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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7-06-11 23:36:22


1. 과학과 신학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

 

  기독교가 고백하는 신은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대한 바르고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과학과 신학이 대화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특히 자연세계에 대한 인과적 서술을 목표로 하는 자연과학과의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에서 발견된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성경을 더욱 풍부하고 균형 있게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과학은 무엇보다도 창조세계의 광대함과 창조의 역동성을 알려준다. 그리고 창조는 대단히 신비롭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과학적 발견의 여러 증거들은 창조가 대단히 오래되었고 동시에 그 창조는 어느 시점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창조임을 알려준다. 과학은 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창조의 역사와 창조주의 지혜를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이며 성경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성경과 자연은 서로 충돌하지 않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인 신학과 자연에 대한 해석인 과학은 서로 충돌할 여지가 언제든지 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학과 과학이 서로 열린 자세로 지속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가 과학의 시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근대 이후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제 과학과 과학기술들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기독교 신학 또한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과학의 이런 영향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이다. 과학시대에 과학이 신앙과 신학에 미치는 영향은 일종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도전에 기독교가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이다. 역사의 과정을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한다면 과학의 도전에 기독교가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기독교는 성장하고 발전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정체하거나 후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잘못된 응전의 하나로 창조과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창조과학의 기본적 스탠스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을 과학적 진리의 판별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주류과학의 발견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기독교를 종교라는 영역에 제한시키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대한 바르고 균형 잡힌 이해를 방해한다. 또 다른 잘못된 응전으로는 과학의 무신론적 세계관을 수용함으로써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를 포기하는 경우일 것이다. 문제는 도전이 아니라 응전이다. 도전에 대한 응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성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후퇴할 수도 있다. 결국 과신대의 목표는 과학의 도전에 대한 바른 응전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키며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자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2.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신학적으로도 보편적인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더불어 자연세계나 일반학문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범주로 볼 수 있으며 이 일반계시는 성경의 특별계시와 충돌하기 보다는 조화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 두 계시가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일 수 있고 실제로 충돌할 수도 있는데 그 경우 우리가 다시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는 지점은 두 계시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계시는 완전하지만 계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항상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에 대한 우리 해석의 한계를 인식하고 두 해석이 충돌할 경우에는 기존 해석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성경 해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한다. 창조과학이 보여주듯이 성경에 대한 경직된 문자적 해석은 과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의 창세기 해석에 대한 구약 학자들의 논의에서 보듯이 창세기 본문에 대한 해석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특히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고려한 성경해석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전통적 성경해석에 대한 비판적이고 발전적인 성찰이 가능함을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진술이 신학적 진술이지 과학적 진술이 아님을 인정하는 인식의 변화다. 성경 본문이 말하려는 신학적 메시지를 찾는 것이 성경해석의 본질이지 거기서 과학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이 창조주가 누구이시며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서술이라면 과학은 창조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과학은 자연을 읽어내는(해석하는) 과정이다. 과학은 이론과 실험 및 관측을 토대로 가설을 세우고 가설이 맞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만일 가설에 대한 반증이 나타나면 이론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설은 경험적 데이터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미래의 예측 가능성도 확보해야 한다. 그렇기에 과학이론에서 경험적 증거의 엄밀성과 더불어 과학자 사이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과 데이터가 나오면 이론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은 비판적 실재론을 취하게 된다. 과학은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 이해는 자연세계에 국한된다. 따라서 과학은 중립적이지 무신론이나 유신론의 증거가 아니다.

 

  셋째로 과학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유용한 해석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과 과학을 사용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인 과학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세계관에 따라서 과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무신론적 해석은 자연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을 무신론의 증거로 주장하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던 그것은 무신론이나 유신론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을 둔 무신론적 세계관일 뿐이다. 과학과 세계관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념체계이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기작에 대한 설명일 뿐 세계관의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을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하여 신의 창조를 기적의 영역으로 제한한다.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과학의 영역에서는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고 세계관은 과학에 대한 해석이다. 과학과 세계관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수용해야 하지만 세계관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3. 한국 교회의 현실과 대책

 

  한국 교회의 문제는 과학의 도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본다. 특히 목회일 선에서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목회자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결여하고 있기에 일반 신자들도 그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목회자들이 창조과학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고 이들의 주장을 일반 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과학의 도전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고 따라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창조과학의 일방적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로 보인다. 이것은 결국 앞서 언급한대로 과학의 도전에 대한 잘못된 응전이며 그 결과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후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과학의 도전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고 있으며 창조과학의 한계에 실망하고 그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갈증은 교회 안에서 채워질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마르지 않는 자는 물을 찾지 않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먼저 기독교 신자들에게 과학이 신학과 신앙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일을 교회 안에서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과신대 운동의 필연성이 대두된다. 지금 과신대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활동의 장들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문제를 아직 인식하지 못한 신자들을 깨우는 한 편, 문제를 이미 인식했지만 그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신자들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출판, 강연, 포럼, 콜로키움, 수련회, 북클럽,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활동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과신대 운동은 과학 시대에 일종의 기독교 계몽운동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