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의 상관 관계
2014-03-19 22:44:55
복음은 율법을 반대하지 않으며 율법 또한 복음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율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율법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한 것은 시내산 언약에서 나타난 십계명이다. 십계명이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졌다는 것은 율법이 언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언약적 요구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언약적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즉 율법이란 하니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때문에 등장한 언약을 규율하는 법 곧 언약법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율법을 지켜 행할 때 이스라엘은 언약에 신실한 것이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는 샬롬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율법의 근원은 창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다른 피조물에 없는 특별한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 관계란 일종의 언약 관계인데 이 언약 관계에서 인간에게 언약적 의무로 주어진 것이 선악과 금령이었다. 선악과 금령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한 통치권이 주어졌지만 인간은 제멋대로 통치권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선악과 금령은 율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고, 다스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언약적 의무였다. 후일 율법이 십계명이라는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지만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율법의 원형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고 이것이 희미하게 그리고 왜곡되게나마 나타나는 것이 모든 인간 마음에 내재한 양심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 라는 것은 관계론적 의미를 가진 것인데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관계를 맺은 상대방에서 상호 의무를 발생하게 하는데 이 관계적 의무를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의"이고 그 반대로 관계적 의무에 신실하지 않은 것이 "불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는 '관계에 신실함' 혹은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의로울 때, 곧 관계에 신실할 때 그 관계에 샬롬이 유지되는 것이고 그 반대일 때, 관계는 깨지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이나 십계명으로 나타난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아담의 범죄나 이스라엘의 범죄는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의무에 신실하지 못한 것 곧 하나님께 불의를 행한 것이고 성경에서는 이것을 "죄" 라고 부른다.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깨어진 것이고 성경은 이것을 "타락" 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기 전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계가 깨어진 후로는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무능하게 되었고 율법을 지킴으로 관계를 회복할 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무능이 문제였고 결국 관계의 유지를 위해 주어진 언약적 의무었던 율법이 이제 타락 이후에는 인간을 정죄하고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타락으로 밀미암아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무능하게 되었고 오히려 깨어진 관계를 확인하고 악화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복음에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성경에서 "의"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 관계가 지우는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언약적 의무를 감당하시는 언약적 신실하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적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의 언약적 의무가 율법 행함이라면 이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무란 인간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주로서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시내산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인간에서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언약적 의무를 다 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의 언약적 의무인 율법을 행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 편에서 언약적 의무를 다 하심으로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시려면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복음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요약되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고 언약적 신실함이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편의 언약적 행동이시며 의로운 행동이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함으로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고 "불의"를 행하였고 하나님의 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불의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으므로 하나님의 의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표현하는 동의어이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나타난 복음은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고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 요구하는 인간의 정당한 반응인 것이다.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하여 믿음이라는 인간의 언약적 반응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졌던 언약관계는 회복된다. 이것이 바로 칭의, 화목, 양자됨이라는 용어로 표현된 것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그 믿음 자체에 어떤 내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 요구하는 인간의 언약적 의무를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이다. 결국 인간이 믿음이라는 언약적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회복된 것을 부정적으로는 "사죄"라 하고 긍정적으로는 "칭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언약관계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없는 불의한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여 회복된 관계가 어떻게 샬롬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 다시 율법이 등장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율법은 관계 회복하는 역활을 하지 못했지만 일단 관계가 회복된 후에는 인간의 언약적 의무인 율법은 회복된 관계를 유지 발전 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회복된 관계는 절대적으로는 아니지만 언제든지 다시 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와 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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