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 그 본질적 의미
2019-01-28 03:44:23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케리그마는 아마도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메시지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적 죽음이며 특별히 한 개인의 죄를 용서함으로 그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의 죽음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죄를 위한 희생이기 이전에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방식의 클라이맥스로 이해되어야 한다. 정녕 예수가 하나님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은 분이라면 그의 죽음은 단지 패배이거나 무능력의 결과일 수 없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의 죽음을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 이해해 왔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무능하거나 패배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단지 대속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그의 죽음의 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죽음은 하나님나라 왕이 자기 백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은 그런 죽음이다. 이 세상의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며 백성들을 착취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왕이다. 예수의 죽음은 권력에 대한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지배하고 군림하기 마련이다. 그 권력이 크든 작든 관계없이 이는 예외없는 진실이다. 큰 권력은 큰게 군림하고 지배하며 작은 권력은 작게 군림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권력의 크기나 종류에 차이는 있지만 지배하고 군림한다는 권력의 본질적 속성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권력의 이런 본질적 속성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은 이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나라의 질서가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그 나라에서는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진다. 그 나라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말째가 되어야 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나라다. 누구든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그 나라에서는 큰 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고 하셨다. (마태 20장 25-28절) 이 말씀은 결국 예수의 죽음이 단순히 죄의 대속이기 이전에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죽음이었음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가 제자들과 저녁을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자리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하셨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발을 씻기는 일은 보통 종이 상전에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행하는 섬김의 행동이지 선생이 제자들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겼고 그래서 베드로는 이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예수의 이 행동은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본을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예수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3장 14절) 예수가 보이신 본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보여준 행동이었다. 예수는 그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나라는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는 나라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나아가 제자들이 그런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가 나 개인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음을 믿는 것 이전에 그가 하나님나라의 왕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그 나라의 질서가 어떠함을 몸소 보여주고 가르치셨음을 믿는 것이며 나아가 그 질서를 따라 사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자리에서 새 계명을 준다고 말하면서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그런 감정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그런 태도와 행동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한번 분명히 새 계명의 의미를 밝히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4-15장)
이제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그의 죽음이 나의 죄를 대속하는 사랑과 은혜의 행동임을 감사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그런 감상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성찬예식을 행하면서 예수가 자기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그 놀랍고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 것을 결심하는 그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가 보여준 그 나라의 질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거스리며 거부한다. 그렇기에 세상은 그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사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게 마련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보여준 질서를 따라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질서를 따라 산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헛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가르치셨다.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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