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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언약의 보편성

언약의 보편성

2019-06-09 17:48:38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창조기사는 성경 이야기의 가장 근본적 출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이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기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이야기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에 대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묘사로 시작하지 않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선언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은 세계를 지으신 분이시라고 대답한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 분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와 창조하신 분이라는 관계를 가지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구성원이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들이니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인간은 서로가 지극히 밀접한 관계, 아니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운명적인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이 관계가 없다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가 형성될 수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맨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맨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첫째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기 위함일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독특한 존재로 지어졌는데,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이 의미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오랜 이론과 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이 진술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특별한 관계를 성경적 언어로 말하면 바로 언약적 관계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별한 관계다.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가 일방적이고 비인격적 관계라면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언약관계는 쌍방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다. 이 언약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가 이어지는 선악과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시면서 사람에게 특별한 과업을 주셨다. 그것은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이 일은 전통적으로 문화명령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어 왔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사람을 지으시되 특별히 자기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이어지는 선약과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이 언약적 관계의 쌍방성과 인격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나무는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약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고 금하셨다. 인간에게는 모든 자유가 주어졌지만 한가지 자유는 금지된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만물을 다스리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데 있어 인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그 과업을 수행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수행하는 일에 실패했으며, 나아가 자기의 존재 이유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로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언약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언약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언약관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그가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인정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하나님과 언약관계 속에 있으며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적 과업을 수행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보편적인 언약관계가 존재하며 문화적 과업의 책임 또한 그러하다. 문제는 그 언약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이뤄지는 인간의 문화적 활동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책임을 가진 인간이 창조목적을 떠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목적,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 언약관계가 회복되는데 있다. 이 언약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던 인간이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편적 언약관계 및 그 언약관계가 훼손된 상태라는 현실을 전제할 때, 구원이란 바로 그 언약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 언약관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설명될 수 없다. 

 

  구약성경을 형성하는 이스라엘의 장구한 이야기도 바로 이 보편적 언약관계를 전제해야만 그 의미가 통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은 단순한 선민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의 도구로 선택된 민족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당시 고대 근동에 널러 알려진 종주권 조약의 형식을 빌려 이뤄졌다.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보편적인 언약을 전제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창조시부터 존재하는 보편적인 언약이 이스라엘 이야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이야기로 표현된 것이다. 보편언약이 없다면 이스라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약 개념은 성립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때가 차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예수가 태어났고 하나님은 예수를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아로 보내셨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신 예수는 이스라엘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이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필요했던 이유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보편적 언약관계가 없다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가 온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를 온 세상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 왕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향해 행하신 언약적 행동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언약관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인간을 향해 언약적 행동을 행하신 것이다. 그 언약관계가 보편적이기에 그 행동 또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행동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향해 언약적 행동을 하셨으며 그것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신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이 행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훼손된 보편언약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향해 행하신 언약적 행동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언약행동에 대해 응답해야 할 언약적 책임이 있다. 그 응답이란 바로 예수를 믿는 일이고 그것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위해 세우신 메시아심을 믿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온 세상의 메시아로 세우셨기에 모든 인간은 그분을 메시아로 믿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약관계에 충실한 행동, 곧 의로운 행동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언약관계를 저버린 행동, 곧 불의한 행동이 되고 하나님은 그에 상당한 보응을 행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비유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작은 아들의 비유다. 예수께서 이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한 일이 있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기에 그 죄인들은 언약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는 오히려 그들을 맞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들도 언약에서 배제되지 않은 자들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어진 세가지 비유에서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주인과 잃어버린 것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런 관계가 없었다면 주인은 애써 그것을 찾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마지막 비유는 더욱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탕자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온 이유도,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반갑게 맞이하고 받아들인 이유도 모두 그 두사람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시고 그을 메시아로 세우시며 그를 믿도록 요구하신 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언약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해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훼손된 언약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잡기를 요구하신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내미신 화해의 손을 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에수가 메시아이심을 믿는 일이다. 만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보편적인 언약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잡아야 할 책임이 성립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책임은 언약적 책임이고 그 언약적 책임을 저버릴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하여 언약적 분노를 보이시는 것이다.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책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이면서도 쌍방적인 보편적 언약관계를 전제해야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음으로 훼손된 언약관계는 회복된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바로 주되심을 믿는 것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첫 사람이 실패한 지점은 바로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지 않은 것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는 바로 첫 사람이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여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는 일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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