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누가복음

누가복음 11장 주 기도문

누가복음 11장 주 기도문

Tolle Rege/누가복음

2013-06-22 20:08:57


  제자들은 주님께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주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유명한 주 기도문인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로 시작된다. 이것은 기도의 핵심이 바로 이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도란 바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그 목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것이 기도의 핵심이 되지 않는 기도는 사실 기도가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고 할 때 거룩의 의미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라가 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신과 우상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므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구별되게 경배해야 함을 가르킨다.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라는 선포는 바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신과 우상과 구별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선포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유일하신 분이신 것이다.이렇게 거룩이란 말은 관계적인 의미인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에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세상모든 신들과 구별되시는 신이시므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외에는 어떤 신도 섬겨서는 안된다는 요구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거룩한 삶이란 윤리 도덕적인 삶이기 이전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계명이며 율법의 가장 근본 계명이 바로 하나님외에는 어떤 신도 섬기지 말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나머지 계명들은 바로 첫계명위에 서있는 것이니 첫 계명을 범하면 나머지 계명은 전부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생각할 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사실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때 비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란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때 세상에 임하는 것이다. 결국 주 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이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바로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 그리고 시험의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이어지는데 이것들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에 필요한 것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 그리고 죄와 시험의 문제를 이기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임을 주 기도뮨은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도의 중심이 먹고사는 문제와 죄사함의 문제에 치우쳐 있고 하나님나라 사상이 결핍된 것은 주 기도문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기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는 죄사함의 문제에서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왜냐하면 주 기도문은 분명히 우리가 남의 죄를 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는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쫒아내신 일을 두고 무리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좆아낸다 하고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바알세블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가운데 임하여있는 것이다. 악한 세대가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지만 주님은 요나의 표적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들은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나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멀리에서 찾아온 남방 여왕이나 모두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 심판 때에 남방 여인과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란 말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을 것과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표적이란 바로 유대인들이 거절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유대인을 떠나 이방에 퍼져나갈 것이요 그들이 유대인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등불을 켜서 움속이나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어서 모든 사람으로 빛을 보게하듯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온 세상을 비추는 진리의 빛이 될 것이다. 하늘로 부터 오는 포적을 보고도 알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주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고 책망하신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듯이 그들은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한 바리새인이 점심잡수시기를 청하였으므로 들어가 앉으셨다. 예수님이 식사전 정결규례를 지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기자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신다. 그들은 겉은 깨끗게 보이지만 속은 더러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한 자들이다. 그들은 십일조는 드리지만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사랑과 진실은 저버린 자들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정신은 언약적 사랑과 진실에 기초한  것이다. 주님의 이런 책망에 한 율법교사 곧 세기관이 반발을 하자 주님은 율법 교사 역시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신다. 그들은 어려운 짐 곧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전혀 율법을 기키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 조상들과 같이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동참한 자들이라고 지적하신다. 예수님의 이런 책망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앙심을 품고 여러가지 질문으로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노리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언제나 눈과 귀의 문제이다.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자들, 자기들의 실상을 지적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자들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다. 

 

[추기] 2015. 11.2. 월요일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대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소위 주기도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단순히 정형화된 기도문이 아니라 기도의 정신, 기도의 본질, 기도의 신학이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제시하신 후에 두가지 예화를 드셨는데 하나는 벗이 밤중에 떡을 꾸어달라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하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강조점은 간청함인 듯 하지만 사실은 벗됨에 있다. 왜냐하면 이야의 맥락에서 보면 벗이라는 관계가 있었기에 무리한 간청도 가능했고 벗이라는 관계때문에 그런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예화는 사람 아버지도 아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느냐는 이야기이다. 이 두가지 예화의 공통점은 기도는 기도를 듣는 자와 기도하는 자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바로 기도의 본질이라는 점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관계를 확신하고 간절히 구하고 찾으며 두드릴 때, 반드시 받을 것이며 찾을 것이며 열릴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의 간절함은 관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기도문은 바로 이런 기도의 신학을 전제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친 것이다. 관계를 확신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이다. 무엇을 구하여 얻을 것인가? 무엇을 찾아서 찾아낼 것인가? 무엇을 두드려서 열리게 할 것인가? 이 기도의 내용에 대해 주님은 세가지 큰 기도의 주제를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셨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둘때는 일용할 양식이며 셋째는 죄사람의 문제이다. 기도의 첫번째 주제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과 동일시 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용할 양식이다. 신자가 구해야 할 두번째 기도 주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젹, 물적 자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사람이 사는 것이 자기 능력이나 재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길에 달렸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 땅에서 신자가 살아가는 일상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신자의 일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주제는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신자의 일상 속에 임할 수 없다. 그리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도 없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기도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그런데 이 기도에는 조건이 부가되는데, 그것은 기도자가 먼저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기]  2018년 10월 14일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소위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빵을 꾸어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다. 예수는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밤중에 친구를 찾아서 빵을 꾸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고 그가 간청하는 것 때문에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이상하다. 그렇다면 친구가 아니라도 끈질기게 간청을 하면 청을 들어주었을 것인가? 친구이기 때문에 긴청을 들어주었겠지 만일 친구가 아니라면 아무리 간청한다고 해도 안들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라는 구절에서 친구는 빵을 간청하는 사람과 그 청을 들어준 사람의 관계를 지칭하기 보다는 빵을 간청하는 사람을 찾아온 친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빵을 간청하는 사람의 친구때문에 그 간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친구가 간청하기 때문에 들어준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예화가 말하려는 교훈은 하나님에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일이 중요함을 가르친다기 보다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갖는 친밀한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어지는 교훈과 그 의미가 잘 연결된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 아버지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구하면 얻을 것이고 찾으면 찾을 것이고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실 것임을 믿고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앞에서 가르쳐준 기도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