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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5장 산상 수훈

마태복음 5장 산상 수훈

Tolle Rege/마태복음

2012-04-22 17:50:04


 드디어 소위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최초의 본격적인 교훈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사람들의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심으로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향하여 일장의 긴 설교를 시작하셨다. 산상보훈이라는 이 설교는 예수님의 최초의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심장하다.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께서 처음하신 말씀이니 그것은 당연히 가장 중대하고 핵심적인 교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산상보훈 이전에 예수님이 하신 최초의 선포는 4장17절에 나타난 바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산상수훈이라는 긴 설교가 이어진 것인데 그렇다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최초의 선포에 대한 해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주제는 당연히 가까이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의 회개에 대한 것임이 틀림없으니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산상수훈을 바라보아야만  산상수훈의 핵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첫머리는 소위 팔복이라고 명명된 교훈인데 그 팔복의 교훈이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가진 것을 보아도 산상수훈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팔복에는 8가지의 복있는 사람들이 예시되고 있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예시된 8가지 복있는 사람들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 8가지 복있는 사람들이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그 복의 내용이 철저하게 구약적 배경을 가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선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당연히 시편42편을 생각나게 하는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영혼의 소유자를 가르키는 말일 것이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복이있는 사람들이다. 천국은 바로 그런 자들의 것이다. 반대로 마음이 부요한 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든 자들은 마음이 부요한 자들이며 천국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들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영혼 곧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복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복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복의 시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어지는  두번째 복있는 자인 애통하는 자의 애통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첫번째 복있는 자와 관련시켜서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될 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하시나 자신은 자극히 낮고 불결한 죄인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심정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무지와 비참함을 더욱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통하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영혼이 느끼게 되는 자기인식에서 나오는 슬픔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애통은 자기 존재의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며 고통의 신음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반드시 이런 자들을 위로하실 것이며 그들의 애통을 돌아보실 것이다.

 

  이어지는 세번째 복있는 사람인 온유한 자는 말 그대로 겸손한 자, 마음이 낮아진 자를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란 앞선 애통하는 자가 도달하게 되는 영혼의 상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애통하는 자는 마음이 지극히 낮아져서 자신이 먼지와 티끌과 같은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지극히 낮아진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먼지와 티끌같은 존재임을 알고 마음이 지극히 낮아진 자, 이런 자가 바로 온유한 자인 것이다. 사실 인간의 죄악의 출발은 스스로 높아진 마음 즉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었다. 인간역사의 모든 비참함이 바로 이 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간의 최초의 범죄인 선악과 사건은 바로 인간의 교만이 죄악의 뿌리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비로 이 교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의미한다. 창조시에 인간에게는 땅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인간은 범죄함으로 땅의 도전을 받게되고 심지어는 땅에서 내어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을 받는다는 말은 바로 범죄하기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땅을 다스리는 권세가 회복되는 것 다시 말하면 창조의 목적이 회복되는 것을 강력히 암시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복있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데 이것도 당연히 앞의 복있는 자와 연관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팔복은 서로 독립된 복있는 사람들을 나열한 복의 목록이 아니라 천국 백성들의 영혼의 발전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애통하는 자의 마음은 지극히 낮아져서 온유한 심령을 갖게 되듯이 애통하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의 애통은 바로 불의하고 죄악뿐인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나오는 슬픔이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당연히 불의하고 죄인인 자신이 어떻게 무한히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인가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없는 의로움,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의로움을 마치 주리고 목마른 자가 음식과 물을 찾듯이 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이런 영적 굶주림과 기갈을 반드시 채워주실 것이니 이런 자들이 복있는 천국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복있는 자는 남을 긍휼이 여기는 자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진다는 의미인데 이런 마음은 그저 착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에 대하여 애통하고 마음이 낮아지며 의를 구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품게되는 심정일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불문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의 심정은 바로 자신에 대한 깊은 애통을 거쳐 온유한 심정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갖게되는 정당한 심정이니 곧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니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여 마음이 애통한 자 그래서 마음이 낮아지고 의를 간절히 구하는 자 그리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 이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다. 여기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을 도덕적 청결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언약적 청결일 것이다. 하나님을 찾았지만 자신의 더러움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자에게 그 더러움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바로 인간에게 이런 복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열심이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뵙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평케된 것처럼 화평케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화평케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평케 하며 나아가 사람과 만물의 관계도 화평케 하는 자들이니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 회복에 쓰임을 받는 자들 곧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화평케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데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박해는 받는 자는 복이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팔복은 정확하게 하나님나라가 어떻에 인간의 심령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에 임하는지를 보여준다.

 

  에수님은 팔복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이 교훈을 듣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바로 바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임을 상기시키신다. 그것은 곧 이 천국 복음을 듣는 자들이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도래케 할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를 도래케 하는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상관 관계에 대한 명확한 교훈을 얻게되는데 그것은 신약은 구약의 성취 곧 실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알지 못하고는 신약에서 구약이 어떻게 성취된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신약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을 알기 위하여는 구약을 충분히 알아야 하며 구약적 맥락을 가지고 신약을 읽어야 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약의 율법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신다. 예컨데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은 단순히 살인을 하지않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의 진정한 화목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이 외적 행동을 규제하는 것인데 신약은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구약의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형제와의 진정한 화목이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간음의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 율법의 정신은 단순한 외적 간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대하여 취해야 할 정당한 태도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헛 맹세를 하지말라는 율법의 정신도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품어야 할 정당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동해보복법이나 원수를 갚는 문제에 관한 율법도 궁극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정신을 가르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신약의 율법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 율법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법정신을 해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정신을 완전히 이루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다. 천국의 도래는 이렇게 구약의 율법이 지향하던 법정신의 완전한 성취로 나타나는 것이다.

 

 

[추기] 2012. 12. 7

 

  예수님이 구약의 십계명중에 몇가지를 예로들어 그 법정신을 다시 해석해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법을 완전하게 곧 그 본의를 성취하러 오셨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구약 율법 해석은 구약 율법의 본의가 무엇인가를 해명하여 주는 동시에 구약율법의 본의와는 거리가 먼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지적하시려는 것이었다. 특히 누구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살인법과 간음법의 법정신을 해명하여 주셨을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인죄와 간음죄를 매일 범하고 있는 자임을 알고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려는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지키기에 너무나 무능하고 더러운 자인가를 자각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마음이 온유한 자인 것이요 천국은 바로 이들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천국백성들이 바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의 소금이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율법은 결국 마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마음으로 부터 율법의 요구를 따르지 못하는한 결국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마음의 문제를 고치시려는 것이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심어주심으로 마음으로 법을 순종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회복됨으로서만 가능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르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말하였다.

 

 

[추기] 2013. 10. 28

 

  성경에는 복이라는 말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보다는 복이 있는 상태나 복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복이 무엇인지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시편 1편에서는 복이 있는 자는 어떠 어떠한 자라고 복이 있는 자 곧 복을 받은 자가 삶에서 나타내는 모습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복이란 인간의 마음에 느끼는 만족이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시편에는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한다. 이 말 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결과는 축복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바로 복의 실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구약적 복의 관점으로 우리는 산상수훈의 소위 팔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팔복을 어떤 행위를 하면 그 댓가로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읽을 수가 없고 그 대신 복을 받은 자가 어떠하다는 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 복이란 바로 천국이다. 이런 식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혹은 복을 받은 자는 심령이 가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가 바로 천국을 소유한 자이다. 이렇게 잃어야 할 것이다.

 

 복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초월적이고 신령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복은 눈에 보이거나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복은 신령한 것이므로 감각할 수 있거나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 자체를 정의하거나 설명하기 보다는 복을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성령의 역사는 보이지 않지만 그 역사의 결과는 보이게 된다. 복이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복을 받은 자의 상태 혹은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팔복의 구조는 서로 다른 8가지 복이 아니라 한 가지 복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을 받은 자는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는 받는다는 것이다. 복은 보이지 않지만 복의 결과인 이런 것들을 보면 그가 복을 받은 자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고 천국이란 바로 복을 받은 자들의 것이다.

 

 

[추기] 2014. 1. 26]

 

팔복이라고 불리우는 이 부분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곳이다.

팔복에서 특별히 의에 대한 말씀이 두번이나 나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나라에서

의가 차지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하시고

10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있다고 하신다.

10절에는 특별히 11절과 12절이 부가적으로 덧붙여질 만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팔복에 나타난 복있는 자의 덕목들은 모두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특징일 것인데

그 중에서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이렇게

의라는 말이 두번이나 나옴으로서 하나님나라에서 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것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11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라고 하심으로써

의라는 말의 의미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으며

12절에서는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는 말로써

구약의 선지자들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 백성의 중요한 덕목이 의를 갈망하는 것이고 나아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는 받는 것이고

구약의 선자자들이 받았던 동일한 박해를 받는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의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의, 곧 옳음이란 율법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든지 어떤 말이나 행위든지 그것이 옳으지 그른지 여부는 

율법에 따라 판정된다.

율법에 적합하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른 것이다.

율법으로 표현되는 이 판정기준은 넓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뜻이다.

결국

여기서 의에 주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의미할 것이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다가 그로 인하여

박해는 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이 매우 중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데 그 뜻에 어떻게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가?

주기도문은 그저 사람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그 뜻을 땅에서 이루시길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기도자가 그 뜻을 땅에서 이루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일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시지만 그 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의 백성이 그 뜻에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그 뜻을 갈망하여야 하고 그 뜻을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라와 의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보아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동일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 주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하심으로

주님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신 분이며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신 분임을 시사하신다.

곧 주님은 하나님의 뜻의 절정이며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은 것도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팔복은 12절로 끝나는게 아닌 것 같다. 이어지는 13-16절의 소금과 빛의 비유는

의를 추구하는 자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맛을 내는 유일한 존재가 소금이듯이 ,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존재가 빛이듯이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의미없는 세상에 의미를 주며

그들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져주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그렇다 하나님나라는 이런 것이다.

허무한 세상에 소망을 주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세상에 생명을 비추어준다.

누가 그 일을 하는가? 의에 주리고 의를 위하여 기꺼이 박해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그 일을 한다. 아니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리고 이 교훈은 17절 이후로 계속 이어진다.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0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율법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은 뜻은 완전히 다 이룰 것이다.

의에 주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그 백성들을 통하여....

이것이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아닌가?   

 

 

[추기]  2014. 4. 11  의란 무엇인가?

 의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의라는 말처럼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사용된 용어가 드물다.  그만큼 의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의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옳다, 바르다는 뜻인데  성경에서 의를 말할 때는 옳고 바른 것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뜻, 혹은 구체적으로 계시된 법, 혹은 언약법에 합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의란 곧 하나님의 뜻 그 자체  혹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이나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나라를 말할 때, 이 의를 떠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나라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먼 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동일시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루시는 경륜적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의를 추구하는 자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여기서 천국백성의 특징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제시된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그들은 복있는 자들이며 그들이 추구하던 의가 성취되어 그들이 그 의로 배부를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세상이 신자들을 욕하고 거짓으로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셨다면 그리스도인에서도 핍박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핍박은 어둠이 빛을 미워하며 거짓이 진리를 대적함으로 생기는 불가피한 핍박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 빛이 아니거나 진리에 서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과 거짓이 본질인 세상은 반드시 빛과 진리를 미워하고 배척하기 마련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 같이 핍박을 받았다.  그런데 구약의 예를 보듯이 그 핍박은 교회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도 온다. 왜냐하면 세상은 교회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천국 백성의 중요한 특징이며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그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왜나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며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고난은 하나님나라에 필연적이다.  왜나하면 세상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국백성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천국백성들은 하나님나라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추구하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고난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받는 고난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 고난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오는 고난이다.  예수 그리스도 받으신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고 사도들이 받은 고난이 동일한 고난이다. 고난은 세상을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성격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시며 의의 절정이요 성취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고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는 것이며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는 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의로운 것은 그가 언약에 신실할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를 위하여 핍박릏 받는다는 것은  언약에 신실함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언약에 신실하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약법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언약법에 순종하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신자들이 언약법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신자들을 핍박하지 않는다.  순종이 없는 곳에는 고난이나 핍박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나를 인하여" 핍박읋 받는다고 부연하심으로써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신다.  우리가 의를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언약적 신실함의 화신이시며 절정이시다.  왜냐하면 에수 그리스도는 율법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미워하는 천국백성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천국 백성만이 무의미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소금이며  천국 백성은 빛이 없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이것이 천국 백성의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며 사명이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천국백성으로서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천국백성되는 조건이 아니라  천국 백성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며  등불은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어 집안을 비추게 하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을 비추게 하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세상에 의미를 주는 소금, 세상을 비추는 빛은 다른 것이 아니라 천국백성의 착한 행실이다. 그 착함은 세상이 인정하는 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뜻에 부합하는 착함이며  세상이 반대하고 미워하는 착함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과 반대를 받는 그 착한 행실로  세상은 자의든 타의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추기] 2014. 4. 14 천국백성의 특징

 

천국 백성의 근본적인 특징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천국백성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천국을 추구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를 구하는 자의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이런 심령의 가난을 알지 못한다.  육신의 만족과 정욕을  추구하는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심령의 가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애통이란 무엇인가?  천국 백성이 무엇애 대하여 애통하는가?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애통이다.  자신안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며  그 나라가 공동체안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로 인한 애통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죄성애 대한 애통이며 슬픔이다. 세상에 속한 자는 이런 애통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천국 백성만에게만 있는 애통이다.  언약적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언약 백성의 애통이다.

 

 

[추기]  2014. 4. 15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은 살롬으로서 관계를 전제한 단어이다.  인간에게 최초이며 가장 근본적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다른 피조물과는 비견할 수 없는 독특한 관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런 독특한 존재로 지어짐으로써  인간과  하나님간에는 상호교통이 가능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을 때 이 관계의 샬롬은 깨어져 버렸고  이것이 인간 존재와 역사의 비극의 출발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부터 하와를 지으시고 그를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하와는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어지자 아담과 하와의 샬롬도 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최초의 인간 관계의 깨어짐은  그 후손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간역사의 모든 문제는 인간과 인간사이에 샬롬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고안도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은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어진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샬롬을 회복하는 일이 없이는 인간과의 샬롬도 회복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 역사의 문제도 해결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샬롬을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샬롬을 만드는 자요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샬롬을 만드는 자요  더 나아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샬롬을 만드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다.  이렇게 샬롬을 만드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최초의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아담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자이다.  아담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였고 그 일을 이루시려 오신 두번째 아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가 이루시는 창조목적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추기] 2019-11-06 17:03:28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마태복음의 첫번째 강화가 5/6/7장에 등장한다. 예수님의 첫번째 메시지가 4:17에 나타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면 산상수훈은 이 선포에 대한 구체적인 강화라고 볼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이 왕이되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니 이스라엘도 왕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왕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인가?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은 왕이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3-12절은 흔히 팔복으로 알려진 구절인데, 이것은 8가지 복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천국 백성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것들이 아니라 천국백성들이 가진 다양한 속성들, 그러나 사실은 그 모두가 천국 백성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실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 백성들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그리고 맛을 잃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경룬의 도구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시고 천국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이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민민이 복을 받게하시려는 것처럼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목적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들은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세상이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13-16절)  그렇다면 천국 백성들은 어떻게 이런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즉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이뤄진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왔다고 말한다.(17절) 하나님은 천국 백성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이어지는 구약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의 그 궁극적인 법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고 더 나은 의, 완전한 율법 준수란 바로 그 율법의 근본 법정신을 성취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법정신은 단지 사람을 죽이기 말라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형제와 화목하라는 것이고 간음하지 말하는 계명의 법정신은 단지 육체적인 간음을 넘어 여자를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며, 맹세하지 말라는 계명의 법정신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지 말하는 것이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계명의 법정신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며 악한 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의 법정신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천국 백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그들도 온전하게 행해야 한다.(48절) 그럴 때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며 세상의 소금이 되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회개의 내용인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