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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사무엘상의 내러티브

사무엘상의 내러티브

2018-11-15 00:44:50


사무엘상 1-3장

  사무엘서는 한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면서 왕정 시대를 연 사무엘이 등장하는 배경 이야기로서 의미를 가진다. 때는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이다. 한나는 이이를 갖지 못해서 괴롭힘과 업신 여김을 당했고 이 문제로 주님에게 나아가 기도했다. 한나는 주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아들을 주시면 그 아이의 한 평생을 나실인으로 주님에게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한나가 이런 특별한 서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는 왜 하필이면 주신 아들을 평생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 것인가?  한나의 서원의 동기는 그녀가 사무엘을 주님에게 바친 후에 드린 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깨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대하는 간절함으로 마친다. 한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어두운 사사시대에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실 그 날을 기대하고 있다. 한나의 기도와 연관시켜서 한나의 서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한나의 서원이 단순히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일에 대한 개인적 감사를 넘어 자신의 서원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하나님이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정하고 준비하심으로 삼손이 사사로 등장했다면 사무엘은 한나의 서원으로 나실인이 되어 사사로 등장하게 된다. 삼손은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하신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서 실패한 자라면 사무엘은 한나의 서원으로 준비된 자이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사사라는 점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이어지는 엘리 집안의 타락상은 사사 시대의 희망없는 암울함을 보여준다. 제사장이자 사사인 엘리와 한나는 매우 대조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엘리가 이스라엘의 사사이자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행한 인물이라면 한나는 비록 아이도 못낳는 불쌍한 여인지만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게 드린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 엘리에게 심판을 경고했고 이어서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도 반복해서 임박한 심판을 경고했다. 그러나 엘리는 이런 두번에 걸친 경고를 듣고 그분은 주님이시니 그분의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왜 하나님이 두번에 걸쳐 미리 심판을 경고하셨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엘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엘리는 이미 이런 하나님이 생각과 마음을 헤아릴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에게 나는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을 따라서 행동하는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행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저절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행하는 자들을 통해 임한다. 이것이 불변하는 하나님나라의 진리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는데 있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엘리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자라면 이스라엘의 미천한 여인 한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행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한나의 서원을 받으셨고 그 서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마지막이며 가장 위대한 사사, 사무엘이 등장하게 된다. 

 

사무엘상 4-7장

  블레셋과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배했다. 그때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자신들이 패배한 이유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들 한가운데 있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크게 패배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전에 조상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 전투에서 언약궤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함으로 기적적인 결과를 경험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여기서 언약궤를 이스라엘 군대 한가운데 가져오겠다는 발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참혹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고, 이 소식을 듣고 엘리도 충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다. 하나님은 블레셋 지역에 재앙을 내리셨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그 재앙이 언약궤 때문임을 알고 언약궤를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언약궤가 성소가 있는 실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럇여아림으로 돌아오고 그곳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무려 이십년을 머물게 된다. 언약궤가 성소가 있는 실로로 돌아오지 않고 오랜 세월 기럇여아림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다. 이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등장하였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에게 돌아오라고 권면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주님에게 돌아오기 위해서는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과 여신상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겨야 된다고 말한다. 앞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주님이 자신들을 떠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언약궤를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사무엘은 주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자들이라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행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의 권면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들을 없애고 주님만을 섬겼다. 그리고 사무엘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주시길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그 결과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무릎을 꿇고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손이 불레셋 사람들을 막아주셨다.

 

사무엘상 8장

  사사는 세습이 되지 않는데 왜 사무엘은 자기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운 것일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릇된 길을 간다고 말하면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가 된 것은 사무엘의 뜻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요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이 늙었으므로 사무엘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사사가 세습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에게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로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제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고 사사시대의 근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왕이 없다는 말은 인간 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지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라고 요구한 일이나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 일은 모두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 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함으로서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공식화하고 있다. 이 대목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이 된다. 왜냐하면 이후 이스라엘에는 왕정시대가 시작되어 바벨론에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구에 사무엘은 매우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고 하시며 다만 그들이 요구한 왕 제도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미리 경고해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분명히 왕 제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도가 아니며 하나님이 그 제도를 허락하신 일도 부득이 하신 일임을 보여준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은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한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 말을 듣고 자신들의 요구를 철회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렇게 일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도 모든 이방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한다며 자기들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왕을 세우려고 하는 주된 이유는 이방 민족(이 당시는 주로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하에 있는 이유는 인간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데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돌이키기 보다는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임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조건 막거나 강제하시기 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돌이키기를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사무엘상 9-11장

  주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라고 명하셨다. 주님은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해낼 것이라고 하시며,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반복하여 주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비록 이스라엘은 주님을 버렸지만 여전히 주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 부르시며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을 요구했지만  주님은 그 인간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하시겠다고 하신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온 이스라엘의 기대가 그와 그의 집안에 걸려있다고 말할 때,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며 자신의 가족은 배냐민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이 없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한다. 외적으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시는 주님의 뜻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하는 일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물론 사울 자체가 보잘 것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사울은 다른 사람들 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커보였고 사무엘은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사람이 없다고 그를 평가했다. 그러나 몇몇 비류들은 사울이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비천한 집안 출신임을 보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나 암몬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대승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인정되었다. 

 

사무엘상 12장

  이렇게 사울이 왕으로 인정되어 왕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으로써 이제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 사사로서 자신이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착취하거나 억압하거나 뇌물을 받은 일이 있느냐고 백성들에게 묻는다. 사무엘이 이렇게 묻는 이유는 이제 이스라엘이 요구해서 시작된 왕 제도하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주님이 경고하신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세운 왕으로 인해 울부짖게 될 것이다. 이어서 사무엘은 출애굽으로 부터 시작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회고하면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원수들에게서 건지시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사무엘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신실하게 왕노릇을 하셨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다스릴 왕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님은 부득이하게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을 허락하셨지만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되심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주님을 두려워하며 그분만을 섬기며 그분에게 순종하여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의 왕이 다 같이 잘될 것이지만 만일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인간 왕이 세워졌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여전히 악행을 한다면 이스라엘도 망하고 왕도 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쓸데없는 우상에게 반하여 그것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한다면 주님은 이스라엘을 기꺼이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 도와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의 귀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사무엘상 13장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했고 이를 발단으로 블레셋과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에다 기마가 육천이나 되었고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서 셀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스라엘 군대는 병거나 기마는 물론 변변한 무기도 없는 실정이었으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이 블레셋에 싸움을 건 일은 매우 무모한 짓으로 보인다. 블레셋의 위세에 눌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마다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고 더러는 요단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지역으로 달아났으니 말이다. 사울은 길갈에 남아있었지만 그들 따르는 군사들은 모두 떨고 있었다. 사울은 이레 동안 기다렸으나 사무엘은 길갈로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두려워 사울에게서 떠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사울은 더 이상 사무엘을 기다릴 수 없어서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그런데 사울이 번제를 마치자 마자 사무엘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무엘은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사울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일부러 나타나지 않고 기다렸던 듯 하다. 사무엘이 꾸짖자 사울은 주님께 은혜를 구하기도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길갈로 내려와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할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변명한다. 사실 사울은 사무엘이 오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자신을 떠나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말 사울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했다면 그는 사무엘을 기다렸어야 했다. 사무엘이 책망한 것은 단지 사울이 번제를 드렸다거나 자신을 기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블레셋과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을 의지헸기 때문이었다. 사울의 이런 불신앙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이며 주님은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왕이 있든 없든 이방과 달리 이스라엘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왕을 폐하시고 자기 마음에 맞는 자를 찾아서 왕을 세우신다.

 

사무엘상 14장

  강력한 블레셋이 두려워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고 도망하는 상황에서 블레셋의 전초 부대를 먼저 공격하는 요나단의 행동은 매우 무모하고 경솔해 보인다. 요나단은 사무엘이나 사울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비록 무모해 보이고 경솔해 보이지만 요나단의 이런 행동은 그의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믿었다. 백성들이 두려워 흩어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더 이상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드린 사울의 행동은 일견 합리적이고 납득이 될 수 있는 것처첨 보이지만, 사무엘이 보기에 그의 행동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이었다. 사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더 중시했다. 이에 반해 요나단의 행동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납득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분명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요나단은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상황을 넘어 계신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사울의 행동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불신앙에서 나왔다면 요나단의 행동은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울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요나단은 자기 소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일은 결국 상황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님은 요다난의 믿음을 받으셨고 블레셋의 진영에 큰 공포를 보내어 혼란에 빠지게 하셨다. 사울은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 말하던 중, 블레셋이 자중지란에 빠진 것을 보고 다시 궤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말한다. 아마도 사울은 블레셋과 대치한 답답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다가 블레셋 진에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더이상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고 빨리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렇게 사울은 항상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울과 그를 따르는 온 백성이 함께 함성을 지르며 싸움터로 달려가 보니 블레셋 군인들이 저희끼리 서로 정신없이 쳐죽이고 있었다. 이 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울은 이 여세를 몰아 확실한 승리를 거두려고 군인들에게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말고 싸울 것을 명령하고 맹세까지 시켰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시킨 것이다. 사울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상황을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었고, 이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여 동이 틀 때까지 그들을 약탈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제사장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보자고 권하였다. 그제서야 사울은 마지못해 형식적으 로 하나님께 여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사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사울은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허물이 발견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한다. 사울은 허물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라 단정하고 허물이 발견된 자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한다. 결국 이로 인해 요나단이 걸려들었고 사울은 요나단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일을 하나님을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이 큰 승리를 안겨준 요나단을 죽일 수 없다고 온 백성들이 반대했고 결국 사울은 자기 뜻을 굽혔다. 이렇게 사울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고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일생동안 불레셋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서 용감한 사람이나 힘센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에게로 불러들였다. 사울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이 아니라 군대의 힘에 달려있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15장

  사무엘은 사울에게, 주님이 나를 보내셔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셨으니 이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한다. 주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목적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되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게 하려 함이다. 이스라엘은 사울의 백성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이며, 따라서 사울은 그 백성을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 이번에 주님은 사울에게 아멜렉을 쳐서 진멸시키라고 명하신다. 주님은 아멜렉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의 길을 막고 대적한 일을 기억하고 계신다. 아말렉의 악행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을 대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주님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쳤지만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양떼와 소떼 가운데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을 꾸짖자 사울은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떼 가운데 좋은 것을 남겨 끌어왔다고 변명한다. 그러자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중 주님이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느냐고 반문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사실 사울의 변명은 거짓이었다. 나중에 사울이 자백한대로 그가 주님의 명령을 어긴 이유는 군인들이 두려워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한 것이었다. 아마도 군인들은 전리품을 남기지 않고 죽이는 일에 반대했을 것이며 아각을 살려둠으로써 무슨 댓가를 받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울은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했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사무엘은 왕이 주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이미 길갈 사건에서 사울은 경고를 받았지만 사울은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아멜렉 사건에서 그 경고는 실현이 되고 말았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고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사무엘상 16장

  드디어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왕 제도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일은 이스라엘의 왕제도가 이방과 다름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왕을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왕 제도가 시작되더라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왕을 폐하시고 자기 마음에 맍는 자를 왕으로 세우신다. 왕제도가 시작되는 시기에 하나님이 사울을 세우고 폐하시며 다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일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무엘은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 바로 주님이 택하신 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달랐다. 하나님은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시지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이제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은 사울이 아니다 다윗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사울은 여전히 왕노릇을 하고 있고 다윗은 사울을 시중드는 하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임이 드러나게 된다.

 

사무엘상 17장

  골리앗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그가 이스라엘이 감히 맞서 싸울 수 없는 엄청난 용사임을 잘 보여준다. 골리앗을 보고 사울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히 그들이 용기가 없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골리앗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전혀없는 매우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골리앗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적인 벽이었다. 그래서 골리앗이 사십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싸움을 걸었지만 사울과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을 모욕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제안을 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중시하는 사울에게 다윗의 이런 제안은 무모하고 어리석게만 보였다. 아직 어린 소년인 다윗이 블레셋의 용사와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고 사울을 설득했다. 다윗의 말을 보면 다윗에게 전혀 승산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나 곰과 싸워서 이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 한 것은 자신에게 실력이나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골리앗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는 현실주의자였지만 다윗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자나 곰과 싸워 이긴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싸움에 나갔다. 아무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면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울의 그런 말은 믿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저 형식적인 빈말일 뿐이다. 사울에게 골리앗은 결코 넘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다윗에게 골리앗은 반드시 넘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을 의지하지만, 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 나왔다고 말한다. 다윗은 주님이 골리앗을 자기 손에 넘겨주실 것이며, 자신의 승리를 통해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하겠다고 말한다. 또한 다윗은 주님이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의 이런 말은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은 단지 승리를 위해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쳐서 넘어뜨렸고, 이를 사울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마치 다윗을  처음 보는 듯이 골리앗을 이긴 저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고 반복하고 묻는다. 이는 사울이 다윗을 보냈지만 그의 승리를 결코 예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다윗을 보낸 것은 그저 아무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가 다윗에게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사길 바란다는 말은 빈말이었을 뿐이다.

 

사무엘상 18-20장

  골리앗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임이 드러났다. 물론 다윗 자신은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골리앗을 물리친 셈이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명을 죽였다는 노래를 불렀다. 민심이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았고 다윗은 항상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사울은 이것을 보고 다윗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이 늘 앞장서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좋아했다. 이후 사울은 다윗을 적대시하여 그를 죽이려고 애를 쓰고 다윗의 오랜 고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과 싸워 이겼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그 승리 때문에 다윗은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사울과 달리 골리앗 사건 이후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다. 요나단은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고 칼과 허리띠까지모두 다윗에게 주었다. 요나단이 이렇게 다윗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블레셋의 선발대를 먼저 공격할 때 요나단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했다. 요나단의 이 말은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칼이나 창이 아니라 주님께 달린 것이라고 한말과 동일하다. 이렇게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게 된 것은 다윗의 믿음이 자신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요나단은 현실주의자인사울의 불신앙과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다윗을 발견하고 깊이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왕권을 노리는 대적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왕권의 계승자인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보호하는 요나단에게 분노하며 다윗이 살아있는 한 너도 안전하지 못하고 왕권도 빼앗기게 되니 다윗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무엘상 21-22장

  다윗이 먹을 것이 없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구한 일이나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려 한 일은 그가 얼마나 사울의 추격으로 인해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이 아둘람 굴 속으로 몸을 피했을 때 다윗의 온 집안이 그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울은 다윗으로 인해 다윗의 집안도 핍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뿐만 아니라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이제 다윗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든 것은 사울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더이상 소망이 없으므로 다윗에게 기대를 걸어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은 비록 쫒기는 신세이고 앞이 전혀 안보이는 절박한 상황에 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여든 일은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이 사울이 아니라 다윗임을 보여준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운 일로 인해 사울은 제사장들을 몰살하고 그들의 성읍까지 진멸하는 악행을 저지른다. 이제 사울은 자기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게 없어진 것 같다. 현실주의자 사울은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경까지 나간 것이다.

 

사무엘상 23장

  다윗은 블레셋이 그일라를 치고 약탈해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 여쭈었다. 내가 출전하여 이 블레셋 사람을 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셨다. 사실 구원해야 할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을 자처하는 사울이지 다윗이 아니다. 그러나 사울이 그일라를 구원하지 못하기에 다윗은 자신이 그일라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주님께 여쭈었다. 다윗의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사울이 아니라 다윗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주님은 다윗에게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사울을 피해 숨어 지내고 있는 상황에서 만일 다윗이 그일라로 출전한다면 사울의 추격을 받아 더 큰 위험에 빠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들의 말을 듣기 보다는 주님께 다시 여쭈어 보았고 주님은 다시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다윗은 눈 앞의 현실을 따라 판단하기 보다는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일라로 출전하여 불레셋을 크게 무찌르고 그일라 주민들을 구원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다윗의 부하들이 우려했던 대로 사울의 추격을 받게 되고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그일라 성을 멸망시키려고 하자 그일라 주민들은 두려워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려고 했다. 다윗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라를 구원했지만 그 댓가는 죽음의 위험과 그일라 주민의 배신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다윗은 자기 부하들의 현실적인 판단을 따르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울은 언제나 눈 앞의 현실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었지만 다윗은 언제나 현실 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날마다 다윗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지 못할 것이며 다윗이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것라고 생각했다. 사울도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사울은 끝까지 왕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사무엘상 24-26장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는 중에 뒤를 보려고 굴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굴의 안쪽 깊은 곳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있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드디어 하나님이 내가 너의 원수를 너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 하신 말씀이 이뤄질 바로 그 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부하들에게 타일러 말한다. 내가 감히 손을 들어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치겠느냐?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주시길 바란다. 왕은 바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자르고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일로 인해 사울은 다윗이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그의 손에서 굳게 될 것을 자신도 안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에 이미 눈이 먼 사울은 다윗 죽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일은 이번 만이 아니었다. 다윗을 추격하던 중 사울이 진에서 잠이 들었는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진에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사울의 군사들이 잠에 빠져 있었다. 아비새는 이 상황을 보고 하나님이 오늘 사울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었으니 당장 사울을 죽이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윗은 그 누구도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죽였다가는 벌을 면치 못한다고 만류한다. 다윗은 주님이 사울을 치시든지, 죽을 날이 되어서 죽든지, 또는 전쟁에 나갔다가 죽든지 할 것이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를 죽이는 일은 주님께서 내게 금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누가보더라고 두번이나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손을 들어 사울을 죽이는 일을 거부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해석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윗은 눈에 보이는 상황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았고 상황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는 이야기 중간에 나발 이야기가 끼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듯이 나발 이야기가 중간에 끼어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나발 이야기가 그 중간에 놓인 것은 분명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의도적인 배치로 보인다. 나발 사건은 다윗이 배은망덕한 나발을 죽여 복수하려다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설득으로 포기한다는 이야기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후회하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란다고 말하며 나발에게 복수하는 일을 만류한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오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의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지 않도록 지켜주었다고 감사하며 복수를 포기한다. 다윗은 나발에게 복수하는 일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합당하지 않음을 깨닫고 돌이킨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사울과 매우 대조적이다. 자기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과 반대로 다윗은 자기 권력을 사용하여 사사로운 복수를 하려던 일을 포기한다. 이렇게 사울을 살려주는 이야기 중간에 놓여진 나발 이야기는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사울과 그렇지 않은 다윗의 대조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무엘상 27장

  다윗이 아기스 왕에게 다시 망명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할 길이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다윗이 살아남는 길은 사울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블레셋 땅으로 도망하는 것 뿐이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준 결과 이렇게 된 것이다. 다윗이 가드로 도망갔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지니 그가 다시는 다윗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다윗을 한번 쫒아낸 적이 있는 아기스 왕이 이번에는 다윗의 망명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다윗의 망명이 사울을 제거하는데 군사적, 정치적 이익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다윗이 부하 육백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또한 다윗이 사울의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기스는 다윗이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어 그가 영영 자기의 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기스는 다윗을 신임했고 다윗의 무리들이 지낼 수 있는 시글락 성도 내주었다. 이렇게 다윗이 블레셋 편으로 넘어오자 블레셋은 이 기회에 이스라엘에 쳐들어 가려고 모든 부대를 집결시켰다. 다윗은 이 블레셋에 가담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워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결과 다윗은 블레셋에 망명하게 되었고, 급기야 블레셋을 위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사무엘상 28장

  사울은 수넴에 진을 친 블레셋 군의 진을 보고 두려워 마음이 몹시 떨렸다. 사울은 주님게 물었으나, 주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울은 이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당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대답을 듣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늘 충실한 현실주의자 사울은 결국 이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있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에 사울은 이스라엘 안에서 무당과 박수를 모조리 쫒아내었는데 사울은 자기가 쫒아낸 무당을 찾아가서라도 주님의 대답을 들으려고 했다. 이렇게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스라엘의 왕에서 쫒겨난 결정적인 이유었다. 사울은 무당이 망령을 불려 올린다고 믿고 무당에서 사무일을 불러올리라고 말한다. 사울이 무당에게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믇자 무당은 땅 속에서 영이 올라온 것을 보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사울이 그 모습이 어떠하냐고 묻자 무당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겉옷을 걸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엎드려 절을 하였다. 지금 사무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여자 무당만이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고 있다고 말할 뿐이니 우리는 이 장면을 보고 정말 여자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올렸다고 생각할 수 없다. 무당이 죽은 혼령을 불러올린다고 믿었던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말했고 무당은 자신이 망령을 불러낸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는 것 처럼 묘사된 장면도 사실 사무엘이 아니라 무당이 사울에게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무엘을 대신하는 듯한 무당의 말은  주님이 무당의 입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이 사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사울은 무당을 입을 통해서라도 예언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고  주님은 사울이 원하대로 무당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미 모압의 예언자 발람을 통해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사울은 블레셋과 대치한 절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무당에서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당의 입을 통해 나온 주님의 말씀은 사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바로 내일 사울과 함께 이스라엘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의 선고였다. 그래서 사울은 충격을 받고 갑자가 그 자리에 쓰러져 땅바닥에 벌렁 넘어졌다.

 

사무엘상 29-31장

   블레셋은 모든 부대를 아벡에 집결시키고 이스라엘을 향해 수백명, 수천명씩 나아갔으며, 다윗도 부하를 거느리고 그 행렬의 맨 뒤에서 아기스와 함께 나아갔다. 다읫은 스스로는 풀 길이 없는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블레셋 지휘관들은 다윗이 자신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아기스에게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에서 블레셋의 대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고 다윗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다윗을 두둔하는 아기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은 강경했고 결국 아기스는 다윗을 시글락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에게 또다른 고난이 기다라고 있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약탈하여 성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모두 사로잡아 끌고 갔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더 아상 힘이 없어 지칠 때까지 목놓아 울었다. 다윗의 부하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서 마음이 아픈 나머지서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일은 다윗에 대한 원망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부하들은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른 이유가 두번이나 온 기회를 놓치고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싶다. 그러나 죽임을 당할 수 있는 큰 곤경 앞에서도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늘 눈에 보이는 현실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사울과 대조적이다. 다윗은 현실을 바라보기 보다는 현실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늘 의지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주님께 여쭈었고 주님은 아말렉을 추격하면 따라잡고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이리하여 다윗은 아멜렉에게 약탈당한 모든 것을 되찾았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 출전했던 부하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함께 출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되찾은 물건을 하나도 돌려주지 말고 다만 각자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가게 하자고 우겼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라면 부하들이 두려워 적당히 타협하고 수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거절한다. 다윗은 아말렉에서 되찾은 물건은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처래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에 나갔던 사람이나 남아았던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전리품 가운데 얼마를 떼어 그의 친구들 곧 유다의 장로들에게도 선물로 보내는데 이는 아마도 장차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노릇하는데 유다 지파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이스라엘 군대는 도망하다가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도 죽었다. 사울은 중상을 입자 자신의 무기 담당 병사에게 칼을 뽑아 찌르라고 명했다. 사울은 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와서 자기를 찌르고 능욕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할례 받은 언약백성의 왕답지 않은 사울이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결국 사울은 비참하게 자살로 그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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