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7장 율법의 요구

마태복음 7장 율법의 요구

Tolle Rege/마태복음

2012-04-22 17:54:18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7장은 갑자기 앞의 문맥과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앞의 문맥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교훈인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구약의 율법의 법정신이 어떻에 신약에서 성취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다. 그것은 구약율법 대신에 새롭게 제시된 신약의 율법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이미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법정신을 충만하게 해명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역시 구약 율법을 해명해 가시는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울법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하고 돌아보라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기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끌을 빼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지 남을 재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구약에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율법을 사용하지 않고 남을 재는 잣대로 율법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거룩한 것이 개에게 혹은 진주가 돼지에게 던져진 꼴이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남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은 개나 돼지가 귀하고 거룩한 것을 알지 못하고 발로 밟는 것과 다름이 없이 거룩한 율법을 훼손하는 짓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해볼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율법의 요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율법의 요구를 따를 도덕적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지도 결여하고 있음을 자인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깊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율법을 자신에게 제대로 적용하지 않을 증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교훈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질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는 말씀은 자신안에 없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능력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자식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아비가 없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냐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것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 율법의 요구와 동떨어진삶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어 험하여 찾는 자가 적은 법이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러가는 자가 많다.

 

  결국 열매로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듯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냐 못하느냐로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 곧 율법을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 축귀, 권능행함 등 종교적 행위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불법을 행한 자들로 간주하실 뿐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근본 정신을 해명하여 주셨고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천국백성의 삶임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이 교훈을 듣고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그래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지만 이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듣고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이 매우 권위가 있었으며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추기] 2019-11-06 17:04:37

마태복음 7장

6장에서 시작한 외식에 대한 교훈은 7장 5절에서 끝난다. 여기서는 또 다른 차원의 외식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율법을 가지고 형제를 비판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잣대를 남에게 들이대기 전에 먼저 자신에 게 들이대어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법정신이다. 율법은 먼저 자신이 스스로 그 법에 순종하여 살라고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남을 판단하는데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빼어냐야 한다 그래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는 것이다.(5절) 하나님은 율법을 개나 돼지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백성에게 주셨다. 그런데 율법의 법정신을 무시하고 외식한다면 그것은 마치 개가 거룩한 것을 돼지가 진주를 알지 못하고 발로 밟고 대드는 꼴이 되는 것이다.(6절) 그렇다면 천국 백성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천국 백성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6장33절)  그 나라와 그 의를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7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마다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 것이다.(8절)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11절) 하늘의 하나님은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대접해 주신다(11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요구하시는 궁극적인 법정신이다. 율법을 따라 사는 길은 좁은 길이고 길이 협착하여 가는 자가 적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13-14절) 율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율법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20절)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듯이(19절)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21절)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축귀를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할지라고 율법을 따라 열매맺지 못하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끝났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나라의 헌장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율법에 진정으로 순종하여 열매맺는 삶을 살라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제 마지막 경고가 주어진다.  산상수훈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지만, 만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위에 지은 것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크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