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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맹인을 고치심

요한복음 9장 맹인을 고치심

Tolle Rege/요한복음

2012-12-21 00:23:39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 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은 그가 맹인된 것이 죄로 인한 것이라 단정하고 누구의 죄로 맹인이 된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주목하셨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계시한 사건이었다. 유대인들과의 계속적인 대립과 갈등속에서 예수님은 엄청난 진리의 말씀을 부어주셨지만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귀머거리요 맹인인 것이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스스로 맹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진짜 맹인인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건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빛이 왔지만 빛을 볼 수 없는 맹인과 같은 사람을 고치러 오셨음을 나타내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신 날이 안식이라는 점이다. 이 일로 바리새인들간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한편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하고 다른 편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는냐고 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맹인을 치유하신 사건에 의심을 품고 여러가지로 맹인과 그 부모를 조사하였다. 바리새인들과 맹인  및 맹인의 부모와의 대화내용은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영적인 소경인가를 극적을 보여주고 있다. 맹인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부끄럽게 하면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라새인들의 주장은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이며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아나 이 사람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르치려는 맹인을 죄인 취급하며 쫒아내고 말았다.

 

. 맹인은 예수를 누구로 아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를 선지자라고 대답하였고 그의 부모는 대답을 회피하였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메시야로 시인하는자는 출교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예수님은 맹인을 만나서 내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었다. 아 질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느냐는 의미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이 보고 말하는 자신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이에 맹인은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였다. 맹인은 육체적인 눈이 떠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절하므로써 이제 영적인 눈도 떠진 것이다. 결국 맹인 치유사건은 예수를 메시아로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을 치유하실 예수님의 사역을 계시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하시며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임을 알고 겸손히 주님께 나아오는 자는 보게하실 것이지만 스스로 본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어둠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맹인이란 말인가? 라고 반문하였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차라리 너희가 맹인임을 인정하였다면 너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인데 맹인이면서도 스스로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신 것이다.

 

[추기] 2013. 4. 20 주일

 

날 때 부터 소경된 자가 누구의 죄로 그렇게 된 것인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가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히심이라고 대답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가 소경된 것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그가 소경된 그에게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불행한 현실들이 인간의 죄와 무관할 수가 없다. 다만 예수님은 여기 등장하는 특정한 소경된 자나 그의 부모의 개인적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언급하신 것일 뿐이다. 그대신 예수님의 관심은 그 소경된 자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일에 있었다. 예수님은 3절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을 4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이라고 바꾸어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며 동시에 자신의 사명은 바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임( work the work of him that sent me)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에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다.

 

 여기 나타난 소경 치유 사건은 매우 의미심장한 계시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고쳐주시기전에 소경에게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고 자신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렇다면 소경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의 떠지는 것이었다. 날 때 부터 소경된 자다 눈이 떠져서 이제 보게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요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하려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소경응 고쳐주신 행동을 유심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일, 곧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 보게하는 것이고 빛이 없어 어둠에 싸인 세상이 빛을 비추어 주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고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 때 부터 소경된 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날 때 부터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들 그래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절대적 무능 가운데 있는 자들, 바로 이들을 찾으시고 부르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세상에 빛이 없다는 의미이고 어둠뿐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어둠 뿐인 세상에 주님은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시러 오신 것이고 날 때 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지한 인간들이 눈을 떠서 빛을 보게 하시려고 오신 것임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의 소경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인정하지만 영적인 소경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나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눈 멀게 하려 함이로다" 고 하신 것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들은 고치시지만,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주장하는 교만한 자들은 보지 못하는 채로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말씀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의 계시인 것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바로 소경인 줄 아는 자, 병든 줄 아는 자, 죄인인 줄 아는 자를 부르고 고치시려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work the work of God)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의 일이 또한 우리 신자들이 이어 받아 해야할 일이다. 예수님이 그리하셨듯이 우리 신자들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세상을 비추는 빛인 것이다. 하나님이 에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신 것 처럼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어 자신이 하시던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추기 ] 2013. 7. 14 주일

 

  맹인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는 선포에 이어 일어난다. 날 때 부터 맹인 된 자는 세상에 빛이 왔지만 그 빛을 보지 못하는 비참한 인간의 실존을 상징할 것이다. 죄에 매인 모든 인간은 날 때 부터 맹인된 자와 같이 날 때 부터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날 때 부터 맹인된 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과 사망에 놓인 인간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실 것을 계시하시는 사건일 것이다.

 

  그래서 날 때 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육신의 눈만 뜨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는 영적인 눈도 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눈을 뜬 후에도 그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그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 정도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는 질문에는 "선지자"라고 대답하고 있다. 바라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하자 그는 "예수님을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후에 예수님이 그를 만나사 "네가 인자를 믿느냐?" 라고 물으시자 마침내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 라고 하며 예수님에게 절하였다. 날 때 부터 소경되었던 자와 스스로 진리를 본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간에 날카로운 대조가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추기], 2013. 7. 20일 주일

 

날 때 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눈을 뜨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맹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the work of GOD) 이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the work of him who sent me)을 그 맹인을 통하여 하신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 곧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일이란 무엇인가하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일이다. 날 때 부터 맹인되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한 일이 바로 어두운 세상을 비춘 일인 것이다. 날 때 부터 맹인되었던 자는 날 때 부터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진리를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알게된다. 어둠에 빛이 비추일 때 빛으로 나오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빛이 구원의 빛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의 빛이 되는 것이다. '보는 자들을 맹인이 되게하려 한다' 거나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는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이것이야 말로 절망적인 상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추기] 2019-11-06 17:33:33

 

요한복음 9장

이번에는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는 표적이 등장하는데 이 표적 역시 38년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일어났다. 이 표적과 관련해 예수는 이것이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표적은 앞의 음행한 여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세상의 빛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이었다. 날 때부터 빛을 전혀 볼 수 없는 맹인의 눈을 뜨게한 것은 예수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심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적이 아닐 수 없다. 이 표적이 안식일에 일어난 것은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 곧 진정한 쉼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를 통해 임재함을 그리고 예수는 그 나라의 도래를 임하게 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낸 표적이라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표적은 앞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마찬가지로 앞을 못보는 맹인과 같이 어둠 가운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보여준다. 그런데 맹인을 고치는 표적은 이전의 다른 치유 표적과 달리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구체적인 치유 행위가 나타나는 점이 특이하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는 자도 있었고 다른 자들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는냐 하여 서로 분쟁이 되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분명히 보고도 그 표적이 보여주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이런 모습은 이미 언급된 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요한복음의 서문을 생각나게 한다.  이어지는 눈을 뜬 맹인과 바리새인들과의 언쟁은 누가 정말 맹인인가에 대한 역설을 보여준다. 맹인이었던 자는 이제 표적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를 보는 반면에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깨닫지 못함으로 스스로 맹인임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눈뜬 맹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는 예수를 믿게 되는데 이 장면은 앞서 4장에서 예수가 사미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밝힌 장면을 연상케 한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날때 부터 맹인된 자와 바리새인들 전자는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는 자들이라면 후자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다고 하는 자들은 정작 예수가 누구신지를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함이라" 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차라리 맹인이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맹인이 표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다고 하면서 표적을 부인하는 바리새인들은 정죄를 받게 된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선포는 세상이 그 빛을 보고 빛으로 나아와야 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빛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 빛은 오히려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 된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는 빛으로 나아오는 결단을 촉구한다. 그 빛으로 나아오는 자는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