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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의 안식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의 안식

2017-05-27 22:34:10


 창세기의 안식

 

  성경에서 '안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3절이다. 2절에 하나님이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절에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하나님의 안식을 하나님이 이제 일을 마치셨으므로 휴식을 취하신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 근동 문헌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은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심을 시작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존 월튼은 자신의 우주성소론에서 고대 근동문헌에 성전이 지어지면 신들이 그 성전에 들어가서 안식한다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때 신의 안식은 휴식이나 쉼이 아니라 신이 성전의 주인 노릇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월튼은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일종의 우주 성전을 암시하며 창조하는 일을 마친 것은 우주성전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를 마친 후에 안식하셨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우주성전의 주인으로서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이 다스릴 대상을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의 안식은 이제 만드신 창조세계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 곧 하나님나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기의 안식

 

  안식일 계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이지만 그 이전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대목이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16장 만나 이야기이다. 그 요점은 제7일에는 만나가 없을 것이니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여섯째 날에는 갑절의 만나를 거둘 수 있도록 하였다.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는 유일한 생존의 수단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광야를 걷게 하시고 그곳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의 생존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것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의지할 것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인도하심 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면서 유독 제7일에 만나를 주시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쉼을 주시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의도라 보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책임지시는 분임을 이스라엘은 매주 돌아오는 제7일에는 만나를 거두지 않음으로써 새롭게 기억하였을 것이고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그 안식일 계명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 안하느냐 의 문제는 휴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안식일 계명이 공적으로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주어진 십계명에서이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지낸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했으므로 이스라엘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창세기에 처음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이스라엘이 진정한 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심상을 시편 기자는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는 것 같다고 노래했을 것이다.(시131편 2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어미의 젖을 배불리 먹고 만족한 아이가 어미 품에 편안하게 안겨 있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 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다스리는 분이심을 믿고 순종하는데서 나온다 할 것이다.

 

신명기의 안식

 

  신명기 5장에는 모세가 출애굽2세대에게 십계명을 다시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안식일 계명의 조건절은 출애굽기의 그것과 달라진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안식이 이스라엘이 안식해야 할 이유로 제시된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이 이스라엘이 안식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되었다. 이렇게 안식일 계명의 조건절이 바뀐 이유는 물론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절의 내용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통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이 구체적인 역사 가운에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이스라엘도 안식일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고 이스라엘 역사 대대로 출애굽은 기념되었다. 그것은 압제로 부터의 자유와 해방이었고 그 자유와 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 절기를 통해 출애굽을 기념하면서 단순히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을 기념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 곧 이스라엘을 은혜와 진리로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기념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안식

 

  마태복음 11장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는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특히 이 구절은 예배의 시작에 읊조려지면서 예배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 구절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을 듣는 대상들은 예수님 권능을 많이 행하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권고의 말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며 그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도래함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은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심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됨을 알리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 표적을 보고 회개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회개는 단지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됨을 깨닫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회개였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안식일 계명에 나타난 정신과 동일한 것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한마디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요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어 자신을 책임지느라 고단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에게로 와야만 한다. 예수에게로 오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다, 이어지는 구절은 예수에게로 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에게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 예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지워주는 멍에는 무겁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것이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그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을 준다. 

 

요한복음의 안식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38년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맹인의 눈을 뜨게 한 표적이 등장하는데 이 두 표적이 일어난 날은 안식일이었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이 표적을 행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한다는 이유로 핍박하고 죽이려는 음모를 하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예수가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이 두 표적을 행했다는 것이고 그런 일이 유대인들의 극심한 저항을 불러 일으킬 것을 알고도 그리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그런 일을 행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맹인의 눈을 뜨게하는 일 자체가 중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표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안식일이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예수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였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될 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는다는 진리가 계시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반드시 안식일에 일어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안식일에 일어난 그 표적은 곧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를 통해 임한다는 사실, 곧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임을 보여준다. 

 

히브리서의 안식

 

  히브리서 3-4장은 안식의 문제를 중요하게 가르치는데 거기서 저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이 창조의 7일에 안식하신 일을 다시 언급하면서 오늘날 복음을 들은 자들이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면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의 강조점은 안식에 들어가려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고 이것은 곧 그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났음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결국 메시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다스림을 깨닫고 순종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야만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 원리는 동일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곧 그의 다스리심을 깨닫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서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하나님의 안식은 반드시 인간의 안식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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