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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십계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십계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2012-03-17 22:42:39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최초의 공적만남을 통해서 주어진 십계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첫만남에서 십계명을 주신 것일까? 시내산에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셨으며,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최초로 경험한 때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이 때는 하나님나라가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새롭게 그리고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시기이므로 십계명의 내용은 하나님나라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계명은 십계명의 출발이며 근본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인간세계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임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창조 직후에 일어난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그래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사건이며 이것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인간의 반역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신 이유도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를 하신 것이고 나아가 인간 존재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있는 것을 가르치시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인간의 모든 비참한 역사의 뿌리가 된 것이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죄라고 규정하였으며 아담으로 부터 나온 모든 인간이 죄아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 역사의 첫단추는 잘못 끼어졌으니 이어지는 모든 역사의 단추가 바르게 끼어질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첫계명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 역사의 잘못 끼어진 첫 단추를 다시 끼우라는 요구인 것이다. 십계명의 첫계명은 아담의 실패이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인간 역사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의 실패로 망가진 인간 역사와 흐트러진 창조질서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인 것이다. 병들어 버린 인간존재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망가진 인간 역사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위대한 교훈이 십계명의 첫계명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첫계명은 하나님나라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위대한 계시인 것이다. 하나님나라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 피조세계에 드러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주인이시므로 인간 없이도 온 피조물을 다시리시는 분이시지만 기이하게도 하나님은 직접통치보다는 인간을 통한 간접통치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특별한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데 있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2계명과 3계명은 1계명과 긴말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이 두계명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자계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계시가 없으면 반드시 왜곡된 신관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히 창조 직후에 일어난 선악과 사건은 왜곡된 신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뱀은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까 염려하여 주신 것이라고 속임으로서 인간에게 잘못된 신관을 심어주었고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의 생각을 중시하는 오판을 하게된 것이다. 선악과 사건은 잘못된 신관은 필연적으로 거짓된 인간관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뱀이 심어준 잘못된 신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착각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불순종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2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너를 위하여라는 말이 첨가된 것은 바로 모든 우상이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내어 만든 인간의 욕심을 반영한 것임을 지적해준다. 특별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피조물로 형상화하려는 것은 잘못된 신관의 대표적 사례인 것이다. 이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 역시 신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한 경외심과 존경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신관이 잘못되면 하나님께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과 태도가 잘못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진정한 순종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요 주인으로 인정하여야 할 것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으며 최초의 계명인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2, 3계명은 바른 신관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결국 바른 신관은 하나님의 자계시에 전적으로의존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계시인 성경에 무지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왜곡된 신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이 두 계명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풍부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자계시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필연코 왜곡된 신관에 물들게 될 것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의 모든 혼란은 바로 신관의 왜곡에 기인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는 소위 안식일 계명인 4계명은 엿새동안은 일하되 제칠일은 일하지 말고 쉬라는 단순한 외적 요구인 것처럼 보이지만 4계명 역시 앞의 세 계명과 분리된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의 근거로서 하나님이 엿새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말에 안식하셨으므로 그 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쉬심을 따라서 일하고 쉬어야 하는 존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이므로 그의 활동 역시 하나님께 의존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최초의 안식일 계명이 십계명 이전에 나타났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면서 한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안식일 계명이었다. 그것은 엿새 동안은 만나를 거두러 나가되 제육일에는 두배를 거두게 하시고 제 칠일에는 만나를 주지 않으시며 만나를 거두러 장막을 나가지 말고 쉬라고 하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이 주어진 이런 배경은 안식일 계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주어진 것은 그들의 생존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만나를 줍는 일을 통해서 그들의 생존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그들의 생존이 유지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 칠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고 장막에서 쉬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생존이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으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편히 쉬라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안식일 계명이 가르치는 교훈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고 편히 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이래 생존의 걱정과 근심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간 역사를 향한 해방과 자유의 선포인 것이다. 인간의 범죄로 땅은 저주를 받았고 그 결과 땅은 인간이 땀흘리고 고생하지 않으면 생존을 위한 식물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 이래 인간 역사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일 마실까 하는 먹는 문제와의 피흘리는 씨름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로 늘 근심하고 걱정하였으며 살아있는 한 한번도 이 문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실존의 이런 모습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죽기를 두려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안식일 계명은 바로 이런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라는 하나님의 초청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해방과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생존의 문제에 종노릇하게 된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의 저주가 풀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순종이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1,2,3 계명이 가르키는 교훈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계시를 따라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때 땅의 저주가 풀리고 인간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4계명은 1,2,3,계명의  결과인 셈이다. 사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의 생존의 문제를 그 분께 의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생존의 걱정과 근심으로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결국 안식이란 생존의 문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맛보는 기쁨이요 평안일 것이다. 이런 안식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 자부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실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전적인 의탁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믿음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인식을 가져다 줄 것임을 안식일 계명은 가르치는 것이다.

 

  5,6,7,8,9 계명은 모두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계명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천륜의 관계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상호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것이 나머지 5계명인 것이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과 살인, 간음, 도적질,거짓증거를 금하는 계명들이다. 이런 계명들은 인간 사회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규례이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 역사 가운데 이 규례를 유지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이 법과 도덕으로 만들어지고 가르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러나칼 하게도 인간 역사는 한번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했던 적이 없고 오히려 인간 역사는 부모와 자식의 갈등, 대량 살상과 살인 ,간음과 음란, 사기와 모함, 거짓말, 도적질로 얼룩져 왔으며 인간 미래가 이런 문제로 부터 점점 자유로워질 것이란 낙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가 없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지나친 경쟁과 상호 불신 가운데 피곤한 삶을 이어져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인간 상호간의 이런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은 이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십계명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아담의 범죄이후 나타난 최초의 살인자 가인과 이어진 가인의 후예의 어지러운 삶은 인간 상호간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간의 범죄의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간 상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 각자의 내면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며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지게 된 것이고 먹고사는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 종노릇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5-9계명에서 나타난 인간 상호간의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인간이 자신의 욕망으로 부터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며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 상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십계명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5-9 계명은 앞선 1-4 계명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1-3계명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가르킨 것이라면 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회복을 그리고 5-9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인간 상호간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역사의 슬픔은 인간 상호간의 얼룩진 관계의 문제를 하나님없이 해결해 보려고 한데 있고 그 결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채 인간 역사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내면의 탐욕을 지적하는 열번째 계명은 인간의 모든 문제가 결국 인간 내면인 마음의 문제이며 특별히 탐심의 문제인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 마음의 탐욕이 자신의 분수를 넘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것이며 그 탐욕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인간 상호간의 모든 갈등도 결국 마음속의 탐욕의 문제인 것을 가리킨다. 열번째 계명은 결국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이 고쳐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탐욕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 마음이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고는 인간역사는 희망이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구약의 예례미아서의 새언약이나 에스겔서의 새 마음에 대한 예언은 신약의 새언약을 통하여 인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대한 희망이었던 것이며 결국 이 예언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으로 성취된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 십계명의 1,2,3 계명을 성취한 것이라면 성령님의 강림과 역사는 십계명의 4-10 계명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과의 전격적인 관계회복을 위한 것이라면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을 바탕으로 한 인간 마음의 수술과 창조 질서의 회복이며 마지막에 나타날 성부하나님의 심판 사역은 창조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인간 역사의 대전환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십계명을 본다면 십계명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십계명은 흔히 생각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주어진 단순한 율법이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지키라고 명해진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인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역사적인 첫 만남에서 십계명을 주신 것일까?  아마도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무엇이며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이스라엘이 그 요구를 따르는데 얼마나 무능하고 죄악된 존재인지 알게 하시려고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닐까 ?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게 될 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고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십계명은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실 그 나라에 대한 풍부한 계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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