나팔소리가 울리 것이니, 앗시리아 땅에서 망할 뻔한 사람들과 이집트 땅으로 쫓겨났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에서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이사야 28장
북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다. 교만한 에브라임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기름진 평야의 높은 언덕에 화려한 왕관처럼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들어 가는 꽃과 같다. 주님의 재앙이 우박처럼 광풍처럼 거센 물결처럼 몰려올 때 그들은 땅에 쓰러질 것이다. 교만한 북 이스라엘은 술 취한 자, 술에 빠진 주정꾼의 도성으로 묘사된다. 이는 그들이 교만하여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함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북 이스라엘은 주님의 재앙에 넘어지고 쓰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남은 백성들이 있을 것이며 주님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시며 영화로운 왕관이 되실 것이다. 그날이 오면 주님은 재판관들에게 공평의 영을 주시고 용사들에게 용기를 주실 것이다. 이어서 남 유다에 대한 예언이 등장한다. 유다 사람들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그들도 독한 술에 취한 자처럼 휘청거리고 비틀거린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계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재판을 바르게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제사장들은 이사야를 향하여 저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젖 뗀 자들이나 가르치라고 빈정거린다. 주님은 예언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예언자를 멸시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과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 이는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주님의 계시를 깨달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주님은 그들이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를 조롱하는 자들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죽지 않을 것이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고 자기들에게 재난이 닥치지도 않는다는 근거 없는 거짓 확신을 가지고 있다. 때가 되면 주님이 시온에 견고하고 귀한 주춧돌을 놓으심으로 시온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실 것이다. 이 견고한 주춧돌을 의지하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시온에 세우실 견고한 주춧돌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릴 진정한 지도자를 의미할 것이다. 그가 공평과 공의로 예루살렘을 다스림으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 자들이나 속임수로 몸을 감춘 자들이 모두 재앙을 당할 것이다. 이사야는 다시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귀를 기울여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의 깊게 나의 하는 말을 들으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그것들을 추수하듯이 주님도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뜻을 하나도 틀림없이 때를 따라 이루실 것이며 주님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끝없이 넓기 때문이다.
이사야 29장
예루살렘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계속되고 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치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슬퍼하고 통곡할 것이다. 적들이 예루살렘 사면을 둘러 진을 치며 탑들을 세우고 흙더미를 쌓아 올려 성을 칠 것이다. 그 때에 예루살렘은 거의 죽은 자와 같이 되어 낮아지고 절망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주님은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며 원수의 무리를 먼지처럼, 그 잔인한 무리를 겨처럼 흩어버리실 것이다. 이 예언은 앗시리아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히스기야 시대의 남 유다를 공격했을 때, 남 유다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한 역사적 배경을 생각나게 한다.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멸망당하고 말았지만 남 유다는 위기의 순간에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보다 뭔가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언약적 자비를 베푸신 것이며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남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잠드는 영을 보내셔서, 그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실 것이다. 이는 이제는 계시를 깨닫고 돌이킬 기회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눈이 멀어서 앞을 못 보는 사람 같이, 포도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해서 비틀거리는 자와 같이 될 것이다. 주님은 예언자로 그들의 눈 구실을 못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실 것이며 선견자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려 보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유식한 자든 무식한 자든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묵시는 마치 밀봉된 두루마리의 글처럼 될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입술로만 주님을 가까이하고 그 마음으로는 주님을 멀리하는 자들이다. 주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다만 들은 말을 흉내 내는 빈말일 뿐이다. 그들은 주님 몰래 음모를 깊이 숨기려고 하고 어두운 곳에서 남 몰래 음모를 꾸미면서,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자들은 마치 옹기장이와 진흙이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레바논의 밀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고, 그 기름진 밭이 다시 밀림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렇게 북 이스라엘이든 남 유다든 모두 주님을 떠나고 언약을 배반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정하신 그 날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편만하게 임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두루마리의 글을 읽는 소리는 듣고 어둠과 흑암에 싸인 눈먼 사람들이 눈을 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나라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거나 주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나라는 천한 사람들이 기뻐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세상이다. 그 나라에서 포악한 자들은 사라질 것이며 비웃는 자들도 자취를 감출 것이고 죄지을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모두 끝장 날 것이다. 이제 다시는 야곱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이사야 30장
이사야는 유다가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려고 한 일을 책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므로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이사야는 이집트가 유다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망상이라고 비판한다. 지금 유다의 상황은 매우 급박하다, 북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초강대국 앗시리아의 위협은 유다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집트의 도움을 얻어 이 난국을 타개해 보려고 한 것이다. 이로 보건데 유다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으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북조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것은 앗시리아가 강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약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패역한 북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고 앗시리아는 단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였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남조 유다는 북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가공할 군사력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고 이 난국을 극복하는 방책으로 이집트와의 군사동맹을 추진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남조 유다가 외교수단을 동원해 앗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려고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일이 죄에 죄를 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유다가 이집트의 도움을 구한 일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 중시하고 현상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유다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판단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현상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해석해야 했다. 한마디로 유다의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만 행한 불신앙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 백성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손으로서, 주님이 율법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자손이라고 책망한다. 하나님이 선견자를 보내 이르셔도 그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사실보다는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했다. 이 죄로 인해 유다는 붕괴될 성벽처럼 갑자기 무너져 내릴 것이고 토기장이의 항아리가 깨어지듯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리고 적군에게 쫒겨 도망가며 언덕위에 깃발만 남아 외롭게 펄럭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가 북조 이스라엘처럼 멸망당하게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유다의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그 계획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 참으로 주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성경이 말하는 공의가 단순히 잘잘못을 따지고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이유는 그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함이다. 유다는 그렇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시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런 공의로우신 주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이 복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유다를 책망하고 징벌하시는 이유도, 또 유다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도 모두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 곧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유다에 은혜를 베푸실 때, 예루살렘에 사는 시온 백성은 이제 울 일이 없을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시며 또 그들에게 스승을 주어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날에 달빛은 마치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유다를 압제하던 이방을 향한 주님의 진노는 불처럼 타오르며 노기는 치솟는 연기처럼 하늘을 찌를 것이다. 주님께서 몽둥이로 앗시리아를 치실 것이니 그들은 주님의 목소리에 정신을 잃을 것이다.
이사야 31-32장
그러므로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군마를 의미하고 많은 병거를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다. 주님이 이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그들을 교정하여 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돕는 자는 이집트가 아니라 만군의 주님이시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그 도성을 살리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그토록 거역하던 주님께로 돌이켜야 하며 자신들이 만든 모든 우상들을 다 내던져야 한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앗시리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앗시리아가 칼에 쓰러지고 칼에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앗시리아를 치는 칼은 사람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칼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되 공의로 통치하는 왕을 세우고 공평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들을 세우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것과 같게 될 것이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고상하다고 하거나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현실은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과 같고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과 같다. 밭농사와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며 땅에는 가시덤불과 찔레나무가 날 것이니 가슴을 치고 몸부림을 쳐야 하는데 유다는 안일하고 아무 걱정도 없는 여인과 같다. 결국 요새는 파괴되고 붐비던 도성은 텅 비고 망대와 탑이 돌무더기가 되고 짐승들이 뛰노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의로우신 주님은 유다가 망하고 소멸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주님은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그들에게 영을 보내주실 것이요,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풍성한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이는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될 때 그 열매는 평화이며 그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이 세상은 갈등으로 가득하고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 어떤 정책이나 프로그램으로도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평화와 안전이 없다. 이 세상이 공평과 의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평과 의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모든 분쟁은 사라지고 갈등은 그칠 것이며, 영구한 평화와 영원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사야 33-35장
약탈 한 번 당하지 않고 남을 약탈하기만 한 자, 배반 한 번 당하지 않고 남을 배반하기만 한 자는 북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이제 남조 유다를 위협하는 앗시리아를 가리킬 것이다. 이제 앗시리아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의 약탈이 끝나면, 이제 약탈을 당할 것이며, 그들의 배반이 끝나면 이제 배반을 당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주님은 그들의 구원이 되어 주실 것이다. 주님의 우렁찬 소리에 열방이 도망가며 주님이 이스라엘 편이 되어 싸우실 때 민족들이 흩어질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고 압제하던 앗시리아에게 재앙을 내리시며 시온을 공평과 의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이 안정된 시대를 누리게 하시며 지혜와 지식을 주실 것이니, 그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보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방에게 주님의 재앙이 닥치므로 그들은 통곡하고 고달파할 것이다. 이제 주님이 일어나서 그 큰 권능을 행하시므로, 이방은 겨를 잉태하여 지푸라기를 낳을 것이며 제 꾀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뭇 민족은 불에 탄 석회같이 되며, 찍어다가 태우는 가시덤불같이 될 것이며 주님의 권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온에서도 죄인들은 공포에 떨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오직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자들만이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장엄한 모습을 볼 것이며 사방으로 확장된 영토를 볼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이제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는 의미다. 지난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인들을 다시는 더 보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도성 시온에서 마음껏 절기를 지키며 다시는 옮겨지지 않을 장막, 예루살렘에서 안락하게 살 것이다. 이제 주님이 다스리신다. 그는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시며 입법자이시며 왕이시며 구원자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가까이 와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의 모든 군대에게 분노하셔서 그들을 진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살육과 온 세상이 경천동지할 격변들이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이 때가 바로 주님께서 복수하시는 날이니, 시온을 구하여 주시고 대적을 파멸시키는 해, 보상하여 주시는 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엄청난 심판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희망으로 끝난다. 주님의 이 심판은 심판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영구한 도래를 위한 예비 작업인 셈이다. 주님의 심판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하여 온 세상의 악과 불의를 제거하시는 일이다. 세상의 악과 불의가 제거되어야만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주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민족과 세상을 향한 놀라운 심판의 경고 이후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환상적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날에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날이 오면 이 세상에 광야나 사막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눈멀고 귀 먹은 사람도 더는 없을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망에서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거기에는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는 큰 길이 생길 것인데, 악한 자나 어리석은 자는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주님께 속량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이사야 36-39장
예언적 선포로 일관되던 이사야서의 중간에 히스기야 이야기가 삽입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그 이야기에 이사야가 등장하므로 이사야서와 관련이 없다할 수 없지만 열왕기에 등장하는 히스기야 이야기가 거의 동일하게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저자의 의도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히스기야 이야기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내용이 있는데 하나는 히스기야의 언약적 성공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적 실패였다. 북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가 유다를 공격하여 위협했을 때 히스기야는 이에 굴복하기 않고 믿음으로 극복했다. 히스기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이 도성을 앗시리아의 손에 절대로 넘겨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항복하라는 산헤립 왕의 편지를 받고서 하나님께서 앗시리아의 손에서 남 유다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주시길 기도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이사야를 보내어 주님께서 산헤립의 코를 갈고리로 꿰고 그 입에 재갈을 물려 그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하시겠다고 응답하셨다. 그런 다음에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서 앗시리아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였고 산헤립은 니느웨 도성으로 되돌아가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었고 바벨론에서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친서와 예물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히스기야가 왜 죽을병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회복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히스기야가 병든 것은 그의 어떤 잘못에 대한 주님의 징계로 인한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사절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보물 창고에 있는 은과 금과 향료와 향유와 무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다.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주었다. 히스기야의 이런 행동은 바벨론과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맺어 앗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한 외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이런 행동을 책망하고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며, 그날이 오면 유다 왕궁의 모든 보물을 바벨론이 가져갈 것이며 심지어 히스기야의 후손 가운데 더러는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히스기야의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와 대조를 이룬다. 첫 번째 이야기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앗시리아의 위협을 막아낸 충성된 신앙의 이야기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바벨론을 의지하여 앗시리아의 위협을 막아보려고 한 불신앙의 이야기였다. 역설적이게도 남조 유다를 멸망시킨 나라는 히스기야가 정작 두려워했던 앗시리아가 아니라 히스기야가 의지하려 했던 바벨론이었다. 결국 히스기야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것은 외부의 강국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신앙이란 이야기다. 북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앗시리아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듯이 남조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바벨론을 의지함으로 정작 자신들이 의지했던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만 것이다. 남조든 북조든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떠났다는데 있ㅈ다. 결국 그들이 앗시리아 및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것은 그 나라들이 강해서이거나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도 그들을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이방의 강대국들에게 멸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 이야기가 말하는 교훈이고 이것은 결국 이사야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히스기야 이야기가 이사야서 가운데 삽입된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이사야 40장
앞의 히스기야 이야기에서 유다가 바벨론에서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갈 것임이 이미 예고되었다. 여기서 부터 등장하는 메시지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백성을 향해 선포되는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다 백성들이 가나안에 있든 바벨론에 있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에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징벌을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제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주어지고 있다. 이제 유다의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넘치게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은 외적으로 보면 유다가 약하고 바벨론이 강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유다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도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있다. 그것은 유다를 떠나셨던 하나님이 이제 유다백성들에게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이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로 잡혀온 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이라면, 이제 하나님이 다시 유다에게 돌아오신다는 것은 곧 그들이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소식과 동일한 것이다. 이제 주님이 돌아오심으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주님이 돌아오신다는 소식은 포로로 잡힌 유다에게는 해방과 기쁨의 소식이지만 바벨론에게 그것은 멸망과 심판의 소식이었다. 유다에게 돌아오시는 주님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유다를 해방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마르고 마는 풀이요 그의 아름다움은 시드는 꽃이라는 외침은 바벨론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바벨론의 영광과 권세는 마르고 시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은 유다에게는 지극히 좋은 소식,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소리를 높여 주님이 오신다고,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오신다고 외쳐야 한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은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리신다는 소식이고 자기 백성에게 상급과 보상을 주신다는 소식이다. 목자가 양떼를 먹이고 어린 양들을 모아 품에 안 듯이 주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오랜 포로생활로 희망을 잃고 위축되어 있었기에 예언자는 그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을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유다백성들은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온 이유가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이거나 바벨론이 강력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랜 포로생활에서 믿음이 약해지고 의기소침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권능이 크시고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분이신가를 길고 진지하게 선포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한 방울 물이나 티끌과 같을 뿐이며 그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 것도 아니며, 그에게는 사람이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며, 그렇다면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어떤 형상에 비기겠냐고 반문한다. 바벨론이 섬기는 우상은 대장장이가 부어 만들어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을 걸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들을 허수아비로, 땅의 지배자들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그동안 야곱은 불평하고 이스라엘은 불만을 토로하며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예언자는 그러므로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을 것이며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을 것이라고 오랜 포로생활로 지치고 피곤한 유다 백성들을 격려한다.
이사야 41장
예언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묻는다.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켰는가? 누가 그를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였는가? 누가 민족들을 그에게 굴복하게 하였는가? 누가 그를 왕들의 통치자로 만들었는가? 이렇게 하신 분은 바로 유다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동방에서 일어난 한 정복자는 물론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온 바벨론을 가리킬 것이다.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위축된 유다백성들에게 예언자는 바로 그 바벨론을 일으킨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신 분,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신 분은 바로 태초부터 계시며 끝날 까지 계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방나라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두려워하며 저 멀리 땅 끝에 있는 나라들이 무서워서 떤다. 그러면서 그들은 합심하여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의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며, 야곱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족속이며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땅 끝에서부터 데리고 오셨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불러냈다.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셨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니 이스라엘은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그들을 강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도와주고 승리의 오른팔로 붙들어 주실 것이다. 이제 주님이 돌아오시므로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자들이 수치를 당하며 당황할 것이며 야곱과 다투던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처럼 되어서 멸망할 것이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지렁이 같이 멸시를 당하던 야곱, 벌레 취급을 당하던 이스라엘은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돕고 그들을 속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단지 해방시키실 뿐 아니라 그들을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강하게 만드실 것이니 그들이 산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언덕을 겨로 만들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를 받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쳐서 굴복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주님과 더불어 기뻐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었기에 오랜 세월 이방의 다양한 우상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민족의 신들에게 소송을 제기해 보라고 요청하며 이방이 섬기는 우상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보라고 요구한다. 장차 무슨 일을 일어날 것인지 말해보라 그러면 우리가 너희들이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든지 해보라 그러면 우리가 모두 놀라며 두려워할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방의 우상 속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참으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이 하는 일도 헛것이며 그것들을 섬겨 예배하는 자도 혐오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래에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에 대해 예언하며, 장차 하나님이 북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한 사람을 일으킬 것이고 그가 와서 토기장이가 진흙은 밟아 이기듯 통치자들을 진흙처럼 짓밟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예언은 장차 하나님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일으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방의 우상들은 결코 이런 일을 미리 일러줄 수가 없다. 그것들 가운데 말하는 우상은 하나도 없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우상도 없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방의 우상들은 쓸모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라고 촉구한다.
이사야 42장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신다.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일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시는 한 종을 통해 구현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이 붙들어 주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실 것이며 그는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가 베푸는 공의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구현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가 베푸는 공의는 바벨론의 유다 백성들만이 아니라 뭇 민족을 향한다. 이는 하나님이 바벨론 유다백성들에게 돌아오시는 일이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민족을 위한 일임을 암시한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었다. 하나님이 유다를 베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시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자유와 해방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그가 택하여 세우시는 종이 베푸는 공의는 뭇 민족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여호와의 종은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데 이는 그가 베푸는 공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가 이렇게 진리로 공의를 베풀게 됨으로, 이 세상에서는 상한 갈대도 꺾이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도 꺼지지 않게 된다. 이는 그가 공의로 다스림으로써 약육강식, 강자독식의 세상이 약자들이 보호받고 살만한 세상으로 변하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종은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다. 그가 이렇게 공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할 때,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이방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으시며 특별히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공의로 다스림을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을 불러 세우신다. 하나님은 그 종을 붙들어 주고 그를 지켜주어서 그로 하여금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실 것이다. 백성의 언약이라 함은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사이의 언약이 회복됨을 의미할 것이고 이방의 빛이라 함은 그를 통하여 이방에 하나님을 아는 빛이 비추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의 언약이나 이방의 빛이 되게 한다는 말은 결국 이 종의 공의로운 통치를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며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온 백성의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주님이 전에 예고한 일들, 곧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란 예언이 이루어졌듯이 이제 새로운 일들, 곧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것이란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이루실 새 일은 유다백성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온 민족들을 위한 복음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뭇 민족들에게 새 노래로 주님을 찬송하며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요청한다. 이제 주님께서 용사처럼 나서시고 전사처럼 용맹을 떨치시며 대적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이제 주님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시며 해산하는 여인처럼 부르짖으실 것이다. 주님은 눈 먼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여 그들이 한 번도 다니지 못한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앞에 서서 암흑을 광명으로 바꾸시며 거친 곳을 평탄하게 만드실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의를 이루려고 힘쓰셨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율법과 교훈을 주시고 그들이 율법과 교훈을 순종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것을 보았지만 마음에 새기지 않았으며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들을 가리켜 귀가 먹은 자들이며 눈이 먼 자들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약탈과 노력을 당하여 모두 구덩이에 갇히고 감옥에 갇힌 자들과 같이 되었으며 그들을 구원해줄 자는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이 무능해서거나 바벨론이 강력해서가 아니다. 야곱이 노략을 당하게 버려두고 이스라엘을 약탈자에게 넘겨준 이는 바로 주님이시었다. 그들이 주님께 죄를 지었고 주님의 길로 걸으려 하지 않았고 주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주님이 불타는 진노를 이스라엘 위에 쏟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야곱은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고, 불이 그들을 태웠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사야 43장
주님이 이스라엘 위에 불타는 진노를 쏟으셨지만 그들은 이것이 무근 일인지 알지 못하였고 불이 그들을 태웠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주님이 이제 그들에게 돌아오시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찾았거나 그들이 주님에게 돌아와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그들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돌아오신다. 주님은 야곱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야곱을 속량하여 그들을 지명하여 주님의 것이라고 부르신다. 이제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강물이 그들을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며 불꽃이 그들을 태우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주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다. 이제 주님은 흩어진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시며 그들을 모두 오게 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주님의 백성이며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눈이 있어도 눈이 먼 자요, 귀가 있어도 귀가 먹은 자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온 민족들과 함께 법정으로 소환하시어 이방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처럼 미래를 예고하는 신이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증인이며 주님이 택한 종이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주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주님이시고 주님 말고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어떤 구원자도 없다. 이제 야곱의 속량자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주님은 바벨론에 군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하여 내실 것이다. 야곱의 거룩한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왕이신 주님은 옛날 애굽 군대에게 하셨듯이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내어 바벨론의 군대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쓰러뜨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새 일을 하시려고 한다. 주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며 사막에 강을 내시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것이다. 야곱은 주님을 부르지도 않았고 오히려 싫증을 내었으며 주님에게 번제물과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돌아오신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첫 조상부터 주님에게 죄를 지었고 그 지도자들은 주님을 반역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야곱이 진멸을 받게 버려두셨고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되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자기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며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이사야 44장
아마도 오랜 세월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온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 신앙도 희미해졌을 것이고 미래의 소망도 거의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길게 설득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야곱을 나의 종이라, 나의 택한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며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속량자이신 주님은 만군의 주이시며, 시작이고 마감이시니 주님 밖에 다른 신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는 신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떨지 말고, 주님이 예고하신 일을 증언할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상은 만드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자들이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종이며 주님은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절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야곱은 기억하여야 한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였으니(이는 주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로 돌아오심을 의미한다.) 이스라엘도 주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이 먼저 주님께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주님이 돌아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으니 하늘이 기쁘게 노래하며 땅이 함성을 울린다. 주님께서 야곱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야곱의 구원자, 이스라엘을 모태에서 만드신 자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당신이 하신 말을 반드시 이루시니 이제 유다의 성읍들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귀환을 막는 모든 강물들을 마르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45장
주님은 고레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고레스는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운 목자라 불린다. 주님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그 앞에 굴복시키실 것이다. 주님이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주님의 종 야곱, 주님이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 하심이었다. 비록 고레스는 주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주님이 그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시고 영예로운 이름을 주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은 고레스를 통해 온 세상이 주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실 것이다. 바벨론은 질그릇 가운데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님이 낳은 자녀이시므로 바벨론이 감히 주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실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주님은 고레스를 의의 도구로 일으키셨으니 그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실 것이다. 그가 주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포로된 이스라엘을 대가도 없이 보상도 받지 않고 놓아줄 것이다. 열방이 고레스를 보고 엎드리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상을 만드는 바벨론은 모두 한결같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창피한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 안에서 안전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은 영원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님은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주님이시며 주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 구원하지도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다. 주님 밖에 다른 신은 없으며 주님은 공의와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시다. 참으로 주님에게만 공의와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고백할 것이다. 사람들에 그에게 올 것이나 대항하던 자들은 모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주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예를 얻을 것이다.
이사야 46-47장
바벨론의 신인 벨이 고꾸라지고 느보 신이 넘어졌다함은 바벨론의 멸망을 의미한다. 이제 야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구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벨론의 우상과 견줄 수 없으며 그것들에 비교할 수 없다. 우상은 부르짖는 자들에게 전혀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지도 못한다. 오직 주님만 하나님이시며 주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주님은 처음부토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신 분이시며, 이미 오래 전에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리신 분이시다. 주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되며 주님은 하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주님이 부르실 동방의 독수리는 고레스를 의미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승리를 믿지 않는 고집 센 백성들이지만, 이제 주님이 승리하실 날이 가까이 왔으니, 그날이 오면 주님은 시온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주님이 이기시는 그 날은 지체되지 않는다. 바벨론은 내려와서 티끌에 앉을 것이며 그 보좌르 잃어버리고 땅에 주저앉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는 분,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제 바벨론은 잠잠히 앉아 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바벨론을 민족들의 여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바벨론에 넘기셨는데 바벨론은 주님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노인에게도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바벨론은 스스로 교만하여 높아졌지만 낮아지는 일이 한 날에 갑자기 닥쳐올 것이다. 바벨론에게 불행이 닥쳐와도 그의 점술이 구원하지 못하며 재난이 덮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바벨론은 검불같이 불에 타고 말 것이며 그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사야 48장
이스라엘이라 일컬음을 받는 유다의 자손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진실이나 공의라고는 전혀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거룩한 성읍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며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자랑하는 자들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이들은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다. 주님이 이들에게 옛적부터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알려주신 것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이 그 일을 명하였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주님은 곧 일어날 새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실 것인데, 이 일은 이전에는 알려주지 않은 은밀한 일이다. 이 새 일은 옛적에 일어난 일과는 다르며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일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성실하지 못하며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로 불러 마땅한 자로 태어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듣지도 못하게 알지도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성실하지 못하며 주님을 반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주님의 징벌이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자기의 이름 때문에(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분노를 참고, 주님의 영예 때문에 자제하여 이스라엘을 파멸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신 것은 그들을 고난의 풀무질로 달구어 시험하기 위함이었지 그들을 파멸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보존하신다. 만일 이스라엘이 파멸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주님의 영광을 남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금 야곱을 부르시며 내가 바로 그다. 내가 곧 시작이요 마감인 자,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고레스로 하여금 바벨론을 공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야곱의 속량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이스라엘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며 이스라엘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명령이 귀를 기울였다면 그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그 공의가 바다의 파도같이 넘쳤을 것이다. 결국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평화와 공의를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종 야곱을 속량하셨다고 즐겁게 소리를 높여 알리며, 이 소식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들려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야곱을 속량하신다는 이 소식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치는 기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오래 경륜을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9장
두 번째 종의 노래가 등장한다. 앞의 42장에서는 하나님이 종을 소개하셨다면 여기서는 이미 소개된 종이 등장하여 직접 하는 말이 나타난다. 여호와의 종은 먼 곳에 사는 민족들을 향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선포한다. 종의 선포의 대상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이라는 점은 종의 사역의 대상이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주님이 이미 모태에서부터 종을 부르셨고 그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종은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준비하여 세우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주님은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셨다. 이는 세상을 향한 종의 선포가 강력하고 날카로워서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종을 숨기시고 감추심으로 세상이 종의 권세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세상은 종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멸시하고 무시하지만 이 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주님은 특별히 이 종을 향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종이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그런 존재임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종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고 쓸모없고 무익한 일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종을 감추시고 숨기심으로 세상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하고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종은 주님께서 참으로 자신을 바르게 판단하여 주시고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심을 깨닫게 된다. 종은 주님이 자신을 종으로 세우신 것은 야곱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시려 하심을 알았다. 그러나 이 일이 종의 궁극적 사명은 아니다.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는 일은 종에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주님은 땅 끝까지 주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종을 뭇 민족의 빛으로 삼으셨다. 흩어진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는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다. 주님은 이 종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사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세상의 왕들이 일어나서 종에게 예를 갖추고 부복할 것이다. 비로 이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 종을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그 이름을 기억하신 것이다.
때가 되면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주님에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돕고 보호하실 것이며 그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살던 땅에 정착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시고 인도하시는 일은 이들을 시켜서 뭇 백성과 언약을 맺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운 하나님의 종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천하 만민이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그 약속의 성취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포로살이 하는 이스라엘은 스스로 말하기를 주님이 나를 버리셨고 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시며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주님의 구원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을 건축할 사람들이 곧 올 것이며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는 사람이 떠날 것이다. 그리고 파괴되고 황폐하게 된 그들의 땅은 다시 번성하게 되고 백성들이 너무 많아져 땅이 비좁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번성하고 백성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족속들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뭇 민족을 부르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딸들을 데리고 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때에 이방의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섬기며 엎드리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이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누가 적군에게 전리품을 빼앗을 수 있으며 누가 폭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를 빼내올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강력한 바벨론의 압제에 오래 시달려온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이라는 현실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력하고 더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넉넉히 바벨론을 이기실 수 있으며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때에 모든 사람이 주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여, 속량자요,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 50장
세 번째 종의 노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종이 직접 말한다. 42장에서 주님은 종에게 주님의 영을 주셨는데 이는 종으로 하여금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 결과 종은 학자처럼 말하며 학자처럼 알아듣게 되었다. 주님의 종의 사역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주님의 뜻을 말하며 주님의 뜻을 알아듣는 일이다. 종이 이렇게 주님의 말을 알아듣고 주님의 말을 말하게 될 때, 종에게는 고난이 닥친다. 사람들은 종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고 모욕한다. 그러나 종은 그 모든 치욕과 고난을 묵묵히 견디어 내고 피하려 하지 않는다. 종은 주님께서 자신을 도우심을 알기에 모욕을 당해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 종은 자신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 가까이 계심을 알기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알을 것을 안다. 종을 정죄하는 자들은 모두 옷처럼 헤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주님의 종에게 순종해야 한다. 어둠 속을 걷는 빛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둠을 밝히겠다고 스스로 불을 피우는 자들은 그들이 피운 불에 타서 소멸될 것이다.
이사야 51장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도움을 받으려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 곧 바벨론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주님이 은혜를 내려서 그 자손을 수없이 많게 하셨음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주님은 시온을 위로하시고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신다. 주님께서 그 광야를 에덴처럼 만드시고 그 사막을 주님의 동산처럼 만드실 그때에 감사와 기쁨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며, 주님의 의가 만백성의 빛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주님은 주님의 법을 말씀하시며 주님의 의를 말씀하신다. 주님의 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주님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며 주님의 심판이 나타날 것이다. 이방이 주님을 우러러보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이다. 주님의 의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나고 바벨론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난다. 주님의 구원은 영원하여 주님의 의는 꺾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의를 아는 사람들, 곧 마음속에 주님의 율법을 간직한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멸할 것이지만 주님의 의는 영원하며 주님의 구원은 온 세상에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마치 잠드신 것처럼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버려두셨지만 이제는 깨어난 자처럼 그 힘으로 무장하고 그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다. 오래전 주님이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구원하셨듯이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속량하여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며 시온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때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죽을 인간이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바벨론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을 잊었다. 이스라엘의 주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만군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이 깨어서 일어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깨어서 일어나야 한다. 이스라엘을 위로할 자는 오직 주님뿐이시다.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그 잔을 바벨론에게 마시게 하실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이스라엘이 그 잔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52장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므로 시온은 깨어서 일어나야 하며 이스라엘은 힘을 내어야 한다. 예루살렘은 먼지를 일어나서 보좌에 앉아야 하며 포로된 딸 시온은 목에서 사슬을 풀어내야 한다. 이제 다시는 할례 받지 않은 자, 부정한 자, 곧 이방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지 못할 것이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와서 조롱한 일은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것과 같다. 아마도 바벨론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이 무능해서 이스라엘이 패망한 것이라고 조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반드시 주님의 이름(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반드시 주님의 백성은 주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혹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 산을 넘어 달려올 것이다. 그것은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며 너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을 떠났던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신다는 소식, 곧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될 때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구원이 이뤄지며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이 기뻐 함성을 터트릴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떠나 나와야 한다. 온갖 우상으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며 그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그들 뒤를 시켜주실 것이므로, 그들이 나올 때 황급히 나오지 않아도 되며, 도망치듯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이사야 53장
네 번째이자 마지막 종의 노래가 52장 13절부터 등장한다. 첫 번째 종의 노래가 주님의 소개로 시작되었듯이 마지막 종의 노래도 주님의 소개로 마무리 되고 있다. 주님의 종은 매사에 형통할 것이고 받들어 높임을 받으며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전에 종은 많은 고난을 받아 그를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랄 정도로 얼굴이 상했다. 이제는 그 종이 많은 이방나라를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이다. 왜냐하면 왕들이 (그 종의 사역을 통하여) 이제까지 듣지 못한 일들을 볼 것이며,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은 일들을( 곧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우리가 들은 것, 즉 그 종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능력이 (그렇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주의 종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고 반문한다. 주의 종은 마치 연한 순과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런데 그가 받은 고통은 이스라엘이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은 것이며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종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고통을 받고 슬픔을 겪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종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이 종은 자기 사명을 다 감당하며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았다. 이 종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그가 당한 모든 고통과 고난은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과 고난을 의미했다. 그래서 종이 당한 고난과 슬픔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찔림과 그의 상처는 모두 이스라엘의 허물과 악함 때문이었다. 그 종이 징계를 받음으로 이스라엘은 평화를 누리고 그 종이 매를 맞음으로 이스라엘의 병이 나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신 것이다. 그래서 그 종은 (자기의 사명을 알기 때문에)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해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고난을 다 감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가 받은 형벌이 이스라엘의 허물 때문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악을 행한 적이 없지만 악인과 함께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난은 주님 앞에 이스라엘을 위한 속건제물이었기에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주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그는 실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인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를 존귀하고 강한 자들과 함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54장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너는 물론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마치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처럼 비참하고 아무 소망이 없는 처지에 있다. 그러나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라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약속이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전해진 복음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믿겨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소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사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이방나라들을 차지할 것이고, 황폐한 성읍들마다 주민들이 가득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는 수치를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이 남편이 그 아내를 잊지 않고 지키듯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만군의 주님이시며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불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불리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잠시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아래 버리신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거나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큰 긍휼로 다시 불러들이신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분노하여 잠시 그 얼굴을 가리셨지만 이제 영원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며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것이다. 노아 때에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셨듯이 주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이방의 압제를 받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노아 때에 땅이 홍수로 멸망한 것에 비견될 정도로 주님이 보시기에 심각하고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은 다시는 이스라엘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주님의 은총은 이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평화의 언약(하나님과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이의 샬롬)이 파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약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서 기인한다. 노아 이후에 땅이 홍수로 멸망당하지 않은 것이 사람들이 죄악이 없어서가 아니듯이 이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통하여, 특별히 자기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시길 작정하셨기에 결코 사람을 포기하시거나 이스라엘을 멸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그동안 예루살렘은 고난을 당하고 광풍에 시달려도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시되 보석으로 벽을 쌓고 기초를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공의의 터 위에 굳게 설 것이므로 이방의 억압이 멀어지고 대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석으로 중건하신다는 말이나 이스라엘이 공의의 터 위에 굳게 선다는 말은 주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스리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다스리실 때 이스라엘은 모든 대적의 억압에 벗어나며 더 이상 이방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이스라엘에 이방의 압제를 당하며 대적을 두려워한 것은 이방이 강하거나 주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통치를 받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생긴 일임을 보여준다.
이사야 55장
목마르지만 먹을 물이 없는 사람들, 배가 고프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 역시 소망이 없고 무능한 처지에 있는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마치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지도 못하는데 수고하는 자들과 같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스스로 자기들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 곧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비록 복음이 생소하고 믿기 어려울지라도 주님께 나아와서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은 살 수가 있다. 그 말씀은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은혜와 같이 영원한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겠다는 주님의 약속이다. 이 영원한 언약이 주님이 이스라엘과 이미 맺은 언약과 다른 별다른 언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약속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베푸실 일방적인 은혜를 가리킨다. 주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비록 다윗의 자손이 죄를 범할지라도 그를 책망하고 징계는 하겠지만 다윗의 왕권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주님이 이제 다윗에게 하신 것과 같은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영원한 언약의 의미하는 바이다. 그리고 다윗을 많은 민족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많은 민족들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으셨듯이 이제 주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세우려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실 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방나라들을 부르게 될 것이며, 열방이 그 부름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달려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이런 때에 주님을 찾아야 하고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야 한다. 이스라엘을 잠시 떠났던 주님, 이스라엘에게 잠시 얼굴을 가리셨던 주님이 이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사 돌아오신다는 이 기쁜 소식을 이스라엘은 믿고 주님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악한 자는 그 불의를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주님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생각과 다르며 주님의 길은 이스라엘의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주님의 길은 이스라엘의 길보다 높으며 주님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생각보다 높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기 길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복음을 믿고 나아와야 한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고 그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침으로 이스라엘은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예루살렘의 황폐한 땅에 자라던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자랄 것이며 찔레나무가 자라던 곳에 화석류가 자랄 것인데, 그것들이 영원히 남아서 주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56장
여기서부터 이사야서의 제3막이 시작된다. 이제 예언은 더 이상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실패했기에 그들이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이며,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오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라면, 그 실현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이유다. 이스라엘이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오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하나의 사례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제기된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저 그날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악행애도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방인이든 고자이든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전과 성벽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며 성전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함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쫓겨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불러 모으신 하나님은 이제 이방인들도 모아들여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현실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가장 큰 문제는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을 스스로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하지만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하고 벙어리 개가 되어서 짖지도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이 없이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자기 배만 채우는 자들이다.
이사야 57장
그래서 의인이 망해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그 뜻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이런 지도자들을 향해 예언자는 점쟁이의 자식들, 간통하는 자와 창녀의 씨, 거역하는 자의 자식, 거짓말쟁이의 종자라고 꾸짖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언자를 조롱한다. 그들은 아직도 바벨론에서 배운,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바벨론에게 멸망해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바벨론의 신들이 힘이 강해서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그처럼 무서워하는 신들이 누구냐? 도대체 그 신들이 얼마나 무서우면 나를 속이면서까지, 나를 까마득히 잊어가면서까지, 그 신들에게 매달리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동안 오랫동안 침묵하셨지만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모두 폭로하실 때, 그들이 섬기던 우상이 돕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현실은 참으로 실망스럽지만, 하나님은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시고, 상한 마음을 고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겸손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의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여 그 얼굴을 가리셨지만, 그래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끝내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끝없이 다투거나 한없이 분을 품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며, 도와주고, 위로하여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평화를 창조하실 것인데, 이 평화는 가까운 곳에 있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먼 곳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은 겸손한 사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교만하고 완악한 악인들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이 쉬지 못하고 평화가 없을 것이다
이사야 58장
그러므로 예언자는 목소리를 크게 내어 주저하지 말고 힘껏 외쳐 이스라엘의 허물을 알리고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야 한다. 이스라엘과 끝없이 다투거나 한없이 분을 품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을 고치시며,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예언자의 이런 사역을 통해 실현된다. 죄악을 알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낮아지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용기를 주시고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 그러나 오히려 예언자를 조롱하고 귀를 막는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은 종교적 위선이 넘쳐난다. 그들은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금식하는 날, 다투고 싸우며,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예언자는 이것이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할 때, 그 안식일 준수와 금식은 모두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종교적 위선일 뿐이다.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이 바로 이러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 무거운 압제와 온갖 폭력이 제거되며,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고통이 사라질 때,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어두운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나타날 것이며, 캄캄한 이 세상이 대낮같이 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해 이루시려는 궁극적 목적이다.
이사야 59장
이제 예언자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와 악을 지적하고 고발한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늘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갈라졌고,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주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그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그들은 손으로 죄악을 행하며 입으로 거짓말을 한다. 공의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진실하게 재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발은 나쁜 일을 하는데 빠르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신속하다. 그들의 생각은 죄악으로 가득차고 그들의 가는 길에는 황폐와 파멸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그들이 가는 길에 공평이 없고, 스스로 길을 굽게 만드니, 그 길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이 없다. 이스라엘에게 공평이 멀고 공의가 미치지 못하므로 빛을 바라지만 어둠뿐이며 밝음을 바라지만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예언자는 백성들을 책망하던 얼굴을 들어 하나님께 향하고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12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언자의 기도는 먼저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시작한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부정하고, 등을 돌리고, 포악한 말과 거짓말을 하였고, 그 결과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하는 세상,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음을 자백하였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처한 이 현실,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으며, 압박받는 사람을 돕는 자가 없으며,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놀라셨다. 이제 주님은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주님은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쓰시고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시고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셨다. 주님의 공의는 겸손한 자, 회개하는 자들에게 구원으로 나타나며, 교만하고 악한 자들에게는 보복으로 나타날 것이다. 주님은 시온에 속량자로 오시고, 야곱의 자손 가운데 회개한 자들에게 오신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과 주님의 영과 주님의 말씀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들에게 떠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이사야 60장
주님의 구원의 빛이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떠올랐으니, 이제 예루살렘은 일어나서 (이방을 향해) 빛을 비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은 이방의 빛이 되게 하려하심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실현이다. 이스라엘이 어둠속에 있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 때, 이방은 그 빛을 보고 빛으로 나아오게 된다.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이스라엘의 광명을 보고 올 것이다. 그들이 모두 모여 마치 이스라엘이 낳은 아들과 딸처럼 예루살렘을 찾아 올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기쁨이 넘치며 흥분으로 가슴이 설렐 것이다. 이방의 모든 재물과 재신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들은 마치 구름 떼처럼 몰려오며 제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비둘기처럼 속히 날아올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려고 은과 금을 함께 싣고 올 것이며, 예루살렘의 성벽을 쌓으며 예루살렘을 섬길 것이다. 이제 누구든지 예루살렘의 빛을 보고 찾아오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성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서 밤낮으로 닫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빛을 보고도 섬기지 않는 민족과 나라는 망하고 황폐할 것이다. 전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 자손이 몸을 굽히고 나아오며 모두 예루살렘에게 굴복하여 주님의 도성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은 주님이 그들의 구원자이며, 속량자요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이 이방에 빛을 비춤으로 이방이 그 빛을 보고 몰려들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그 때,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편만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은 평화를 감독자로, 의를 지배자로 세우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 다시는 폭행 소문이 들려오지 않을 것이며, 황폐와 파괴의 소문도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해도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며, 달도 더 이상 밤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젠 오직 주님께서 그 나라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영원한 빛이 되시므로 곡하는 날도 끝나고 다시는 해도 지지 않고 달로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빛을 보고 찾아온 모든 백성이 그 나라의 시민권을 얻고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이들은 주님이 심으신 나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만든 주님의 작품이다. 때가 되면 주님은 이 일을 지체 없이 이루실 것이다.
이사야 62장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시온의 의가 빛처럼,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것이다. 그 약속이 이뤄지기 까지 주님은 잠잠하지 않으시고 쉬지 않으시며 시온을 격려하실 것이다. 마침내 이방 나라들이 시온에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며 뭇 왕이 예루살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시온을 주님이 지어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며, 시온은 주님의 손에 들려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다. 다시는 시온이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여인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예루살렘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시온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주님이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이는 주님이 그 약속을 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시온이 그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시온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님이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오른손 곧 능력의 팔을 들어 맹세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온은 이제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나아가서 뭇 민족이 보도록 깃발을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 깃발을 보고 뭇 나라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큰 길을 만들고 거치는 돌을 없애야 한다. 이날은 주님이 땅 끝까지 선포하신대로 주님께서 자기가 구원한 백성들을 데리고 오시며 그가 찾은 백성을 앞장세우고 오시는 날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주님이 속량하신 백성이라 부를 것이다.
이사야 63장
이렇게 주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대적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여호와의 종이 선포한 보복의 날이다. 여호와의 종은 주님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동시에 선포했다. 이 두 날은 다른 날이 아니라 같은 날이다. 주님의 백성에게는 은혜의 날이고 구원의 날이며 주님의 대적들에게는 보복의 날이다. 그날 주님은 포도주 틀을 밟듯이 민족들을 짓밟으시고 두려운 징벌을 행하신다.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진 이스라엘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예언자는 다시 이스라엘의 현실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7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비전과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책망해 왔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풍성한 자비였다. 예언자는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주실 뿐 아니라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 주님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반역하고 그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할 때 주님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그들과 싸우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과 긍휼로 구원해주신 일이나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그들과 싸우신 일은 모두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상반되어 보이는 그 두 행동의 뿌리는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다. 예언자는 모세의 날을 추억하며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묻는다.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의 고토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비루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예언자는 주님이 하늘에서 이런 이스라엘을 굽어 살피시고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주님의 열성과 권능이 사라지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친 것 같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는 주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호소하며 주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고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속량자시라고 말한다. 예언자는 그러므로 주님의 길에서 떠나고 마음이 굳어지고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고치시고 주님의 종들, 주님의 유산인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라고 간구한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고토로 돌아왔지만 주님의 원수들이 짓밟은 성소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마치 오래전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와 같이 된 현실을 한탄한다.
이사야 64장
예언자의 기도가 계속된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옛적에 시내산에 강림하시듯이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길 기대한다. 그래서 주님의 대적들이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하시길 기도한다, 예언자는 주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오시는 분이시며 주님의 정의를 실천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한다. 주님이 진노하신 것은 오직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기에 주님이 얼굴을 숨기시고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이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긍휼을 간구하면서 다시금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의 의로우심에 호소한다. 예언자는 주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며, 이스라엘을 빚으신 토기장이이심을 고백하며 주님의 진노를 거두어 주시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주님의 영광스럽던 성전이 불에 타고 아직도 복구되지 못한 비참한 상황을 슬퍼하며 하나님께서 이제 가만히 계시고 잠잠하시며 이스라엘을 고통 가운데 버려두지 마시기를 기도한다.
이사야 65장
예언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시는 분이시며 누구든지 주님을 찾는 자를 만나려고 준비를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주님을 찾지도 않았다. 주님은 심지어 자기 백성이 아닌 이방나라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제멋대로 악한 길로 가며 반역했지만 주님은 돌이키는 그들을 맞이하려고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김으로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면서도 스스로 거룩한 백성인 척 위선적으로 행동한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참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분노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다 멸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로 옛적부터 작정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영원히 지키시는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야곱으로부터 자손이 나오게 하시며 유다로부터 시온 산을 유업으로 얻을 자들이 나오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에 빛을 비추게 하심으로 이방이 그 빛을 보고 시온으로 주님께로 나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고 주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칼에 죽는 신세가 될 것이다. 언약백성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떠나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주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러나 주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책망의 말을 듣고 돌이키는 자는(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주님의 종이 된다. 주님의 종들을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기뻐하겠지만 악한 자들은 굶주리고 목마르며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종들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이것은 재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새로워진 상태를 의미하며 결국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에 편만하게 실현된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 가득하고 슬픔과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 세상에서는 죽임이 삼킨바 되고 약탈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기가 수고한 대로 누리며 헛된 수고가 없고 재난을 당하는 일도 없다. 그 나라는 백성들이 부르기도 전에 주님이 응답하시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님이 들어주시는 그런 세상, 즉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가 놀랍도록 친밀하게 회복된 세상이다. 주님이 만드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는 갈등과 전쟁과 약탈이 없는 영원한 평화를 누릴 것이다.
이사야 66장
주님의 응답이 계속된다. 지금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성전은 불에 타고 재건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주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대로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어떻게 나의 집을 짓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전의 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겸손하여 회개하며, 주님을 경외하고 복종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하는 일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제사장들을 주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제 뜻대로 하며 주님이 보시기에 오히려 우상숭배를 즐기는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 주님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찾으신다. 이들은 대적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조롱을 당하지만 주님은 그 대적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시온은 진통이 오기도 전에 해산할 것이며 해산의 고통이 오기도 전에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은 시온의 남은 자들을 통해 이방이 시온으로 돌아오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때 주님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시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위로를 받으며 마음이 기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들에게 진노하시며 불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편만하게 온 세상에 실현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삼판을 통해 모든 악을 제거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다른 모든 민족을 모을 것이며 그들이 와서 주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주님은 살아남은 자들(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이방에 보내어 주님의 명성을 말하고 그 영광을 알리게 하심으로 이 일을 하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성전에 예물을 바치듯이 모든 민족들이 주님에게 바치는 선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오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으로 삼을 자를 택하여 세우실 것이며 주님이 지으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자손 대대로 살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매달 초하루와 인식일마다 주님을 섬기듯이 그들도 그렇게 주님에게 경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들을 삼키는 불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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