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나라
2017-05-11 00:10:32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가 아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그런게 아니다. 예수께서 "때가 찻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을 때,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포이지 온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언약백성을 향한 말이었다. 그러니 하나님나라란 언약 백성을 전제로 한 것이지 언약과 무관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가 아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선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요구였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선언은 서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예수가 이 선포를 할 당시인 1세기 유대인들은 모두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자신들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왕의 귀환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현재 로마 식민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나라를 잃고 이방에 짓눌려 사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시고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사 이방인의 압제하에 두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이방인의 압제 가운데 두셨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도래 곧 하나님의 돌아오심에 대한 소식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제2의 출애굽을 의미했다. 이제 로마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나라의 맥락이다. 이 맥락을 떠나서 하나님나라를 단순하게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언약적 의미이다.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선지자로 생각했지만 사실 이 선포는 예수 자신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선포를 통해 예수는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곧 메시아의 도래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지만 그 왕권은 인간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반드시 인간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인간을 통해 성취된다. 결국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대상인 언약백성을 전제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통치가 언약백성에 제한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언약백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백성을 요구한다. 만일 언약백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통치는 실현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백성을 창조해내신다.
메시아이신 예수가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언약백성을 창조하신 일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언약을 배반하여 언약백성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약백성이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맺어진 새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구약의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던 옛 언약은 폐기되고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언약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예수로 말미암아 열린 것이다. 사실 구약 이스라엘의 옛언약은 새언약의 그림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옛언약이 새언약으로 대치되었다기 보다는 옛언약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 새 언약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의 빛이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닝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온 세상과 맺은 언약을 대표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담이 그랬듯이 온 세상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선 백성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온 세상의 실패요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은 온 세상의 언약배반이다.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실패가 온 세상에 미치듯이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온 세상의 실패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통해 천하민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고 그들의 언약배반의 죄악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 죄악의 해결 이것이 바로 새언약의 요체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이 해결될 때 새언약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메시아가 오신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오셨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으로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 사명를 위해 예수가 하신 일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셨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은 회복되었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하나님나라 백성의 탄생을 가져오는가? 예수가 메시아 곧 그 나라의 왕이란 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법적이고 공적인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죽음이 된다. 원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대단히 법적이고 공적인 관계였다. 그 언약에 의하면 누구든지 언약을 배반하는 자는 그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언약배반의 책임은 죽음이며 죽음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목숨을 건 심각한 언약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언약의 일방인 하나님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는 불로 상징되는 피의 언약에 참여하셨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도 할례로 상징되는 피의 언약에 참여한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인 시내산 언약에서도 언약 쌍방이 목숨을 걸고 언약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짐승의 피를 양푼에 담아서 반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에 뿌리고 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린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언약에 따라서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래야먄 언약이 회복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떠나셨는데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려면 언약이 회복되어야 하고 그러러면 이스라엘이 죽임을 당해 언약배반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는 죽으신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의 책임을 지고 죽으신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그 책임을 지고 죽으신 것이므로 예수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죽음과 동일하게 간주된다. 예수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은 법적이고 공적인 죽음, 곧 언약적 죽음이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했지만 언약배반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보내어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의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사함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성경은 새언약을 위해 흘린 피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으로 이제 옛언약은 새 언약을 대치, 아니 옛언약의 실체인 새언약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언약은 이제 민족적 이스라엘에 국한될 수 없고 온 세상 천하민만에게 열리게 되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는 자는 새언약 안으로 들어와 새언약의 백성이 되고 참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이 되는 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예수가 왕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 그가 바로 새언약백성이고 예수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탄생한 자들이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을 창조했다. 하나님나라는 그 나라의 백성을 창조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통치의 대상인 언약백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나라가 요구하는 그 나라의 백성은 단순한 그 나라 백성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종하는 백성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나라 백성의 순종을 통해 현실화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강제적이고 압제적이 아니며 폭력적이 아니다. 이 세상의 통치는 모두 지배하고 압제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나라의 통치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통치는 이 세상 나라들이 이해할 수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기이하고 신비한 통치다. 그 통치는 왕이 그 백성을 섬기고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그런 방식으로 이뤄지는 통치다. 그리고 그 나라의 통치는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통치다. 이 세상은 강제와 폭력으로 다스리고 백성들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과 복종을 요구받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의 죽음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므로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준 사건이다. 그러니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나라 왕의 죽음이었고 그 나라의 왕이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하나님나라 통치방식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어떤 것이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하여는 이스라엘을 대표했고 이스라엘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메시아였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자발적인 순종의 극치였으며 이스라엘을 향헤서는 하나님나라 통치의 극치였다.
예수는 이렇게 죽었고 그렇기에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의 죽음이 언약배반의 책임을 지고 죽은 죽음이었고 동시에 언약에 신실한 의로운 죽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부활은 그의 죽음이 언약에 신실한 의로운 죽임이었음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으며 그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증거였다. 그러니 예수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이 없었을 것이듯이 예수의 부활이 없는 예수의 죽음은 무의미하고 헛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죽었고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대표하는 죽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왕인 예수의 부활은 곧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부활이었고 새이스라엘 창조의 신호탄이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그의 언약백성을 전제하며 그 언약백성의 순종을 요구한..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실 필요도 죽으실 필요도 다시 살아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그 나라의 백성인 언약백성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혼자 이루시는 나라가 아니라 그 언약백성과 함께 이루시는 나라이며 특별히 그 언약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실현되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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