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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종말의 신학

종말의 신학

2014-11-28 18:49:16


 

 역사상 현실을 도피하는 극단적 종말론이 발흥하였고 그 부작용은 심각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종말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이 종말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그것은 진정한 회복으로서 창조 목적의 성취이다. 종말론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그 빛아래서 오늘을 살게한다.

 

 

죽음과 부활

 

  종말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우주적 종말이고 둘째는 개인적 종말이다. 흔히 종말을 이야기 하면 우주적 종말을 떠올리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우주적 종말 이전에 개인적 종말을 경험하는데 그것이 죽음이다. 모든 사람이 죽음은 불가피한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성경은 3가지 죽음을 이야기 하는데 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 그리고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제3의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 영적 죽음이 하나님과 단절을 가져온 것 처럼 육체의 죽음은 이 땅에서 누렸던 모든 관계의 단절을 초래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어떤 일도 감수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 떨며 노예가 되고 죽음이 왕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정복했고 이제 죽음은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관문이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역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실 때에 죽음도 다른 모든 부정적인 것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 인간의 피할 수 없은 운명이라는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죽음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생각들이 있다. 신적인 생명으로 융합된다는 신적 합일설,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환생설, 몸이 없이 영혼만 불멸한다는 영혼불멸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는 부활이 있는데 이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며 부활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부활에는 부활이전과 부활 이후에 연속성과 아울러 불연속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모든 신자들에게는 이런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이 세상의 삶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믿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재림과 심판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고 말한다. 이런 역사관은 인생을 무의미한 순환론이 아니라  목적론적으로 바라보게 하며 현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기독교 신앙의 주변부가 아니라 이 땅의 삶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진 믿음의 핵심이었다. 성경은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이 재림의 확실성을 말하나 그 시기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재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재림의 시기보다는우리의 현재적 삶을 잘 감당하게 하려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은 재림의 징조를 말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어서 징조롤 가지고 재림의 시기를 추정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재림은 어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비밀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알 수 있도록 큰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온다. 그 때 세상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진정한 권세자이심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사람은 부활하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심판은 단순히 재판하고 형벌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자들에게 부활의 확실성을 보증해주고 소망을 주며 나아가 불의한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삶에 동력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재림은 불의를 바로 잡고 신자의 억울함을풀어주는 때가 될 것이 때문이다. 재림에 대한 언급은 항상 재림을 준비하라는 권면으로 끝을 맺는다. 재림에 대한 준비는 재림의 시기를 추정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함몰되지 않고깨어있는 것이고, 재림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것이며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심판하는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졌다. 이 심판 자리에서 마귀와 불신자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나 신자들은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신자가 의롭다는 동일한 판결을 받는 것이지만 상급은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상급은 상징적이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상급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상급이 어떻게 시행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서 처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심판의 확실성과 공정함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에 넘칠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천국과 지옥은 기독교 초기부터 신자들의 신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의 발흥으로 천국과 지옥은 실재가 아니라 신화이며 원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현대인들은 지옥의 형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데 이는 그런 것이 전근대적인 신화라고 치부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관련된다.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고 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은 실제로성취될 것이므로 지옥의 형벌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성경적 지지를 받기 어렵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동시에 믿음을 요구하신다 이 말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또한 구원이 인간의 자유 의사와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도록 만드셨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됨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에는 멸절설(annihilationism)인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는 주장이다. 지옥이 존재한다해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고 일정기간 형벌을 받다가 존재가 멸절되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의 사랑에 맞지 않고 영원한 형벌은 영혼이 불멸하다는 헬라사상에서 유래한 것일 뿐이고 성경은 영생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과 형벌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은 함께 가는 것이다. 만약 악인이 단지 존재가 멸절할 뿐이라면 악에 대한 보응이 없어지므로 하나님의 심판이나 형벌은 무의미해 질 것이다.

 

 마지막은 상징설이다. 이 주장은 지옥에 대한 묘사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종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과 형벌의 실재를 분명히 가르친다.  몰론 지옥의 묘사에 상징적 요소들이 섞여있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표현 의도 자체를 상징이라고 볼 수 는 없다. 지옥은 실제적인 물리적 장소와 마음의 상태의 결합이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재로 오는 고통이다. 또한 성경은 천국에 상급이 있는 것처럼 지옥의 고통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옥의 실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한다. 

 

  천국은 일차적으로 장소보다는 상태를 의미한다. 죄가 들어오기전 원래 세상은 천국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주권을 인정했다. 이 때는 상태와 장소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어떤 영역이나 장소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만 반대로 인정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장소와 상태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한 천국에서는 장소와 상태가 다시 결합될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며 또한 피조물과도 온전한 교제를 나눔으로 진정한 공동체가 회복되는 곳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어떤 상태나 영역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장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활후에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모든 육체에는 공간적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천국에 대한 요한 계시록의 묘사는 천국이 장소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어떤 장소일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곳은 정의와 평화가 완전히 회복되어 사람과 진리와 기쁨이 넘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현재의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안토니 후크마는 그의 책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그 연속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을 뜻하는 헬라어는 시간과 기원이 전혀 새로운 'neos'가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다는 'kainos' 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일하지만 질적으로 갱신된 우주를 말한다.  또한 피조물도 구속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부터 해방되고 갱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현 우주가 소멸되고 새로운 우주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이 만든 좋은 문화적 산물들은 정화되어 그대로 천국에 남을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24절에서 땅의 왕들이 그 도성으로 가지고 들어올 그들의 영광이란 아마도 천국에서도 남아있을 인간의 문화적 산물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포기하신 적이 없다. 문화 명령 또한 인간이 죄를 짓기전에 주신 명령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모두 부정하거나 소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에서 죄와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되고 긍정적인 문화적 성과들은 남을 것이다. 우리는 구속 사명뿐 아니라 문화 명령도 잘  감당해야 한다. 긍정적인 문화적 산물들은 천국이 오면 사라질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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