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소고

시편 23편의 신학

시편 23편의 신학

2015-03-23 16:58: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시작되는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우리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시인이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분은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지금 시인은 그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목자라는 이미지는 목자가 양을 돌보고 지키듯이 여호와는 자기를 돌보고 지키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왜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여호와는 시인을 지키고 돌보시는가? 그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며 그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인은 자기 개인으로서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여호와는 목자가 양을 지키고 보호하듟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가? 그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에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여호와의 행동의 출처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며 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보편적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언약적 행동인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자신과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내 평생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2절부터 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이스라엘과 시인에게 목자 노릇을 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목자가 양을 푸른 풀밭에 누이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듯이 여호와는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여기서도 자시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시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언약적 자비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4절은 3절의 내용을 더욱 부연하여 고백하는 것인데 시인은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목자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양을 지키듯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호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5절은 여호와께서는 시인을 지키시는 방식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예상을 뛰어넘는 탁월한 방식임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시인을 대적하는 원수의 목전에서 시인에게 잔치상을 베푸시며 기름을 머리에 부으시고 시인의 잔에 넘치게 따라주신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시인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바로 여호와가 2-5절의 목자 노릇을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셍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런  고백의 결과이지 고백의 원인이 아니다.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인에게 목자 노릇을 해주시는 것이지 시인에게 목자 노릇을 해주셨기 때문에 여호와가 시인에게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시인은 자기의 미래에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반드시 자기를 따르리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이런 확신은 하나님이 시인에게 베푸신 일에서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시인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시인의 고백은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고백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나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시인의 고백은 바로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23편으로 드리는 기도

2015-03-08 15:52:37


  시편 23편은 현대인의 기도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기도다. 현대인의 기도에는 무엇무엇을 해달라는 기도로 가득차 있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정해놓고 그렇게 이루어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기도에는 하나님과 신자의 인격적인 교제보다는 기도자의 일방적인 요구로 가득차 있다. 과연 이런 것이 합당한 기도인지 의문이 든다. 시편 23편은 현대인의 이런 일방적이고 요구로 가득한 기도와는 전혀 다른 기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전혀 없고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고백, 감사, 찬송 그리고 결단으로 가득차 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감사와 찬양으로 올려드리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시인은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기도하는 시인이 여호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에서 이런 고백이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고백일 것이다. 지금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 나의 기도의 대상이신 그분이 기도자인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한 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분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에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이며, 또 그분은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만물의 창조자, 통치자이실 뿐 아니라 나를 양처럼 돌보시는 나의 목자와 같은 분이시라는 이런  시인의 고백이야 말로 시인이 기도할 수 있는 원천이며 동력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목자와 같으신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분은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 처럼 시인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시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자기 이름이란 바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여호와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를 맺으신 분이신지를 나타낸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시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노래한 것이다.  여호와는 이런 분이시기에 시인은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고난을 만나더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시인과 함께 하시며 마치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을 지키듯이 시인을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호와께서는 시인을 대적하는 원수의 눈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머리에 부으시며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분이심을 시인은 넘치는 감격으로 고백하고 찬양한다. 이렇게 시인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충분히 맛보았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의 평생에 따를 것을 확신하고 있다. 시인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미 맛보았고 또 그 인자와 선하심이 자신을 평생 따를 것을 알기에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고 결심한다. 

 

  이렇게 시편 23편은 여호와가 시인과 어떤 관계를 가진 분이신지에 대한 진솔한 고백으로 시작하여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침내 자신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결심으로 마치고 있다. 여기에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어떤 일방적인 요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대신 거기에는 고백과 감사 찬송 그리고 결단이 나타나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기도할 수 없는 것일까? 모든 시편이 그렇지만 특히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