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의 내러티브
2018-12-13 20:16:45
사무엘하 1-2장
시글락에 머물러 있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배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다윗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했다. 다윗은 해가 질 때까지 울며 금식했다. 다윗이 이렇게 슬퍼한 이유는 사울과 다윗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군대가 이방인의 손에 도륙을 당한 사실에 대한 슬픔이었다. 비록 이스라엘과 사울을 블레셋의 손에 내어주셨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패배를 기뻐하셨을리 없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슬픔에 마음을 같이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조가를 지어서 부르고 사람들이 이 패배를 잊지 말고 마음에 새기도록 그 노래를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했다. 이 일 후에 다윗은 주님께 유다의 성읍으로 올라갈 것인지 여쭈었고 주님은 헤브론으로 올라가라고 일러주셨다. 이제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노릇을 시작한다. 그러나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까지는 칠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왜냐하면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아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에 전쟁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윗 집안은 점점 더 강해지고 사울 집안은 점점 더 약해졌다.
사무엘하 3장
이스보셋과 반목하게 되면서 아브넬은 다윗 편을 들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이 이 나라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빼앗아 다윗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브넬이 다윗을 대적한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브넬은 자기와 언약만 세워준다면 다윗 편을 들어 온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제안한다. 다윗은 아브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아브넬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립하기 보다는 포용하여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분열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세우신 일은 유다 족속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임을 다윗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다윗을 끝까지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결국 아브넬은 사사로이 원수를 갚으려는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요압의 손을 통해 아브넬을 심판하신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자신이 원수를 갚지 않고 사울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 것 같이 아브넬에 대해서도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아브넬의 죽음을 알고 다윗은 온 백성과 함께 울며 금식하였는데 온 백성은 그때에 비로소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아님을 알고 다윗을 마음에 좋게 받아들인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자기 아내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요구한 일이나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한 일은 모두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무엘하 4장
아브넬의 죽음에 이어 이스보셋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다윗을 대적하던 사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사울, 아브넬, 이스보셋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들의 힘으로 왕권을 유지하려고 애썻던 자들이라는데 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심을 알고도 다윗을 대적했으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뜻을 거스린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경우에 그랬듯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석하게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들은 다윗의 왕됨을 반대한 자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자들이니 다윗이 이들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을 듯한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사울의 경우에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다.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세워진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화가 두번이나 주어졌으니, 이를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해석해도 크게 무리가 없었을텐데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사울 죽이기를 거부했다.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된 이후에 아브넬과 이스보셋으로 인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찰년 반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만일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작정하고 아브넬과 이스보셋을 죽이려고 했다면 이렇게 긴 세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점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노릇을 하려고 스스로 애를 쓰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사울, 아브넬, 이스보셋과 대조적인 사람이다. 사울, 아브넬, 이스보셋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스스로 왕권을 지키려고 애쓴 사람들이라면 이와 대조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다윗이 이런 태도를 항상 견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인간 왕은 그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우시는 자일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인간 왕을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스스로 왕권을 취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다리고 인내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제나 잊지 않았던 사람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이 가장 인정하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왕,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된 것이다.
사무엘하 5장
사울의 집안이 몰락하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으로 찾아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다윗이 그들을 찾아가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윗을 찾아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다윗은 자신에게 기름부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렸으며, 드디어 하나님은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한 첫번째 일은 도읍지를 정하는 일이었다. 유다의 왕이었을 때는 도읍지가 헤브론이었지만 이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다윗은 새로운 도읍지를 정해야 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도읍지로 정하고 그곳에 있는 여부스 사람들의 성을 뺏앗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부스성은 워낙 견고한 성이라서 여호수아 이래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점령할 엄두를 못내고 있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에게 우리 가운데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고 호언 장담을 했다. 그러나 다윗은 마침내 그 성을 점령했고 그 성의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두로 왕 히람이 사절단과 함께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 다윗에게 궁궐을 지어준 것을 보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의 위세가 이웃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두번이나 전면전을 벌였고 다윗은 블레셋과의 두번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가장 압제해온 숙적 블레셋의 세력이 드디어 꺽여 버리게 된 것이다. 사사시대 이래 이스라엘은 불레셋을 가장 두려워 했으며 그들에게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대적이 될 수 없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블레셋의 압제하에 살았던 것은 블레셋이 힘이 강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힘이 약해서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 부치셨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섬기는 다윗 왕이 등장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은 더이상 블레셋의 압제하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무엘하 6-7장
엘리 시대에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긴 이후 법궤는 스스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지만 실로에 있던 성막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사무엘상 7장에서는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날로부터 스무해 동안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말한다. 법궤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성막을 떠나 있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싫어하여 그들 가운데 돌아오지 않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법궤가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법궤를 옮겨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법궤를 옮겨 올 생각을 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다윗은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고 온 백성들은 환호성을 울리고 나팔 소리가 우렁찬 가운데 주님의 궤를 옮겨 왔다.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온 후에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가 아직도 휘장 안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법궤를 안치할 하나님의 집을 짓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윗이 법궤를 옮겨 오고 법궤를 안치할 집을 지으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다윗이 법궤를 옮기고 이어서 법궤를 놓을 집을 지으려는 이유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모시려는 생각때문이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모시려는 다윗의 이런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고 그래서 다윗은 법궤를 옮겨올 생각을 했고 법궤를 안치한 집을 지으려고 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생각을 크게 기뻐하시며 다윗의 나라와 그 왕조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일도 감당하게 어려운데 자기 집안에 있을 먼 장래까지 말씀해주시는 주님의 약속에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도 없다고 감격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하신 그 약속이 단지 자신의 집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뜻과 목적을 이루시려는 큰 일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튼튼히 세우시어 영원히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집안이 튼튼하게 서는 일이 사람들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높이게 하시기 위함임을 알았다. 다윗은 주님이 바로 이런 목적을 이루시려 자신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알았으며, 그래서 자신이 왕으로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다.
사무엘하 8장
다윗이 블레셋을 쳐서 그들을 굴복시켰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숙적이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블레셋을 굴복시킨 적이 없다. 그런데 다윗이 드디어 블레셋을 굴복시켰다. 블레셋뿐 아니라 모압과 소바와 시리아 하맛 애돔 암몬 등 주변 나라들을 모두 굴복시키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 왜냐하면 다윗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언제나 자기 백성 모두를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에서 고통을 받은 것은 그들이 강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무능해서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공평하고 의로운 법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의로운 법으로 다스림으로 그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않게 되었으니 더이상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 아래 살 이유 가 없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동서남북이 이방나라에 둘러싸인 땅이었다. 서쪽은 가장 강력한 블레셋, 북쪽은 아람 족속, 동쪽은 암몬과 모압 족속 그리고 남쪽에는 아말렉과 에돔 족속이 버티고 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늘 이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을 굴북시키지 않으면 이들에게 굴복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대적이 없는 땅, 이집트처러 물이 넉넉한 평야가 아니라 대적들에 둘러싸인 땅, 물이 저장되지 않는 산간 땅이 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아니라 항상 긴장하고 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땅이 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니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살게 하시려고 의도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까지 인도하신 목적이 그저 이스라엘을 낙원으로 인도해서 잘먹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으로 더럽혀진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게하시려고 하셨다. 그래서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도구로서 선택된 나라였기 때문에,만약 이스라엘이 이 목적을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사무엘하 9장
다윗은 사울의 집안에 남은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어주고 싶었다.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베플려고 한 것은 자기 개인의 동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이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사울의 집안에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려고 하였을까? 사실 사울의 집안은 다윗과 원수이며 다윗의 왕됨을 끝까지 거부했던 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사적으로는 다윗의 원수이고 공적으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대적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었다. 그것은 다윗의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하던 시절에 사울의 요구에 의해 그의 집안에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다윗이 사랑했던 요나단에게도 마찬가지로 그의 집안에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적이 있다. 다윗은 바로 이 약속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사사로운 약속이 아니라 하나닙의 이름을 걸고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다윗이 베푸는 은총은 다윗의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되는 것이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그가 백성들을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린다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늘 신실한 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일이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이전에도 그랬고 왕이 된 이후에도 늘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신실한 태도를 견지한 사람이었다.
사무엘하 10-11장
다윗의 선의를 거부하고 모욕한 일로 인해 암몬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암몬은 시리아 용병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이길 수 없었다. 전쟁은 길어져서 다음해 봄까지 이어졌는데 이미 대세는 결정된지라 다윗은 직접 출전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왕이 된 후에 전쟁에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암몬과의 전쟁도 다윗은 낙관했을 것이다. 이렇게 다윗이 방심한 틈을 타서 밧세바 사건이 벌어졌다. 한 여인으로 시작된 일이 급기야 그 여인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 일로 커져 버렸다. 다윗은 자신이 밧세바를 임신케 한 일을 숨기려고 하다고 여의치 않자 급기야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 악한 꾀를 내었다. 부하의 아내를 탐한 일이나 충성스런 부하를 죽게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거스린 일이었고 더구나 하나님의 의로운 법으로 다스려야 하는 왕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될 악행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왕권을 남용하여 충성스런 부하를 배반하고 죽인 불의였다. 그러니 다윗의 죄의 본질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공적인 것이다.
사무엘하 12장
다윗을 책망하기 위해 온 나단의 비유 이야기는 다윗이 저지른 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불의하게 사용하여 약한 자를 압제하고 핍박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고 또 사울의 손에서도 구해주셨다. 그리고 왕으로서 부족할 것이 없이 많은 아내들도 허락하셨고 그에게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을 맡기셧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부족할 것 없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일은 명백히 왕권을 남용한 일이었고, 이것은 결국 다윗에게 왕권을 맡기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 일이다. 밧세바 사건의 본질은 개인의 간음과 살인이라는 사적인 죄악 이전에.왕권의 남용이란 공적인 죄악이었다. 한마디로 밧세바 사건은 다윗이 스스로 왕노릇을 하려고 해서 벌어진 일이요 하나님의 법이 아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함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까지 다윗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그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따라서 왕노릇하였지 자기 소견을 따라 스스로 왕노릇 한 적이 없었다. 밧세바 사건의 본질은 다윗이 하나님의 왕되심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한 죄악이었다. 사실 밧세바 사건은 이방나라의 왕에게라면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아니지만 이스라엘 왕에게는 큰 범죄가 아닐 수 없다.었다. 왜냐하면 이방 나라에서 유일한 왕은 인간 왕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유일한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밧세바 사건의 본질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다윗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한 죄였다. 다윗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으며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디윗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죄악으로 인해 다윗 집안에 재앙이 일어날 것과 밧세바와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죽을 것이 선고되었다.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셨지만 그 용서가 다윗이 지은 죄가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벌 선고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어린 아이를 살리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했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모면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 아이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죽을 것이란 선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가 죽었을 때 다윗은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 입은 뒤에 성전에 들어가 주님께 경배했으며 음식도 먹었다. 다윗의 이런 상반된 듯이 보이는 두 모습은 모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함에서 나오는 진실된 태도였다.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주님은 그 아이를 사랑하여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다. 밧세바와 사이에 태어난 솔로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특별한 사랑은 하나님이 다윗을 진정으로 용서하셨음과 다윗의 왕권이 끊어지지 않게 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징표일 것이다.
사무엘하 13장
나단을 통해 선고된대로 다윗 집안에 재앙이 시작되었다. 암논이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몹시 분노했지만 암논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압살롬은 암논에 대해 앙심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고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결국 암살롬이 암논을 쳐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 자식들 사이에 벌어졌는데, 이는 밧세바 사건에서 다윗이 저지른 간음, 속임, 살인의 죄악이 자식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만일 다윗이 암논 사건을 제대로 처리했다면 이것이 압살롬 사건으로 확산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압살롬은 스스로 암논에게 복수를 하고 말았다. 아마도 다윗은 자식에 대한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암논 사건을 덮고 지나가려고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다윗은 암논의 아버지이기 전에 하나님의 정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할 왕이었다. 그러니 암논 사건을 덮고 지나가려 한 일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자기 소견을 따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압살롬 사건에 데한 다윗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압살롬은 그술 왕 암미웃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을 쳤는데 다윗은 압살롬을 적극적으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년이 지나 암논으로 인한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자 다윗은 오히려 압살롬을 보고 샆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밧세바 사건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라면 암논과 압살롬 사건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일은 밧세바 사건으로 끝난게 아니라 암논과 압살롬 사건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시는 이유는 단지 밧세바 사건으로 다윗을 처벌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윗의 합당하지 못한 점을 교정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밧세바 사건으로 드러난 다윗의 이스라엘 왕으로서 문제점은 단지 자기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이런 뼈아픈 징계를 통해 교정되어야만 했다.
사무엘하 14-15장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 것을 알아챈 요압은 압살롬을 데려와 다윗과 화해를 시킬 궁리를 한다. 왜냐하면 다윗이 압살롬과 화해만 한다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압살롬이고,그렇게 될 때, 압살롬은 요압에게 크게 신세를 지게되니 군대 장관으로서 요압이 누리는 권세도 더욱 견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어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고,결국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는 허락을 받아낸다. 물론 다윗이 압살롬을 바로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압살롬을 대면하는 일은 시간의 문제였다. 결국 요압의 주선으로 다윗이 압살롬을 대면하였고 압살롬이 왕에게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자 다윗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 요압과 압살롬이 원한대로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 화해개 이뤄졌다. 이일 후에 압살롬은 스스로 왕이 될 욕심을 품고 일을 벌린다.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사람들을 불러서 왕에게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사람이 없다고 모함을 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공정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이라고 말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네 해가 지났을 때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내려가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첩자를 보내 입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게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다윗을 대적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까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모두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가장 사랑하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배신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했던 범죄가 압살롬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올리브산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계속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 때에 누가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 아히도벨도 끼여있다는 말을 전하자 다윗은 주님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 아히도벨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다윗은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모략에 대단히 능한 사람임을 알았기에, 만일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채택한다면 자기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16-17장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노정에 사울 집안의 친척인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나타나 줄곧 저주를 퍼부었다. 시므이는 다윗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지며 다윗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며 불한당이라고 욕을 했다. 그리고 오늘날 다윗이 이렇게 된 일이 다윗이 사울 집안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했으니 이제 주님께서 그 피 값을 갚으시려고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저주했다. 이를 보고 아비새는 당장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왜 나의 일에 너희가 나서느냐고 말하며 만류한다. 다윗은 주님께서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다윗은 이 모든 재앙이 주님의 징계임을 인정하고 달게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시므이나 아비새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윗은 자기 소견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비로서 다윗은 자기 소견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이 뜻을 찾아 행하는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길 바랐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오늘 밤으로 당장 다윗을 뒤쫒아 급습해야 한다는 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다윗이 보낸 후새는 아비도벨이 베푼 모략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온 이스라엘 군대를 소집한 후에 다윗을 공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계책을 제시했다. 그러자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이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더 좋다고 찬성했고, 결국 아히도벨의 모략은 채택되지 못했다. 주님께서 이미 압살롬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려고 아비도벨의 모략을 좌절시키신 것이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자기 고향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서 죽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패할 것이고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18-19장
드디어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이때 다윗은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는 압살롬의 생명을 해하지 말아달라는 인간적인 부탁이었다. 이것을 다윗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다윗은 비록 압살롬이 자신을 배신하고 반역을 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압살롬을 죽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길 원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신을 살려주신 것 같이 다윗은 하나님이 압살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서슴치 않고 압살롬을 죽이고 말았다. 이전에도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인 일이 있었다. 요압은 그렇게 하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압을 늘 눈에 보이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왕이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윗은 압살롬 대신에 차라리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며 울부짖었다. 이렇게 슬퍼하는 다윗을 보고 요압은 이는 다윗이 왕을 반역한 무리들을 사랑하고 왕에게 충성한 부하들을 미워하는 일이라고 항의했다. 그리고 이제라도 일어나 부하들을 위로의 말로 격려해주지 않으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 곁에 남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왕이 지금까지 당한 그 모든 환난보다도 더 무서운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다윗을 겁박하였다. 요압의 이런 말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이지만 사실은 왕을 멸시하는 태도이고 나아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에게 가담했던 아마샤를 차라리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으로 삼으려고 작정을 하였다. 다윗이 다시 왕으로 귀환하는 길에 다시 시므이가 나타나 용서를 구했다. 아비새는 시므이가 주님이 기름부으신 왕을 저주했으니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번에도 왜 나의 일에 나서서 나의 대적이 되느냐고 책망한다. 다윗은 자기를 저주한 시므이에게 자기가 복수하지 않고 주님의 손에 맡기려고 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소견대로 행하지 않고 범사에 주님의 인도와 뜻을 구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무엘하 20장
다윗이 왕으로 다시 귀환하는 일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유다 지파와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 간에 갈등과 반목이 있었고 특히 사울의 지파인 베냐만 지파에서는 세바라는 자가 적극적으로 다윗의 귀환을 반대했다. 세바는 다윗에게서 얻을 몫이 아무 것도 없다고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을 선동하였다. 세바의 말을 듣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버리고 세바를 따랐다. 오직 유다 지파만이 요단강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줄 곧 다윗 왕을 따랐다. 이에 다윗은 다윗은 요압 대신 아마샤를 시켜 세바를 진압하려고 했는데, 이 일을 알아챈 요압은 결국 아마샤를 죽이고 말았다. 결국 세바의 무리는 요압에 의해 진압되었고 요압은 온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으로 자기 위치를 공고히 했다. 요압은 이전에 아브넬을 죽인 일도 있는데 이번에는 아마샤를 죽이고 말았다. 요압은 언제나 자기의 권력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한 자였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대신 아브넬이나 아마샤를 군대장관으로 삼으려고 애를 썻지만 요압의 꾀로 말미암아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무엘하 21장
다윗 시대에 세 해 동안이나 흉년이 들었고 그 이유는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으로 밝혀졌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은 기브온 백성을 살려주겠다고 맹세를했는데, 사울이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일로 인해 기브온 사람들은 다윗에게 사울의 자손 가운데 남자 일곱명을 넘겨달라고 요구했고 사울의 집안은 몰살을 하게 되었다. 사울은 물론이고 요나단을 제외한 사울의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왕됨을 반대했으니 이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일과 동일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자손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잘 대해 주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그들을 결국 처벌하였다. 다윗이 왕으로 귀환하는 일에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이 갈등을 일으킨 것을 보아도 사울의 자손들이 남아있는 한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는 일은 항상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결국 하나님은 기브온 사건을 통해 사울의 자손들을 제거하심으로 다윗의 왕권을 공고하게 지키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왕됨을 반대한 사울과 사울의 지손들은 이스라엘의 왕됨이 인간의 힘과 뜻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가 인간 왕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이심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이어지는 블레셋 거인들을 죽인 다윗의 용사들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권이 강해지고 블레셋이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라가 공고하게 세워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사무엘하 22장
다윗의 이 노래는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기에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주님이 자기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분, 반석,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파난처, 구원자라고 노래한다. 주님에 대한 이런 고백은 다윗의 경험에서 우러난 절절한 고백일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죽음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파멸의 파도가 나를 덮쳤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동여 묶고, 죽음의 덧이 나를 낚았다고 표현한다.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고 다윗을 구원하려고 나타나셨다. 주님은 높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 다윗을 잡아주시고 깊은 물에서 건져주셨다. 그런 엄혹한 상황에 처해봤고, 그 상황에서 부르짖어 구원을 맛본 다윗이기에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기에 이렇게 살려주셨다고 말한다. 주님이 다윗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가 의롭게 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며 주님의 모든 법도를 두고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은 신실한 사람에게 주님의 신실함으로 대하시는 분이시심을 고백한다. 이는 다윗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소견을 따르지 않고 늘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온 자신의 일관된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비롯 다윗은 밧세바 사건이라는 큰 죄를 저질럿지만 그로 인한 징벌을 달게 받았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 앞에 합당한 왕으로 세워졌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은 진실로 나의 등불이며 나의 어둠을 밝히시는 분이시라고 노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윗은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반석이심을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주님은 손수 세우신 왕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시는 분이시며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무궁하도록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찬양한다.
사무엘하 23장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이 높이 일으켜 세우신 용사이며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자신이 스스로 높아진 자가 아니고 스스로 왕으로 자처하는 자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은 여호와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왕은 공의로 다스려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 왕을 세우신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스리는 왕은 맑은 아침 햇살과 같고, 비온 뒤에 새싹을 돋게 하는 햋빛과도 같이 백성을 살리며 기쁘게 한다. 다윗은 진실로 자기의 왕실이 그러하며, 그러기에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견고하게 하시며 구원을 베푸셨다고 말한다. 다윗의 용사 이야기들이 또 등장하는데 이 이야기 역시 용사들의 충성을 통해 견고하게 다윗의 나라가 세워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특별히 세 용사가 강조되는데 이들은 다윗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고 다윗도 이들을 깊이 신뢰하였다.
사무엘하 24장
다윗이 시행한 인구조사는 단순한 호구조사가 아니라 칼을 빼서 다룰 수 있는 용사의 수를 조사한 모병조사였다. 이런 모병조사는 사실 왕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군비를 튼튼하게 하여 외적을 막는 일이 왕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스라엘 왕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쟁의 승패는 군대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왕이 모병조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군대의 수를 의지하는 죄가 된다. 그래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고 난 다음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내가 큰 죄를 지었고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을 했다고 고백한다. 이 일로 인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니, 온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칠만명이나 되었다. 그렇다면 요압이 말리는데고 불구하고 다윗이 모병조사를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다윗이 요압의 만류를 물리치고 모병조사를 강행한 것은 주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다윗을 부추기신 것인가? 성경은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백성을 치시려고 그리하셨다고 말한다. 무엇때문에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것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앞에서 다윗이 왕으로 귀환한 후에 블레셋을 굴복시키고 충성스런 다윗의 용사들 이야기에서 보듯이, 다윗의 왕권이 강해지고 나라가 부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들의 군사력이 강해서 블레셋을 굴복시키고 부강하게 되었다고 자부하거나 자랑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을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생각에 진노하시고 그들을 징벌하시려고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마음은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아닐 수 없지만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감추어진 죄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부추기어 인구조사를 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죄악을 드러내려고 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윗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윗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고 백성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다윗은 백성을 대표해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다윗이 주님께 비니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앙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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