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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누가복음

누가복음 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

누가복음 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

Tolle Rege/누가복음

2013-06-22 18:26:01


   열두 제자외에 칠십인을 세우셨다는 기록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지금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시려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칠십인을 가시려는 각 동네와 지역으로 앞서 보내셨다는 것을 보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도 각 동리에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칠십인의 제자들은 아마도 열두 제자처럼 주님이 직접 택하신 자들이라기 보다는 주님을 쫓아 다니던 무리들 가운데 가까이 하셨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으로 보아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할 만한 자들은 매우 드물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저 병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지 진리의 말씀을 들을 귀는 없었던 자들이니 씨 뿌리는 비유에 길가에 떨어진 경우일 것이다. 말씀을 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 자들이다.

 

   주님은 칠십인을 보내면서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셨다. 병자들을 고치는 이적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표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을 혼자서먼 하신 것이 아니라 열두 제자외에도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자들을 세워서 동역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이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지만 하나님 홀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또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인간 창조의 이유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영광스럽게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셨던 갈리리 지방의 고라신과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행히신 모든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교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행하였던 권능을 차라리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의 말을 듣는 자들은 곧 주님의 말을 듣는 것이요 제자들을 저버리는 자들은 곧 주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결국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의 말과 주님의 말을 동일시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권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말이 바로 주님이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이 보내신 칠십인이 돌아왔는데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귀신을 쫒아냈음을 기뻐하며 보고하였다. 주님은 그들에게 사탄이 하늘로 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아직 사탄의 권세가 부수어진 것이 아니요 장차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사탄의 권세가 꺽일 것이지만 주님은 사탄이 하늘에서 내어쫒겨 그 권세를 잃어버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 그리고 원수로 표현된 사탄의 권세를 이길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결국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선물은 바로 사탄의 권세를 이길 능력인 것이고 이 능력의 출처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주님이 자기의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를 없이 하셨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작 기뻐해야 할 것은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즉 그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실인 것이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를 떠난 종교적 능력이나 영적인 권능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주님은 칠십인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자 귀신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이어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나갈 것이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님에게 이 사실은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때에 주님은 성령에 충만하시어 기쁨으로 기도하셨다.  주님은 이것을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숨기시고 또 계시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만물을 주셨는데 바로 이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은 이 비밀을 교만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나타내신다. 그런데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충만하게 계시하신 것이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롤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칠십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계시를 받은 자들이 된 것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와 왕들도 기대만 할 뿐 보지 못하던 그리스도를 지금 그들은 보고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복이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보는 눈이 없는 율법교사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자로 스스로 자부할 것이지만 정작 율법 계시의 총화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율법교사는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도전하였는데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일 해야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학문이 없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신 것이고 율법사의 모범 답안을 주님은 옳다고 하시며 그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이 제출한 모범답안을 이미 행한다는 전제를 가진 듯하다. 그리고 이 질문도 몰라서 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도 주님인 세라와 죄인들 심지어는 사마리인인들과도 상종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의 핵심은 사마리아인처럼 선행을 하라는 교훈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사의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이냐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사마리아인이 바로 율법사의 이웃이라는 대답을 유도해 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울법사는 바로 강도만나 벌거벗기고 매를 맺아 거의 죽게된 어떤 사람이 되는 셈이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자신을 시험하려는 율법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적하신 것이다. 스스로 율법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은 강도만나 죽게된 자 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있는 자이며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날 가망이 없는 자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나 비유의 교훈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강도 만나 자를 살려준 사마리아인을 통하여 울법사를 구하여 줄 시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넌지시 알려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하듯이 율법사는 주님을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도만나 죽게된 유대인을 살려준 사람이 그가 멸시했던 사마리아인 인 것 처럼 동일한 처지에 있는 율법사를 살려줄 이는 바로 율법사가 멸시하는 그리스도 예수이신 것이다. 그러나 율법사가 이 비유의 교훈을 받았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게 여기는 자였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아들을 숨기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