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어떤 책인가?
2015-03-08 19:07:22
신구약 성경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삶속에서 형성된 사람의 글이라는 인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계시이면서 동시에 문학이기도 하다. 성경이 가진 이런 양면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성경은 역사책도 과학책도 아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자신들이 이해한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글은 신앙고백이고 신앙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나 성경을 다른 책들과 구별시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란 점이다. 계시란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스스로를 알리시고 드러내신 계시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말의 원천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특정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는데 이런 사건에는 반드시 그 사건의 의미를 알려주는 말씀이 수반된다. 사건에 대한 해석이야말로 그 특정한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깨닫게 한다1. 사실상 해석이야 말로 사건을 특별하게 하는 본질적인 사항일 것이다. 만일 사건이 해석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기적적이고 특별한 사건일지라도 우연하고 의미없는 일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계시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구속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구속(redemp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죄로 말미암아 혹은 경제적 곤경으로 인해 종으로 팔린 이들을 값을 치르고 되사서 자유인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되사는" 일에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구약성경에서는 동물 제사로 표현되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물로 드려졌다. 그러므로 구속은 어떤 영혼의 구원같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몸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계시의 일차적인 목표는 구속이지만 그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말씀하시길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고 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두 단계의2 목적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백성을 죄와 곤경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약속으로 이끄시는 것이 계시의 첫번째 목적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하는 것이 계시의 두번째이자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계시의 책인 성경이 가진 영감성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디모데후서 3장16-17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3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하려 함이라." 고 말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혹은 성경이 영감된 책이라는 말은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다거나4 성경이 기적적이고 신비롭게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믿는 자들의 삶에 미치는 힘과 영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글이 정경으로 결정되고 선포된 이유는 그 들들 자체가 지닌 특별한 힘이며, 그 글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이런 역사는 성경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작용하였을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구전으로 전달되고 전달된 이야기들이 편집되고 글로 기록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셨을 것이고 그 결과 오늘날의 정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면 성경을 읽고 깨닫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믿음의 자세이다. 성경을 감동하신 성령께서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를 또한 감동시키셔서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변화된 삶을살 수 있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성경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감된 특별한 책인 동시에 사람이 기록한 보통의 책임을 기억하는 것도 필요하다. 성경의 책들은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이야기들은 사람의 구전을 통해 전승되어왔고 사람에 의해 이야기들이 수집되고 편집되어 왔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감된 책이지만 어떤 신비롭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그들의 삶과 경험을 통해 알게된 하나님의 계시를 깊이 연구하고 전달하는 방법으로 형성된 것이다. 5성경이 긴 시간동안 이렇게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고 편집되고 기록되어 형성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성경에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참고점이 된다.
이렇게 성경은 사람의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한 시대를 살고 있던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특정한 고대적 문학 양식에 따라서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본문이 가진 문학적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서 압도적으로 사용된 평행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을 오해하기 쉽상이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구절이 속해 있는 맥락 즉 문맥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6 문맥은 본문의 의미가 창출되고 이해되는 기본적인 틀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몬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역사적 정황도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학적 문맥과 아울러 역사적 문맥에 주의하여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의 글이라는 점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글들의 양식, 문백, 수사법, 평행법, 역사적 배경 등을 음미하고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본문을 말하고 기록하였던 이들의 시대와 삶을 상상해 볼 때, 때로 우리는 마치 우리 눈앞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걸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이 고민하고 기도하며 모색했던 상황과 문제들이 오늘 우리의 상황과 문제에 생생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계시는 믿어진 사실이지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게시에 근거한 신앙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성은 믿음의 고백이다.
각주 2
계시의 목적을 두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츨애굽이 첫단계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두번째 단계이면서 출애굽의 긍극적 목적이다. 이것은 시부림과 열매맺음, 태어남과 장성함의 두 단계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에수님이 주신 대사명에는 세례를 주어 하나님나ㅣ라 성이 되는 일과 그들을 가르셔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
각주 3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올바른 관계의 핵심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참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온다.
각주 4
성경에 전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의로 교육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각주 5
누가복음 1장 1-4절은 한 권의 성경책이 어떻게 셍겨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보면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누가를 전적으로 사로잡아서 단어를 받아쓰게 하신 것이 아니라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자 편지를 쓰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누가는 글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되어진 일들을 주의깊게 관찰..
각주 6
그러나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문맥을 무시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부주의로 인한 무시라기 보다는 1세기 당시의 구약 해석에 부합한 인용이었을 것이다.
- 계시는 믿어진 사실이지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게시에 근거한 신앙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성은 믿음의 고백이다. [본문으로]
- 계시의 목적을 두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츨애굽이 첫단계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두번째 단계이면서 출애굽의 긍극적 목적이다. 이것은 시부림과 열매맺음, 태어남과 장성함의 두 단계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에수님이 주신 대사명에는 세례를 주어 하나님나ㅣ라 성이 되는 일과 그들을 가르셔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게하는 일이 두단계로 주어졌 있다. [본문으로]
-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올바른 관계의 핵심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참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온다. [본문으로]
- 성경에 전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의로 교육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본문으로]
- 누가복음 1장 1-4절은 한 권의 성경책이 어떻게 셍겨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보면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누가를 전적으로 사로잡아서 단어를 받아쓰게 하신 것이 아니라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자 편지를 쓰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누가는 글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되어진 일들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가 아는대로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의 생각에 좋아보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누가는 자신이 쓴 글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가는 자신의 글에 하나님과 성령을 빙자하여 그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그러나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문맥을 무시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부주의로 인한 무시라기 보다는 1세기 당시의 구약 해석에 부합한 인용이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구약성경의 중요성
2015-03-08 20:29:07
비교적 단기간에 형성된 신약성경에 비해 구약성경은 이천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쳐 말해지고 전해지고 편집되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여러 다양한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책마다 특정한 표현 양식과 시대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경은 오래전 부터 유대교의 정경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경을 율법서(토라)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신명기), 예언서(느비임)1 8권(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서,이사야,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서), 성문서(케투빔)2 11권(시편,욥기,잠언,룻기,아가서, 전도서,예레미야,애가, 에스더,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으로 도합 24권으로 간직하고 있다. 로마카톨릭의 경우 개신교의 구약성경과 동일한 39권과 더불어 7권의 외경(Apocrypha)- 토비트,유딧, 긴 에스더,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 바룩, 긴 다니엘- 을 정경으로 여기고 있다3. 이 외경들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기록된 책들인데 초기 교회에서는 널리 읽히던 책들이었고4 초기 교회의 교리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이 책들이 유대인의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교회에서도 구약정경과는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외경을 구약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즐겨 읽던 책들이었으며,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외경을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된다.5
유대교와 기독교가 정경으로 간직한 구약의 책들은 동일하지만 각 책의 배열에는 차이가 있다. 유대교는 율법서(토라)-예언서(느비임)-성문서(케투빔)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율법서가 성막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질서를 말한다면 예언서는 이러한 이상이 중단되고 실패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 이상을 회복한 세상을 기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문서는 그러한 거룩한 이상을 따라 살아가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율법서(오경)-역사서-시와 지혜-예언서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6오경이 이스라엘의 형성과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한다면 역사서는 형성된 이스라엘 역사의 진행을 말하며 시와 지혜서는 특정한 시간을 넘어 무시간적인 현재속에서 봉착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예언서는 구약의 결론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심판은 심판 이후에 임하게 될 새로운 회복과 약속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고 있다.
구약의 마지막에 놓은 예언서는 그러한 약속과 기대가 성취되는 현장으로 신약성경을 바라보게 하며, 에수 그리스도야말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고 실패를 회복할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그런 점에서 예언서는 그 전체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과 기대의 결론이며 답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예언자들이 기대한 회복의 비전을 아는 것이니, 이는 예언자들이 지녔던비전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의 의미를 알려면 예언자들의 선포로 돌아가야 한다. 구약이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만, 어떻게 그런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이 전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회복과 약속에 대한 기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또 우리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하신 분이 되고 말 것이다. 구약을 알지 못하고는 예수가 왜 우리의 소망이 되는지를 정당하게 알지 못하게 된다.7
각주 1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별되는데 전기 예언서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이고 나머지는 후기 예언서이다. 기독교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된 책들이 전기 예언서에 속한다는 사실이 흥이롭다.
각주 2
성문서는 영어로 wrights인데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 율법서와 예언서를 제와한 기타의 글들이란 의미이다.
각주 3
원래는 카톨릭도 외경을 정경의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는데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거부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외경을 제2의 정경으로 격상시키게 된다.
각주 4
외경은 중간기에 대한 유일한 정보자료이며 초대교부들에게 익숙한 자료였으며 당시 널리 사용된 성경인 70인역에도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주 5
제롬은 와경을 교육을 위해 사용될 수는 있지만 교리와 실천의 구범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 어거스틴은 외경을 정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책으로 여겼는데, 그는 동방교회가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것을 고려하여 교회연합을 위한 열망에서 외경을 정경으로 강조하였다고 한다.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히던 70인역에서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제롬은 불가타 성경을 ..
각주 6
구약성경의 배열이 이렇게 바뀐 것은 제롬이 히브리성경을 텍스트로 번역한 불가타성경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히브리 성경의 배열이 정반합의 안정적인 순환구조라면 기독교 성경의 배열은 미완성을 향한 불안정한 구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구약의 소망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주 7
구약의 기대를 성취하신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 점이 개신교 신학에 결여되어있다.
-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별되는데 전기 예언서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이고 나머지는 후기 예언서이다. 기독교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된 책들이 전기 예언서에 속한다는 사실이 흥이롭다. [본문으로]
- 성문서는 영어로 wrights인데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 율법서와 예언서를 제와한 기타의 글들이란 의미이다. [본문으로]
- 원래는 카톨릭도 외경을 정경의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는데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거부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외경을 제2의 정경으로 격상시키게 된다. [본문으로]
- 외경은 중간기에 대한 유일한 정보자료이며 초대교부들에게 익숙한 자료였으며 당시 널리 사용된 성경인 70인역에도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 제롬은 와경을 교육을 위해 사용될 수는 있지만 교리와 실천의 구범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 어거스틴은 외경을 정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책으로 여겼는데, 그는 동방교회가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것을 고려하여 교회연합을 위한 열망에서 외경을 정경으로 강조하였다고 한다.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히던 70인역에서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제롬은 불가타 성경을 번역하면서 70일역이 아닌 하브리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불가카 성경에는 외경이 빠져있다. [본문으로]
- 구약성경의 배열이 이렇게 바뀐 것은 제롬이 히브리성경을 텍스트로 번역한 불가타성경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히브리 성경의 배열이 정반합의 안정적인 순환구조라면 기독교 성경의 배열은 미완성을 향한 불안정한 구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구약의 소망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으로]
- 구약의 기대를 성취하신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 점이 개신교 신학에 결여되어있다. [본문으로]
성경의 권위
2015-03-20 16:25:41
기독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기록된 성경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전통적으로 성경은 주전 15세기부터 주후 90년까지 약 1500년에 걸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성경에는 장절 구분이 없었는데 이후에 번역본에서 편의상 집어넣은 것이다. 장구분은 1205년 캔터버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의 성경이, 절구분은 1577년 발행된 제네바 신약성경이 최초이다. 그렇다면 누가 성경을 기록하였는가? 당연히 성경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딤3:16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숨을 내쉬듯이 말씀하심으로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령과 인간이 성경의 공저자라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결국 성령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심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주장이 있는데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 과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 그것이다. 전자는 성령이 불러주시는대로 한글자 한글자씩 인간이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라는 주장이고 후자는 인간 저자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하나님이 어떤 영향을 주어서 하나님의 의도를 담게하시어 글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주장이다. 전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저자의 특성은 저술내용에 전혀 반영될 수 없도 인간은 단지 받아적는 도구로만 사용된 것에 반해 후자는 인간 저자들의 고유한 경험과 특성들이 성경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의 기초로서 문자적 의미의 성서무오설을 지지하는데 반해 후자는 성서 비평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자가 성서 유오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문자적 의미의 성서무오설을 반대한다.
구약의 정경화가 정확히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신구약 중간기 이전에 이미 구약의 정경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의 정경성이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수많은 구약본문들을 (295회) 신약에서인용하였다. 기독교는 주후 90년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이미 정경으로 확립되어 있는 히브리 성경 39권을 구약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신약의 정경화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기독교 초기인 주후1세기 경에는 다양한 문서들이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중에 일부 책들이 선별되어 신약 정경으로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경의 선별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기장 중요한 기준은 사도들이나 사도들이 인정한 사람들이 쓴 책이라는 사도성이었다. 두번째 기준은 보편성인데, 이것은 당시 동방, 서방, 아프리카 교회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책인가라는 점이다. 이런 두가지 기준을 기초로 신약의 정경와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주후 175년에 처음으로 "무라토리안 경전"이라는 신약정경의 목록이 등장하였고 주후 367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아타나시우스가 신약정경 목록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을 서방, 동방 교회가 이의없이 받아들였고 이 목록은 주후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도 인정되었다. 어떻게 보면 마치 교회가 정경을 정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회가 정경을 정한 것도 아니고 정경에 권위를 부여한 것도 아니다. 교회가 나서기 전에 이미 여러 지연의 수많은 신자들에게 알여졌고 권위있게 받아들여진 책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것이다. 교회가 한 일은 하나님이 이 책들에게 이미 권위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했을 뿐이다. 이렇게 정경이 완성되었지만 문제는 정경의 원본이 모두 분실되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의 원본은 없지만 필사본들은 상당히 많아 구약의 사본은 1만개가 넘고 신약사본도 5천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사본들은 필사과정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지만 놀랄 정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학자들은 수많은 사본들을 비교 분석하는"사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원본과 거의 동일한 성경을 복원해 내었다. 지금의 성경은 수많은 필사본들을 비교하고 분석하여 원본에 거의 가깝도록 편집한 것으로 매우 신뢰할만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성경의 권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임을 말할 나위가 없지만 성경의 기록 자체도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기를" 이란 문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란 사실을 나타낸다. 신약성경 또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의 인정하고 그 권위를 받아들였다. 신약성경 또한 자체적으로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는데 이미 사도 시대 당시에 신약 성경의 권위는 보편적으로 여러 교회에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성경을 매개체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경의 권위이다. 아무리 외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성령이 역사하시기 전에는 사람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거백 1장 5항은 이렇게 말한다. "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그 말씀으로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달린 것이다." 또한 생각할 것은 성경이 권위를 가진 책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그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고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권위를 말로 고백하는 것과 삶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면서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권위에 순종하면서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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