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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신앙의 이원론과 세속화(secularization)

신앙의 이원론과 세속화(secularization)

2015-03-06 21:12:16


   이원론(Dualism)에는 존재론적 이원론(Ontological  Dualism(과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이 있다. 존재론적 이원론이 존재하는 것을 영과육, 성과속으로 구분하여 파악하려는 것이라면 윤리적 이원론이란 신앙과 삶(행위)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원화된 신앙구조의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세상과 분리된 교회당 중심의 신앙이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를 대립적으로 보고 세상과 분리하여 신앙생활을 교회당안의 종교적 생활에 국한시키려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대개 구원지상주의 혹은 피안적 종말 사상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는 어둠과 악일 뿐이며 장차 멸망할 장망성으로서 벗어나고 회피해야 할  무엇으로 인식된다. 이런 신앙은 교회와 세상의 정당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런 신앙은 세상을 등지고 피안만 추구하며 전도에 치중하는 구조선 신학(life boat theology)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에 대한 오해이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슬로건이었던 오직 믿음을 행위를 반대하거나 배제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믿음과 행위를 대립적으로 보는  신앙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운 이런 구호의 의미는 당시에 로마 카톨릭과의 대립구조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당시에 로마 교회는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해서 사람의 구원이 믿음과 함께 신자의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의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것이지 신자의 선행 자체를 배제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적 강조는 16세기의 시대와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교리적 강조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믿음에 대한 이런 오해로 인하여 행위를 강조하는 신학은 행위구원론이나 공로신학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19세기에 등장한 자유주의 신학은 신앙의 지적 이성적 요소를  강조하고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으며 특히 신앙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보수신학은 이에 대한 반발로 더욱 신앙에서 윤리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보수 신학은 더욱 배타적이 되고 윤리에 무관심하게 되엇으며 신앙 지상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선행을 믿음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윤리를 이야기 하면 자유주의 신학이나 사회복음 주의로 치부하였다.

 

3. 하나님의 주권이나 초월성에 집중된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이 세상이나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이나 책임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인간의 책임이나 자유의지를 소홀히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게 대한 믿음은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나 자유의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하여 나타남을 강조한다. "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줄 개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9:24)

 

4.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에 대한 오해이다. 이 교리를 인간 선행이 무가지 하다거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선을 행하려고 나서면 안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선행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선행을 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교리는 전적으로 부패했던 사람이 거듭나고 신자가 된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선행에 힘써야함을 반대하지 않는다.

 

5. 신앙의 사유화 혹은 사적 신앙(private faith)이다.  이 경우는 기독교 신앙이 가진 공동성을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다. 신앙은  개인적일 수 있지만 결코 사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사적이지 않고 공적이시며 신자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도 사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공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 때문에 개인의 회심이 사화의 변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교회 안이나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게 된다. 신앙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리처드 니버는 그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세상을 등지고 피하려는 분리형,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변혁형, 세상에 타협하고 적응하는 적응형으로 구분하였다. 이원론적 신앙 구조가 분리형 패러다임을 취한다면, 세속화된 신앙은 적응형 패러다임의 모습을 보인다. 세속화 과정에 있는 한국 기독교는 과거 이원론적 신앙구조에서 취했던 분리형 패러다임에서 적응형 패러다임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제 문제는 이원론이 아니라 세속화이다. 죄많은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무한대로 긍정하는 세계관이 문제이다. 이제 죄로 오염되어 타락한 세상을 등지려는 분리형 신앙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 너머의 초월적 영역에 가치를 두는 피안적 세계관도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한국 교회는 이미 자신의 존재형식을 세상내적 질서와 가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 긍정에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이원론적 구원관의 포로가 아닌 듯하다. 영혼이 육체로 부터 탈출하는 것을구원이라고 사고하지 않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설교하는 경향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교회는 점점 세상을 죄로 물든 지옥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의 생활 양식과 불신자들이 누리는 생활의 안락함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 사고가 점증하고 있다. 이원론이 물러간 자리에 세속화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심령구원,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구원의 선물, 즉 구원의 물질화, 구원의 세속화, 구원의 현세성을 중시하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육체나 물질을 긍정적을 간주하여 영혼구원이 츅체 건강이나 물질적 축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구원관이 총체적인 이해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구원이 세속화되고 변질된 것을 의미한다. 구원이 육체나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니 대표적인 예가 번영신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