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이란 무엇인가?
2015-03-18 18:33:27
성경이 말하는 언약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인 언약신학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언약(covenant) 개념은 양측 사이의 조약인데, 그 내용은 각측이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한 쪽이라도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고 본다.. 다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경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라는 성격 때문에 인간의 동의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한다. 전통신학에서는 성경에 크게 세 가지의 언약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구속의 언약, 행위언약, 은혜언약이라고 한다. 두 가지로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 경우 아래 '구속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을 하나로 보는 시각이다. 구속의 언약 (covenant of redemption)이란 삼위일체 중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은 언약이라고 한다. 이 언약에서 성자는 인류의 죄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 받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을 대신해서 이행하는 의무를 지며 성부는 성자의 공로를, 특히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 의무를 진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구속의 언약은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속의 언약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 다음이 행위의 언약 (covenant of works)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라는 것이다. 이 언약에서 아담은 인류의 총대(總代)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의무를 지며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경우 영생(永生)을 그에게 허락하실 의무를 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창조될 당시 본래 갖고 있던 생명 보다 높은 질의 생명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담은 이 행위 언약을 파기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과 심판이 왔다. 그래서 은혜의 언약 (covenant of grace)이 등장하는데, 이 언약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곧바로 하나님이 모든 인류와 맺은 언약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담의 타락이후에 나타난 모든 언약은 구약의 언약을 포함하여 모두 은혜언약에 속하다는 것이다. 이 은혜 언약에서 사람의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이행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들의 것으로 여겨시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언약은 행위언약과 달리 파기될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은혜언약은 영원한 언약인 구속언약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이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언약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다. 그러니까 전통신학은 언약을 타락전 언약인 행위언약과 타락후 언약인 은혜언약으로 나눈다. 사람은 타락전에는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었는데 타락후에는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신학적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언약을 하나님편에서의 일방적 선포로 본다는 점 둘째는 언약을 영생 혹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보는 것이고 셋째는 언약을 행위와 은혜로 구분하는 관점이다. 이런 신학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과연 성경이 말하는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 선포로 성립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구약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본격적인 언약인 시내산 언약이다. 이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쌍방적인 관계가 성립되고 유지되는데는 이스라엘의 순종이 전제조건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것은 십계명이란 율법이었는데 이스라엘은 언약의 조건으로서 십계명에 순종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언약체결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지 재심 확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언약체결 예식에서는 쌍방이 언약의 피를 뿌리고 언약의 조건을 지킬 것을 맹세함으로 언약체결이 완료되는 것을 본다. 이렇게 성경에서 나타난 언약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이었지만 사람의 순종을 조건으로 한 대단히 쌍방적이며 인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타난 언약은 대단히 인격적인 차원에서 양언약의 당사가 참여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언약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전통신학에서는 구속사적 관점으로 언약을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다시 성경의 대표적 언약인 시내산 언약으로 돌아가 보자. 시내산 언약을 맺을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였다. 언약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언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목적은 바로 그들과 언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아 가나안 땅을 향해가는 도중인 광야에서 시내산 언약을 맺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언약의 조건으로 주어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삶을 살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언약은 구원을 얻는 수단이라기 보다는 구원받은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번째는 언약에 대한 구분이다. 전통신학은 언약을 크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언약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고 행위로 얻는 구원과 은혜로 얻는 구원을 염두에 둔 구분법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담이 타락전에 맺은 언약만 행위언약이고 타락이후에 맺은 언약은 구약의 언약도 은혜언약이라고 한다.그런데 이런 구분은 전통신학안에도 모순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전통신학에서는 복음이 등장하는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이전의 구약 시대에서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등장하는 언약은 은혜언약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행위언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신학에서 아담의 타락후 언약을 모두 은혜언약이라고 한 것은 인간은 타락후에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을 행위와 은혜라는 이원론적 구도로 나눌 수 있는 것일까? 구약의 대표적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예로 들면, 거기에는 언약의 조건으로 율법이 제시되어 있고 그것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시내산 언약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아브라함 언약에도 할례라는 구체적인 행위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새언약으로 대표되는 신약의 언약에서 요구되는 언약의 조건인 믿음도 행위로 입증되는 믿음어어야 했다. 그렇다면 언약을 행위와 은혜라는 구도로 나눈 것은 대단히 자의적이란 생각이 든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에는 은혜적 요소와 행위적 요소가 모두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맺는 언약에서 하나님편에서 베푸신 것이 은혜라면 그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사람의 행위이다. 언약에서 은혜와 행위는 대립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러니 언약을 행위와 은혜라는 구도로 구분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이렇게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언약신학이 가진 신학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간단히 고찰하여 보았다. 토대가 무너지면 건물도 무너지는 법이다. 신학적 전제가 비판받을만 하다면 그 전제위에 구축한 신학전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언약을 어떻게 새롭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위에서 비판한 신학적 전제들을 새롭게 세우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첫째,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비록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인격적인 차원에서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으로 맺어진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에게 내려오시며 언약 조건인 율법의 수납을 조건으로 맺은 시내산 언약은 말할 것도 없이 인격적이고 쌍방적이다. 그리고 전통신학에서 행위언약이라고 말하는 아담언약도 지극히 인격적이고 쌍방적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셨지만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속에서 자발적인 순종이 전제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대단히 인격적이고 쌍방적임을 보여준다.
둘째 언약의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전통신학에서는 언약을 구속의 수단으로 본다. 그래서 언약을 행위로 받느냐 혹은 은혜로 받는냐는 관점으로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 언약을 예로 들어보면 이런 구분법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아담은 죄가 없는 상태였는데 그에게 언약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질 이유가 없다. 물론 전통신학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이 약속되었다고 말하며 이것을 구원이라고 설명할지 모르지만 구원이란 모름지기 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아직 죄가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그리고 아담언약에서 하나님이 영생을 약속했다는 설명도 어색하다. 하나님이 불순종할 경우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아담이 이미 영생을 소유한 존재인데 불순종하면 그 영생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로 보아야지 순종을 조건으로 없던 영생을 새롭게 약속하신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담언약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신 목적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창조목적이고 세계창조의 이유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아담이 권세를 사용하는 조건으로서 순종이 요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선약과 금령은 그저 사람을 테스트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을 다스려야 할 사람에서 순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아담언약의 목적은 단순히 순종이란 행위를 조건으로 구원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따라 만물을 다스려야 할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 권세를 사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아담 언약의 목적인 것이다. 결국 아담언약은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언약이고 그래서 아담언약을 창조언약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담언약뿐 아니라 시내산 언약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인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가나안에서 살게하려는 목적으로 맺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지는 새언약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언약에는 구원이 전제되지만 구원 그 자체가 새언약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구원은 언약을 맺기 위한 예비적인 출발일 뿐이고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의 참 백성, 참 이스라엘로서 하나님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하는 것이다.
언약을 이렇게 새롭게 이해할 때 우리는 사람이 처음부터 언약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권리와 책임을 가진 언약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려여 하는 언약적 존재로 출발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특별히 자기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언약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아담 언약 혹은 창조언약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 언약이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언약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언약이 없었다면 즉 사람이 언약적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면 아담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에도 언약모형이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그리고 새언약은 모두 아담 언약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언약적 존재이기에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도 바로 사람이 언약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이유는 바로 새언약의 당사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분이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맺으신 언약이 바로 새언약인 것이다. 언약은 사람의 타락과 상관없이 타락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했다. 언약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일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언약의 조건성과 무조건성
2015-10-21 17:12:01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은 조건적이기도 하고 무조건적이도 하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듯 하지만
언약의 상대방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간의 모든 언약은 조건적일 수 밖에 없다.
즉 언약의 일방이 언약조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 언약은 맺어지고 유지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도 이런 조건성이 당연히 있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당연히 이스라엘에게도 그 언약에 신실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지 여부는 언약의 조건으로 주어진 율법에 대한 순종을
근거로 판단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므로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기만 하다면
언약으로 맺어진 그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약의 한 편인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언약의 조건성만 생각하면 이 경우에 언약은 당연히 파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은 인간의 언약적 불신실함에 의해서 죄우되지 않는다.
만약 좌우된다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제한적인 신실함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제한받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유이다.
그래서 언약의 무조건성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제한받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조건성이나 언약의 무조건성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언약적 특징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도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로와 소망은 무조건적이지만 무차별적은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언약을 배반한 자를 무조건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개와 순종을 통해서 용납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화개와 순종없이 언약을 배반한 자를 용납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와 순종의 마음을 주시는 새언약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찬란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대표한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었다.
그것은 새언약을 위한 죽음이었고 부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죽음을 의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부활을 의미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죽고, 다시 살아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죽었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영원히 깨지지 않는 새 언약이 맺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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