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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언약의 두 측면 - 은혜와 믿음

언약의 두 측면 - 은혜와 믿음

배우는 자의 기도/소고(小考)

2013-12-14 15:05:07


언약의 두 측면 - 은혜와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두가지 정신의 상호 관계)

 

 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언약사상에는 언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적 주고받음의 원리가 잘 나타나 았다. 은혜를 하나님 편에서의 선행적 언약적 행동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사람 편에서의 은혜에 대한 언약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은혜는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지만  언제나 사람의 믿음이라는 정당한 반응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언제나 믿음에 선행하여 주어지지만 일단 은혜가 주어지면 은혜는 언제나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은혜는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믿음의 토대이고 대상이며 또한 믿음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며 은혜가 나타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은혜없는 믿음이 없듯이 믿음 없는 은혜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아담 언약(창조언약)에 나타난 은혜와 믿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다. 그리고 사람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은 그가 만물을 다스리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려야 하다는 교훈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다. 선악과 금령은 사실 지키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우 쉽고 단순한 것이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단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선악과 금령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 한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를 통하여 순종을 가르치기 위헌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금령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어야 했다. 사실 이 금령은 쉽고 단순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킬 수 없는 계명이다. 왜냐하면 그 실과를 먹지 말아야 할 논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금하셨다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비록 그들이 그 명령을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을 배웠어야 하는 것이다. 순종은 이성적 납득이나 논리적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은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면서 또한 선악과 금령을 명하심으로써 사람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을 요구하셨다. 이렇게 성경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으로서 믿음이 요구되었다. 

 

 

2. 아브라함 언약에 나타난 은혜와 믿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과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만드셔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며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의 이런 약속은 아브라함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언약 형식으로 빌어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목숨을 걸고 맹세하기 까지 하셨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이런 모든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전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서의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러하셨듯이 이런 은혜를 주시면서 그에 합당한 믿음을 요구하셨고 믿음의 구체적인 규례로서 할례를 요구하셨다.  할례는 하나님이 고대 근동의 언약 형식을 빌어 약속하신 것을 맹세하신 언약을 세우셨는데 하나님은 이제 할례 의식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도 그 언약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는 것이 곧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그 후손사이에 지킬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맹세로 하신 약속의 성취를 믿으라는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었고 할례는 그 믿음의 구체적인 표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은혜를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에게 그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서 믿음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가 크면 클수록 아브라함에게는 더 큰 믿음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마지막 시험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통과하였고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선악과 금령보다 더 어렵고 더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증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담이 배웠어야 했지만 실패한 그 믿음과 그 순종을 배웠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3.시내산 언약에 나타난 은혜와 믿음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맺은 본격적인 언약이지만  사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한 언약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공동체와 본격적으로 갱신하신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이름이 모세를 통하여 먼저 여호와라고 계시됨으로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언약의 하나님이 되심이 밝혀졌다. 시내산 언약 당시에 이미 이스라엘은 거대한 민족 단위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의 약속 곧 그의 후손이 하늘에 별과 같이 번성한다는 일차적인 약속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남은 약속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인데 바로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입애굽 그리고 출애굽 이어서 시내산 언약과 가나안 전쟁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와 땅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도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정탐꾼 사건으로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전멸한 것은 은혜에 합당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 곧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엄청난 은혜를 먼저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이어서 소위 십계명이 주어지는데 그러니까 십계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반응으로 요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서 믿음의 행동, 곧 순종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반응을 지도하는 언약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언약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언약법이 오직 할례법뿐이라면 시내산 언약에서는 십계명을 비롯하여 세부법까지 엄청나게 많고 상세한 율법이 언약법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아브라함 개인보다는 훨씬 더 많고 복잡한 삶의 자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며 나아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될 때 이방족속과의 종교적 문화적 대결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율법을 따라서 삶으로서 이방족속과 구별된 언약적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의 수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요구라고 볼 수있다. 율법을 준수하는 순종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4. 새 언약에 나타난 은혜와 믿음

 

성경에서 말하는 새 언약은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과 같은  옛언약에 대응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옛 언약을 무효로 돌린다는 의미에서 새 언약이 아니라 옛 언약의 연속성 가운데 옛언약의 갱신으로서 새 언약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마치 시내산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었듯이 새 언약은 옛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다. 새 언약이란 말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먼 훗날에 이루어질 일로 예언된 적도 있지만 특별히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언급되었다. 예수님은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슴하심으로써 십자가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언약적 행위임을 계시하여 주셨고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새 언약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언약적 측면은 다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가 나타나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은 죄없으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임을 밝힘으로써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느 사랑을 선포한다. 결국 십자가의 첫번째 언약적 측면은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인 것이다. 두번째 십자가는 인간의 절대적 순종을 의미한다. 신인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은 저가 죽기까지 순종하였다고 증거한다.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에 대한 언약적 반응으로서 인간의 절대적 순종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에는 은혜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과 믿음 곧 순종이라는 인간의 언약적 반응이 완벽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 언약, 곧 완전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에게만 아니라 그 후손에게도 할례가 요구되었듯이 아브라함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순종이 요구되었듯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보이셨던 그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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