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
Tolle Rege/누가복음
2013-07-13 22:04:59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왔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하는 일을 비난하였다. 세리와 죄인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였다. 예수님은 이들(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에게 세가지 유명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였다. 양과 드라크마 비유는 모두 하나님이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멸시하는 세리와 죄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소유된 언약벡성으로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들임을 의미할 것이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내기까지 찾는 사람의 모습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 까지 부지런히 찾는 여자의 모습에서 잃어버린 언약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열심이 느껴진다.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임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멸시하는 세리와 죄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것을 이 비유는 보여준다.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는 앞의 두가지 비유보다 스토리가 매우 상세하면서 의미의 발전이 이루어 지고 있다. 우선 이 비유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이라는 관계를 설정하고 둘째 아들이 먼나라에가서 허랑방팅하다가 비참한 처지에 빠져 고생을 하였는데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아버지를 떠나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큰 아들이 등장한다. 앞의 두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이나 드라크마가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세리와 죄인을 가리킨다면 탕자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둘째 아들은 누구인가?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앞의 두 비유와 동일하게 세리와 죄인으로 본다면 큰 아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하기 어렵다. 큰아들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으로 보기도 여려운 것이 큰 아들은 둘째 아들과 달리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를 섬기고 명을 어기지 않은 모범적인 아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여러번 암시된 넓은 의미의 죄인이며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인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큰 아들을 유대인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산 반면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비참한 죄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인 셈이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룰 채우려고 해도 주는 자가 없는 둘째 아들의 비참한 처지는 하나님을 떠나 죽을 수 밖에 없고 아무 소망도 없는 이방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에 하나님나라 복음이 전해지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탕자의 비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는 듯하다.
[추기] 2017년 9월 10일 주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 일에 대해 비난을 했는데, 이것이 이 세 가지 비유의 배경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잃어버리기 이전에 어떤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엇음을 전제한다. 잃어버린 양의 경우 목자와 양이라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경우 주인과 주인의 재물이라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탕자의 비유의 경우는 당연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만일 이런 전제된 관계가 없다면 주인이나 아버지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멸시하는 죄인들이 바로 하나님이 애써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비록 그들이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자들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 그들은 잊혀지거나 버림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이고 다시 찾아야 하는 자들이다. 이 비유는 분명히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반영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인류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진술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구별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이런 특별한 관계가 바로 일종의 언약관계임을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택함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관계를 반영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인류 전체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죄라는 개념 자체가 오직 사람에게만 특유하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다른 피조물에게 죄라는 개념은 없다. 죄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가진 관계를 전제한다. 그 관계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이나 상황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멸시하는 죄인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시 찾아야 하는 잃어버린 자들이고 여전히 소중한 존재들임을 이 세 가지 비유는 보여준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와 달리 탕자의 비유는 매우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쌍방성을 잘 보여준다. 양이나 드라크마의 경우는 주인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일방성만 존재하지만 탕자의 경우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과 그 아들을 기다리고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환대가 함께 나타남으로 언약적 쌍방성을 잘 보여준다. 양이나 드라크마의 경우는 주인이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지만 탕자의 경우는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극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소유와 소유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비유들의 결론은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말로 끝난다. 탕자의 비유의 말미에 등장하는 맏아들은 당연히 여기서 죄인들을 멸시하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멸시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오히려 귀히 여기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이 세 비유는 잘 보여준다.
추기 [2017년 9월 19일 수요일]
어쩌면 맏아들의 분노는 이해할만하다.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을 극진하게 횐대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조그만 호의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맏아들의 주장 가운데 의심을 해볼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맏이들이 자신이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러한가? 정말 그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면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뻐하며 환대하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이버지가 기뻐하는 뜻이기 때문에 비록 자기 뜻에 거슬린다고 할지라도 정말 아버지를 섬겨 명을 거스림이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맏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분노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섬겨 명을 거스림이 없었다는 그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지 않았고 명을 거스린 것은 이미 드러났지만 맏아들이 아버지를 섬기지 않았고 명을 거스림은 그의 분노를 통해 드러났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거스린 자식들인 셈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째 아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이킨 반면에 맏아들은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고 돌이킬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탕자의 비유의 핵심이다. 탕자의 비유는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을 먿는 예수에 대한 비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정죄하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인정한 자들인 반면에 그들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야 말로 정작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임을 지적한 것이다. 탕자의 비유는 누가 죄인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자기 죄를 깨닫고 돌이킨 자인지가 중요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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