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2015-03-11 18:18:1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1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더 이상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의 선지자에 대한 기대는 말라기 기록에 반영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예언에 기초하여 엘리아와 같은 선지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유대인들을 크게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주의 날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고대하였는데 그 나라를 위하여 자신들을 준비시켜 줄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믿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요1:18-19) 아마도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자 유대인들은 그러면 엘리야나 그 선지자(신15:15-18)냐고 또 물었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다만 자신의 임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 증거로 세례를 받게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눅3:16-17ㅡ 마3:1-2, 11-12) 세례자 요한은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여기서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왔다는 것이고 계속하여 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여여 하는 이유는 천국이 이미 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도래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 회개가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행동의 변화임을 강조한다. 이런 회개는 사고의 긍극적 변화, 삶의 가치의 변화 나아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회개는 하나님나라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 이것은 일회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개념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회개의 긴급성과 구체성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기대한 바는 메시아의 도래와 하나님의 통치였다.(눅10:23-24, 마13:16-17) 하나님의 통치는 메시아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메시아의 도래는 곧 하나님의 통치의 나타남을 의미했다. 마태는 예수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그리고 성전보다 크신 분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은 그 자체가 예수의 정체성 즉 그가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로 제시한다.(눅4:16-21, 마11:2-6)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임해있으며(눅17:20-21) 세례자 요한 이후로는 하나님나라 복음이 전파되며 사람들이 그 나라로 몰려 들어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눅16:16, 마11:12-14) 예수님의 치유 기적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동시에 사탄의 나라가 파괴되었고 예수께서 승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특히 마12:28, 눅11:20 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예수님이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유일한 대목이다.
하나님나라의 미래성
복음서에는 하나님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을 언급한 구절이 많다.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은 현재성에 에 비해서 목회현장에서 지나칠 정도로 많이 강조되어 왔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마6:9-13,눅11:2-4)이나 복에 관한 예수의 말씀(마5:3-12, 눅 6:20-23), 하나님나라 잔치 비유(마8:11-12, 눅13:28-29)가 하나남 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수많은 비유들은 하나님나라가 장차 들어갈 나라로 나타나고 있다.(막9:43-48, 마8:8-9, 마7:21, 마10:23, 마19:23, 눅18:24)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내세에 얻을 궁극적 구원으로서 영원한 생명(마10:15, 마18:3, 눅18:17)을 가르키기도 하였다. 특히 예수님의 비유들에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많아 나타난다.(마13:31-33, 막4:26-29), 마13:24-30, 36-43)1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이런 가르침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현재적 삶의 동기와 소망이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나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나라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래적으로 완성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현재적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의미가 크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을 가르치면서도 그 나라의 도래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를 알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다만 미래에 임할 그 나라는 갑자기, 예상치 못한 때에 임한다는 사실이 강조되는데(눅12:35-40, 마24:42-51) 그 이유는 그 날을 준비하고 깨어있으라는 촉구를2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준비하고 깨어있는 상태를 어린 아이과 같이 되라(마18:3), 한 눈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막9:4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눅13:24)는 등의 비유로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역동성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된 모습과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라는 말은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많은 경우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의 두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쪽 측면만을 강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적으로 어거스틴은 하나님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했고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간과하였다. 하르낙(A. Harnack) 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현재성을 단지 내적-영적 실제로만 이해하였고 다드(C.H..Dodd)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만을 주장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미래적 요소는 후대 기독교 공동체나 복음서 기자의 첨가라고 보았다. 그는 예수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심판과 긍극적 축복이 이미 그 시대에 현존했다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주로 강조한 주장들도 많은데, 바이스(J. Weiss)와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를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모두 전적으로 종말론적이며 어떤 경우에도 현재의 영적-내적 실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철저히 미래에 임할 종말론적인 실재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무시하고 미래적 측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은 13장,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은 이 세상에서 의인들과 악인들이 함께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세상 끝에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곧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모습은 의인들과 악인들이 알곡과 가리지처럼 구별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예레미야스(J. Jermias)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를 예수의 비천과 영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시행하는 왕 메시아로 오셨는데 예수의 초림으로 구원의 시대는 시작되었고 사탄은 전복되었지만 하나님나라의 미래는 예수의 재림으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오심과 수난을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로 보지 않고 하나의 전주곡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약화시켰다.
쿨만(O.Cullmann)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하나님 나라의 두 시기로 나누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예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예수 재림의 때에 하나님 나라는 온전히 이루어질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D-day에 해당하고 예수의 재림 사건은 V-day에 해당한다는 비유를 하고 있는데 이런 비유는 여전히 십자가 사건을 승리 그 자체가 아니라 승리의 계기를 마련하는 준비의 날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여전히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설명하는데 부족하다.
리델보스(H. Ridderboss)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를 너무 체계적으로 제시하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복음서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델보스는 하나님 나라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애매한 통일성"이라고 표현한다.드사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단지 그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취되었고 앞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조지 래드(G.E.Ladd)는 리델보스와 유사하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를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표현한다. 래드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취되어서 이 세상에 현존하여 있지만 아직 그 나라의 완성의 때는 미래로 남아있다고 말하며 하나님 나라의 이런 긴장 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하지만 그도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그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다시 오실 그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것이라는 계시는 신비로운 비밀 자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종말의 때가 오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영생과 심판을 경험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래에 온전히 임하여 의인은 영생을 누리게 하고 악인은 심판할 것이다.
각주 1
이런 비유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나라를 단순히 미래적으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된 미래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국은 현재는 땅에 뿌려진 작은 씨와 같지만 나중에 큰 나무로 자라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비유는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은..
각주 2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 주는 교훈은 그 나라가 단지 미래의 일이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임할 그 나라를 위하여 현재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씨와 열매의 관계로 비유한 것과도 밀접하게 일치한다.
- 이런 비유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나라를 단순히 미래적으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된 미래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국은 현재는 땅에 뿌려진 작은 씨와 같지만 나중에 큰 나무로 자라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비유는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은 현재와 무관한 순전한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미 시작하였고 미래를 향하여 진행되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랑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를 씨와 열매의 관계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 주는 교훈은 그 나라가 단지 미래의 일이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임할 그 나라를 위하여 현재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씨와 열매의 관계로 비유한 것과도 밀접하게 일치한다. [본문으로]
하나님 나라와 성령
2015-03-11 21:55:50
누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와 성령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울 이후에 성령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제시해주는 신약의 저자는 누가이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과 승천 이후 사도들의 활동이 성령의 사역과 맞물려 있다고 보았다.누가복음에는 특별히 성령사역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성령은 항상 예수와 함께 하며 예수가 누구이시며 그분의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누가는 특히 예수의 출생이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 엘리사벳과 사가랴도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을 하였으며 어린 아이 예수에게도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어린 예수의 이런 지혜의 충만함은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음으로써 메시아적 통치자의 자격 요건으로서 그가 하나님과의 독특한 부자관계에 대한 자기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누가는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고 말하는데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란 창세기 8장 11절과 대비하여 비둘기가 노아에게 홍수후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려주었듯이 새로운 창조의 상징성을 가진다. 이 환상에서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늘의 계시가 성령을 통하여 땅으로 내려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누가는 이 이미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요단강 세례 이후에 담당하실 메시아적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의 광야시험에서도 성령의 역할은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시면서 예수의 메시아적 능력을 보여주셨다. 누가복음 4장16-21절에서 예수께서 이사야 인용구절을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상령의 체험으로 임한 구원의 능력에 대한 것이다. 주의 상령은 곧 요단강 세례시에 성령 체험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인용 구절은 그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고 그 예언이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지상사역 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시행에서 두분의 철저한 공동사역이 이루어짐을 드러낸다. 또한 예수님은 메시아적 통치의 결정적인 요인을 심판이 아닌 은혜로 규정함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심판 사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시에 임하신 성령은 심판의 영이 아니라 은혜의 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바울서신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와 성령
바울서신에서 하나님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에 있다. 바울 서신에서 성취와 완성의 사이에 있는 하나님나라의 성격은 하나님나라와 성령을 이해하는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의 정의:로 규정된다. 로마서 4:17에는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영적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서 의, 평화, 기븜은 굘회안에 들어와 있는 종말론적 구원의 실재를 완곡하게 표현한 개념이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이며 해석이다. 또한 성령은 미래적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질 최종적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하나님나라에서 구원의 현재와 미래는 맞물려 있으며 구원의 현재는 구원의 매래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요 성령의 열매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한 하나님나라는 물질적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영적인 하나님나라이며 의와 평화와 기쁨을 부분적으로 맛보는 나라이다. 그리고 현재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나라에 속하며 장차 올 완전한 하나님나라를 받게된다. 바울이 본 성령은 미래적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으로 보증하며 또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실재가 성령의 열매와 은사로1 나타나게 하는 분이시다.
하나님나라와 성령에 대한 신학적 접근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이루는 하나님나라를 현재와 미래의 양 측면에서 언급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성령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나타남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이 하나님나라가 이 세계의 역사와 무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하나님나라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가시성을 추구한다. 성령은 이미 일어난 구원사역을 지시하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보증으로 나타난다. 보증으로서의 이런 성령 사역은 현재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과거적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 사역을 현재화시키는 일이다. 또한 성령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선취하는 가운데 그 영광을 현재화 시킨다. 성령의 현존과 통치가 있는 곳에 하나님나라가 즉각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세상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곳에는 하나님나라가 현존한다. 성령의 현재화 사역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첫번째 나타나는 변화는 인간의 변혁이다. 성령의 조명없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데 사람은 성령의 조명으로 십자가에 계시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중생한 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 평화, 기븜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중생자를 동역자로 부르시고 성령의 은사를 베푸신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나라를 지시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형성하고 파송하시는데 교회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아직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의 대행자요 강력한 증인이다.2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이 성취하는 현실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를 확장한다는 말은 하나님나라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3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실재는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인 과제로 주어진다. 하나님나라는 역동적이므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되며 역사 가운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는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역사와 문화속에서 나타나는 역사적이며 우주적 실체라 할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종교를 포함하여 인간의 이성적, 문화적 활동 전반을 포함한다. 문화명령(창1:28)은 하나님나라 확장의 원리이며 세상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관심사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의 활동은 인간 내면이나 종교적 영역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지평에 있다. 하나님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영적 관계를 비롯하여 육체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까지 포함한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만드는 역할 곧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을 이루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에서 성령의 역할은 미래성과 현재성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성령은 하나님나라의 대행자인 교회를 형성하고 파송하며 결국 이세상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고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신다. 따라서 성령은 역사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이루어 가신다.4
각주 1
성령의 활동은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지평을 가지므로 성령의 열매나 은사를 종교적 영역이나 교회 공간에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각주 2
교회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각주 3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은 근본적인 명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하나님나라가 인간과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인간을 통해서 인간을 사용하여 아루신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의 중요한 계시이다.
각주 4
결국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실재는 성령이 일하사고 다스리시는 성령의 나라이다.
- 성령의 활동은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지평을 가지므로 성령의 열매나 은사를 종교적 영역이나 교회 공간에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본문으로]
- 교회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본문으로]
-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은 근본적인 명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하나님나라가 인간과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인간을 통해서 인간을 사용하여 아루신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의 중요한 계시이다. [본문으로]
- 결국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실재는 성령이 일하사고 다스리시는 성령의 나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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