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13-07-20 16:41:03
기독교 역사는 결국 모든 신학적 문제는 성경에서 풀어질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비록 성경은 교회의 역사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교회가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와 역사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다른 이방종교의 경전과 달리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하여 행동하시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과 행동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과 행동도 함께 나타나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과 행동을 떠난 역사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과 인간 쌍방의 말과 행동이 함께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반응하시며 말하고 행동하셨으며 인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하심에 반응하여 말하고 행동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언약 백성들의 역사를 통하여 언약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과 함께 말하고 행동하시는 하나님, 이 분이 바로 성경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신관과 인간관의 터위에서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3가지 단층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단층은 구약과 신약사이에 있는 단층일 것이다. 이 단층은 수많은 신학적 혼돈과 갈등을 신학의 역사 가운데 일으켰고 이 문제는 여전히 오늘말 우리에게도 큰 도전을 가져다 주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중대한 신학적 과제이며 성경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관건인 것이다. 현대신학이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는 율법과 복음의 이원론 그리고 율법의 의미에 대한 혼동은 바로 이 단층에게 기인할 것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단층은 각각 구약과 신약안에 있는 단층인데 이 두가지 단층은 첫번째 단층은 신약과 구약의 단층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첫번째 단층에 비하여 이 두가지 단층에 대하여는 심각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두번째 단층은 구약안에 있는 단층인데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인류 역사의 출발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구약 전체의 이스라엘 역사간 존재하는 단층이다. 이 단층에 대한 정당한 이해는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 그리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밝혀주는데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세번째 단층은 신약안에 있는 단층인데 그것은 복음서와 바울서신간에 가지고 있는 긴장을 말한다. 이것은 특히 믿음과 행위간의 신학적 갈등을 초래하는 단층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를 통하여 나타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의 역사성에 주목하여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3가지 단층은 사실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층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성경읽기 시각이 가지고 있는 단층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말은 계시의 역사성에 주의하지 않고 계시를 분리하여 읽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의 3가지 단층을 가지고 이 점을 설명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구약 성경의 모든 계시는 최초의 계시인 창세기 1-11장의 근본계시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성경 해석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바로 이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계시인 것이다. 당연히 구약의 전체계시가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근본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 근본계시와 이스라엘 역사과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할 것이다. 두번째는 신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당연히 신약은 구약계시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역계시와 연관된 맥락에서 신약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구약은 모두 한 목소리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적 맥락 없이 신약을 해석하려고 하면 반드시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신약을 가지고 구약을 해석하려는 구속사 신학은 계시의 역사성을 거스리는 태도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구약 성경의 공통적 토대는 창세기 1-11장의 근본계시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이 이 근본계시와 어떤 관련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이해는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를 아는데도 필수적이다. 왜내하면 이 근본계시는 구약과 신약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15-03-07 22:31:22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끝난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창조 기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고 그 말씀이 선포되니 세상이 말씀대로 지어지고, 그 지어진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는데 하나님 백성으로의 부르심과 약속이야 말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이르시는 말씀의 핵심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명백히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늘과 땅에 대조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세상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창조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는데 그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여기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며, 이곳에서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공통적으로 하늘과 땅,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하나나님의 백성을 다루고 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으로서의 하늘과 땅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백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통치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의미하는 바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듯이 신약의 이스라엘 역시 죄와 악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된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그리하셨듯이 하나님은 신약의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 곧 하나님나라야 말로 신구약 성경 자체가 제시하는 근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늘과 땅의 창조로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끝맺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첫 창조와 새 창조 사이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지금 사는 땅 바깥의 어딘가로 옮겨질 것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에 임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 하늘에서 여기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이다. 성경의 주제가 하나님나라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이라는 점,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게 한다.
로마서 12장 1-2절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권면하는 기초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의 이유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 때문이다. 바울은 이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면서 이것이 합당한 예배(reasonable service)라고 말한다. 여기서 몸을 드리라는 삶을 드리라는 의미이고 그것이 당연한 예배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역본이 합당한 예배를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이라고 의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는 잘못된 번역이다.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삶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1절에서 삶을 드리라고 했다며 2절은 그 삶을 드리는 내용을 말한다고 본다. 그것은 첫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이고 둘째는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be transformed) 세상의 형태(form)에 자신을 맞추지(conform)말고 오히려 세상의 형태(form)을 변화시키는(transformed)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려면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한다.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듯을 분별하지 못하면 세상의 틀을 바꾸는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 마음을 늘 새롭게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확인하고 받아들여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베뢰아 사람들은 기품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열심이고 간절함이다.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는 진리에 대한 열심이며 간절함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말씀을 간절하게 받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라는 진지한 탐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나 성경을 보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새롭게 하기 위한 공부하는 자세이다. 진리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그 들은 바에 대한 비판적 자세, 이 두가지야말로 고귀하고 고결한 덕목이며, 성경을 공부하는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것이다.
구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19-10-31 18:59:20
구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구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앞서 우리는 구약을 왜 읽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기독교 안에는 구약의 예언이 모두 신약에서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구약성경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에 대한 이런 태도는 아직도 교정되지 못한 상태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예배 시 설교본문은 구약보다는 신약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현실이다. 구약에 대한 이런 관점으로 인해 교회에서는 구약을 신약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나는 신약의 구약의 완성이며 결론이라는 명제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신약이 어떻게 구약을 완성하고 결론지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서론이나 본론을 읽지 않고 결론만 읽는다면 우리는 그 결론의 의미를 오해하기 십상이듯이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읽는다면 우리는 신약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위험이 매우 크다. 부언한다면 우리가 구약을 읽는 이유는 신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을 잘 모르고 신약을 읽는 것은 마치 드라마의 전편을 보지 않고 후편만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의 전편을 보아야 후편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듯이 우리는 구약을 잘 알아야 신약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종말에 이르는 대하드라마이기에 우리는 성경을 긴 호흡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신약중심의 성경읽기를 하거나 구약을 신약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 결과 구약을 경시하고 잘 읽지 않거나 구약본문을 모두 신약에 대한 예언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은 이미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본문의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라고 확신하곤 한다. 그러나 이사야 본문이 구약의 어느 예언자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한 예언이라면 예언자에게나 그 예언을 듣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예언은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예언은 말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 모두에게 하나의 암호나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만다. 만일 그 예언이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면 그 당시의 예언자나 청중들에게 그 예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암호가 되고 무의미가 된다.
물론 이사야의 그 본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하게 성취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본문이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주장과 그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주장은 엄연히 다른 주장이다. 전자의 주장은 예언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문자적인 해석인 반면에 후자의 주장은 예언의 역사성을 고려한 포괄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시간적이거나 초월적이고 신비한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사람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초월적이고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이 계시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주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가 초월적이란 의미는 그것이 역사나 이성과 관계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나 이성 안에서 주어지지만 역사나 이성보다 더 크고 높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되거나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이 아니라는 주장은 계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이다. 고난 받는 종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하게 성취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연관성 가운데 그 예언의 의미를 먼저 숙고해야 하고, 그렇게 할 때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을 읽어야 한다. 구약을 알지 못하는 신약 읽기는 반드시 오류와 왜곡에 빠질 위험이 있고 그 위험은 이미 오랜 교회 역사 가운데 이미 입증되었으며 오늘날 교회도 그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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