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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누가복음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 비유

Tolle Rege/누가복음

2013-07-14 01:07:06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이어서 나온 비유이다. 그 비유의 스토리는 이렇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고 결국 청지기 직무에서 쫒겨날 신세가 되었다. 청지기는 주인이 자기 직분을 빼앗으니 먹고 살 대책을 궁리하다가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 빚증서를 고쳐쓰도록 하였다. 청지기는 자기가 빚진 자들에게 이익을 주었으므로 직분을 빼앗긴 후에 그들이 자기를 영접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무리 없이 스토리가 이해가 가는데 그 다음 대목에서 문제가 생긴다. 청지기가 자기 소유를 낭비하므로 쫒아내기로 작정한 주인이 불의하게 빚을 탕감해준 청지기를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고 칭찬했다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가지고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지혜롭다고 하시며  이 청지기처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도 이해가 안되는 말이지만 이어지는 10-12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그리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 그리고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앞의 8-9절의 말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 비유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마친다. 그런데 이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므로 이 비유를 비웃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신 듯 하다.

 

   그렇다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앞의 세가지 잃어버린 비유에 이어진 비유인 듯 하다. 잃어버린 세가지 비유가 바리새인들이 멸시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면 블의한 청지기 비유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이이야 말로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불의한 자들임을 지적한 비유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다시 들여다 보면 8-9절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반어법적으로 사용된 일종의 조롱인 셈이다. 이 반어법을 직설법으로 다시 고쳐쓰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주인이 이 청지기의 불의한 짓을 지혜롭다고 칭찬하겠느냐? 불의한 자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들 보다 지혜롭다고 착각하지만 재물을 불의하게 사용하여 살 궁리는 한 이청지기는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이렇게 고쳐쓰고 나면 10-12절에 이어지는 작은 것에 충성되지 않은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지 않다거나 재물을 불의하게 사용하고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서 청지기 일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없게 연결이 된다. 결국 이 청지기 비유는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불의하게 사용하면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 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에 대한 교훈인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좋아하면서도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들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 비유를 듣고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사람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옳지 않음을 아신다고 지적하신다. 스스로 옳다하면서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자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실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의 때까지라함은 구약의 모든 계시가 요한의 때까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인 하나님나라 복음이 전파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시면서 간음을 금하는 율법을 예로 드신다. 그런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만이 간음이 아니라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간음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다. 이어지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부자와 거지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모세와 선지자를 읇조리면서도 사실은 모세와 선지자로 부터 듣지 않으려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인가를 지적하신 것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곧 구약에서 모세와 선지자가 말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을 말씀에 귀를 막은 것은 곧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거절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추기] 2017년 9월 10일 주일

 

   15장의 세 가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멸시하는 죄인들에 대한 비유라면 이어지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죄인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비유이다. 앞의 세 가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배척하지만 하나님에게 죄인들은 소중한 자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찾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진리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에 대한 비유인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결론은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로서(14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결국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죄인들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작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자들임을 고발한 것이다. 이런 문맥을 염두에 둔다면 불의한 청지기가 이 일을 지혜롭게 했다든지(8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는지(9절) 하는 구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반어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10절)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다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11절)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2절)는 이어지는 진술로 보아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신다고 책망하신다.(15절)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하는 자들이나 그것을 불가능하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일 뿐임을 이 비유는 고발하고 있다.

 

추기 [2017년 9월 20일 목요일]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탕자의 비유에 이어지는 비유로서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비유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불의한 청지기에 해당하는 자들은 바로 죄인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일 것이다. 청지기의 직무는 주인의 소유를 잘 관리하는 일인데 여기 등장하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였다.(1절) 그가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2절) 문제는 이 청지기가 자신이 직분을 빼앗긴 후를 대비하여 한 일이다. 그것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인의 소유를 팔아먹는 횡령을 한 것이다.(4-7절) 이 경우 청지기가 해야 할일은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제대로 청지기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을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로 한 것이다. 과연 주인은 이 청지기기 지혜롭게 일을 했다고 칭찬하겠는가? (8절) 당연히 아니다. 이런 식으로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친구를 만들면 그 친구가 그 청기기를 대접하겠는가? (9절) 당연히 아니다. 이렇게 주인의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는 청지기를 누가 신뢰하고 중한 일을 맡기겠는가? (10-12절) 이 불의한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청지기 일을 맡았을 때도 주인의 재물을 낭비했고 청지기 일을 빼앗긴 후를 대비해서도 재물을 횡령한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결론은 결국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충성을 하기 보다는 재물을 더 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13절) 죄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들임을 이 비유는 고발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비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설명하고 있다.(14절) 그들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된 마음을 아신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이다.(15절) 이것이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16절)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구약의 율법을 반대하지 않는다.(17절) 구약의 율법에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일이 간음이라면 하나님나라 복음에서는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앞의 두 가지 비유들과 이어지는 비유일 것이다. 여기서 부자는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일 것이고(19절) 나사로는 그들이 정죄하고 멸시하는 죄인들을 가리킬 것이다.(20-21절) 멸시받는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다.(22-23절) 부자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 앞에서 높임을 받던 바래시인들과 서기관을 의미할 것이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멸시받고 천대받던 죄인들을 가리킬 것이다.(25절)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증언하게 하여 자기 형제들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기를 간구한다.(27-28절) 그러나 그들에게 증언하는 자는 나사로가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이다. (29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 자는 비록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듣지 않는다. (31절) 결국 이 비유는 죄인들을 정죄하고 멸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야 말로 실상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 자들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를 자처하고 사람 앞에서 높임을 받으며 죄인들을 멸시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그들이야 말로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않는 죄인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된 마음을 아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