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목적, 하나님나라
2019-08-04 20:02:38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근본적 정체성은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이야기는 언약관계의 양당자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언약적 주고받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스라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가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라 대단히 쌍방적이고 능동적인 것임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를 떠나서 이스라엘 이야기인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유독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에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천하 만민이 그의 후손 곧 이스라엘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지만 그 선택이 다른 민족을 배제한 이스라엘만을 위한 선택일 수 없다. 오히려 그 선택은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의 도구로 선택된 민족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도구가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것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여호와의 도, 곧 정의와 공의를 행함을 통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함으로써 온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고 온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신 목적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도, 곧 정의와 공의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일종의 언약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야만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온 세상이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렇게 될 때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이 넘치고 하나님의 통치가 편만하게 구현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목적은 바로 온 세상이 편만하게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안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하나님나라가 구현될 때, 다른 민족들도 그것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며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려던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를 남겨두셨다. 이것이 비로 이사야서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남은 자들이다.
이사야서는 구약성경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반드시 이루실 것인지를 웅장하고 환상적으로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경륜의 도구임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율법을 떠난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징벌하시는 이유도 바로 그들을 통해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징벌하실지언정 이스라엘을 다 멸하시거나 포기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일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언약의 목적은 온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온 세상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온 민족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하고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외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하며 부름을 받은 민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고 율법을 어김으로 이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는 실패한 이스라엘 이야기를 이어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이야기다.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 왕을 세우셨다. 그가 바로 예수다.
그러므로 예수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는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왕으로 세워진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지만 이스라엘만의 왕은 아니다.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듯이 하나님이 예수를 왕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예수가 온 세상의 왕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을 내리시겠다는 당초의 목적을 이제 예수를 통해 이루실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이 세우신 온 세상의 왕이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가 온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이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왜 이것이 기쁜 소식인가? 그것은 당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이 복을 주시려는 약속이 바로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소식은 이제 예수를 통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를 통해 실현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온 세상의 왕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온 세상의 왕이 온 세상을 위해 죽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은 왕이신 예수가 스스로 죽은 죽음이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적 죽음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을 멸하시며 거기서 그들을 건져내시려고 했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분이 바로 예수다. 이스라엘 이야기인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다면 이제 예수 이야기인 신약에서 언약백성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의 민족들로 확장되었다. 예수 이야기는 온 민족 온 인류가 창조로부터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수가 온 세상의 왕으로 오셨으며 예수가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 온 세상 민족들 간에 이미 언약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그러니 예수가 왕으로 오신 일, 그가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신 일은 바로 하나님 편에서 온 세상을 향하여 행하신 언약적 행동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는 하나님과 온 세상 민족이 언약관계에 있음을 전제해야한 의미가 통한다.
예수는 온 세상의 왕으로 오셨고 왕으로서 자기 백성인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가 부활한 사실은 그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고 승리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다. 그래서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온 세상의 왕으로 명실상부하게 선포되었다. 그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이제 그가 왕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온 세상을 현재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는 미래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다시 오실 때 그가 비로소 왕 노릇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현재적으로 온 세상의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시다. 미래에 그가 다시 오시는 것은 그때 비로소 왕 노릇을 하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그 다스림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왕으로 오신 예수는 죽음으로써 자기 사명을 감당하고 부활하여 왕으로서 공적으로 선포되셨으며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현재적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왕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분의 현재적 통치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란 예수가 왕이시라는 소식이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왕이신 예수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예수는 왕으로 오셨고 온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행하신 언약적 행동에 대하여 신실하게 반응하라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일이라며 그렇지 않은 것이 바로 죄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이 그 언약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편만하게 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듯이 하나님이 예수를 왕으로 세우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나라가 편만하게 임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이야기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며, 신약은 구약의 성취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언약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것은 온 세상이 복을 받는 일이요, 온 세상에 하나님나라가 편만하게 임하는 일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셨으며,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리고 예수를 온 세상의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온 세상의 왕이시며 현재적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면, 왜 이 세상은 이 모양이고 우리는 그분의 현재적 통치를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왜 세상에는 아직도 죄악이 가득하고 고통과 슬픔으로 넘치는 것일까? 왜 세상에는 끊임없는 분쟁과 살육이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왕이신 예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력과 압제로 왕 노릇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는 절대 강제력과 압제로 다스리지 않는다. 이 세상 백성들은 왕이 두려워 마지못해 복종하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백성들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복종한다. 결국 왕이신 예수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는 그 나라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기쁨의 순종을 통해서 이 땅에 구현된다. 다시 말하면 그 백성들이 그렇게 왕에게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는 이 땅과 역사 가운데 구현되지 못한다. 왕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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