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표적들(Signs)
2017-06-25 00:17:37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라고 불릴만큼 표적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표적들을 이해하는 것은 요한복음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표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진술들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표적들은 어둠에 비치는 빛과 같다. 그러나 어둠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한다. 표적 이야기들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악을 행하는 자들이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는 요한복음이 서론에 나오는 신학적 진술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표적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인데 요한복음 저자는 이 일을 첫 표적이라고 특별하게 명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첫 표적이라고 하면서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가 자신의 영광을 나타냈다고 말하는 점이다. 예수의 영광에 대해서는 이미 저자는 1장14절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진술에서 예수의 영광 곧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영광 혹은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진술을 첫 표적과 연관시켜 보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난 표적이 된다.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난 표적이란 말인가? 혼인 잔치가 한창이던 때에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대단히 절박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 일은 혼인잔치 전체를 망쳐버릴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랑은 이 상황에서 속수무책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바로 이런 상황은 바벨론 포로 이후 속수무책으로 이방의 압제에 놓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물을 좋은 포도주로 만들어 깨어져 버릴 위기에 처한 혼인 잔치를 회복시킨 일은 이방의 압제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전격적으로 회복하는 하나님의 행동을 암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첫 번째 표적이 보여준 것은 망가진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이며 동시에 이 표적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가져올 하나님나라의 왕 곧 메시아이심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표적이 예수의 영광 곧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나타난 일이 되는가? 그것은 그 표적이 보여주는 바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이 곧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의 언약적 배반으로 이스라엘을 버리고 떠나심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이후 지금까지 이방의 압제하에 눌려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고 계신 것이다. 이 첫 표적은 이렇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요한복음 저자는 이 표적을 행함으로 예수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영광은 이 첫 표적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등장할 모든 표적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다만 이 표적은 예수의 영광이 처음으로 나타난 표적이기에 저자는 첫 표적이라고 강조했을 것이다.
두번째 표적은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준 사건이다. 그의 아들은 병들었는데 나을 희망이 없이 거의 죽게된 처지였고 예수는 왕의 신하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그 병을 고쳐주었다. 모든 표적이 그렇듯이 이 표적도 이스라엘의 회복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보여준다. 왕의 신하의 아들은 비록 그가 고관의 아들이지만 병에 걸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의 이런 절망적 처지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절망적 상황을 상징하며 예수가 그의 병을 고쳐 살린 것은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도 요한복음 저자는 이 표적을 두번째 표적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나타나는 표적에 대해서는 저자는 표적의 순서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자가 유독 첫 표적과 두번째 표적에 대해서 그 순서를 언급한데는 나름의 의도가 있어 보인다. 첫 표적과 두번째 표적 사이에는 두 가지 서로 대조적인 에피소드가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니고데모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다. 앞의 이야기는 표적을 보았지만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니고데모 이야기이고 뒷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안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표적을 보지 않았는데도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메시아이심을 믿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첫 표적과 두번째 표적 사이에 이 두가지 대조적인 이야기가 놓은 것은 유대인의 선생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했지만 유대인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은 표적을 보지 않고도 예수를 믿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의 다음 진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장 12-13절) 니고데모 이야기는 예수가 행하신 표적이 하나님나라를 나타내는 표적임을 암시한다.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안다고 말했을 때 예수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은 분명히 예수가 행한 표적이 하나님나라의 표적임을 의미한다.
세번째 표적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이다. 38년된 병자란 표현은 그의 병이 치료 불가능한 병, 아무 희망이 없는 병임을 의미할 것이다. 이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면(실제는 들어갈 수도 없지만) 병이 낫게 된다는 허망한 풍설을 믿고 있었다. 이 병자의 처지 역시 아무 희망이 없고 누구도 도울 자가 없는 이스라엘의 처량한 처지를 상징한다. 예수가 즉각 이 병자를 고친 일은 예수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세번째 표적을 행한 날은 안식일이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하여 박해하기 시작한다. 물론 예수는 우연히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병을 고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이다.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심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 믿는 분이 안식일에 일하신다는 놀라운 진술을 하셨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예수는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한다고 하시며 그래서 자신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을 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을 주신 분의 뜻이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병자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절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자유를 주는 일이 바로 안식일에 행할 일이고 그것이 안식일 계명의 정신이라고 말한 셈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 휴식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여 자유와 해방을 주심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안식일을 골라서 병자를 고치는 일을 행하신 것은 진정한 안식이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회복시키는 일이임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표적이 아닐 수 없다.
네번째 표적은 소위 오병이어 표적이다. 이 표적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갈릴리 바다 건너편의 어느 광야에서 일어났다.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는데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고 말한다. 광야에 모인 큰 무리 그러나 그들이 먹을 양식은 전혀 없는 막막한 상황이다. 이 표적이 나타난 상황 역시 도울 자가 없는 이스라엘의 막막한 처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이 표적을 통해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을 주는 떡이심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는 이 표적을 통해 자신으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가 죽은 자와 방불한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는 나라이며 자신은 바로 그 나라의 메시아로서 생명을 주는 떡임을 보여주었다.
다섯번째 표적은 날 때 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이다. 제자들이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렇다면 그 맹인에게서 나타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 곧 메시아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일 것이다. 나면서 부터 맹인된 자 역시 앞날이 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이스라엘의 상황을 상징할 것이며 맹인의 치유는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회복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이 표적은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맹인이었던 자는 이제 보게되고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되었음이 이 표적을 통해 증명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맹인 치유 표적 역시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일어난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마지막 표적인 여섯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이다. 첫 표적에서 예수의 영광이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표적은 하나님의 영광 곧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은혜와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인 것이다. 물론 죽은 나사로 역시 죽은 자와 같은 이스라엘의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를 상징하며 그를 다시 살린 것 역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행동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지만 오히려 이 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를 죽일 것을 결의하게 된다. 이제 예수에게 남은 일은 십자가에 죽으실 일뿐이었다. 이제 그 죽음은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그 죽음은 불가피하게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예수가 스스로 자초하여 죽는 죽음이었다.
이제 모든 표적은 끝나고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는 자신이 죽으실 것을 준비하신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에게 부은 일은 예수의 장례를 위한 준비로 간주된다. 드디어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큰무리가 예수를 환영한다. 이 장면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들어가시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 곧 왕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죽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죽음이었고 메시아로서의 죽음이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로마인들은 합세하여 예수룰 죽였는데 그것은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예수가 행하신 모든 표적들이 이제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는 죽으신 것이다. 그 표적들이 일치하여 보여준 것은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표적들이 일치하여 보여준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요한복음은 이 질문에 대해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대답한다. 예수는 자신이 행하신 표적들이 보여준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듯이 메시아 예수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는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죽었다. 그의 죽음은 언약 배반에 대한 책임을 진 언약적 죽음이었다.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것이 언약적 진리이며 언약적 공의다. 예수는 바로 이 언약적 진리를 따라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동시에 이스라엘을 대표한 죽음이었기에 그는 동시에 언약적 은혜를 따라 죽은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죽음에는 그의 성육신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드러났다. 이제 이스라엘은 예수와 함께 죽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이스라엘은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예수의 죽음이 그러하듯이 그의 부활에도 하나님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왕적 통치 행위의 절정이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죽은 왕이었고 자기 백성을 위해 다시 살아난 왕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고 하나님나라의 본질적 성격이다.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이 나타낸 하나님나라는 이렇게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과 역사 가운데 도래하였다.
표적 중의 표적(The Climax of Signs)
2017-07-19 20:40:14
잘 알려진 대로 요한복음은 표적들의 책으로 유명하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여섯 개의 표적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표적이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이라면 마지막 여섯 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다. 이 마지막 표적 이후로 더 이상 표적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인 대중들을 향한 예수의 가르침도 나타나지 않는다. 12장에서 예루살렘 입성 후에 예수는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집중한다. 그래서 13장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긴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베푼다. 이 대목은 마치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장면과도 같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지나고 나면 18장부터 다시 이야기는 급속하게 진행되어 예수는 잡히고 십자가에 달리고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는데 제자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마의 이야기에서도 보듯이 부활한 예수를 보고도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있었다.
도마 이야기 직후에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자기가 그중에서 몇 가지를 선별해서 기록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11장에서 나사로가 살아난 표적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데 요한복음의 저자가 자신이 표적을 기록한 이유를 언급하면서 표적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비록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자신이 기록한 표적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만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요한복음의 표적들 가운데 들어간다면 그 표적은 일곱 번째 표적이 될 것이며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표적들보다 더 탁월한 표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지금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표적중의 표적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이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을 기록한 이유는 복음서를 읽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요한복음의 표적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표적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낸다 말인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는 곧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시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왕이심을 드러내는 표적들이라는 말이 된다. 이제 우리는 첫 표적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들을 간단히 일별함으로써 그 표적들이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나라 왕이심을 드러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포도주 사건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는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예수의 이적행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수가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를 단번에 해결한 것임을 상징한다.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를 단번에 말씀만으로 살린 사건이다. 거의 죽게 된 왕의 신하의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방의 압제 아래 살며 죽은 자와 같이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아들이 단번에 살아난 것은 예수가 거의 죽을 처지에 처한 이스라엘을 단번에 회복시키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상징한다. 세 번째 표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쳐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한 사건인데, 이 사건 역시 38년 된 병자, 곧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병자는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말씀만으로 이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한 예수의 능력은 절망적인 이스라엘을 전격적으로 회복시키시는 이스라엘의 왕의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네 번째 표적은 갈릴리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따르는 큰 무리를 먹이신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구약에서 출애굽이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역사를 회고하게 한다. 하나님이 큰 능력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원하여 내신 일이나,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신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큰 무리를 먹인 오병이어 사건 역시 예수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낸 표적이다. 그래서 오병이어 이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다섯 번째 표적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맹인과 같은 이스라엘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자이심을 보여준다. 여섯 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인데, 병들어 죽은 나사로 역시 하나님을 떠나 죽은 자와 같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실정을 상징할 것이며,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 역시 죽은 것과 같은 이스라엘을 전격적으로 회복시키시는 이스라엘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여섯 번째 표적인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은 마지막 표적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하는 듯이 닮아있는 표적이란 점이 흥미롭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모두 예수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이스라엘의 왕 곧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마지막 표적이며 일곱 번째 표적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며 또한 표적중의 표적, 즉 표적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것인가? 이미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는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죽음이며 또한 그 죽음은 자기 백성을 위해 죽는 죽음임을 여러 번 말했다. 지금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계속적으로 이방의 지배를 받았고 지금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언약을 배반한 연고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보내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심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가 말하는 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이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이유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다시 돌아오시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은 죽음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법적이고 공적으로 대표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왕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곧 이스라엘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제 예수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은 언약배반의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모든 죄는 사해졌고 이스라엘에게는 언약배반이라는 무거운 짐이 벗겨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의 오랜 압제에서 해방된 것과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르는 것이듯이 이스라엘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시 살아나야만 했다. 그렇기에 예수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신 예수의 부활은 곧 이스라엘의 부활을 의미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은 죽었고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적으로 드러낸 표적들 중의 표적, 곧 표적의 클라이맥스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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