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과 아스다롯
2018-10-25 17:46:14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렇게 기대했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심각하고 고질적인 문제에 빠져 버렸는데, 그것은 가나안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비롯한 이방신들을 섬긴 일이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 일을 수차례 언급하며 그들이 이방신을 섬길 경우 약속의 땅에서라도 쫒겨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시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하시려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만일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긴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목적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일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통을 겪고 살아야 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그 땅을 실제적으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방에게 쫒겨 다니며 그들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 이렇게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일에 빠지게 된 원인은 그들이 약속의 땅을 분배받은 이후에 그 땅에 사는 민족들을 다 쫒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섞여 삶으로써 그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그 땅에 사는 민족을 다 쫒아내지 않고 섞여 살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이방 민족들이 강력하다는 이유로 다 쫒아내지 못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 족속들을 다 몰아내기 보다는 그들을 남겨 종으로 부리는 것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이 왜 이 땅을 자기들에게 주시는가를 망각한 처사이고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들의 소견을 따라 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을 이방의 압제에 붙이셨다. 그러니까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이방민족을 다 쫒아내지 못한 것이었고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의 영향으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여 그들을 이방의 압제에 붙이신 것이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방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이방의 손에 붙이심으로 이방의 압제를 벗어날 길이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에게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사사들을 세워 그들을 이방의 압제에서 건져주셨다. 사사기에는 이런 일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긍흉이 여기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야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뗄래애 뗄 수 없는 언약관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후 언제나 변함없이 언약에 신실하셨다.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일이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는 일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에게 신실하게 행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일이나 그들을 불쌍이 여겨 구원하신 일은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행하신 언약적 신실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망각하였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하기 보다는 자기들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기를 좋아앴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경고하셨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일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결국 언약백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반복적인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몰랐기 때문일까? 그럴 수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그들이 이방의 압제를 받는 이유가 바로 이방신을 섬기는 일 때문임을 말씀하셨고 그래서 일시적으로지만 그들이 스스로 이방신을 제거하고 여호와만을 섬기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계속적으로 섬긴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기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유혹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여호와 신앙을 떠난 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긴 일이 주님을 떠난 일이며 주님을 저버린 것이라고 책망하셨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이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이방신만을 섬겼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함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니 이는 곧 혼합주의 신앙이었다. 그들은 혼합주의를 택했고 이런 식으로도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런 혼합주의 신앙은 여호와를 떠난 신앙이고 여호와를 버린 신앙이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다른 신과 겸하여 섬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바릴 수 없었고 결국 혼합주의 신앙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를 약속하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사를 시작했고 그들에게 농경민족인 가나안 족들의 토속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풍요와 번영을 바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농경민족인 가나안 족들이 누리는 풍요와 번영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광야를 거쳐오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엄청난 이적도 경험했지만 가나안 족들이 누리는 그런 물질적 풍요는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누리는 그런 풍요와 번영이 바로 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내려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는 큰 이적과 능력으로 자신들을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였지만 이런 풍요와 번영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출하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여호와를 떠나는 일을 꿈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여호와도 필요했고 바알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여호와와 바알은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을 택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반복적인 징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여호와와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길 원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런 식의 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첫번째 조건이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는 일은 곧 언약을 배반하는 일이며 이는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에게 바알과 아스다롯은 단순히 이방신이 이니라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풍요와 번영의 신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바알과 아스다롯은 무엇인가? 그것은 풍요과 번영을 추구하는 우리의 욕망이며 그 욕망의 충족을 약속하는 것들, 곧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과 권력이지 이방 종교일 수 없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이방 종교를 함께 섬긴 일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긴 일에 있다. 그러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 부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만고불변의 진리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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