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Tolle Rege/요한복음
2012-12-23 01:12:26
"양의 우리" 비유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설교는 맹인 치유사건으로 발단된 메시아논쟁에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문맥상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 설교를 하신 것이다. 양의 우리는 작게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크게는 하나님나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으로 비유하신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다 절도며 강도이듯이 자신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직 양의 문이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에는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바울 사도의 선포가 생각나게 한다.
둘째는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히시는데, 도둑들이 오는 것은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지만 자신은 선한 목자로서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둑은 양의 생명을 해치고 삯꾼은 양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돌아보지 않고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나라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실 것을 계시하여 주신다. 여기서 도둑이나 강도 그리고 삯꾼으로 비유된 자들은 분명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를 자체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소경을 인도하려는 소경이며 사람을 만나 자기들보다 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드는 자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알고 양들도 자기 목자를 아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다시 한번 자신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양과 목자와의 관계 , 즉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로 동일시 된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가지신 관계를 신자들도 동일하게 누릴 것을 계시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 들지않은 다른 양들을 인도하실 것인데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는 이례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을 통한 구원이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이방에 퍼져나갈 것을 암시하신 듯하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위함이라고 하시며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지 강요된 것이 아니며 자신이 목숨을 버리시는 권세도 있고 목숨을 다시 얻는 권세도 있는데 이 권세는 바로 아버지께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철저한 자발적 순종이며 진정한 생명은 바로 이 순종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무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이었으며 특별히 하나님에게서 받은 능력이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양의 우리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다시금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소경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중에 혼란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수전절에 성전안 솔로몬 행각에 다니신 것을 보아 아마도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오신 이후 계속 머무시며 공적 사역을 계속하셨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에워싸면서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하나이까? 메시야라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였다. 예수님이 그렇게 밝히 자신이 메시야 이심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귀머거리인 유대인들은 알아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고 하시며 아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폭탄 발언을 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니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시편82편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 계시며" 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떠받드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곧 구약의 재판관, 통치자, 예언자들을 신(엘로힘=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어찌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자신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하느냐고 반박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 곧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한다고 주장하신다. 자신이 행하는 아버지의 일을 믿으면 아버지께서 자신안에 계시고 자신이 아버지안에 있음을 곧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문제는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이요 그들에게 볼 눈과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의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시니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것이다.
[추기] 2019-11-06 17:34:10
요한복음 10장
우리가 맹인인가? 라고 반문하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이르셨다.(9장 40-41절) 이제 10장에서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예수는 지적하신다. 그들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둑이고 강도들이다.(1절) 도둑이 오는 것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키는려는 것뿐이듯이(10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양들인 이스라엘을 망치고 해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양을 돌보는 목자가 아니라 삯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무책임한 자들이다.(12-13절)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며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9절) 또한 예수는 자신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한다.(14-15절) 이 대목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다. 스스로 백성들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예수가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다. 전자가 하나님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라면 후자는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시는 메시아이신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이런 비유를 알이듣지 못했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고도 그 표적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심을 믿지 못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 것이다. 수전절이 이른 때에 예수께소 예루살렘에 머무신 것으로 보아(22-23절) 7장에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후 계속 머무신 것으로 보이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다시 갈릴리도 돌아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도 유대인들과의 갈등 장면이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메시아라면 밝히 말하라고 다그친다.(24절) 예수는 이미 내가 너희에게 말했고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여준 표적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인데 너희가 믿지 않았다고 대답하신다(25절).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고 길게 가르쳤음에도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관으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비록 놀라운 표적을 행하는 비범한 존재였지만 안식일을 범하고 신성모독을 행하는 참람한 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종교기득권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는 자였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아니였다. 예수의 표적을 본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참이라 인정하고 예수를 믿었다. (41-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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