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의 내러티브
2018-10-05 15:57:32
사사기 1장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 가운데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야 합니까 라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대답해주셨지만 시실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여호수아는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주었고 각 지파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각 지파들은 이미 분배받은 땅을 실제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곳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들을 내쫒는 일을 하면될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먼저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그 땅을 유다 지파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때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가나안 족들을 쫒아 내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하다. 유다 지파의 이런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다 자손은 산간 지방과 네겝 지방과 낮은 지대로 내려가서 거기서 사는 가나안 사람과 싸웠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그들은 산간 지방을 차지할 수 있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낮은 지방에 살고 있는 거민들을 쫒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유다 자손들은 낮은 지대의 거민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아예 싸우려고 들지도 않은 듯하다. 유대 지파의 이런 태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므낫세 지파도 분배받은 땅의 거민을 몰아내지 못했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강성해진 다음에도 가나안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고 그들을 부역꾼을 삼았다는 언급으로 보아 이렇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이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사사기 기자는 사사시대를 진단하기를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왕이 인간 왕을 가리킨다면 이스라엘이 왕정시대로 넘어간 후에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이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가 보여주듯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이 고질병은 모세 시대와 여호수아 시대 내내 지속되던 문제였고 이제 모세나 여호수아가 없는 사사시대에는 그 문제가 더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에브라임 지파, 스블론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도 가나안 주민들을 쫒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섞여 살았다. 이는 그들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소견을 따라 행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 지파의 경우는 아모리 사람들에게 쫒겨 산간지대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사사기 2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고 조상에게 맹세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신실하게 행할 것은 요구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허는 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신다. 하나님은 그 땅의 거민들을 몰아내지 않으실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신들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올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징벌은 단지 형벌이 아니라 언약적 징계라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그 땅의 거민들을 다 몰아내지 않고 그들과 섞여서 산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바알 신들을 섬기며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는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 하나님을 저버린 일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크게 분노하심으로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주셨다. 그러나 주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는 않는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불쌍히 여기시고 사사들을 일으켜서 그들을 약탈자의 손에서 건져주셨다.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들의 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 여기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이어서 탁월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을까? 더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방치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모세 시대 이래 계속된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불순종을 잘 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사사시대의 그 지리멸렬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건 아닐까? 여호수아는 주님이 모세에게 말쑴하신대로 모든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그 땅에서는 전쟁이 그치고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여호수아 11장 23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광야에서 인도하셨으며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여호수아서의 이 언급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다 지켰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제사제도와 제사장을 세워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인도하여 들이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셔야 할 일을 다 행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이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들을 이스라엘에게 스스로 행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스스로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 편에서 하실 일을 충실하게 다 하셨기에 이제 이스라엘에게도 그 가르쳐 준 길로 충실하게 걸어갈 것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사사기 기자는 하나님이 가나안 민족들을 단번에 몰아내지 않고 남겨두신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그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사사기 3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과연 모세를 통해 주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알아보시려고 가나안 땅에 일부 민족들을 남겨두셨는데 그들이 블레셋과 가나안 사람, 그리고 시돈과 히위 사람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하는 내내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 민족들이 남겨진 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리된 것이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그들을 넉넉히 쫒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남은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대적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 섞여 살았고 심지어 그들과 통혼을 하기까지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목적과 의미를 잊어버린 셈이 되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하나님을 저버리고 악한 일을 저질렀고 하나님은 그들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에게 팔년 동안 압제를 받게 하셨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버렸으니 참으로 기기 막할 일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에게 울부짖었고 주님은 그들을 구해 주시려고 이스라엘 가운데 한 구원자를 세우셨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사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사 웃니엘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 가운데 두신 일은 이스라엘에게 형벌을 내리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그들을 기꺼이 구원하시려고 사사를 세우셨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하나님의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에서 나온 언약적 행동이지 단순한 심판이나 구원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불순종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모압에게 압제를 받게 하셨고 다시 그들이 울부짖으매 주님은 사사 에훗을 세워 그들을 구원하신다. 이런 일이 사사시대 내내 반복되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있음을 깊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방의 압제에서 시달리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시거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시거나 심지어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키시며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게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으신다. 그들을 이방의 압제에 붙이시고 다시 구원하시는 이 지루하고도 한심한 세월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사사기 4-5장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악을 저질렀고 주님은 그들을 하솔 왕 야빈의 손에 붙이셨다. 야빈은 철병거 구백대를 가지고 이십년동안 이스라엘을 심하게 억압했다.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이번에는 여 선지자 드보라를 불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야빈이 철병거 구백대를 가지고 있다는 언급은 그의 군사력이 이스라엘이 감히 대항하지 못할만큼 강력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대승하였고 드보라와 바락은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시에 불성실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이 노래는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 이스라엘에서는 용사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여 선지자 드보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 용사가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대적을 물리칠 믿음이 이스라엘에게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어찌하여 길르앗은 요단강 건너에 자리잡고 있고 어찌하여 단은 배 안에 머물러 있는가? 어찌하여 아셀은 바닷가에 앉아 그 부둣가에서 편히 쉬고 있는가? 라고 책망하며 오히려 이방의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이스라엘의 용사들 보다 더 용기가 있다고 말한다. 여선지자 드보라 이방 여인 야엘, 하나님은 이 두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에 용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사사기 이야기는 사사들의 영웅담이 아니라 이스라엘 무능과 불신앙을 고발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런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다.
사사기 6장
그동안 기드온 이야기는 기드온과 삼백 용사의 영웅담처럼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가 그렇듯이 기드온 이야기 역시 기드온과 삼백 용사들의 용기와 믿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능하고 믿음없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답답하고 애타는 심정에 대한 이야기다. 미디안의 압제하에서 이스라엘은 산에 있는 동굴과 요새로 도망을 다니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인하여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그들을 구원하셨다. 주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언자를 보내어 말씀하셨다. 사사 시대에 처음으로 예언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대변하는 역할을 위해서인 듯하다. 예언자가 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과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셨다. 이랗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자신의 신실한 행동을 통해 입증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모리 사람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드온은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미약한 므낫세 지파 가운데 가장 약한 집안의 막내였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용사가 아니라 미디안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는 사람이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에서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의 평범한 백성중 하나였다. 이런 그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힘센 용사라고 말하며 주님이 그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자 기드온은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 모든 어려움을 겪느냐고 반문한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기 때문에 미디안 사람의 압제하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이 고통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시고 버리셔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이스라엘 대부분의 백성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문제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고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배반하였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있는데 이스라엘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문제이고 한심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으 마치 한 사람을 처부수듯 쳐부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그 말의 증거로 기적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기드온의 믿음이 아니라 불신앙이며 기드온의 이런 모습은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적을 요구하는 기드온의 불신앙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 들어주심으로 기드온을 설득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전에 가장 먼저 기드온 집안의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당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모든 원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 일을 낮에는 하지 못하고 몰래 밤에 하였다. 성읍 사람들은 이 일을 행한 기드온을 끌어내어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저버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사기 7-9장
기드온이 용사라서 그들 뽑아 세우신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기드온의 군사를 삼백명만 남겨두신 일은 이들이 무슨 대단한 용사들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의 원인이 그들이 힘이 없기 때문이나, 그들의 대적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린데 있음을 알게하시려는 의도였다. 이스라엘이 정녕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는데 바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음을 알게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드온을 세워 미디안과 싸운 전쟁은 이전의 다른 사사들을 통해 이스라엘 구원하신 전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마치 기나안 첫 전투인 여리고 전투가 신기하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처럼 기드온의 전쟁도 그러했다. 삼백명이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 때 주님은 적들이 혼란 가운데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셨다. 그러나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는 와중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은 지극히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미디안이 완전히 패배하기 전에는 기드온의 승리를 믿지 않았고 미디안을 두려워하여 기드온 편에 서서 돕지 않았다. 이런 정신을 가진 이스라엘이기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건만 대적에게 쫒겨 도망다니고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드온의 승리가 확인 되었을 때 그들은 기드온을 찾아와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기드온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나와 나의 아들은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오직 주님께서 여려분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했다. 기드온은 문제의 본질이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데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드온이 죽자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안에 엄청난 살육이 일어났고 결국 아비멜렉은 한 여인의 손에 비참하게 죽고만다. 요담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려는 세겜 사람들에게 올리브 나무도, 무화과 나무도, 포도나무도 다 나무들의 왕되기를 거절하고 자기 분수를 아는데 나무지만 나무라고 할 수도 없는 가시나무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우화를 들려주었다. 아비멜렉을 향한 요담의 우화는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제 분수를 모르는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사사기 10-11장
입다 이야기는 이전의 다른 사사와 달리 매우 독특하다. 입다가 등장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암몬의 억압을 십팔년 동안이나 받던 시대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이 막심하여 주님에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의 대답은 매우 단호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도 불구하고 이방신을 섬겼으므로 이제 다시는 그들을 구원하여 주지 않을 것이란 대답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선택한 신들에게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으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포기하지 않고 구원을 호소했고 회개의 표시로 자신들 가운데 있는 이방신들을 제거하고 주님을 섬겼다. 이때 사사기 기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가만히 보고만 계실 수 없으셨다고 말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간절히 매달리고 회개의 분명한 행동을 보이니 차마 가만히 계실 수 없었다는 표현이다. 이런 대목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매우 쌍방적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드디어 암몬 자손이 집결하여 길르앗에 진을 쳤고 이스라엘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쳤다. 그동안 암몬 자손에게 억눌려 수탈을 당하던 이스라엘이 이제 암몬 자손과 일전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는 모습니다. 이를 보면 이스라엘은 비록 하나님이 거절을 하셨지만 결국은 자신들을 도와 구원하시라라 믿었던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전의 기드온의 경우처럼 사사를 불러 세우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셨다. 그러나 길르앗의 장로들은 포기하지 않고 길르앗 사람 입다를 불러 이 전쟁의 지도자로 세운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지 않고 침묵하시자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전쟁을 지휘할 지도자를 세우는 일은 지금까지 사사들 가운데 입다가 유일하다. 이렇게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사사 역할을 할 지도자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신다. 그러자 입다는 하나님에게 서원하길,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신다면 내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길이 내 집 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주님에게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런 서원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전쟁을 목전에 둔 절박한 입다가 던지는 하나의 승부수였을지 모른다. 이렇게 입다는 사사로 세워지는 일이나 암몬과 전쟁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어떤 승인나 약속도 받지 못한 채 암몬과 전쟁을 시작했다. 결국 하나님은 암몬 자손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고, 입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입다 이야기에는 구원 요청을 거절하신 후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적극적인 믿음으로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사실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에서 하나님이 항상 먼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이스라엘은 항상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사기 12장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승리하자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에게 시비를 건다. 그들은 왜 암몬 자손을 치러 올라갈 때에 자신들을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도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다. 이는 전쟁의 승패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상황을 엿보다가 전쟁에 승리하자 전공을 나누려는 대단히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기드온 당시에는 기드온이 이들의 트집을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갔지만 입다의 경우는 달랐다. 입다는 그들의 비겁하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지적하고 책망하며 그들을 대항하여 싸움을 벌렸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사사기 기자는 이로 인해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가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고 말한다. 이 일은 에브라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기드온 때 이후 자행되어온 에브라임의 악을 입다를 통해 심판하신 것이다. 이를 보면 입다는 사사기 기자가 굉장한 용사라고 평가한 대로 기드온과 달리 매우 적극적이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기드온은 미디안이 두려워 포도주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지 못해 두번이나 기적적인 확증을 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의 협박에 굴복했지만 입다는 그렇지 않았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암몬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암몬은 지금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원래 자기들의 땅이었으므로 이제 그 땅을 내놓으라고 입다를 협박하였다. 그러나 입다는 그 땅이 이스라엘이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암몬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이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암몬의 협박에 대한 입다의 대응이나 전쟁을 압둔 그의 과감한 서원이나 에브라함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은 담대한 태도를 보면 입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입다는 보기 드문 믿음의 용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사기 13-15장
삼손 이야기는 입다의 경우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입다기 언약적 능동성을 통한 성공을 보여준다면 삼손은 언약적 수동성을 통한 실패를 보여준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중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 가운데 준비된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 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은 그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세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준비하셨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한 것으로 보면 당시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통혼하는 일이 흔히 있었던 것 같다. 삼손의 부모는 이를 반대했지만 삼손은 결국 불레셋 여자를 좋아해서 아내로 삼고 말았다. 삼손의 이런 태도는 자신이 나실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임을 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블레셋 주민들과 삼손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므로 삼손은 블레셋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혼자의 힘으로 블레셋과 싸웠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괴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블레셋은 쳐올라와서 유다 땅에 진을 치고 레히 지방을 짓밟았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이 두려워 삼손을 붙잡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블레셋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에 넘기는 일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였으니 당시의 이스라엘의 비굴한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삼손은 혼자서 나귀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모두 블레셋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상황에서 삼손 홀로 블레셋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혼자 힘으로 그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것은 삼손의 열심이나 담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주심이었고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할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덕분이었다.
사사기 16장
삼손은 들릴라에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 놓으면서 자신이 나실인이며 머리털을 깍으면 힘을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이런 삼손을 보면 그는 나실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완전히 망각한 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삼손의 힘은 머리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이었다. 머리털이 깍이자 삼손이 힘을 잃어버린 것은 나실인으로서 마지막 상징인 머리털마저 포기한 삼손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기 때문이다. 삼손은 힘을 떨치려고 애를 썻지만 주님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결국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히고 놋사슬에 묶여 연자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날 때 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자로 준비된 삼손이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삼손은 마지막으로 블레셋에게 복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삼손은 자신의 죽음으로 블레셋의 원수를 갚았다. 태어남으로 부터 죽을 때까지 삼손의 삶은 이스라엘을 정확히 반영한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자이면서도 구별된 삶을 살지 않고 끝까지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삼손과 함께 하시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면서도 반복적으로 언약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도하시며 그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이다. 불순종하는 삼손을 통하여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야 말로 어두운 사사 시대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요 유일한 소망이었다. 사사기에 삼손에 대한 기록이 가장 길고 자세하 기록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사사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도 요약한다면 그것은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다. 특별한 나실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나실인 규례를 모두 어기고 자기 소견을 따라서 산 삼손은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백성이면서도 자기 소견을 따라서 산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삶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또한 삼손의 기사는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구원이 나타난 것 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강력하게 예고한다.
사사기 17장
미가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일이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미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은 돈을 주님에게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방식이 조각한 목상에 은을 입혀 우상을 만든 일이었으며, 제사장이 입는 에봇과 이방의 신상인 드라빔을 함께 만드는 일 그리고 개인 신당을 만드는 일 이 모든 것이 바로 여호와 신앙이 이방신앙과 혼재된 혼합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사사기 기자는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뜻에 맞는대로 행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미가 이야기에서 유다 땅 베들레헴에 살던 레위지파의 젊은이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베들레헴을 따나 있을 곳을 찾고 있었다는 말은 유다 지파가 자기 지역에 거주하는 레위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먹고 살 곳을 찾아 떠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각 지파들은 자기 지역에 거주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지해야 하고 그 대신 레위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서 존속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렣게 레위인이 자기 살던 곳을 떠나 떠돌게 됨은 언약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붕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이 레위인은 미가 집안의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되었고 미가는 이런 식으로 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다.
사사기 18장
단 지파 이야기 역시 미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단 지파에만 국한된 이야기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도 하나님을 떠난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떨어진 악을 행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사사기 기자는 단지파가 아직 그들이 유산으로 받을 땅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자리잡고 살 땅을 찾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단 지파를 포함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여호수아로부터 이미 땅을 분배받았다. 당시에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에 서쪽 땅이었는데, 이 땅에는 강력한 블레셋과 아모리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단 지파는 마땅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이 땅을 차지해야 했는데 그들은 아예 엄두도 내지 않았다. 단 지파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뜻에 맞는대로 행했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도 자기들이 보기에 강력한 블레셋과 아모리를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들의 소견이 먼저였으니 이것이 바로 사사기 기자가 반복하여 언급한 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미가 이야기나 단 지파의 이야기는 바로 그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되었다. 단 지파는 다른 땅을 찾기로 작심하고 결국 북쪽의 라이스 땅을 찾아냈다. 그들이 보기에 라이스 땅은 살기에 좋으면서도 넉넉히 점령이 가능한 지역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라이스 주민을 죽이고 성을 불사르고 그 땅을 차지하였다. 약속의 땅을 포기한 일이나 약속의 땅이 아닌 곳을 찾아나선 일이나 모두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들의 소견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견과 판단이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단 지파는 미가 집안의 신상과 제사장을 빼앗아 자기 지파의 신상과 제사장으로 만들었으니 자기 소견을 중시하는 단 지파에게 혼합주의는 더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사사기 19장
한 레위 사람과 그의 첩 이야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한 결과 벌어진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저지른 악행이나 레위 사람이 그 악행을 복수하겠다고 첩의 시체를 잘라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낸 일이나, 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지 못할 일들이다. 이런 일들은 단지 악행 이전에 이들이 하나님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이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관련된 문제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데 있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런 일을 금하셨지만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은 일이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 기자가 강조하는 바,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의미다. 이 사건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나온 날 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또 본일도 없다고 말하며 이 일을 깊이 생각하고 의논한 다음에 의견을 말하기로 하였다.
사사기 20장
이 일을 처리하게 위해 이스라엘 공동체는 미스바에 모였고 기브아 사람이 이스라엘 안에서 저지른 이 악행을 처벌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그러나 이들은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고 가나안족들과 섞여서 살았다. 그런 결과로 발생한 일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단지 기브아의 불량배 몇을 처단하는 일로 해결될 수 없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며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했다. 그 길만이 이 사건을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고 이 사건을 기브아의 불량배 몇을 처단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기브아의 불량배를 처벌하는 일에 베냐민 자손들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싸우려고 나온 일은 이 사건이 불량배 몇명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베냐만 지파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관련된 문제임을 잘 보여준다. 베냐민 지파의 저항으로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심각한 내전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제 이스라엘은 공동체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이때 비로서 하나님에게 묻는다. 그 물음은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지파와 싸워야 하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싸우기로 결정하였고 그렇다면 누가 먼저 싸우느냐는 스스로 결정하면 될이다. 주님은 이 헛된 질문에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대답하신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은 패배했고 그들은 주님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면서 "우리가 다시 가서 우리의 동기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읍니까?" 라고 물었다. 주님은 올라가서 싸우라고 하신다. 그러나 두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 연합군은 패배하고 만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목놓아 울면서 우리가 또다시 올라가서 우리의 동기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주님은 올라가라 내일은 틀림없이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고 대답하신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공동체 내전을 원치 않으셨기에 망설이고 계심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미 싸우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에 어느 지파가 먼저 올아갈 것인지를 물을 일이 아니라 먼저 베냐민 지파와 싸워야 할 것인지 여부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아니 질문 이전에 그들은 이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나 베냐민 지파에만 있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에 있음을 인식하고 돌이켜야 했다. 결국 이 사건을 처리하는데 있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소견에 옳은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으며 그 결과는 비참한 공동체 내전이었다. 공동체 내전으로 베냐민 지파는 궤멸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공동체 내전을 원치 않으셨고 망설이시다가 마지 못해 베냐만 지파를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베냐민이 궤멸되기를 원하실릴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에서 사람이나 가축이나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다 죽이고 성읍도 불살랐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구하는 대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것이다.
사사기 21장
공동체 내전이 끝난 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지파가 궤멸되어 한 지파가 이스라엘에서 거의 없어지게 된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앉아 크게 통곡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동기 베냐민 자손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공동체 내전 이전에 미스바에 모였을 때 우리 가운데 아무도 베냐민 사람과 결혼시키지 않도록 하자고 맹세한 일이 있었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이런 맹세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한 일이다. 총회에 나오지 않는 지파는 죽이기로 맹세하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을 닥치는대로 죽인 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한 일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자손에게 화친을 선언하고 살아남는 남자들에게 아내를 짝지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들이 이미 미스바에서 한 맹세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맹세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아내를 짝지어 주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실로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베냐민 자손들이 여자를 강제로 붙들어가서 아내로 삼는 일을 묵인하는 방식이었다. 맹세를 잘못했으면 그일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이 마땅할텐데 이번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사사기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는 이 한마디 말로 사사시대를 요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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