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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연중론의 신학적 의의

연중론의 주장

2014-01-08 04:12:08


연중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중생의 범위는 유효적 부르심에서 회심까지로 넓게 잡아서 회심에 이르렀을 때 중생이 완료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생을 유효적 부르심으로 즉각 주어지는 원리적 생명에 국한시키면 중생이라는 영적 실제를 체험하는

것이 약화되거나 이론이나 관념화될 위험이 있다. 회심을 통해서 실제적 생명으로 체험될 때

중생은 실제적으로 확신되고 영적으로 검증되어 신자로서 확실한 출발을 할 수 있다.

 

 

2. 유효적 부르심에서 회심에 이르기까지는 통상적으로 시간이 소요된다.

 

왜냐하면 내적 부르심으로 영적각성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오랜 세월의 영적 무지 가운데 있던 영혼이

의식적으로 합당한 반응을 하는데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고 일정하게 정해진 기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에서 회심까지의 기간은 짧을 수록 좋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3. 내적 부르심 곧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회심에 이르기 위하여는 인간의 회개와 믿음이 요구된다.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영적인 각성이 주어진 것은 곧 죽은 자에게 생명이 심기운 것과 같다.

원리적 생명이 심기운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발현되려면 부르심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서

인간의 회개와 믿음이 요구된다. 회개는 주로 죄애 대한 깊은 각성이며 믿음은 복음에 대한 깊은 수납이다.

회개와 믿음 곧 회심을 통하여 중생의 초기에 심겨진 원리적 생명은 실제적으로 의식되어 중생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초기에 심겨진 생명의 씨가 회심을 통하여 최초로 발현되는 것이며 체험되는 것이다.

 

4. 연중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17세기, 18세기 개혁주의의 중생론을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중생을 좁은 의미로 국한시킴으로써 중생이라는 영적 실체는 체험되지 못하고 관념화되어 회심없는 중생으로 중생의 실체에 무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명목상의 신자들로 넘쳐나고 있고 교회는 점점 무는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연중론은 이러한 현대교회의 영적 무능을 수술하는 성령의 칼이 될 것을 기대한다.

 

연중론의 신학적 의의

2014-03-20 00:34:0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의미의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가리키는, 성경이 사용하는 다양한 표현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는데 그가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 없던 자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 이것이 중생인데 여기서 생명이 주어지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원래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고 생명이 없는 이유는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었던 인간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사상으로 설명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생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는 시점이 중생도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생은 성령의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성령은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직접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초대하시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끄시는 역할을 하시는데 이것이 성령의 부르심이다. 그래서 성령은 그냥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여 부르시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은 자를 성령이 부르신다는 것은 부르심과 동시에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허락하심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들을 귀가 없이는 성령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성령의 부르심에는 부르심에 대한 정당한 반응 혹은 대답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반응 혹은 대답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부르심이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을 듣는 자의 신실한 응답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부르심에는 이미 응답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부르심은 언제나 전적인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는 값없는 것이지만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은혜는 항상 믿음이라는 정당한 반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두 슬로건은 은혜 없이는 믿음이 없지만 동시에 은혜는 반드시 믿음을 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신칭의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진리 역시 동일한 원리를 보여준다. '이신칭의'란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인데 여기서 복음이 은혜라면 믿음은 그 은혜가 요구하는 반응이고 응답일 것이다. 은혜가 요구하는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 이것이 이신 칭의의 진리이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시작되는 성령의 부르심은 언제나 정당한 반응 혹은 응답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응답이 바로 회심(죄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서 회심에 이르는 순간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시점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며, 또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의 순간이니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중생과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다. 성령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회심으로 중생하는 것과  복음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모두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 죄인의 실제적인 변화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칭의는 죄인의 신분적 변화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결국 이 두가지가 동일하게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 연합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생을 성령의 부르심으로 시작되어(수태) 회심에 이르는 것(새출생)으로 설명하는 연중론은 위에서 제시된 신학적 원리에 부합되며 '이신칭의'의 진리와도 잘 조화되는 중생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중생을 회심 이전의 성령의 부르심으로 제한시키는 소위 순중론은 위에서 설명한 성경적, 신학적 원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슨중론은 중생을 부르심의 순간에 국한시키고 회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성령의 부르심에 대한 죄인의 반응의 필수성을 약화시키며 또한 중생에서 주어지는 새 생명의 출처가 성령의 부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순중론은 회심을 중생과 구별되는 중생 이후의 별도의 구원의 서정으로 분리함으로써 중생 교리를  형식화 내지 사변화시킬 위험이 있다. 우리는 중생없는 헛된 회심과 동시에 회심없는 거짓 중생을 경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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