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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

2018-01-01 16:54:04


 

서론- 구약 그 정치적인 말씀

 

1. 신약성경의 첫 책인 마태복음은 "나라[바실레이아"]를 전한다. 그리고 그 나라와 연관된 중요한 개념은 "권세" 그리고 "왕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속 왕 헤롯을 긴징하게 했고 로마총독 빌리도가 십자가형을 집행하게 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첫머리인 마태복음이 "나라"를 둘러싼 정치적 사건으로 예수 사건을 드러낸다고 볼 때, 기독교 정경으로서의 마태복음은 구약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한 구약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구약을 정치적으로 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구약에서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구약은 좋은 말 모음집이 되어 버리고 신약 역시 교훈의 모음집이 되어 버린다. 개신교에서 구약 율법을 이른바 시민법, 도덕법, 제의법으로 구분하고 제의법과 시민법은 신약에서는 폐지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구약 전체는 개인윤리와 관련된 도덕영역으로 축소되었다. 그 결과 개신교 신앙은 구약을, 더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가두어 버렸다. 이처럼 구약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적 차원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부족한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를 파괴하고 뒤흔들어 버리는 잘못된 읽기다. 정치적 차원을 간과하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격언 모음집이나 영적비밀 모음집이 되어 버린다고 볼 때, 우리가 흔히 해오던 성경  해석은 이단 사이비 종파의 출현을 이미 배태한 셈이다. 성경에 대한 정치적인 이해는 성경의 배경이 된 정치적 틀과 사회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개인적이고 내면적으로 적용하는 말씀으로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2. 아담과 하와 이래로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받은 왕적통치를 감당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이 점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하나님이 통치자들에게 하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을(창18:19)을 아브라함에게 하셨다는데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 백성도 세상에서 왕과 같은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사실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구약의 많은 부분이(시33:5; 89:14; 97:2,; 사5:16; 33:5) 하나님이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분이심을 증언한다는 점은 사람이 행하는 정의와 공의가 실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것임을 보여준다. 참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본받는 왕이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언급은(삼하8:15)은 다윗이 하나님이 지으시고 부르신 사람의 본보기임을 보여준다. 왕의 다스림, 왕의 통치를 생각한다면 하나님 백성의 행함에는 통치와 관련된 정치적 차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구약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왕과 같은 존재라고 선언한다. 모든 이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므로, 왕답게 통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다윗 가문의 왕이든, 일반 백성이든, 모든 이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명령받았으며 이 명령의 준행여부에 따라 심판받는다.

 

3. "구속"이란 개념도 개인과 나라의 분리, 정치적 관심의 실종을 초래한 중대한 원인중 하나로 보인다. 종종 하나님은 그분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의 목적을 구속(redemption)이라고 표현 한다. 우선 구속이란 영혼뿐 어니라 몸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영혼뿐 아니라 삶 전체가 자유를 누리게 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다는 고백은 죄에 매인 인생을 구속하시며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의 행하심을 잘 드러낸다. 흔히 "언약어구"라 불리는 내 백성-- 너희 하나님 표현(출6:6-7; 19:5-6)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다. 이 언약어구의 실제적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게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속량, 구속하셨다. 이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두 단계다.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곤경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것이 첫 단계라면, 그렇게 부름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둘째 단계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계시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마28:18-20) 지상명령에서 제자가 할 일은 세례를 베푸는 것, 그리고 주님이 부분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두가지다.  마태복음의 핵심 가르침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임을 기억할 때, 주님 분부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구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 대속은 단순히 개인차원이 아니다. 구속을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의 제자된 근본 차원이다.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산상수훈은 단순한 교훈모음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다룬 것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개인 경건이 아니라 구약의 정치적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복음서도 바울서신도 모두 구약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이 맥락을 무시해왔기에 이제까지 신약 읽기가 비역사적인 개인 교훈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약의 공의와 정의와 어원이 같은 신약의 칭의(justification)와 정의(justice)가 구약적 맥락과 분리되고 의미가 모호해지면서 구약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법정적 칭의 혹은 사법적 칭의 개념이 만연하게 되었다. 

 

4. 구약은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증거한다. 복음서 기자는 이 부분을 길게 말하지 않는다.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이 부분을 이미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약을 구약의 맥락에서 읽지 않기에 신약기자들이 전제로 삼은 것(하나님나라)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복음이 실종되어 버렸다. 신약의 복음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회복과 미래의 약속에 대한 말씀에 국한되어 버렸다. 아브라함의 삶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다. 왕으로서의 아브라함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의 의미는 서로 연결된다.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삶은 정의와 공의를 기초로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셨고 다윗은 그것을 실행하였다. 오경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역사서 그리고 시편과 예언서들은 정의와 공의의 중요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세상 나라를 잃어버리면서 참된 나라,곧 하나님나라가 또렷해졌지만, 이와 더불어 신앙의 개인화도 진전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사회에서 구약신앙이 점차 비역사화되면서 하나님을 믿고 왕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의 종교로 전락했고, 그런 종교는 내면을 치료하고 위로하며 혹독한 현실을 견뎌내는 심리적 기제가 되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증언을 기초로 한다. 그러한 구약 흐름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이 드러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것은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들의 통치에서 실험되었다. 그리고 이 실험을 통해 나온 결론이 예수 그리스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이다. 구약이 없다면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그저 겸손이며 그의 사역은 그저 사랑이다. 그러나 구약이 있기에 예수의 오심과 사역은 왕의 통치가 되며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된다. 구약이 없다면 신약은 개인 윤리책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구약이 있기에 신약은 하나님나라의 성취가 된다.  톰 라이트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전하는 복음서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구약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장구하고 지난한 역사인 구약이 빠지니, 인간의 전적 타락과 회복으로서의 십자가가 신약을 대표해 버렸다. 구약은 기껏해야 죄많은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예가 될 뿐이고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구약의 진정한 국면은 구약이 보여주고 기대하는 세상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에게 기대하고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구약이 없으며 역사가 없어지고 남는 것은 개인의 실존뿐이다. 개신교의 대표 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활동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주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말하고 있지만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의 의미는 말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이런 고백서가 신앙을 내용없는 형식으로, 그의 표현대로 "빈 망토"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신앙고백서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신앙 실천으로 이끈다고 것이다. 이것은 매우 본질적인 문제다. 교회에서 선행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하나님나라라는 큰 틀에서 강조하지 않는다. 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관점에서 선행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선행은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미미한 규정에 불과해진다. 구약의 약화는 구약의 약화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삶의 붕괴,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잘해야 개인적인 신앙으로 이어진다. 

 

6. 초대교회와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나라였다.(행8:12; 행19:8; 행28:23; 행 28;31; 롬14:17) 그런데 정작 바울 서신에서 하나님나라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신약의 중심이 하나님나라로 알고는 있지만 신약이 개인 윤리를 넘어 사회와 구조를 다루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주후2세기 중반까지 기독교 교회의 구속력있는 권위는 구약뿐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는데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구약을 근거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한 하나님나라 역시 구약에 기반을 둔다. 그러므로 신약을 읽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문맥은 구약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새로운 피조물"(엡4:22-24; 고후5:17)이라는 말씀의 문맥 역시 창세기로 대표되는 구약이며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가 없으면 새로운 피조물의 내용이 없어진다. 새로운 피조물은 단순히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창조를 따라 주어진 사명, 즉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사명을 지금 감당해야 한다것을 의미한다. 창조의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시 모든 인류의 몫이 된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으로 구약 전체를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내용이 비르게 보이게 된다. 

 

7.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의 왕과 영토를 두고 다투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자, 세상 왕들은 자신들이 더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에수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이들은, 현실의 인간 왕을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우신 사람으로서 존중할 뿐이며 그들의 참된 충성심은 하나님에게만 있게 되었다. 세상 왕은 악을 징벌하고 선을 포상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런 목적을 거스른다면 그는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존재일 분이다. 그래서 세상 왕들은 그리스도인을 용납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체제의 안정에 위협적인 존재다. 언제든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면 그들은 왕의 통치를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되심은 참으로 현실의 왕들에게 위험한 사상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왕들은 종교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구약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구약의 의미를 축소하게 한다. 구약을 축소할수록, 신약을 영적으로 해석할수록 교회는 현실에 더욱 무관심해진다. 그 결과 세상에 슬픔과 고통은 더욱 많아지지만 왕들의 권세와 체제는 더욱 견고해진다. 사람들은 이 모든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더욱 영적이고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위로만 추구한다. 이렇게 종교와 권력은 서로 뒷받침하며 서로 견고해진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면화, 복음의 개인화는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뒤틀어버린 것이며 복음을 이 세대의 왕들이 기뻐하는 형태로 변질시킨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사회에 대한 관심의 결여나 구제의 부족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복음의 결여, 톰 라이트가 말한 대로 "복음의 텅 빔"이다. 이것은 복음을 개인적, 사적 차원에 국한한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핵심전략이다. 

 

 

 

1부 구약으로 읽는 복음과 그 본질

 

하나님의 형상

 

1. 창세기로 시작되는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 선포되고 제시되며 성취되는지를 보여준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쫒겨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상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포로된 이스라엘은 창세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는 바벨론 포로를 거친 이스라엘의, 신학적 신앙적 반성과 새로운 미래를 향한 소망과 전망을 반영한다. 창세기는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세기는 지난  시대와 현재와 미래를 알리려는 신학적 의도가 담긴 글이다.

 

2. 창세기1장에서 창조의 절정은 하나님이 엿새째 만드신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실질적 의미는 남자와 여자 곧 복수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태초에 부부 혹은 가정을 만드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관계 혹은 공동체로서의 인간이다. 복수형의 하나님이 복수의 사람을 만드셨다. 함께 살아가는 관계, 달리 표현해서 공동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공동체, 즉 관계를 통하여 구현될 수 있다. 이것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는 말씀의 의미다. 그러므로 오직 공동체를 통해서만 그리스도가 드러난다. 관계야 말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통로이며, 관계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처음부터 사람은 관계 안에 존재할 때만 사람이다. 관계에서 떨어진 채 홀로 존재하는 개인 윤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신앙은 수많은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적"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존재의 근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종, 민족, 종교가 다르더라도 사람은 근본적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적 존재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출발부터 공적 신앙이다. 그리고 개인 이기주의, 가족 이기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집단 이기주의, 민족과 나라를 중심에 둔 민족주의는 모두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근본적으로 부적절하며 온전치 못한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창세기1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논 가운데 지음받은 존재임을 증거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반드시 관계 안에, 공동체 안에 존재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사람답고 가장 하나님을 닮았으며 가장 존귀하다. 창세기는 사람은 처음부터 함께 존재하도록, 상대방을 통해 서로 온전하게 되도록 지음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달리 말해 사람은 처음부터 공적으로 존재했다. 

 

3.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 중재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지으시고 질서를 세우시며 명령하시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여기서 등장하는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은 왕이신 하나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곧바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또한 학자들은 고대에 통치자가 곳곳에 자신의 형상을 세움으로써 그 지역이 미치는 자신의 통치권을 표현했는데, 왕은 신의 형상이라는 점을 들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와 연관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스리게 하자 혹은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점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통치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존재로 사람을 세우셨으며, 사람 역시 그런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 다스림, 달리 말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고대중동의 신화들은 왕이 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극소수의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왕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 시편의 다윗은 특별한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대표요 전형이다. 다윗은 왕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탄식과 기쁨이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는지 보여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인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왕노릇, 통치를 선언하고 있다. 특정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왕으로 세움을 받은 세상이 성경이 제시하고 지향하며 약속하는 세상이다.

 

4.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의미라면 필연적으로 모든 행함은 "공적"일 수 밖에 없다. 한 나라의 왕의 통치는 그 왕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일 수 없고 반드시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적 통치이다.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은 그 신분이 존귀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사람이 행하는 일의 근본적인 속성에 공공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존엄한 선언에 유의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행위가 필연적으로 공적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왕이라는 베드로 전서의 선언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샒과 행위가 더더욱 공적이어야 하고 공동선에 부합해야 함을 확실히 보여준다.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는 것은(엡1:23) 교회야말로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유일한 통로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으로 부르셨는데, 이 직무는 우리를 존귀하게 하며, 이 사명이 우리를 존엄하게 한다. 문제는 왕의 이미지가 혼탁해져 벼렀다는 점이다. 참된 왕의 모범은 하나님이건만, 우리들은 이 세상 왕의 모습에 휩쓸려 참된 왕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5.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사람을 그곳에 거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경작이 땅을 쓸모있게 만드는 작업이라면, 지키는 것은 땅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작업이다. 개발과 보존은 아담 이래로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사명이다. 개발과 보전 모두 사람이 행하는 일, 노동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하는 존재다.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창세기2장의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노동을 한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다름아닌 땅을 경작하고 지키는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은 다스림을 구체화한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제자리에 두시고, 구분 지으시고, 흙으로 만드시며 노동하셨다. 그분 형상대로 지음받아 그 왕적인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 역시 노동으로 그 통치를 구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일하는 자 혹은 노동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호칭이다. 특이하게도 창세기 1-2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경배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라고 선언하지만 정작 창세기 1-2장에서는 이에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본문은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존재이유라고 선언하며, 노동이 그 다스림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를 생각하면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일하라고 사람을 지으셨다. 노동은 하나님이 그분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존재근거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명은 제의가 아니라 일상의 일이었다. 사람에게 에덴동산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노동하며 살아가는 공간이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노동하며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노동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가능한한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처음부터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노동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사명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노동을 벗어버릴 짐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세상 다스림의 실현이다. 

 

선악과, 죄, 죽음

 

1. 창조의 영광스러운 이야기는 곧바로 사람의 추방이야기로 이어진다. 창세기는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아름다움에 머물게 하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죄악, 관계의 파괴에 직면하게 한다. 선악과 이야기를 보면 인간의 탐심은 타락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순진무구하여 아무 탐심도 없고 아무 유혹도 없는 존재로 짓지 않으셨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자체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다는 것은 사람이 온통 선만 행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같은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바라고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시험거리나 함정이 아니다. 그 나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지만, 하나님이 아님을 잊지 않게 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을 살라고 부르시고 초대하신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선악과 이야기는 자신의 욕망, 자신의 탐심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것, 자신이 받은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죄의 출발이고 본질임을 보여준다. 죄악의 근원은 자기애다. 사람이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은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린 것이며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사람은 욕망의 충족과 채움을 통해 자기 존재를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한 사람은 탐욕을 버릴 수 없고 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을 배제하려고 한다.

 

2.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사람이 선악의 결정과 판단의 주인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사람이 선악의 선택자가 되었다, 즉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이 더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의미다. 선악과를 먹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사람은 이 열매를 먹는 행동을 함으로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했다.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얼핏 인간 존엄에 합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예에서 보듯이 사람은 자신이 선약의 기준이 되면 자기 욕망을 총족시키는 방향으로 결정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이 되실 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온 세상을 지으시고 조성하신 하나님의 법을 따라 통치된다. 원칙적으로 이 세상은 모든 이를 위한 세상, 전체 공동체를 위한 세상이다. 하나님의 법은 한 사람만 위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이를 위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곧 "공적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은 근본적으로 공적 삶,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삶과 연관된다. 창세기1장은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임을 증거한다. 사람은 아무것에도 좌우되지 말고 아무것도 숭배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존재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 구현하는 존재다. 그러나 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까지도 넘어서서 스스로 기준과 척도가 되도록 이끈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자 선악이 더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자 선악을 상대화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판단하게 되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선을 악이라하고 악을 선이라 하는 일(사5:20-21)은 그 필연적 결과다. 세상에서는 권력과 돈이 가장 큰 능력이라서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다.(사5:23) 선악을 아는 일에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면 함께 살아가는 삶은 이처럼 붕괴되고 만다. 자신의 유익이 최우선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은 이렇게 자기 욕심을 따르는 것을 세상 풍조를 따른 것, 공중 권세잡은 자를 따른 것이라 표현한다(엡2:2-3) 그리고 이렇게 자기가 선악의 기준이 된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없다"할 것이며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을 것이다.:(시14:1-3) 그러므로 뱀의 유혹은 근본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 공동의 삶, 달리 말해 공공의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부정과 거부로 곧장 이어진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공적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얼마든지 상대를 제거하고 죽일 수 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라멕, 노아 시대 그리고 사사시대가 이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왕정도,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제국들도 이 점을 확인해 준다. 주류 경제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을 내리는 합리적 경제인(homo economicus)이다. 그러나 이미 창세기에서 보았듯이 사람은 처움부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존재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런데 사람이 최초로 저지른 죄의 근본은 자신의 유익에 기반을 둔 결정이다. 이를 생각하면 자신의 유익을 기반으로 하여 합리적 결정을 내라는 경제학을 바탕으로 하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를 얼마든지 희생시키는 세상일 수 밖에 없다. 합리적 경제인을 기반으로 한 세상은 필연적으로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소수의 부유층과 힘있는 이들 위해 존재하는 세상일 수 밖에 없다. 

 

3.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통적으로 육체적 죽음으로 해석되었고 간혹 영적 죽음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적인 이해와 더불어 죄로 인한 죽음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은 범죄로 인해 사람과 사람시이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에서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성경의 첫 책에서 증거하는 최초의 죽음은 아벨의 죽음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선악의 판단자가 되자,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가인의 후예 라멕에 이르러서는 이런 죽임이 더 강력해졌다. 마침내 노아 시대에는 온 땅에 폭력이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초의 범죄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렸고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가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되면 사람은 죽을 것이다. 뱀의 유혹의 본질은 공동체 전체의 유익, 인류 전체의 유익보다는 나 자신의 유익, 내가 속한 집단의 유익을 모든 선악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마귀 혹은 사탄의 유혹의 실체다. 창세기3장은 자신의 욕망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버린 현실을 뚜렷이 고발하며 이것이 바로 신약이 표현하는 사탄의 유혹의 실체다. 마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를 얼마든지 희생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을 볼 수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얼마든지 공격하고 짓밟는 군국주의와 민족주의에서도 사탄의 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 역사는 특정 집단이나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집단과 민족을 짓밟은 일들로 가득하다. 구약을 기반으로 마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귀 이해는 지극히 영적인 것이되고 축사자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이미 인류 역사가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는 삶은 그저 종교적인 삶이 아니라 참으로 인류 공동체가 함께 살도록 하는 삶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누가 왕이냐 하는 질문에 닿는다. 아담과 하와의 첫 장면의 핵심은 누가 왕이냐 하는 것이다. 첫 사람은 하나님이 왕이심을 부정했고 자기 욕망의 극대화를 구했으며, 모든 관계를 파괴했다. 자기애의 극대화를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그로 인해 모든 공적 관계를 파괴한 것, 그것이 타락의 본질이며 죄의 핵심이다. 죄악으로 인해 임하는 심판은 관계의 파괴 그 자체다. 관계 가운데 갈등과 대립, 지배하고 차지하려는 욕망이 서로 부딪히고 반복된다. 이것은 모든 관계 가운데 더는 평화가 없을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형상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에게 위임받은 왕적인 통치이며, 그 통치는 노동을 위해 구현된다. 그러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노동이 고역이 되었고 사람은 죄의 결과에 매여 죄의 종으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왕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어느새 종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파괴한다. 이것은 추상적은 선언이 아니다.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깨지고 노동이 고역이 되고 사람은 죄의 종이 되었다.

 

4. 구약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의 가장 첫 부분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한지를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타락은 인간의 절망적인 결론이 아니다. 성경은 이런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해셨다는 것은 아담과 그 아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주목할 것은 성경이 에덴에서 쫒겨난 이후의 인간을 묘사할 때도 여전히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명시한다는 점이다. 창세기는 타락이후에도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임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사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대해 구약 성경은 더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형상 파괴의 실제는 관계의 파괴임을 기억할 때, 창세기 본문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 존귀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포기하고 자기애를 끝까지 내세우며 폭력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점에서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한 지나친 강조, 전적 타락에 대한 신념과 같은 확신은 도리어 우리 안에 일어나는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포기되거나 기각되지 않았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 맞닥뜨리는 인간의 부패는 우리의 전적인 죄성을 절감하게 한다. 그러나 구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타락은 사람의 본질을 전적으로 규정해서 옭아매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타락은 과거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며, 현재 처한 참상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다. 이것을 제대로 다룰 때,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창12:1-3; 18:18-19)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가는 본질적 부르심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의 위치가 모호하게 된다. 이것이 어정쩡할 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정쩡하게 된다. 그분의 사역이 구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행위가 되어 버린다. 창세기의 타락 사건은 우리를 아담과 하와가 서 있던 자리에, 그리고 광야 생활이 끝나던 시점의 이스라엘의 자리에, 나아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자리에 세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처음 죄악 그대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관계를 모두 깨뜨리는 삶을 살 것인냐 하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두 갈래 길

 

1.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왜 가인의 제사는 거부되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는가 하는 것보다는 그 사건에 대해 가인이 어떻게 반응을 했느냐 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났지만 그것으로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게되며,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수도 있으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관계가 파괴된 후에도 사람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대화하시며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 역시 가인과 하나님의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은 가인에게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삶에도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깨져버리고 엉망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2.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몹시 화가 났고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을 찾으신다. 그리고 가인에게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안색을 변하느냐고 물으신다.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물으시는 것이다. 이를 볼 때,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 자체가 어쩌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가인의 행동과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은 창세기4장의 초점이 제사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에 이어지는 부분에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를 죄를 다스려라" 고 이르신다. 이 말씀은 죄가 우리를 삼키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죄에 지배 당하지 말라고, 죄에 굴복하지 말라고, 도리어 죄를 다스리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가인을 찾으시며 말을 거시며 권면하시는 것은 가인이 그럴 수 있는 존재임을 전제로 한다. 가인도 아벨도, 아담과 하와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니,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신다. 그것이 사람이며 그것이 사람에게 주신 존엄이다.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인식은 크고 깊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지식,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준에 동의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의지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끊임없이 동의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죄라는 실체에 강력하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가인 안에 있는 분노, 미움, 체념, 원한 등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하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3.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쳐 죽였다. 하나님은 가인을  죄를 다스리는 삶으로 부르셨는데, 가인은 자신과 비교되는 존재인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자기라는 존재를 초라하게 하는 아벨을 제거해버리는 것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가인의 행동의 본질은 자기를 최우선에 두는 "자기애"를 끝까지 관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담과 하와의 죄는 가안에게서 좀 더 뚜렷하고 난폭하게 본질과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애가 최우선이 된 이들에게 지고의 선은 자기 자신이다. 참으로 사람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다. 가인은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아벨을 존재해서는 안될 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가인이 한 행동과 선택은 낯설지 않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기와 다른 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은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오랜 관행이다. 결국 가인은 지면에서 쫒겨나게 된다. 가인이 쫒겨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쫒겨났고 이제 가인도 쫒겨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가인이 만나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셔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은 이제 가인에게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표를 주셨다. 그러므로 가인의 삶은 결코 끝이 아니다. 가인이 계속 걸어가고 살아갈 길이 있다. 그러면 가인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4. 가인의 후예는 번성했고 그 가운데 라멕이라는 이가 있었다. 가인은 특별한 존재였으며 라멕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특별함으로 상대를 부정하고 상대를 짓밟아버린다. 가인의 표는 쫒겨나서 유리하는 이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들만 보호하는 약속으로 여길 때, 가인의 표는 다른 이들을 향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사로운 집단돌봄으로 이해할 때,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약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를 위한 배려와 이해를 수반해야 한다. 노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며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창6:11) 부패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 구절은 땅의 부패함이 이 땅에 가득한 폭력임을 보여준다. 폭력은 무엇인가? 자신의 뜻과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를 짓밟고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이다. 폭력이 가득한 세상은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무엇이든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만 지배하는 세상이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욕망을 앞세워 하나님의 명령을 짓밟아버린 것이 폭력의 시작일 것이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그 단적인 모습이고, 라멕이 자신의 상처로 사람을 죽인 것도 그러하다. 인류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폭력이 땅에 가득하게 되었고 온 땅이 부패하였다.

 

5. 성경은 노아가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고 증언한다. 이 증언 다음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진술이 뒤따른다. 노아는 완전무결한 사람이기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찾으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간 이였다. 이것이 의인됨의의미일 것이며, 완전의 의미일 것이다. 노아 시대에는 폭력이 난무하였다. 이러한 폭력은 필연적으로 약자를 짓밟고 유린하는 현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노아는 폭력 가득한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에 공감하고 동의하며 살아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찾으시는 것은 특출함과 특별함이 아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에게 동의하고 공감하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그것을 하나님은 찾으신다. 그 반대의 삶은 무엇인가? 자기 힘을 자랑하는 삶,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삶이다. 자신의 힘과 능력과 특출함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짓밟고, 자기보다 나아보이는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고 제거하고 없애버리는 삶이다. 가인과 라멕이 대표하는 폭력 가득한 세상과 노아의 세상은 가치관이 다른 세상이다. 가인과 라멕의 세상이 능력과 힘이 전부인 세상, 능력과 힘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한치도 포기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노아의 세상은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음을 믿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대에 자신을 내려놓고 공감하고 동의하는 세상이다. 

 

6.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강하고 견고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홍수조차 무색하게 해버린다. 홍수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바벨탑을 짓는다. 바벨탑 건설은 근본적으로 지독한 집단 이기주의의 발현이다. 이 점에서 바벨탑은 아담과 하와의 죄악이래 한결같이 지속되는 자기 자신의 욕망, 자기애를 조금도 내려놓지 않는 인간의 굳어져 가는 죄악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짓느라 모인 큰 무리들의 모의와 대조적으로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바벨탑의 배경이 되는 갈대아 바벨론에서 불러내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세상의 변두리, 힘의 교차점에 있게 하셨다.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평생을 원죄의 굴레 아래 살아가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상으로 부르셨는지를 보여주며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도 보여주되, 그 모든 실패와 연약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새로운 출발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실패의 근원이 자기애를 기반으로 한 관계의 파괴, 달리 말해 공적 삶의 상실에 있음을 보여준다. 가인은 특별한 존재였으나 정작 하나님이 열납하실 예배를 하지 않았고,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상대를 부정하고 제거하고 없애버렸다. 라멕은 상대에게 받는 어떤 공격도 용납하지 않았고 몇배로 되갚아주고 복수했다. 사람들은 온 힘과 능력을 다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하였다. 그러나 헛됨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벨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예배를 했고 죽임을 당했다. 폭력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의인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변두리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멍에를 벗어버리고 바로 서서 걷는 삶을 살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어느 길을 걸어갈 것인가?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1. 아담과 하와가 시작한 죄는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노아 시대가 되었을 때 온 땅에는 죄가 가득찼다. 셋의 후손이건 가인의 후손이건 차이가 없었다. 홍수를 경험하고도 다시 인간들은 새로운 차원의 죄를 도모한다. 인류 전체의 거대한 죄악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구원을 새롭게 이루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한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창세기 12장부터 구약성경은 온 인류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야기로 그 범위를 좁히며 이것은 이후 구약의 모든 책에서 일관된다. 그런데 그렇게 좁히는 첫머리인 3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안에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인류 전체를 향한 11장까지의 논의에 이어 아브라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그와 그의 후손만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인류 전체를 회복하시고 건지시겠다는 의미다. 이제 하나님은 한 사람, 한 가족, 한 민족을 통홰 모든 이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동에 땅의 모든 족속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삶은 그저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과 연결된 공적인 차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아브라함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복주시고 그들을 건지시는 통로다. 그것이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다.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받는 것은 열방을 위한 순종의 선택이요 부르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백성은 근본적으로 공적 존재다. 하나님 백성은 자신의 복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열방의 복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아라는 말씀의 의미이기도 하다.

 

2. 아브라함은 그의 땅, 그의 친척, 그의 아버지 집이 의미하는 이전의 삶에서 바야흐로 이제 하나님이 보여주실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새로운 삶, 낯선 삶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부르신 삶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땅과 자손의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창세기 본문(창18:19)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까닭을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 명시한다. 다소 뜻이 불분명할 수 있는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천하 열방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공의와 정의를 행할 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은 천하만민 가운데 하나님이 특별하게 선택한 사람이 존재하는 근본 이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받은 이들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야말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근거다. 그러므로 선택은 단순히 특혜가 아니라 그 선택에 합당한 삶을 통한 열방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공적 이유로 그분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3. 창세기 구절에서 "공의"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쩨다카"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뜻한다. 쩨다카는 우리가 하나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것과 관련있는 개념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었더니 하나님이 이것을 아브라함의 "쩨다카"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움은 단지 계명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자신의 처지에 따라 거절하거나 못한다 하지 않고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자신을 맞추고 동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취할 수 있는 올바른 관계의 본질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능성에 대한 순전한 동의, 달리 말해 믿음이다. 하나님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시고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건지실 때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라고 찬양한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쩨다카는 실상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인 경우가 많다.(사56:1; 62:1) 한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쩨다카"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여기지 않고 돕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 쩨다카 역시 이웃의 형편과 처지에 대한 깊은 공감, 마음을 같이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하나님에게 향하는  이 세가지 관계를 생각하면,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쩨다카를 규정할 수 있는 상황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의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쩨다카는 근본적으로 공적 문제다. 사사롭게 내 유익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내 처지로 생각하는 것이 쩨다카라는 점에서, 쩨다카는 사적 이익을 훌쩍 넘어선다.

 

4. 창세기 18장에서 "정의"로 번역한 히브리어 미슈파트"의 기본 의미는 "재판"이다. 재판의 근거는 규례이며, 재판하여 내린 판결이 악한 이들에게는 심판이고 억울한 이들에게는 구원이다. 재판을 통해 상황이 바로잡히는 세상은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법도인 규례를 근거로 재판에서 판결을 내린다는 점에서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를 근거로 올바른 사회질서를 이루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창세기의 가장 첫 부분에는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사람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라는 의미다. 즉 처음부터 구약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본받은 왕과 같은 존재라고 선언한다. 그러면 왕이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은 무엇인가? 왕의 핵심 직무는 통치, 다스림인데, 그러한 통치행위의 본질은 바로 재판이다. 재판의 본질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괴로움, 힘겨움, 갈등을 듣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일상은 이런 재판일 수 밖에 없다. 다음으로 모든 재판의 근본 원칙은 "공정함"이다. 여기서 공정함이라고 옮긴 "쩨데크"는 앞서 살핀 "쩨다카"와 의미가 동일한 단어다. 공정하게 재판한다는 것은 재판에 관련된 모든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이며 어느 한 사람에게 편파적으로 쏠리지 않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구약성경은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표현한다.(신1:17) 성경은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지 않는 재판이 공의로운 재판이라고 말한다.(신16:18-20) 외모와 뇌물은 모든 재판을 사사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는 재판은 자신의 유익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외모와 뇌물에 좌우된 재판은 하나님의 법을 기반으로 재판하지 않고 도리어 재판관 자신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외모를 보지 않고 공정하게 행하는 여부로 구분지을 수 있다. 나에게나 남에게나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때 "공적"이라 부를 수 있다. 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공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나 자신,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속한 나라만 아니라, 내 이웃, 내 공동체와 함께 존재하는 다른 공동체, 내 나라와 함께 존재하는 다른 나라를 배려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공과 사는 나의 어떤 행동이 나와 내가 속한 집단에만 유익이 돌아가는지 아니면 모든 이에게 고르게 의미있는지에 달려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할 때, 사람의 모든 행함은 필연적으로 공적일 수 밖에 없다. 왕의 자리는 신분의 존귀함만 의미하지 않고, 그 사람이 행하는 일의 근본에 "공공성"이 존재함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존엄한 선언에 유의한다는 것은 사람의 삶과 행위가 공적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왕같은 제사장" 이라는 베드로전서의 선언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가 더욱 "공적"이어야 하고 "공동의 선"에 부합해야 함을 분명히 한다. 

 

5.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구약성경에서  "공의와 정의"가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약자를 통해 극명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실 재판 같은 제도는 힘있고 부유한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 제도는 오직 재판 외에는 자기 힘으로 억울함을 풀 길이 없는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공의와 정의가 우리 신앙이 가진 공적 차원, 공공성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공적 차원을 고려한다는 것의 의미가 이 사회적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과 실천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연약한 이들을 지켜내고 보호하는지 여부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가장 약한 자들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판단할 때, 그 결정과 선택은 사적이 아니라 공적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시며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나님에게 행한 것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정의와 공의의 실행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찾으시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참된 예배다. 바울은 온 율법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며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한다(갈5:13-15). 이어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한다. (갈5:16)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삶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의 반대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이다.(갈5:16-17)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 이제껏 우리가 논의한대로는 사적인 욕심을 따르는 삶이다. 이를 생각하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 나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를 같이 배려하는 것, 달리 말해 공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므로 정욕과 탐심을 못박았다는 것은 모든 욕망을 없앴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모든 사욕 추구를 못 박았다는 의미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요 대강령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의 의미는 남과 나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내용이다. 

 

6. 아브라함이 받은 땅과 자손의 약속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할 사람이 필요하기에 자손을 약속하신 것이고 이를 행하며 살아갈 공간이 필요하기에 땅을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이러한 삶을 살 때 열방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특권은 천하 열방을 위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으로 부름받았다는 점이다. 흔히 선택을 자신들만 누리는 이익으로 연관하여 풀이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행하는 삶이 이스라엘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으로 불러내신다. 정의와 공의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사적 욕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고려하는 공적 차원의 문제다. 선약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사적 이익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버린 현실을 반대하고 뒤집는 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이다. 이런 이해가 없다면 자기 부인은 자칫 개인적 욕망의 절제, 욕구의 절제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자신에 대한 신뢰, 자기애를 주의 명령보다 위에 두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땅과 자손의 약속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손에게 명하여 이루시는 정의와 공의의 나라로 연결된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이 정의와 공의라는 점(시97:1-2; 사33:5)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고 하나님의 통치가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정의와 공의의 삶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라는 점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삶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상에서 하나님을 닮아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이웃의 슬픔과 괴로움에 동참하며,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기업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이웃을 돕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공의와 정의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서 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주어진 약속은 단지 한 가족, 한 민족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사건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이며, 하나님은 기독교인만 아니라 온 인류를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분이심을 고려할 때, 정의와 공의는 단지 기독교 내부에만 해당되는 원칙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보편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신앙과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임을 고려하는 것이 공적 사고의 기본이라면 그러한 공적 영역을 관통하는 기준은 비로 정의와 공의가 아닐 수 없다.

 

 

출애굽 공동체로 부르심

 

1. 이스라엘이 특별해진 것은 전적으로 출애굽 사건 이후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건져내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제 막 자기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 부르심이 오래 전에 하나님이 하신 약속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돌아본 역사가 바로 창세기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사실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출애굽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내용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이전에 조상들이 받은 약속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고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그분 뜻대로 지으셨음도 깨달았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창조가 의미있다. 달리 말해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창조사건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2. 그러면 출애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애굽에서 무거운 짐과 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을 건져내시어 자유케 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심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 여호와는 너희의 하나님" 이라는 언약 도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까닭은 이스라엘을 그 땅에 거하게 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다스리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 그 통치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정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그 곳에서 다스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통치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실 것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너희 하나님-내 백성" 도식의 의미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되, 하나님이 불러내시고 속량하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도록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도식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사랑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도식은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법으로 따르고 살아가도록 구별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이 도식은 이스라엘이 이 땅에 존재하는 본이 되는 공동체로 부름받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출애굽기 6장에서 시작해서 구약의 거의 마지막 시기인 스가랴에 이르기까지 이 도식을 구약성경 전체가 줄기차게 반복하고 환기한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자기 반성은 이 도식에 합당한 삶이냐 아니냐 하는데서 출발하며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이 도식에서 출발한다.

 

3. 하나님은 일대일로 애굽 땅의 히브리 노예를 만나신 것이 아니다. 심지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을 때에도 모세만 상대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대표하는 커다란 집단, 공동체를 염두에 두셨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홀로 판단하고 본인의 만족을 극대화 할 합리적 선택을 하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로서 이스라엘,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시내산 율법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법이다. 시내산 언약을 맺는 장면에서 쓰인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같은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공동체로 부름 받았음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수많은 잡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님의 언약, 그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에게 제시된 율법이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 그 법을 따라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세상과 구별될 것이다. 크기나, 군사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따르고 지키는 율법이 이스라엘을 세상과 구별한다. 

 

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부르시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처음부터 개인 윤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전제로 하는 틀은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구약 율법은 처음부터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한 규례라고, 달리 표현해 공적 삶을 위한 규례라고 할 수 있다. "공적"이라는 것은 이 율법을 따를 때 그 결과가 나 자신만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미친다는 의미다. 반면 사적이라는 것은 어떠 행동이 특정한 범위 내의 사람에세만 요구되고, 그 행동의 영향 역시 그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미친다는 의미다. 가령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장례식장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파트 전체 주민의 결정이라 해도 사적이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개인이 받았다 해도 공적이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선악의 판단 기준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될 때 필연적으로 온 세상은 자신의 사적 유익을 위해 상대를 배척하고 제거하게 될 것이다. 선악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 하나님의 법이 될 때 공동체적인 삶, 함께 살아가는 삶, 달리 말해 공적 삶이 가능해진다. 하나님나라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5.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집단의 유익을 구한다고 해서 공적이라 할 수는 없다. 민족주의와 집단이기주의는 지극히 사적 이익의 관철임이 분명하다. 핵심은 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원리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하느냐 여부다. 이를 일상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양심이나 자연법과 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다. 공적 삶의 실체는 선악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의 문제이며 신앙 공동체는 그 절대적인 기준이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출발은 반드시 개인이다. 그런데 개인이 지키는 그 율법은 본질적으로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기에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법의 영향력과 혜택이 미치며,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이들도 이 법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오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자, 율법을 따라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만 선택하고 부르시지 않고 그들을 끊임없이 백성들 가운데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율법을 따라 살아갈 때, 완덕의 개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공동체로 나아가게 되며 이것이 바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다. 온 인류를 상대로 행하던 하나님의 경륜이 아브라함에게서 한 사람, 한 가정으로 국한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에 복을 내리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출애굽기는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임을 여러번 이야기한다. 출애굽과 시내산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다.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되고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확장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따라 살아갈 때 열방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다.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구별된 삶을 통해 열방이 회복을 경험할 것이다. 

 

 

 

2부 공동체적이며 공적인 복음과 그 구체적 실현

 

아브라함과 나그네, 소돔과 고모라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갈까? 가나안 땅을 떠도는 나그네일 따름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설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것을 양보했다. 아브라함은 좋은 것을 상대에게 양보해도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좋은 것이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 곧 아브라함이 쩨다카를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돔을 둘러싼 국제 전쟁에 휘말려 롯이 가족과 함께 사로잡혀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해 과감하게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아브라함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롯을 살리라고 자기를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여기는 듯하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다른 이의 고통을 보고 가만히 그 자리에 눌러앉지 않는다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잡혀간 롯을 나몰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이때를 위한 것이라 여기고 투입하여 뛰어들었을 때, 롯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쩨다카, 즉 공의를 행했다. 부당하게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구출했다는점에서 미슈파트, 즉 정의를 실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비록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떠도는 나그네였지만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돌아보고 자신이 받은 복을 모두 걸고서 사로잡힌 이웃을 구해냄으로 천하만민에게 복이 임하게 한다.

 

2. 창세기 18-20장은 나그네를 대접한 아브라함과 나그네로서 그랄에 간 아브라함을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이 본문에서 주인공들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가? 참으로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인지 모를 정도로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했다. 나그네 환대는 사소한 여러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선언하며 그렇기에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신10:17-19) 모세는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높고 뛰어나심을 외모나 놔물에 좌우되지 않으심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심과 연결한다. 하나님이 나그네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니,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본질이다. 창세기20장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되어 그랄 땅에 살게 된 경우를 다룬다. 기근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불가피하게 도시인 그랄로 이주해야 햤고, 그곳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의 특징은 아브라함과 같은 나그네를 함부로 다루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역의 나그네 대우는 소돔에서 적나나하게 드러난다. 아브라함과 롯은 자기들에게 온 나그네의 신원을 묻지 않고 극진히 대접했지만 소돔 사람들은 나그네를 폭력적인 성욕으로 짓밟으려 한다. 상대방의 정체를 묻고, 그래서 상대방의 지위와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관습이다. 소돔 사람들의 죄악은 단순한 동성애가 아니라 도착적인 성욕에 사로잡힌 폭력일 따름이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힘없는 나그네를 향한 집단 성욕의 폭력적 발현이 문제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18:19)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과 대조된다.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신 하나님이 소돔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과 죄악을 확인하기 위해 소돔을 방문하실 것이라는 말씀(18:21)은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판단기준으로 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문맥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문제가 동성애 같은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에스겔에 따르면 소돔의 죄악은 동성애가 아니다.(겔16:49-50) 자기는 태평함과 풍족을 누리면서 자기들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것, 오히려 이들에게 교만하고 가증한 일을 행한 것, 그것이 소돔이 죄악이다.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은 것이 소돔의 멸망의 원인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의 근본 특징이다. 복음이 지닌 공공성에 대한 인식은 약자에 대한 올바른 고려와 직결된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공적 신앙의 요체는 성읍을 방문한 나그네를 대하는 자세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이 중보하며 찾았던 의인 열 사람의 경우, 그 "의인"됨의 실체는 나그네를 대하는 자세에서 나타난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1. 요셉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그가 종교의 특수한 외적 형식을 열심히 준수하는 데서 드러났다기 보다는 일상에서 충성스럽게 일을 하는데서 드러났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외치고 선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알 정도로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은 자기 뜻에 반하여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애굽에서 일시적으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여 곧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가지 않고 마치 그 땅의 한 부분인 것처럼 살아간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요셉이 부당한 세상에서 탈출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세상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다. 그런 점에서 요셉이 함께 살아가는 애굽의 사람들과 애굽이라는 공적 환경은 쉽게 포기하고 체념할 것이 아니었다. 요셉 이야기는 다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제2성전기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반영한다. 요셉은 기적없는 세상에서, 신앙고백이나 종교적 규례에 대한 몰두와 상관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셉 본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되, 마치 함께하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복도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통해 표현된다. 이 점은 창세기의 요셉 본문이 지닌 특별함이기도 하다.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신앙고백이나 동족 결혼으로 증거하지 않는다.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은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자세는 "하나님없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라고 말할 수 있다. 요셉에게는 자신의 모든 선의가 어그러지고 자신의 모든 진지함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것 같은 현실이 반복된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시105:17-18)는 참으로 어려운 표현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현실인데, 하나님은 그 현실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때가 있다. 요셉의 환난은 계속되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세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시간을 견뎌내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교회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공공 영역이 지닌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2. 요셉 이야기의 절정은 요셉이 잘 참고 충성하더니 마침내 총리가 되어 성공한 것이 아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요셉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요셉이 총리가 되어 한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성공시킨 것이 하나님을 증거한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성공한 자리에서 한 일이 참으로 하나님을  증거한다. 요셉은 총리가 된 후 7년 흉년을 통해서 결국 애굽 전체 토지를 국유화해고 애굽인 전체를 국가의 종으로 삼아버렸다. 어떻게 보면 요셉은 자유롭던 애굽인들을 모두 왕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고 철저히 왕과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토지가 국유화되고 애굽인들이 국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국유지가 된 땅을 국가에서 빌려서 부치는 일종의 소작인이 되었다는 의미다. 빌리는 대신 지대 형식으로 수확의 20퍼센트를 국가에 바쳐야 했다. 자유인이 종이 되었다니 표면적으로는 비참해진 것 같지만 왕과 제사장을 제외한 애굽 모든 이가 왕의 종이 된 것이니 실제로는 애굽에 가득하던 온갖 불평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작료 20퍼센트는 상당히 관대한 조건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수확의 3분의 1이나 절반을 지주에게 내야했다. 이를 고려할 때, 거의 이천년 전에 수확의 20퍼센트를 내는 소작료는 애굽인들에게 결코 부담이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7년 흉년을 통해 사실상 애굽  모든 국민이 평등해지고 모든 국가의 땅을 부치는 이가 되고 모두 동일하게 20퍼센트의 부담스럽지 않은 소작료를 내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누구든지 소작료만 내면 토지를 경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굽에서 토지는 더는 소유가 아니라 경작에 의미가 있게 되었다.

 

3. 요셉의 토지 정책은 근본적으로 레위기 25장이 이야기하는 희년토지법과 통하는 바가 있다.(레25:23) 땅은 사사로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동안 경작하는 곳이다. 이스라엘이 내는 십일조는 자신이 땅에서 거둔 수확물 가운데 드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대하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이 이룬 토지법은 희년제도와 통하는 바가 있다. 사람들이 토지를 사유화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땅은 가만히 두면 아무 가치도 나지 않지만 인간이 경작할 때 가치를 생산한다. 경작함이 없이 오직 땅 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떼돈을 버는 것은 불로소득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룬 이득을 독차지하는 것밖에 안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차이가 심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구성원 일부가 땅을 잔뜩 지니는 것과 그 사회의 불의가 심해지는 것은 늘 관련이 있다. 그 점에서 모든 사유지를 국유화한 요셉의 정책은 토지의 사유화와 독점에서 생기는 불로소득을 막는 것이며, 사회의 불평등과 구조화를 막는 것이며, 요셉 신앙의 결론이었으리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총리가 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총리가 된 요셉이 애굽인에게 흉년을 대비시키며 흉년을 이겨 내게 하고 애굽에 있는 불평등한 모습을 제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토지제도를 이루는 정책과 노력에서 요셉 이야기의 진정한 국면이 나타난다. 요셉은 사사로운 신앙인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열심이 일하는 신앙인이다. 요셉은 하나님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 그런면에서 공적 영역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적나나하게 드러내는 영역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청지기로 살아간다는 것은 공적 영역의 유익을 구하고 자신의 충성을 통해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세우신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공적 유익, 공공의 유익을 돌아보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믿음 여부에 따라 하나님 일이냐 세상 일이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거룩한 삶, 레위기 19장

 

1. 애굽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불러내시어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셨다. 그 율법은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이 아닌 여호와의 명령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상, 다른 세상을 향한 가르침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시내산에서 선포되었는데, 시내산과 관련된 부분은(출19:1-민10:10) 오경에서 가장 중심에 있으면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를 때,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출19:6) 시내산 율법의 한 가운데 놓인 레위기는 이러한 거룩한 삶을 집중해서 다룬다. 레위기 가운데서도 레위기 19장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명시적으로 명령하는 구절을 첫 머리에 제시한다는 점에서 레위기의 핵심 본문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복수형 "너희"를 향해 명령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거룩함은 한 사람 한사람의 거룩한 삶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전체의 거룩함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내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과도 통한다.(출19:6) 이러므로 이러한 명령은 공동체 전체의 순종과 변화를 요구하며 거룩한 삶은 공동체 전체가 구현해야 하는 삶임을 보여준다. 또한 레위기 19장은 거룩함이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크고 높고 영원하심, 유일하심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분 백성에게 거룩함을 명령하신다는 것은 그분 백성이 다른 백성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거룩함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자명하고 당연한 사실로 보이는데 레위기19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의 거룩함의 근거로 제시한다는 것은 놀랍다. 성경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할 때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이나 원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상에 행하신 일을 들어 찬양한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함은 단지 어떤 성품이나 추상적 원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일과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배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며 죄를 다스리도록 부름받은 존재다. 또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징이나 행하심을 본받고 행하도록 부름받았다. 거룩함 역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이스라엘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존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라는데 그 본질이 있다.

 

3. 레위기19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내용을 부모 경외와 안식일 준수로 시작한다. 우상을 만들거나 경배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 다음에 나온다. 부모 경외와 안식일 준수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삶의 핵심에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게 되고, 쉬지 않는 노동은 사람을 지치고 곤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거룩한 삶은 단순히 지켜야 하는 부담과 의무라기 보다는 모든 이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은혜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그 공동체는 안전하며  두려움없이 살아갈 수 있다. 레위기19장의 다양한 규례의 중심에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말씀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규례에는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배려와 섬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삶을 든든히 지켜내고 지탱하는 일이 공적 규례의 본질이다. 레위기 19장에는 화목제 규례와 함께 수확물을 남겨놓는 규례가 나온다. 화목제 규례와 수확물을 남기는 규례는 모두 가난한 이웃을 위한 규례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규례들은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수확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한다. 거룩함은 신앙고백보다는 모퉁이 남기기를 통해 표현된다. 그런데 그 모퉁이를 남길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레위기에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를 하나님 명령의 형태로 담아서 일종의 제도와 틀로 만든 점도 주목할만 하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일을 개인의 양심과 자선에 맡기기보다는 제도와 구조를 통홰 확립하는 레위기 율법의 특성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제도야 말로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함이다. 레위기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얼핏 세속적으로 보이는 개념을 가장 종교적인 단어인 "거룩함"으로 표현한다. 레위기는 거룩한 삶을 개인의 자선보다는 사회경제적인 틀, 법적인 제도로 만드는데 관심이 있고 내 자신의 자선보다는 서로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구조에 관심이 있다.

 

4. 레위기 19장은 이웃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문제를 다룬다.(레19:13) 여기서 이웃을 표현하는 말로 품꾼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웃은 자기보다 훨씬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이다. 레위기는 품꾼을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그것은 무엇보다 제 날짜에 노동의 댓가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품삯을 늦게 주거나 안주는 이들에게는 관대하고 품삯을 받지 못해 부르짖는 이들에게는 소망을 하늘에 두라고 권면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행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기가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 대가를 제대로 주지않는 것이 바로 억압, 즉 힘이나 권세로 상대를 누르는 행위다. 굳이 품삯이 아니어도 상대에게 없는 것이 자기에게 있을 때, 그것을 이용하여 정당한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억압이다. 우리 삶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자기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자이며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맞서는 존재다. 그러므로 자기가 가진 힘이나 권력으로 남을 억압하는 일은 단순히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참람함이다.

 

5. 레위기 19장 15절에는 첫머리( 재판할 때 불의를 행지 말라)에 재판을 뜻하는 "미슈파트"가 쓰이고 대응부분( 공의로 너의 이웃을 재판하라)에 공의를 뜻하는 "쩨데크"가 쓰여 평행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미슈파트를 해치는 불의는 가난하다고 혹은 힘있다고 부당하게 판결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재판해야 하는가? 오직 "쩨데크"만이 재판의 기준이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얼굴을 들어주는 것도 공의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든 세력이 있는 자든, 얼굴을 배제하는 것이 재판에서 실현해야 하는 공의의 핵심이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신원하는 것이 공의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라는 구절과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공의다. 그들에게는 가난하다고 하여, 힘이 없다고 하여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 앞에 함께 서있는 이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19장은 품꾼과 장애인뿐 아니라 또 다른 약자로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함께 살아가는 거류민들을 언급하면서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할 때와 동일한 태도로 거류민들을 대할 것을 명령한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을 함께 사는 거류민들도 함께 누려야 한다.거류민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규례는 거룩함에 관한 레위기 율법이 지닌 공적인 특징을 가장 명확하고도 단적으로 보여준다. 

 

6. 레위기는 거룩한 삶의 마지막 부분에서 공평한 도량형을 다룬다. 재판에서 "쩨데크"가 실현되기 위해 재판 당사자의 외모를 보지 않고 판결해야 하듯이 상거래에서 "쩨데크"는 공편한 저울과 추를 통해 나타난다. 공평한 저울추는 나와 남에세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의 저울추를 의미한다.(신25:13-16) 불의 혹은 악이라는 말은 추상적으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재판에서 힘세고 부유한 사람의 낯을 보아주거나 시장에서 공평하지 않은 저울추를 쓴다면 그것이 불의요 악이다. 이 구절은 이런 행동이 여호와께 "가증"하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가증"은 제의 영역에서 부정한 짐승이나 우상숭배를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인데 저울추를 두개 가진 사람에게도 이 단어를 쓴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제의 영역과 상거래 영역은 전혀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상거래에서 "공의"는 나와 남에게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레위기 19장에서 명령하는 거룩한 삶의 핵심 규례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여긴다면 모든 사람을 동일한 원칙을 따라 재판해야 하며 나와 남에게나 동일한 저울추룰 사용하여 거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레위기 율법을 요약하시면서 레위기19장8절에 나오는 이웃사랑을 인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7. 레위기19장에서 상거래와 같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을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항목에서 다룬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거룩함은 제의와만 연관된 좁은 영역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영역 전체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 "쩨데크"는 상황에 따라 달리 구현된다. 재판에서 쩨데크는 상대방에 좌우되지 않고 재판한다는 의미이며 시장에서 쩨데크는 자신과 남에서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시장에서 거룩한 삶은 공평한 저울추로 구현되지 여호와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아울러 레위기에서 공평한 저울추를 여호와의 규례로 명령하는 것에서 주목할 점은 이런 사항을 개인 양심에 맡기지 않고 법으로 제정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제도가 훌륭해도 개인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면 그 제도는 유명무실해지기 쉽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은 그에 합당한 제도나 법령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레위기는 이렇게 공평한 저울추를 써야 하는 까닭을 말하면서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진술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묵상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분이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라면, 이스라엘은 거류민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고 나와 상대에게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해야 한다. 농사꾼에게 거룩한 삶은 밭의 모틍이를 남기는 것이고 고용주에게 거룩한 삶은 품꾼의 품삯을 속이거나 착취하지 않는 것이다. 재판관들에게 거룩함은 재판 당사자들의 외모를 보지 않고 오직 공의로 판결하는 것이고 장사하는 자들의 거룩함은 모두에게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하는 것이다. 

 

8. 레위기 19장의 결론은 37절이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행하는 삶이야말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다. 이스라엘은 세상 가운데서 삶을 통해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이다. 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들의 존재 이유가 없으며, 그들은 땅에서 쫒겨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거룩할 수 있을까? 거룩함의 유일한 원천이 하나님이심 기억할 때,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닮는 삶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함은 단지 종교 영역에서 구별됨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백성에게 하신 행동을 통해 거룩함을 드러내셨는데, 거룩함은 홀로 있는 존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거룩함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과 관계 가운데 드러난다. 이스라엘 신앙과 당시 이방종교의 차이점은 많지만, 이렇게 사회차원의 윤리를 거룩한 삶으로 담아내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차이다. 이스라엘 신앙이 타락했을 때 바로 이런 결합이 깨어져 예배와 제사는 풍성한 반면, 사회적 공의와 이웃 사랑이 사라졌다. 구약 예언자들이 줄기차게 선포한 말씀은 바로 이런 비뚤어진 신앙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의 거룩함과 이웃을 대하는 삶의 거룩함이 분리된 신앙은 사실 여호와 신앙이 아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신앙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우상숭배다. 거룩함은 언제나 공동체와 관련이 있으며, 거룩함은 가난한 자, 거류만, 피고용자, 나그네를 끊임없이 고려한다는 점에서 매우 공적이다. 구조에 대한 인식,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올바른 행동으로 구현된다. 이를 생각하면 예수님이 구약을 요악하시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고 하신 것이야말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말의 실제 의미다. 결국 거룩함은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되고 현실화될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희년법과 그 정신

 

1.. 레위기25장에 나오는 희년 규례는 레위기 23장부터 시작하는 절기에 관한 말씀의 한 부분이다. 즉 레위기 23장 첫머리에 이스라엘이 지킬 첫째 절기로 안식일을 언급하고 절기에 관한 모든 말씀이 끝난 후인 26장 첫머리에 다시 안식일을 바르게 지킬 것을 언급한다. 이는 희년을 포함한 절기 규정의 근본이 바로 안식일 규례에 있음을 의미한다. 구약 신앙에서 안식일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틀 속에 안식일이 강조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언급은 안식일의 근본에 구별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도록 부름받았다. 안식일로 대표되는 절기를 바르게 지키는 것이 그런 본받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레위기 16장은 제사와 정결규례의 결론으로 대속죄일을 제시하는데 레위기25장에서 규정하는 희년이 바로 이 대속죄일에 선포된다. 그런 점에서 제사와 정결규례를 말하는 1-16장의 결론으로서 16장은 안식일과 절기 규례를 말하는 17-25장의 결론인 25장과 대응한다. 그러므로 대속죄일에 선포되는 희년 절기 규정은 실제로 레위기 전체의 내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2. 레위기에 나오는 각종 절기 규정들은 안식일 규정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월절은 14일 저녁, 즉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점에 지키고 이후 일곱날 동안 무교절로 지킨다. 그리고 일곱째 날 즉 다음 안식일에는 성회와 더불어 일절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첫 이삭 단을 드리는 날은 안식일 다음 날인데, 이날부터 일곱 안식일을 세어 일곱 안식일 다음날에 첫 이삭의 떡으로 소제를 드리는데 이 날을 칠칠절 혹은 맥추절이라 하며  이 날도 성회를 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보면 칠칠절은 안식일에 이어 안식을 한번 더 지키는 날이었다. 또 해마다 일곱째달 첫날인 나팔절은 아무 노동도 하지 않으며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성회의 날이었으며 일곱째 달 십일에 지키는 대속죄일도 일하지 않으면서 지키는 안식의 날이었다. 나아가 일곱째 달 십오일부터 이레 동안 지키는 초막절도 첫날과 여덟째 날에 아무 노동도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된 절기였다. 이를 보면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도 일주일마다 반복되는 안식일에 더하여 지키는 또 다른 안식일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오늘날의 토요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즉 안식일은 토요일에 매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과 명령에 매인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날이 바로 안식의 날이고 그날은 사람이 노동하지 않고 쉼을 누리는 날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쉼으로 나타난다. 절기의 쉼은 이 절기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는 날일 뿐 아니라 이 절기 자체가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주시는 은헤임을 보여준다.

 

3.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이 거룩함을 위해 명하신 안식일 규례라는 틀 안에서 안식년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하며 일곱째 안식년으로 나타나는 대안식년으로서 희년을 명령한다. 각 절기 규정의 마지막에 있는 희년은 절기 규례의 가장 절정 혹은 결론으로 보인다. 안식년에 담겨있는 정신의 확장이요 결론이 희년 정신인 셈이다. 나아가 안식년의 근본이 안식일이라는 점에서 희년은 안식일 정신을 가장 온전히 구현한다. 오십년째 해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절정은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바로 서서 걷는 삶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거칠 것이 없이 흘러가는 자유를 주셨다. 이 자유는 그저 정신적인 자유나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일을 결정할수 있는 자유 정도가 아니다. 참된 자유는 종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인 땅 위에서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 희년의 자유는 몸과 마음의 온전한 자유다.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에게 받은 기업으로, 원래 하나님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자유를 누리던 상태로 돌아간다. 가난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에서 이스라엘을 소외시킬뿐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유한 삶의 근본인 노동에서도 소외시킨다. 그런 점에서 기업 무르기에 관한 세부 사항은 희년 규례가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묘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희년 규례를 근본적으로 현실 세계를 위한 규례로 여기게 한다. 

 

4. 레위기 25장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여러번 반복하여 강조하는 구절들은 희년법을 사회차원의 도덕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본질로 다를 것을 요구한다. 희년법 준수의 동기는 사회의 균형이나 유지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근본 언약 관계가 형성된 출애굽 경험이 희년법의 근본정신이자 희년법을 준수할 동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희년법은 사회적 규례라기 보다는 신앙의 근본인 종교적, 영적 규례다. 여호와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에게 가난한 이웃을 돕고 사랑하라고 선포하는 신앙의 권면이 희년법이다. 희년을 성결 법전의  절정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제의적이며 신학적 성격을 가진 대속죄일에 선포한다는 것은 희년의 제의적 성격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희년 규정은 영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통합한다. 사실 구약 율법 자체가 단순히 영적이거나 단순히 사회적 규정들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년 규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며 행해야 하는 근본 삶을 규정하는 것이다. 희년 규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땅에서 이스라엘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땅에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비록 가난하여 남에게 자신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종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종, 즉 여호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땅과 이스라엘이 모두 여호와의 것이므로 여호와가 아닌 사람의 사적인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희년이 말하는 자유는 단지 마음이 억눌린 데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기업과 몸의 회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5. 희년 규례의 최대 문제는 바로 이 규례의 실현 가능성과 실제 준수 여부다. 희년 규례에 세부 규정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이 규례는 분명 실제 준수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럼에도 희년 규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그분 백성에서 명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훼손하는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여호와께 대한 경외라는 원칙으로 다루어야 한다. 희년의 실현 불가능성은 시실 실제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동기의 문제일 것이다. 희년은 실현 불가능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적이다.  희년이 이상적이라는 말은 희년이 실현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희년법 안에 그분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참된 이상이 담겨있다는 의미다. 희년은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하던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르며, 이를 통해 지향해야 하는 목표를 제시한다. 희년의 회복은 일시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이다. 7년마다 돌아오는 면제년을 바르게 준수하면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설령 빚을 면제 받아도 이미 땅을 팔아버린 사람은 여전히 땅이 없는 채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희년법은 참으로 그 땅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는 법이다.

 

6. 희년 규례의 근본에는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선언이 있다. 아울러 이 선언에는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의 종이 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시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되 모든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본질이다. 이 자유의 몸으로 자유의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희년 규정은 현실 사회 속에서 몸과 땅이 하나님 백성에게서 분리될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 그 분리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규정한다. 희년 규정에 따르면 일곱 안식년이 지난 그 다음 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정결케 하는 대속죄일에 몸과 땅은 완전한 자유를 회복한다. 결국 희년법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사람의 양심이나 자선이 아니라 구조적인 법률을 통해 삶을 회복하도록 규정한다. 이를 생각하면 희년 규정은 몸과 땅의 회복, 즉 사람이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현실과 땅이 사람에게서 분리된 현실을 바로잡는 법이고 제도다. 그리고 이러한 회복을 이루는 날이 속죄일이라는 점에서 참된 자유와 구속과 해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희년 규정의 초점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로막는 모든 질곡과 멍에에 대한 해방과 자유선포이다. 이렇게 희년이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재조정이라는 점에서 희년의 현대적 적용은 한 사회에서 새출발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을 포함한다. 최근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온 국민에게 실질적 자유를 부여한다는 정신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희년과 통한다. 토지 소유자에게 소유 규모에 따라 토지 보유세 혻은 국토보유세를 징수하여 기본소득으로 모든 국민에게 나누어 준다면 "모든 이의 땅을 모든 이의 것으로" 라는 희년 정신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게 될 것이다. 어느 시대이건 땅이 독점되지 않게 하고 땅에 대한 사람의 평등한 사용권을 보장하는 제도를 갖추고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종이 되게 만드는 사회구조나 틀을 바꾸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며 이것이 바로 희년의 정신이다.

 

7. 이사야 61장 2절에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어떤 해가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가리킨다고 할 떼, 희년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해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에 선포하는 자유와 하나님나라를 생각할 때, 예수님이 이 구절을 선포하심으로써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참으로 적절하다. 예수님의 선포 역시 하나님나라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사야 61장을 사용하신 것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점은 희년 성취의 선언이다. 희년은 7과 49라는 숫자에 매이지 않는다. 안식년이 땅의 안식과 노예의 해방을 지시하고 7년 면제년에 빚의 탕감과 노예해방이 선포되면 49년 희년에 땅의 회복과 더불어 노예의 해방, 빚의 탕감을 모두 명령한다. 그런 점에서 희년 개념의 핵심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더불어 시행하는 모든 회복과 자유와 해방이다. 이런 거룩한 시간들을 통해 구약이 보여주는 것은 해방하시고 회복하시며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신 후,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고 하신 것은 의미가 깊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은혜의 해라고 선언하신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일꾼 비유는 각자 재능에 따라 수고하고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로 받는다는 점에서 희년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고린도 후서 8장에 등장하는 교회들 간의 유무상통 이야기는 가난의 문제를 개인의 열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해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원리가 모든 이를 균등하게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희년 정신의 구현이다.

 

 

아둘람 공동체

 

1. 사무엘에게 피했어도 사울이 쫒아왔고 자기가 제사장에게 들렀다는 사실로 인해 사울이 제사장까지 죽이는 것을 보면서 다윗은 사울의 세상에서 더는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블레셋으로 도망갔으나 가드 왕의 의심을 사게 된 다윗은 미친 척을 하며 겨우 빠져나와 아둘람 굴로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다윗의 아둘람 동굴 시절이 시작되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둘람은 사울의 기브아와도 꽤 가까워서 오래 머물기 적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무엘상 22장은 아둘람 시절에 다윗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그런 점에서 이후 다윗의 공동체를 아둘람 공동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시기에 다윗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윗에게 갔다. 이는 다윗의 가족으로서 사울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다윗의 가족들도 배들레헴을 떠나 아둘람 동굴에 합류하여 짧지 않은 방랑의 세월을 시작했다. 가족만 다윗에게 합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곤고한 사람들과 빚진 이들, 마음이 괴로운 이들이 스스로 다윗에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어려움과 환난에 둘러싸여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곤고한 삶을 살던 이들이다. 환난 당한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몰려왔음은 사울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원칙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재판을 통해 환난과 원통함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어려움은 그렇게 해결되지 못했고 이들은 자신들 세계에서 더는 살기  힘들었다. 그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닌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 사람들은 스스로 다윗에게 모여들었다.

 

2. 다윗은 자기를 쫒는 사울을 피해 여기저기로 도망 다녀야 했고 이 시절은 다윗에게 매우 힘겨운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시기에 놀라운 역사를 이룬다. 도망다니는 와중에도 다윗은 블레셋에게 약탈당하는 동족 그일라를 돕는다. 자기도 사울에게 쫒겨다니는 처지였지만 그일라가 블레셋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사울이 그일라를 포위하자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려 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일라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블레셋의 손에서 그일라를 건졌지만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배신했다. 그일라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냥 모른채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그일라를 건지는 일에 참여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고 오히려 피해가 된다고 해도 다윗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처지였지만 다윗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고 승리하게 위해 살아가는 존재였다. 다윗에게는 약탈당하고 압제당하는 동족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개입하지 말아야 했고 실제로 피해만 생긴 것  같아도 다윗은 이 싸움에 뛰어들었으며 하나님에게도 이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옳았다는 응답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무엇을 결정할 때, 언제나 이익과 유익만 추구할 수 없다. 손해가 될 수 있고, 헛수고처럼 보이더라도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뛰어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비록 배신을 당하고 피해를 본다고 해도 곤경에 처한 이를 돌아보고 살리는 일에는 뛰어들어야 한다. 여기서 다윗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중심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3. 아둘람 공동체에는 다윗의 용사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바, 아호아 사람 엘르아살, 하랄 사람 삼마였다. 다윗의 용사들은 확보하고 얻은 지역을 작다하여 소홀히 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지켜낸다. 다윗의 용사들이 이렇게 지켜내던 때는 승승장구하던 때가 아니다. 백성 전체의 사기가 떨어지고 상대는 기세등등하여 모두 도망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던 이들이 바로 다윗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아마 아둘람 시절 이래로 다윗과 함께 했을 것이며 원래 아무 것도 없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거침없이 맞설 수 있었다. 세 용사는 다윗과 함께 빛났고 아둘람 시절과 더불어 눈부셨다. 다윗의 찬란한 시절은 세 용사들과 더불어 빛난다. 세 용사는 세상이 몰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이들이지만 다윗과 함께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 사실은 한 사람이 이루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이가 함께 이루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세상임을 보여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머리가 되시고,머리이신 주님에게 연결된 이들은 몸을 이루는 지체다. 우리 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몸을 이루는 지체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등한 공동체, 그것이 다윗의 공동체이며 아둘람 공동체다. 

 

4.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다윗 나라의 모습은 다윗의 시글락 시절을 다룬 사무엘하 30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울을 피해 다니던 다윗이 블레셋에 투항하여 블레셋 휘하 부대로 시글락에 주둔하여 명맥을 유지하던 시기가 있었다. 다윗 부대가 시글락을 잠시 비운 사이에 아말렉이 침략해서 시글락을 초토화하고 모든 여인들과 자녀들을 사로잡아가는 일이 일어났다. 아내와 자녀를 빼앗긴 백성이 슬퍼하고 다윗을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서둘러 아말렉을 추격한다. 추격에 나선 다윗의 무리는 들에서 죽어가던 애굽 소년을 만나고 그 소년의 목숨을 건져준다. 이 소년의 도음으로 다윗 군대는 아멜렉을 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여인과 자녀들을 되찾아 온다. 시글락 사건은 다윗의 리더십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다윗 군대와 아말렉 군대의 결정적 차이는 병들어 쓸모없게 된 애굽 소년을 어떻게 대우했는지에 있다. 아멜렉에게 이 소년은 쓸모없이 밥만 축내는 대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사람은 부픔이고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가족을 되찾으려면 한시가 급한 다윗의 군대는 길에 쓰러진 애굽 소년을 데리고 와서 먹이고 돌보아 준다. 다윗과 그 군대는 이 일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 살려낼 것이 아니라면 다윗 공동체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다윗에게 왔는데 자기들이 바쁘다고 지금 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다윗 집단의 존재 근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과 아말렉을 구분짓는 것은 혈통이나 민족이나 신앙이 아니라 병들고 죽어가는 한 사람을 생명으로 대하느냐 아니면 대체 가능한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느냐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다윗의 리더십은 생명을 존중하는 리더십이며 정의와 공의의 통치다. 

 

5.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다윗의 모습은 아말렉 전투 후에 전리품을 처리할 때도 한결같다. 아말렉 전투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는 후방에 남은 이들 몫으로 나눠줄 전리품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윗은 사람의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초점을 둠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분명히 일을 능력있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받는 몫은 같다. 왜냐하면 이 싸움이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면 전쟁에 참여한 자나 후방이 남은 자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고백이 우리 안에 난무하지만 다윗 공동체 안에서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고백이 전쟁에 아무 기여도 못한 약한 이들에게도 전리품을 동등하게 나눠주는 것으로 구현되고 드러난다. 깊은 신앙고백을 일상의 나눔과 실천으로 구체화하고 현실화한다. 그리고 다윗 공동체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로 삼았다. 멋진 세상이 한번으로 그치지 않도록 그것을 제도로 만들고 사회의 틀로 만든다. 이를 통해 다윗의 공동체는 욕망을 극대화하는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쓰시는 이들의 공동체임이 분명해졌다. 또 힘이 강한 이들과 약한 이들이 함께 살아가며 돌보는 공동체임도 분명해졌다. 이 공동체는 일한 대로 배분되며 뒤쳐지면 살아날 수 없는 도급제 집단이 아니라 힘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였다. 이것은 각기 다른 시간에 고용되어 포도원에서 일했지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은 포도원 일꾼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아무래도 능력있고 뛰어난 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고용되어 일했을 것이고 일을 잘하지 못하는 이들은 나중에야 겨우 고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품삯을 받는다. 왜냐하면 재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는 유능하고 성실하므로 남들보다 더 많은 몫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지만 공의와 정의로 통치되는 하나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여건은 소중한 것이며 감사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재능은 그만한 재능이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삶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어느 사람에게는 재능을 주시고 어느 사람에게는 재능을 주시지 않은 까닭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다. 손이 발더러 너는 물건을 만드는데 기여하지 않았으니 빠지라고 말할 수 없다. 각자의 재능을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며 살아가고, 그러면서 그렇지 못한 다른 이들을 섬기고 나눈다. 그렇게 우리는 도움을 받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

 

 

 

 

3부, 예언자들의 선포

 

우상숭배

 

1.구약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거나 구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우상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구하고 찾고 의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상의 본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울 때 주의할 점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많이 가지면 안되는 것으로 병마와 아내와 은금을 말한다. 이 세가지야 말로 왕의 권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셋의 공통점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구하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한다는 것이다. 병거와 은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한다는 점에서 우상숭배와 본질상 동일하다. 이런 힘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들 힘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 혜택은 온전히 그 집단에 속한 이들끼리만 누린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병마와 은금에 대한 갈망은 근본적으로 우상숭배다. 우상은 그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약속한다. 그러나 우상은 그들에게 두려움이나 걱정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초초하고 불안하며 살게 마련이다. 또한 우상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우상숭배는 힘에 대한 숭배이며 욕망에 대한 숭배이므로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약자들과 함께 살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나 하나님 아닌 것들을 형상화하는가?  최초의 우상숭배라 할 수 있는 금송아지 숭배 장면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백성은 아론을 찾아와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다. "자기를 위하여"가 바로 우상의 본질이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불안과 초조함이 있다. 사실 그들이 신을 만들고 한 일은 그 신 앞에서 춤추고 종교의식을 행한 것뿐이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잊고자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어 열광적이고 열정적인 종교의식을 행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신을 대신하는 형상이든, 하나님처럼 여기는 대단한 사람이든 그 본질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거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없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만족하고 안심할 대상에게 도망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한 존재라는 점에서 금송아지 숭배는 선악과 사건과 통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금지된 열매를 먹었고,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신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하고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우상 숭배는 순전히 "자기를 위한" 종교다. 자기를 위한 종교는 필연적으로 자시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자기를 위함"의 중심에는 병거와 금은으로 상징되는 힘과 풍요가 있고 안심과 평안이 있다. 이 모두를 아울러서 사적 종교, 사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질이 이러하기에 우상숭배는 현실에서 이웃과 맺은 관계의 파괴로 나타난다. 자신의 힘과 이익과 안전과 평황를 위해 신을 조정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므로 우상숭배가 번성하는 곳에서는 힘없고 약한 자들이 짓밟힐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번성 여부는 사회의 사회경제적 현실과 맞물릴 수 밖에 없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이며 하나님 따르는데서 돌이키니, 그 사회는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한다(사 59:13-15)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사회경제적 불의를 고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숭배가 번성했는데도 예레미야는 불의한 사회현실을 바로잡을 것만 왕에게 요구했다는 점은 우상숭배를 척결하는 일과 정의로운 현실의 회복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3. 우상숭배는 시적 이익을 위한 신앙이 본질이기에 우상숭배가 극심한 세상은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한다. 개인보다 큰 집단에 유익이 돌아간다고 해도 우상숭배는 사적 이익추구가 본질이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더 큰 집단 사이에도 전쟁이 멈추지 않는다.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드는 세상은 전쟁이 가득한 세상이 된다. 그 점에서 병마와 은금을 무수히 확보하는 것과 우상이 무수한 것은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것은 기독교만 진리고 다른 종교는 모두 거짓이고 가짜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여호와 신앙을 위한 싸움은 배타적 종교를 확산시키는 싸움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종교"를 철폐하는 싸움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젖먹는 아이가 독사 구멍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 경외 신앙은 지극히 공적 현실로 드러난다. 우상은 우리의 불안과 초조를 파고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안을 파고들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우리를 건지시며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 풍성한 자유, 하나님 백성의 자유를 주신다.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은 그렇게 자유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삶을 알려준다.

 

 

나봇의 포도원과 예언자

 

1.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아합의 제안은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합리적이고 관대하기까지 하다. 원한다면 아름다운 다른 포도원을 줄 것이고 그게 싫다면 돈으로 주겠다는 아합의 제안은 평생 농사만 짓던 나봇의 삶에 해 뜰 날이 올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내 집 근처를 국가가 개발하면서 엄청나 개발이익이 생기는 상황이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나봇은 왜 왕의 제안을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봇은 아합에게 대답하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당신에게 주는 것을 여호와께서 결단코 내게 대해 허락하지 않으시리라"고 대답한다. 나봇의 이 말은 그 땅이 조상에서 유업으로 받은 것일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유업으로 주신 특별한 땅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봇의 사고는 레위기에서 명맥히 규정하는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와 같은 오랜 신앙 전승을 근거로 한다. 그에 비해 아합의 요구는 땅을 그저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부동산으로 보는 사고를 전제한다. 땅을 단순히 재산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약속이 담긴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아합과 나봇 사이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봇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파 중심 농경사회와 왕정의 도시문화 사이의 갈등을 증거한다.

 

2.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죽일 주도면밀한 음모를 꾸민다. 여기서 심각한 점은 이세벨의 음모가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진위를 밝힐 수 없는 거짓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지극히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이세벨은 토라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토라를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은 합법적인 정의 혹은 절차적인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장로와 귀족들은 나봇의 억울함에 귀기울이지 않고 이세벨이 보낸 거짓 증인의 말만 듣고 나봇을 죽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세우신 제도인, 성문에서 장로들이 집행하는 공평한 재판이 나봇 사건에서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다. 공평과 정의는 절차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외모와 뇌물은 절차적 정의를 이용해서 오히려 공평과 정의를 구부린다. 이런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외모와 뇌물이 부족한 약자들이다. 관계 안에서 이루는 쩨다카와 쩨다카 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미슈파트는 현실에서 가장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 예민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사 더는 세상이 고아를 억압치 못하게 하신다. 그분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68:5) 그러므로 고아의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과부를 위해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첩경이다.(사1:17) 

 

3.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의 의도는 아합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권이 사법적 살인과 무죄한 피를 흘릴 정도로 법과 질서를 세우는데서 물러나버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험에 처한 것은 땅이 아니라 율법 자체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의 쟁점은 왕권의 실행과 미슈파트의 실행이다. 씁슬하게도 그리고 역사에서 곧잘 볼 수 있듯이, 여기서도 종교는 압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어찌 나봇 시대에만 있던 일이겠는가. 나봇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땅을 빼앗긴 후, 아합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엘리야가 찾아온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네가 죽이고 빼앗았다"고 선언한다. 아합은 살인을 교사하지도 않았고 살인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합이야말로 살인자요 도적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절차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절차의 정당성이 정당함을 보장하지 못하며 형식적 무죄가 무죄를 입증하지 못한다. 세상 법으로는 아합의 유죄를 입증할 길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법으로만, 예언자의 법으로만 나봇의 억울함을 밝힐 것이다. 나봇과 같은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는 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을 따라 순종하는 예언자들이다. 아합의 죄는 단순히 사회적 불의가 아니었다. 아합의 죄는 하나님에게서 떠난 죄이며, 우상을 숭배한 것과 동일하다. 사회적 차원의 일로 보이지만, 하나님과 예언자들에게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

 

4. 누가복음 20장에는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가 나온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포도원 비유와 나봇의 포도원이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나봇은 포도원 주인이고, 이 비유에서 주인이 보낸 아들도 포도원의 주인이다.나봇을 죽이는 이유는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고,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이유도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나봇은 성 밖으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했고, 포도원 주인의 아들도 포도원에서 내쫒겨 죽임을 당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과 이세벨에게 심판을 선포하셨고, 포도원 주인은 군사를 보내어 악한 농부들을 진멸했다. 이 두 본문을 비교할 때 우리는 나봇이 예수님을 상징함을 알게된다. 나봇이 예수님을 상징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주님의 승리이듯이, 나봇이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사실은 나봇의 승리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봇의 삶은 실패하지 않았다., 나봇은 승리했으며 그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린다. 나봇의 삶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본질적이면서 실질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죽는 일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들이 본질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승리는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는 길로 가서 대박을 터트릴 기회를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그길에서 마침내 죽기까지 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복인가? 내가 산 땅이 엄청나게 값이 오른 것이 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핍박받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는 것,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이다. 

 

 

예언자들의 회개 선포

 

1. 앗수르에서 바벨론과 바사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소용돌이와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가 구약 예언서들의 배경이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은 진공의 현실이나 산속에서 느닷없이 제시된 하늘의 말씀이 아니었다. 주전 8세기 이후 문서 예언자들의 출현은 이러한 역사상 유례없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지는 앗수르의 위협이라는 현실 상황과 연관이 있다. 이처럼 아주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 상황 속에서 예언자가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이런 상황과 분리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에 그런 예언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원한 진리가 구체적인 역사 현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되고 임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역사나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 구약성경은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과 개인의 실존적인 만남만 다룬 책이 아니다. 구약성경이 그런 만남을 언급한다 할지라도, 구약 성경의 관심은 그 개인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역사 한가운데 존재할 수 있는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다룬 책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 그리고 이렇게 구약을 다룰 때, 구체적인 역사 현실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를 결정하는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즉 역사와 거의 무관하게 개인의 실존에 집중하는 성경 해석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부적절한 해석이다. 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은 위기 속에 오직 실존적 차원만 강조하는 나 홀로 받는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2. 예언자들은 국가나 공동체의 위기의 원인이 국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며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살거나 죽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오라" 고 선포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에게로 돌이킬 수 있는가?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말하며 이들을 향해 여호와의 말씀,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 기을이라고 촉구한다.(사1:10)  이 촉구를 뒤집어 생각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라고는 없으며 에워싸인 성읍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이사야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말씀, 하나님의 법의 골자는 제사에 정성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억울함을 회복하며 정의롭게 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그분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이며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위기에 직면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사적인 촉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개인의 내면의 죄, 하나님 앞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존을 드러내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사회가,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끔직하고 참담한지 드러낸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향한 극진한 제사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압제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폭로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예배드리거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회개로 보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회개다. 이사야와 비숫하게 주전 8세기에 살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을 선포한 아모스 역시 하나님을 찾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아모스는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찾는 길이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상의 관찰은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예언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의 사귐을 더 깊이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없다. 개인의 죄악상을 직면하고 들어다 보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는 것으로 요약할 수 없다. 더 은혜롭고 충만한 예배를 함께 회복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것은 성문에서 회복하는 정의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공적 현장에서 지켜내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렇게 공적인 신앙을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데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하거나 미흡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다.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수많은 우상숭배와 종교수준으로 격하해버린 것이 사적인 신앙, 신앙의 사사화다. 사적 신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사화적 약자에 대한 올바른 행동과 직결됨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고발하며 돌이킬 것을 요구한 예언자들의 외침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로 이어진다. 사회의 약자들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과 실천과 행동이야 말로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며 공적 신앙의 핵심이다.

 

3. 예언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개인을 비판하지 않는다. 왕을 비판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것은 왕이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초점은 특정 개인의 올바른 삶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 즉 공동체에 있다. 예언자가 보는 삶의 변화는 공동체의 변화다. 의인 몇 사람으로 인해 성을 용서하신다는 말씀은 의인 열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 전체가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사야1장 21절은 시온을 가리켜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으며 정의와 공의가 거하던 곳이 이제 "살인자들"만 있다고 고발한다. 이사야는 신실함의 내용으로 정의와 공의를 말한다. 신실하다는 것은 혼자서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이어 이사야 21장 23절은 정의와 공의가 깨진 현실로서 권력자들이 도둑과 한패가 되어 고와와 과부의 억울함을 신원치 않는 모습을 고발한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진멸과 파괴가 아니라 청결하게 하고 새롭게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하실 때, 그들 가운데 정의와 공의가 가득할 것이다. 예언자들이 기대하고 꿈꾸던 세상은 개인만 회복되는 세상이 아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회복시키실텐데, 그 나라는 정의와 공의의 나라다. 이스라엘 가운데 올바른 행실과 올바른 관계 맺음이 가득한 세상, 함께 돌아보며, 서로 살피고 지탱하는 세상, 그것이 정의와 공의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신실함"의 의미이며 "의로움"의 의미이다. 오늘날 종종 회자되는 칭의나 성화,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이사야 본문은 처움부터 마지막까지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다. 회복의 그날은 홀로 의로운 사람의 날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정의와 공의가 가득한 날이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자기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세상, 그렇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약은  정의와 공의 가운데 살아가는 공동체, 신실한 공동체, 의로운 공동체라고 부른다. 

 

 

 

4부 포로 후기 공동체의 대응

 

느헤미야와 개혁

 

1.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는 유다를 둘러싼 주변 이방 만족들의 위협에 맞서면서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은 채 성벽 공사를 진행했다. 이 귀환 공동체는 마음을 같이 하여 단단히 연합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연합한 공동체 내부에 경제적 갈등이 심각하게 발생했다. 귀한 공동체 내부의 빈부 차이가 있었고 흉년이 들자 가난한 이들의 곤궁이 더욱 극심해졌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지경인데, 바사 정부에 바쳐야 하는 세금까지 더해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포도원이나 땅이 있던 자들은 저당을 잡혀서 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땅이 없는 자들은 흉년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자신과 자녀들이 남의 종살이로 흩어지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었기에 마침내 이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왔다. 이방 땅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유의 땅으로 돌아왔는데 경제적인 곤궁 때문에 다시 종살이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더구나 이번에는 이방인의 종이 아니라 동족의 종이 되는 처지였다. 개혁과 재건의 와중에 일어난 이런 현실 문제를 느헤미야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느헤미야는 공동체 외부에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여 공동체를 단단히 연합시켰지만 공동체 내부의 문제에 대처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경제적 문제에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만족하게 일을 처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이러한 경제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내버려둘 경우, 지금 재건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 공동체를 위한 성벽이 아니라 가진 자들을 보호하는 성벽이 될 뿐이다. 공동체를 지키는 성벽이 아니라 지킬 것이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될 뿐이다.

 

2. 가난한 백성의 울부짖음과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분노하고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귀족들과 민장들"을 불러 꾸짖고 심지어 그들을 "치기 위한 대회"까지 연다. 느헤미야의 조치는 일방적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해졌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오직 가진 자들과 지도자들을 불러 책망하고 그것도 모자라 공개적으로 큰 집회를 열어 그들을 친다. 당시 재건공동체의 주축은 재물과 사람을 가진 귀족과 민장들이었고 이들이 빠져나가면 아마 성벽 재건은 무산될 것이다. 이들이 반대하면 느헤미야의 개혁은 좌초될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느헤미야가 일방적으로 귀족들과 민장들을 책망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느헤미야가 보기에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당장에 가난한 자들에게 사들인 땅과 집을 돌려주고 빌려준 돈이나 양식의 백분의 일도 돌려줄 것을 명령한다. 이 백분의 일은 이자였을 것이다. 이자 금지에 대한  구약의 입장은 확고하다. 합의를 했더라도 상대의 곤궁함을 이용한 합의는 정당한 합의가 아니다. 구약의 원리는 합의에 의한 경제원칙을 넘어선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회의 덕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일부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이전의 유다 총목들과 달리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빼앗고 착취하지 않았으며 재산을 불리지도 않았으며 오직 성벽을 쌓는 일에 힘을 다했다고 말한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렇게 행동했다고 말한다. 하나님 경외가 성전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에서, 특히 재물과 권력의 사용에서 드러났다. 

 

3. 느헤미야 10장에는 수문 앞 광장 집회를 기점으로 귀환 공동체가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결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칠년 안식년을 지키고 이와 더불어 모든 빚을 탕감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칠년 안식년과 이에 이은 빚의 면제는 신명기 15장에서 다루는 면제년 규례와 연관된다. 안식년의 완성 혹은 절정이 희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안식년 규례 준수는 희년 준수와도 연관된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존의 전통을 따라 7년을 기다려 종을 해방하거나 희년에 이르러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즉시 종 삼은 동족들을 해방하고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명한다. 그런 점에서 느헤미야는 오경의 자구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경 율법의 근본정신과 지향점을 확고하게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자비를 선포하시면서 안식일에 거침없이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유대인들로서는 38년이나 기다린 병자가 왜 하루를 더 기다려서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고침을 받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38년이나 기다려온 병자에게 어떻게 하루라도 더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날인 희년을 선포한 이사야 61장을 읽으신 후 " 이 말씀이 오늘날 너희 듣는데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은 정확히 이에 대해 선언하신 것이다. 언제가 구원의 때이며 언제가 은혜의 때인가?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

 

1. 스가랴 7장은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는 일군의 사람들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며 금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스가랴를 통해 대답하신다. 이 대답에 따르면 이들의 금식은 전적으로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스가랴는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에 순종하라고 대답한다. 옛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은 무슨 내용인가?스가랴나 당시 백성들이 "옛 선지자들"의 선포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성전재건이 오랫동안 중단되자 귀환 공동체는 귀환할 당시의 열심과 이상을 포기하고 체념하였으며 자신들의 안위와 안전, 평안을 구하는데만 골몰했다고 동시대의 선지자 학개는 고발한다. 이상은 사라지고 이기주의가 가득한 세상,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짓고 그분의 말씀과 규례를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 앞일을 도모하며 "각자도생"하는 시기가 바로 성전재건의 배경인 귀환 공동체의 상황이었다. 벧엘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은혜를 구한 때는 바로 성전 재건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다리오4년 9월4일이었다. 여기서 벧엘 사람은 특정 지역 사람이기 보다는 당시 귀환공동체를 비롯하여 유다와 그 인근에 살던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벧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상황은 당시 공동체가 기근과 흉년으로 겪던 일반적인 어려움들과 곤경이라고 할 수 있다.

 

2. 벧엘 사람이 대표하는 귀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방법을 알고자 했으며 종래에 해오던 방식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이렇게 울며 금식하는 방식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욜2:12) 하고 말한 포로 이전 선지자의 외침 중에도 나온다. 그런 점에서 벧엘 사람의 생각은 나름 근거가 있다.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제껏 해오던 대로 울면서 자신들을 정결하게 구별하며 금식할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들의 기존 생각이 철저히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학개에서 드러난 대로 그 시대는 이미 각자도생의 시대이며 금식으로 대표되는 해결방식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하는 금식은 각자도생의 종교적 신앙적 표현이다.이러한 현실 앞에서 스가랴를 통한 여호와의 응답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이제껏 열심히 지켜온 금식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여호와를 위해 금식했지만 그들의 금식은 전적으로 자의적 숭배일 따름이다. 은혜를 구하는 길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은 간결하다. 그것은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느냐"였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스가랴 7장 9-10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도모하지 말라" (슥7:9-10) 여기서 두 개는 긍정명령이고 두 개는 부정명령인데 결국 긍정명령 둘과 부정명령 둘은 같은 내용을 서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즉 진실한 재판을 행한다는 것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궁핍한 이들을 압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인애와 긍흉을 베푸는 것은 상대방을 해치려는 못된 꾀를 꾸미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본문은 진실한 재판과 이웃에 대한 인애와 귱휼을 행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해 외친 말씀이고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바로 은혜를 구하는 길이다.

 

3. 구약의 전통에서 재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막대하다. 광야를 나온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모세가 주로 하던 일이 재판이었다는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그래서 이 광야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세운 지도자들은 재판장들이다. 도울 이가 없는 과부와 고아, 나그네는 이러한 재판에서 가장 피해를 보기 쉬운 계층이었기에 올바른 재판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이면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인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가 기본적으로 드러나는 현장도 바로 이 재판이다. 스가랴 7장 9절에서 "재판"을 꾸며주는 말은 "진실한"으로 번역한 "에메트"다. 이 히브리어 명사 "에메트"는 확실함, 견고함, 신실함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러한 의미들과 연관하여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에메트, 즉 진리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이 진리이심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생각하면 사람의 신실함 혹은 사람의 진리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진리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에메트 혹은 진리는 옛 선지자들의 선포의 중심에 있으며 여호와께서 그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사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라 불리게 하시며, 이 백성에게 진리와 공의로 행하실 것이다. 이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은 두려움 없이 진리의 재판을 베풀어야 하고 이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진리로 행하시니 이스라엘은 진리를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의 에메트를 근거로 이스라엘에게 에메트를 명하신다. 그러므로 신실함  혹은 진리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을 닮는 것에 그 근본이 있다. 이상에서 보건대, 신실한 재판은 정의와 공의와 동일선 상에 있다.

 

4. 스가랴 7장 9절은 진실한 재판을 명하면서 그 진실한 재판의 법 정신이 무엇인지를 말하는데 그것은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공의로운 법 집행의 근본정신은 인애와 긍휼이다. 여기서 인애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헤세드"다.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사람에게 품으신 마음이 헤세드다. 하나님은 헤세드 안에서 당신 백성을 대적들로부터 건지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시며 당신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헤세드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자들이 이웃을 향하여 마땅히 품을 마음도 헤세드, 즉 '인애'다. 인애와 짝을 이루는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밈"은 여성의 자궁을 뜻하는 단어, '레헴'에서 파생했다. 어머니가 태에서 난 자녀를 향하여 품는 마음이 바로 긍휼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태에서 태어난 자식을 사랑하듯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다. 긍휼의 가장 근본 역시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헤세드'와 '라하임', 즉 인애와 긍휼이야말로 구약백성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던 소망이고, 백성에게 이러한 인애와 긍휼을 거두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스가랴는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인애와 긍휼을 이제 백성들 간에 서로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을 경험한 사람은 이웃에게 베푸는 인애와 긍휼이라는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한다. 벧엘 사람은 여호와께 은헤를 구하고자 하여 금식을 생각했다. 그러나 스가랴가 옛 선지자들에 대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는 길은 진실한 재판과 이웃에 대한 긍휼로 요약되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다. 진실한 재판과 이웃에 대한 긍휼이야 말로 그들이 전해받은 율법의 내용이고 옛 선지자들이 이 백성의 열조에게 선포한 말씀들이었다.

 

5. 스가랴 7장이 현재 시점에서 벧엘 사람의 문의에서 시작하여 과거 역사에 대한 회고로 이어졌으니, 8장에서는 이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갈 것을 언급하고 그에 따른 여호와의 구원을 선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8장은 이런 예상을 뒤집고 시온을 위한 여호와의 질투와 분노를 언급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하여 질투하신다는 내용은 스가랴 1장에도 나오는데 8장에서는 동일한 표현을 반복하면서 '크게 분노함으로'를 더하는 교차대구를 통해 '여호와의 질투라는 주제를 훨씬 더 강화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를 기초로 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마음과 뜻이 질투로 나타난다. 여호와의 이름이 소홀히 여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질투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고초를 겪을 때 여호와께서 질투하사 그분 백성을 억압과 압제에서 건지신다.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의 결과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오심을 선언하듯이, 8장에서도 여호와의 질투는 시온으로 돌아오심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서는 그분 백성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 채 일방적으로 은혜를 선포하신다. 여호와와 백성의 언약관계를 상징하는 "너희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을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일방적인 행하심으로 선언하신다. 여호와께서 무조건적으로 회복시키시는 근거는 이스라엘의 행실이 아니라 오직 그분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질투하심뿐이다. 벧엘 사람은 여호와의 은혜를 얻기 위해 금식을 제안했지만 정작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이스라엘의 행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질투하심에서 비롯된다. 스가랴의 선포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열조가 금식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진실한 재판과 긍휼을 행치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가 진노하셨다. 이제 귀환공동체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질투하심으로 여호와의 돌아오심과 은혜를 일방적으로 선포하신다.

 

6. 이상의 논의 위에서 보면 스가랴 8장 16-17절의 명령은 여호와의 은혜를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이미 은혜를 얻은 이들이 두려움없이 행할 일이다. 7장 9-10절과 8장 16-17절의 유사한 표현은 이 구절에서 요구하는 바가 포로 이전 열조에게 옛 선지자들이 요구하던 바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8장의 명령은 옛 선지자들의 요구를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당시 시대에 맞게 적용한다고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8장의 명령들도 이웃과 올바른 관계, 이웃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에 대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강조하는 신약의 교회은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낯설어 하면서도 복음이 아닌 부차적으로 중요한 일을 듣는 듯한 자세를 취할 때가 많다. 그러나 8장의 명령은 하나님의 놀랍고 풍성한 은혜를 경험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힘쓰고 애써 행할 일은 자기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웃들과 올바른 관계, 정의로운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삶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 삶은 하나님이 이미 전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은혜에 합당하게 두려움 없이 걸어갈 길이다. 옛 선지자들에게 외친 말씀은 그저 옛날 말씀이 아니라 스가랴의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 진리의 말씀이다. 벧엘 사람은 여호와의 은혜를 얻기위해 금식을 생각했지만 도리어 여호와께서는 질투하심으로 이러한 금식의 절기를 기쁨과 희락의 날로 바꾸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스가랴 7-8장에서 '진리'(에메트)는 반복해서 언급되는 중요한 단어이며, 진리를 행하는 삶은 여호와를 본받는 삶이다. 이러한 진리 위에 화평이 있다. 스가랴는 이 '화평'을 표면적으로 문제가 없는 화평이 아니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궁핍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한 긍휼과 인애와 연관된 화평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것은 개인적 덕목의 성취라기 보다 사회 차원의 변화다.

 

7. 벧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는 금식에 대한 문의로 시작한 스가랴 7-8장은 옛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에 대한 회고와 함께 열조에게 임한 심판으로 마무리되지만, 이미 예루살렘에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이 시작된다. 그 은혜를 힘입어 두려움없이 행할 진리와 화평을 구하는 삶을 거쳐 금식이 기쁨의 날이 되며 그로 인해 열방이 여호와의 은혜를 구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혹은 시온으로 돌아오셨다는 말의 실질적 의미는 각 본문에서 성전의 재건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더욱 주목할 것은 이렇게 성전의 재건이 중요하고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이 두려움 없이 행할 삶은 여전히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삶이라는 점이다. 스가랴 1-8장은 전체가 한 덩어리로 긴밀하게 엮여 있는데 그 중심 메시지는 성전을 재건하는 공동체와 그들이 행하는 진리와 화평의 삶이다. 성전 재건 사건이 그 중심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둘러싸고 지난 열조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전 재건을 시작한 새로운 세대를 향한 전망을 함께 제시한다. 반성과 전망을 위해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옛 선지자"들에 대한 스가랴의 이해다. 스가랴에게 옛 선지자들은 진실한 재판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인애와 긍휼을 선포한 이들이었다. 옛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는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받은 '율법'의 정수이기도 하다. 옛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외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도 스가랴의 이해에 의하면 진실한 재판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다. 성전을 재건하면서 모든 관심은 제의적 측면에 쏠리게 마련이다.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스가랴를 통해 주시는 대답은 확고하다.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그럴 때 열방이 여호와의 은혜를 사모하여 예루살렘으로 나아올 것이다. 예루살렘이 열방을 향해 의미있는 것은 성전이나 제의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룰 공평과 정의의 삶 때문이다.

 

8. 사실 포로시기 이전에는 금식 자체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금식 문제는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금식이 효과적이며 타당한지 논쟁하는 가운데 부각되었다. 변한 상황 속에서 스가랴는 '옛 선지자'들의 선포를 진실한 재판, 이웃에 대한 인애와 긍휼로 요약하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핵심임을 증거한다. 스가랴에게 귀환 공동체는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인해 언약 관계안으로 회복된 백성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스가랴가 보기에 벧엘 사람의 질문은 은헤로 회복된 이들의 삶에 대한 질문이었으며 그 대답은 옛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의 재적용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했지만, 옛 선지자들의 외침은 여전히 보편타당한 진리로 스가랴의 시대에도 적용된다. 나아가 스가랴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유다의 삶이 열방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근본이 될 것을 내다본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스가랴가 포로후기 재건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하느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에 초점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건이나 헌신의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평화라는 어찌 보면 매우 보편적인 가치를 촉구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교회가 회복해야 하는 핵심은 전형적 기독교 색채가 가득한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세속 사회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로 표현한 보편 가치여야 함을 의미한다.

 

 

 

5부 결론: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라

 

예언자들의 희망

 

1. 예언서에는 예언자들의 고발과 듣지 않는 백성으로 인한 상심과 절망만 가득하지 않다. 놀랍게도 예언서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다가오는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심판 이후의 희망을 보고 꿈꾸었다. 다가오는 미래를 향한 예언자들의 선포에는 '새롭다'는 단어가 반복하여 나온다. 본질적으로 이 '새로움'은 심판 이후에 오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산산히 흩어지고 성전도 파괴된 전면적인 심판 이후에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분 백성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영광의 그날이 곧 다가온다는 것이 '새로움'의 본질적 내용이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새 언약'은 이전 율법이 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 그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는 세상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이것과 정확히 맞닿는다.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다가오는 새로운 날은 모든 역사가 사라지고 초월적인 세상이 생기는 날이 아니다. 예언자들은 역사와 단절된, 근본적이고 궁극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다른 세상을 전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심판 이후에 임할 영광의 그날, 새롭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았다. 그런 점에서 예언서는극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품은 희망과 기대를 반영한다. 

 

2. 다윗 가문에 대한 영원한 약속과 이스라엘이 영영토록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단단히 맞물린다. 이 영원한 약속은 단지 다윗 왕가의 지속만 이야기한다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계속 존재할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윗의 나라가 망했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도 있고 이방 땅에서 내내 살아간 디아스포라도 있던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임을 생각하면,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약속'은 다윗이 상징하는 왕권의 지속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스라엘의 지속에 초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사야 본문(사55:3)은 다윗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으시는 언약으로 표현한다. 이 본문은 특정한 개인의 후손인 왕가와 관련된 다윗 언약을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언약으로 풀이한다. 즉 다윗 언약을 민주화(democratizing)한다. 이사야에서 다윗을 통한 약속은 '여호와께 복받은 이들' 이라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통해 현실이 되고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사람 다윗을 향한 약속이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향한 약속으로 다시금 민주화되는 것이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자 같은 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다. 여기서 '인자'라는 표현 때문에 특정한 개인을 떠올릴 수 있지만 다니엘 본문 자체는 '인자'가 성도들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도 하나니이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가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통해 현실이 될 것임이 약속된다.

 

3. 그러므로 구약의 약속은 공동체를 향한 약속이다. 아브라함은 공동체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회복할 다윗조차 공동체로 이해해야 하고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도 그러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말씀임을 확인해 준다. 다윗의 본질은 혈통이 아니다. 다윗의 본질적 의미는 정의와 공의가 가득한 세상이다. 정의와 공의가 없으면 다윗의 왕위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다윗의 나라'는 특정 개인에 대한 예고라기 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예고'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근본 원칙이라는 점에서, 정의와 공의의 세상은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세상, 곧 하나님나라를 의미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선포로 이어진다.(겔37:24-28) 에스겔은 '다윗'은 이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며 왕이요 목자인 다윗을 통해 내 백성--너희 하나님' 이라는 언약 관게가 회복될 것을 예고한다. 예언서에 언급하는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달리 표현한 것이며, 그 내용은 정의와 공의의 나라다.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이루지 않는다면 아무리 혈통이 다윗의 후손이어도 다윗에 대한 약속과는 무관하다. 예언서는 다윗이라는 이름이 대표하는 하나님나라를 기대하고 꿈꾸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느 사람이 다윗의 혈통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를 살피고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이 구약의 약속과 기대를 이루셨다는 말은 구약이 약속하고 기대하는 세상을 현실로 만드셨다는 의미다.

 

4.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 곳곳에는 미래에 임할 정의와 공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왕의 판결, 왕의 결정을 듣기 위해 몰려온 열방은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자, 자기들에게 있던 칼과 창을 쳐서 보습과 낫으로 바꾸었다.(사2:2-5)  여호와께서 왕이신 세상에서는 칼이나 창이 더는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보습과 낫의 나라, 전쟁없는 세상이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하는 단적인 표현이다. 온 열방이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면 필연적으로 전쟁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미가서 4장 1-5절에서 말하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며 두렵게 할 이가 없는 삶' 역시 전쟁이 없는 세상, 즉 각자 자기 땅을 경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하나님이 왕으로 임하시는 세상은 전쟁없는 세상이다. 왕이신 하나님이 모든 억울한 일을 풀어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기에 칼이나 창이 전혀 필요없다. 각자 자기 기업 위에서 열심히 일하며 두려움없이 살아가면 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놀며 천사처럼 날아다니는 세상이 아니라 각자 열심히 자기 기업을 경작하며 다른 이를 공격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사야11장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로 표현된, 새로운 다윗으로 상징되는 나라를 예고한다. 다윗은 여호와 경외를 즐거워하며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다. 공의로 통치하면 현실은 어떻게 변할까? 이사야11장 6절 이하는 공의의 통치 아래서 변화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때가 되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다. 서로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세상이 이뤄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러한 평화의 왕국과 직접 연결된다. 

 

5.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간다' 는 표현은 이 땅에서 살 때 기독교를 선택하면 죽은 다음에 극락에 가게 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알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 노는 세상을 갈망하며 꿈꾸게 되고 마침내 누리게 된다는 의미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러한 세상을 열망하고 ,이를 위해 헌신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 가운데 살아가며, 교회조차도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라고 부추긴다. 정말 끔직한 것은 예수를 믿는 신앙을 이렇게 죽고 죽이는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편과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신앙은 경쟁 사회에서 이기는 힘이되고, 신앙이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며, 새로운 다윗으로 상징되는 하나님나라일 수 없다. 하나님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이리와 어린 양이, 어린아이와 독사가 서로 상함도 해함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가 말하는 '그의 거룩한 산'의 실제 의미다. '거룩한 산'은 그곳에서 실현되는 평화 세상으로 구체화된다.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사65:17-26) 전쟁 없는 세상, 서로 상함도 해함도 없는 세상,약자라 하더라도 마음껏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예언자들이 전하는 다가오는 미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새 언약의 세상은 이러한 예언이 일상이 되고 현실이 되는 세상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개인이 모인 세상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현실이 되어 어무든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야말로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영광의 미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십사만사천의 의미다.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이 숫자는 구원받은 개개인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한다. 구약에서 줄기차게 공동체의 회복을 예고하였는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역시 열두 지파로 상징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구약의 기대를 잇는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6. 예언자들이 회복의 날을 말할 때, 남북 이스라엘 모두 회복하는 것으로 그리는데, 이런 관점을 '온 이스라엘적 관점'이라 부를 수 있다. 예언자들은 다윗과 좀 더 연관있는 남왕국의 회복만 아니라 진즉에 흩어진 북왕국도 포함하는 회복을 그린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 자체가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를 향한 것이었고(렘 31;31-34) 마른 뼈가 되살아나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을 다루는 에스겔 37장은 유대와 요셉, 남왕국과 북왕국 모두 회복시키고 연합시키는 예언으로 끝맺는다.(겔37:15-28)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만 말하지 않는다. 앞날에 대한 예언 곳곳에서 열방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이사야2장과 미가4장은 열방이 하나님의 법을 듣기 위해 몰려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온 땅을 통치하실 때, 이스라엘만 혜택을 누리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열방 역시 그리로 나아온다.(사11:10; 슥8:20-23) 여호와께서 온 땅을 지으셨으니 온 땅에 하나님 백성 아닌 자가 누가 있을까. 애굽을 '내 백성'이라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자'라고 부르는 이사야의 한 구절(사19; 24-25)은 이방인의 회복을 가장 강력하고도 따뜻하게 선언한다.

 

7. 예언자들이 그리는 미래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는 말의 실제적 의미를 알려준다. 예수 믿으면 얻는 구원이 우리에게는 압도적으로 내세 지향적이지만 예언자들이 그리는 다가올 영광의 미래는 내세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은 세상이 얼마나 끔직하든지 간에 내가 실존적으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장차 누릴 약속이지만, 예언자들이 말하는 다가올 미래는 개인의 성취나 성공이나 복락과 전혀 관계가 없다. 예언자들이 꿈꾸는 미래는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공동체다.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는 그날이 되면, 남왕국과 북왕국 모두 회복될 것이며 심지어 이방인들도 모일 것이다. 이들은 이제는 칼이나 창이 없어도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창과 칼을 쳐서 보습과 낫을 만들 것이다. 그 세상은 서로 사자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세상, 사자는 사자대로, 양은 양대로 각자  살아가면 되는 세상, 아무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모두 여호와를 알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에게는 온 땅의 왕이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 전체에 가득함이 평화가 곳곳에 흘러넘침과 동의어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의 내용이다. 초대교회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를 세상에 증거하고 보여주었다. 참으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의 진리는 공동체적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공적 변화가 없는, 개인 실존 차원의 고백과 그에 입각한 구원 약속은 부족하고 미흡한 복음이 아니라 잘못된 복음이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 형상대로 관계 안에 존재하며 왕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복음의 근본 내용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부르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굳게 믿고 신뢰하며 일상에서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 땅의 현실이 참담하고 끔찍할수록, 하나님의 도우심과 약속과 다가올 영광의 미래를 믿고 꿈꾸고 소망하며, 공동체 가운데, 우리가 사는 사회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그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그 나라를 누리며 경험할 것이다. 

 

 

복음,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을 첫머리에서 제시한 마가복음은 이사야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작한다. 여기서 마가는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풀이하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려면 이사야가 증언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사야 40장의 주된 관심은 심판과 징벌이 아니라 이제 징벌받은 백성에 대한 위로다. 이사야 40장 이후는 심판 받은 하나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을 선포하는 외침으로 시작하며 그 위로가 핵심이다. 그러면 이러한 위로의 내용과 실체는 무엇인가?  광야와 사막같은 곳, 골짜기, 작은 산, 험한 곳,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오실 평탄한 곳으로 만들라는 외침의 가장 자연스러운 문맥은 왕의 입성이다. 광야이건 사막이건 험한 땅이건 '여호와의 길' 혹은 우리 하나님의 대로가 될 것을 이야기하는 이사야 40장은 이제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선포한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참으로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이사야 40장 5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광야와 사막, 험한 산에 대한 언급은 바벨론 포로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바벨론 포로의 귀환은 무엇보다도 왕이신 야훼가 온 땅에 행하심의 결과다. 

 

2. 이사야 40장 6-8절은 세상에 존재하는 나라와 권세의 본질이 '사라지고 없어질 풀과 꽃'이라 단언한다. 참으로 영원하며 견고한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이다. 그러면 세상 권세, 나라와 대조되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9절에서는 이 전령이 전할 소식을 '아름다운 소식'이라 부른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다름 아닌 '너희의 하나님' 이신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다스리실 것이라는 소식이다. 아름다운 소식, 즉 복음의 핵심은 장차 우리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신다는 것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이다. 이사야 52장 9절에 쓰인 것과 흡사한 '야훼께서 통치하신다"는 외침 혹은 환호는 시편 제4권을 특징짓는 문장이다. 시편3권까지 이어지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다윗 왕조의 붕괴로 인한 탄식에 대응하여 시편4권에서는 야훼 하나님의 통치, 야훼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시편의 찬양은 단순히 개인을 곤경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찬양이다. 시편에서 수없이 나오는 시온과 예루살렘에 대한 찬미 역시 다윗이라는 인간 왕국의 도성과 그 영광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시온 찬양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좌정하신 처소인 시온에 대한 찬미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에 대한 찬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도래야 말로 바벨론 포로기에 있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위로임이 이사야 40장을 비롯한 구약 여러 본문에서 명백하다. 구약에서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쓰지는 않지만 이사야 구절과 시편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표현과 개념을 도처에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약성경이 반복하여 증거하는 '하나님나라(천국)'의 핵심이다. 

 

3.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되심을 의미하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되심의 의미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선포하는 바, 복음의 핵심은 '이제 곧 이루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나라이다. 이사야가 선포한 복음이 미래의 소망인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말한다고 해서 현재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온 땅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왕이시다. 그러면 미래의 소망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곧 임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를 잊고 사는 현실을 일깨운다. 현실의 삶이 괴롭고 힘들어서, 자신이 처한 상항과 자신을 둘러싼 현실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심을 잊고 산다. 혹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도 이제는 자신의 삶에 개입하거나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여긴다. 도리어 다른 존재, 다른 왕을 온 땅의 주관자라 여기고, 그 왕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되는, 이제 곧 임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고 보신다는 것, 하나님이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며 마침내 온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도래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다시 돌아보게 하며, 이제 곧 임할 영광의 날을 기대하게 한다. 지금 존재하는 견고해 보이는 억압적 현실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들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임을 굳게 확신하게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의 강력한 지배자와 지배질서에 영합하며 살아가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이 왕이심을 신뢰하고 확신하며 새롭게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제 임할 하나님나라는 현재 삶 속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확고히 붙잡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은 현재의 질서를 궁극적 질서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재의 질서를 보전하고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고 이제 임할 하나님의 질서, 참된 왕이신 하나님이 선포하시고 명령하신 질서를 구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마6:33)은 하나님의 통치질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질서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4. 마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선포는 왕이신 하나님의 입성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이어졌다. 마가복음이 말라기와 이사야 구절을 사용한 것을 볼 때, 마가복음에서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자와 이제 곧 왕으로 임하실 하나님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사역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사역이다. 요한은 이제 곧 오신 주님을 준비하며 회개를 전했고, 요한이 잡힌 후에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도 이제 곧 임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며 회개를 전하셨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핵심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첫 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었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내용은 드디어 때가 이르렀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이사야 40장이 선포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신약은 하나님나라의 복음, 즉 구약이다. 구약은 신약을 구체화하고 신악은 구약을 현실화한다. 예수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1세기 유대백성에게 이제 곧 임할 하나님나라 복음을 증거하셨다. 다른 아무 것도 우리의 주님이나 왕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제 왕으로 임하실 것을 선포하셨다. 세상에 굴복하거나 현실에 체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굳게 붙잡고 살라고 선포하셨다. 주님이 이 땅을 살아가신 모습은 하나님나라를 굳게 붙잡은 삶의 모습을 강력하게 증거한다. 

 

5.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면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회개'를 선포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나라 복음이라는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언된 회개는 단순히 도덕적이고 개인적인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왕이신 하나님, 왕으로 오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은 채 삶아온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이미 가까이 온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재의 질서를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질서를 이 땅에서 추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왕이심을 향한 '전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게 회개할 때, 이전에 행한 삶의 어리석은 죄악들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나라 약속을 굳게 믿는 사람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씨를 땅에 뿌림'(막4:26-29)에 비유하기도 하시고,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에 비유하기도 하신다.(막4:30-32) 이런 비유들은 곧 임할 하나님나라가 어느 한 순간에 도래한다기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서 그 나라를 기대하고 확신하며 살아가면 때가 되면 도래한다는 의미다. 이런 비유들은 다가올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와 지금 살아가는 현실을 연결해준다. 마가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여러 사역은 하나님나라를 굳게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증거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막13:13) 선을 행하고 진리를 행하는 이들이 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만 왕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세상 질서를 최종적 권위로 여기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 기대하고 소망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1. 특이하게도 기독교인들이 싫어하고 거부하는 표현이 '인본주의'라고 번역되는 '휴머니즘'이다.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상'이다. 놀라운 것은 재물을 주인으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대다수가 '인본주의'는 사탄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하여 반대하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자본이 주인이 되는 것은 크게 상관없는데, 사람이 주인이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이다.  정작 주님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으로 '재물(맘몬)'을 경계하셨는데 재물(자본)을 주인으로 삼는 자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를 더 무섭게 여기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인본주의(휴머니즘)는 사람을 모든 관심과 초점과 중심에 두는 사고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한 율법학자가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여쭈자,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전체의 근본이라고 명쾌하게 답하셨다. 구약 전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단순히 제사나 예배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없다. 제사를 명령하는 구약 성경 곳곳에서도 하나님이 가난한 마음 통회하는 심령을 찾으신다고 이미 이야기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선을 행하는 것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찾으신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요한복음의 진술(욥15:1-12)도 이와 통한다. 구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시며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마7:1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구약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하신 주님이 다시 구약을 한 계명으로 요약하여 '이웃 사랑'이라고 하신 것이다.

 

2.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구약 전체를 압축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5:14) 바울에 따르면 율법이 대표하는 구약의 요체요 핵심은 아웃 사랑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종교적인 표현으로 구약을 요약하지 않는다.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처럼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경쟁을 중시하며, 내가 이기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는 세상에서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살기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인임은 남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종교적 언어들로 가득찬 표현을 하는데서 나타나기 보다는 누구든 이해하고 납득하고 동의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버거운 진리를 지키고 순종하고 실천하는데서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알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여기는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가 믿는 신앙을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말로 표현한다. 구약 신앙은 이웃 사랑으로 압축할 수 있고 이를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조로하는 '휴머니즘'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명하셨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이야말로 신본주의의 핵심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4:8) 그러므로 휴머니즘의 반대말은 신본주의가 아니라 사람보다 자본(재물)을 우선으로 여기는 자본주의라고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가 이윤 추구라는 점에서, 그 안에 사람이 설 자리는 거의 없어 보인다. 기껏해야 이윤 추구란 목적에 부합할 때에만 인간의 존개가 의미가 있을 뿐이다.

 

3.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가르침으로 대표될 수 있는 신약의 구약 해석의 결론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웃'에는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이웃 사랑을 말할 때, 이웃의 조건이나 상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웃의 사회 경제적 여건은 물론이고 이웃의 종교를 포함하여 아무것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으로 참으로 구약의 본질을 꿰뚫는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파격적이며 근원적이다. 이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신앙 이해는 근거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바울의 구약 해석과 요약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이며 공적이다. 선교나 전도도 이런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전도는 자칫 상대방의 문화를 흔히 말하는 '기독교 문화'로 동화시키거나 조정하는 것일 수 있고 그런 사례는 무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구약으로 대표되는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 곳 이웃 사랑이다. 우리가 전할 복음의 핵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기독교 문화는 민족과 시대의 제약을 받지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건 보편타당하며 본질적이다.

 

4.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여기서 이웃은 당연히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곳곳에서 그 이웃을 좀 더 세밀하게 규정한다. 레위기 19장의 경우, 밭과 포도원 모퉁이를 남겨두는 까닭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이며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곧장 '품꾼'의 삯을 제때 지급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진다. 구약 곳곳에서 언급하는 고아, 과부, 외국인, 나그네는 바로 이런 맥락이다. 즉 우리가 사랑하고 대접할 이웃은 구체적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 외국인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영생과 영벌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나그네된 이들, 즉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를 제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기독교 신앙이 그저 사적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적이며 공적 차원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레위기 19장은 '공동체의 거룩함'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 품군을 위한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근본적으로 희년 제도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난해진 자들을 위한 제도다. 예언자들의 무수한 외침은 고아, 과부, 나그네를 저버린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선포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공적 차원을 고려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구조와 틀 안에서 가장 연약한 이들을 고려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교회건 국가건 그 안에 속한 약자들을 위해 정책을 결정할 때, 그것을 공적 결정이라 말할 수 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아보는 정책은 단지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안전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정책이다. 이웃 사랑, 남을 대접하는 사랑은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이웃을 돌아보는 삶으로 구체화되며 이것이야말로 공적 신앙의 본질적 요소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막 9:37) 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혹은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이웃을 영접한다는 의미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끝]