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소고

중생과 구원의 확신

중생과 구원의 확신

2014-02-07 04:40: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8항은 

구원의 확신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거룩한 진리 

그리고 성령의 내적 증거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은 객관성과 주관성을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웨신은 구원의 확신이 믿음이 본질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른 구원의 확신은 신자들을 방종으로 기울게 하지 않고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고 최대한 힘쓰는 것은 

모든 신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의 실제적 출처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거듭남에 대한 분별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중생을 분별할 것인가?

중생의 객관적 표지는 무엇인가? 

혹자는 중생을 분별하는 것은 중생 이후의 삶의 열매를 보고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화를 중생의 표지로 본다면 중생을 분별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정도의 성화의 열매가 있어야 중생여부를 분별하는 표지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구원의 확신은 성화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칭의에 기초한다고 고백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과 싸운 교리적 무기가 바로 이신칭의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얻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심에 이르기 전에는 칭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 구원의 확신의 기초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을 분별하는 표지는 의심할 바없이 회심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침된 회심과 거짓회심을 분별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바른 회심의 증거가 공적으로 인정되기 까지는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애썻던 것이다.

이렇게 중생과 회심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고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전통은 중생의 범위를 

현대의 좁은 의미가 아니라 부르심에서 회심에 이르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대의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에 의하면

중생은 회심이라는 중생의 표지가 없는 사변이 될 위험이 있고

나아가 바른 회심에 이르려는 정당한 노력이 간과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일에 큰 장애로 대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의 범주를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전통을 따라서

회심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으로 회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중생의 표지로서의 회심에 이르기 위하여

애쓰게 되고 실제로 그런 회심의 체험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